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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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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준의는 고려 시대 무신으로, 무신정변에 참여하여 권력을 얻었으나, 이후 이의방과의 갈등 끝에 정균에게 살해당했다. 1170년 무신정변 이후 좌승선, 급사중 등을 역임하며 권력을 휘둘렀고, 문극겸과 함께 권력을 남용하여 간관들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171년 궁궐 화재 당시 미온적인 대처로 민심을 잃었고, 1173년 김보당의 난 진압 후 이의방의 문신 살해를 막는 데 기여했다. 1174년 이의방의 횡포를 꾸짖었으나, 이의방이 정균에게 살해당한 후 이준의 역시 연루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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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의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이준의
원래 이름이준의(李俊儀)
본명이준의(李俊儀)
다른 이름미상
별명미상
작위승선(承宣)
출생일생년 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일1174년
사망지미상
재위 기간? ~ 1174년
배우자미상
자녀미상
가문
부모부: 이용부(李勇夫)
모: 미상
가문전주(全州)
기타 정보
왕조조선(朝鮮)
종교불교(佛敎)
묘호미상
시호미상
직업고려의 문신
전임자이용부(李勇夫)
후임자이의방(李義方)

2. 생애

1170년 무신정변 이후, 이준의는 정중부, 이의방 등과 함께 고려 조정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권력을 남용하고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등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 관직 임명 및 권력 남용:

시기사건
1170년 9월무신정변 직후 좌승선(左承宣)·급사중에 임명됨.
1171년 9월문극겸과 함께 대성(臺省)의 직책을 겸하며 권력 남용. 간관들의 비판을 받자 순검군(巡檢軍)을 시켜 모욕을 줌. 이후 위위소경(衛尉少卿)으로 좌천됨.
1172년 6월53개 현에 감무(監務)를 두고, 안동부 보주(甫州)를 현령(縣令)으로 승격시키며, 고성현(固城縣)에 위(尉) 1명을 더 배치할 것을 건의.


  • 갈등 및 사건:

시기사건
1171년 9월근신들의 축수 잔치에서 문극겸의 간언에 격분하여 욕설.
1171년 10월궁궐 화재 발생 시 이의방 형제가 변란을 우려하여 대궐 문을 걸어 잠금.
1173년 4월왕이 대내(大內)로 들어가는 것에 화를 내며 문극겸을 꾸짖음.
1173년 9월김보당의 난 진압 과정에서 이의방의 문신 학살 중지를 진준과 함께 요구.
1174년 1월이의방의 승려 학살과 사찰 파괴를 제지하려 했으나 실패. 이의방에게 임금 시해, 태후 여동생과의 간통, 국정 농단 등 세 가지 큰 잘못을 꾸짖었으나, 이의방이 분노하여 죽이려 하자 문극겸의 만류로 목숨을 건짐.
1174년 12월이의방이 정균과 종참(宗旵) 등에 의해 살해당한 후, 정균에 의해 형제들과 함께 죽임을 당함.


2. 1. 무신정변 참여 (1170년)

1170년 9월, 이준의는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이 수문전(修文殿)에 행차할 때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변 직후, 이준의는 좌승선(左承宣)과 급사중에 임명되었다.

2. 2. 권력 남용과 갈등 (1171년)

1171년 9월 무자일, 이준의와 문극겸이 대성(臺省)의 직책까지 겸하며 궁중에서 권력을 남용하자, 겸직을 해제하라는 건의가 있었다. 왕은 이 건의를 따랐으나 이준의와 문극겸에 대한 건의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튿날 간관들이 대궐 문에 엎드려 간쟁하자, 이준의는 술기운을 빌려 순검군(巡檢軍)을 시켜 간관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왕은 이준의를 불러 타이르고 간관들을 가두었다.

1171년 9월 경인일, 왕명으로 이준의는 위위소경(衛尉少卿)으로, 문극겸은 대부소경(大府少卿)으로 좌천되었다.

같은 해, 근신들의 축수 잔치가 한밤중까지 소란스럽게 이어지자, 문극겸은 왕에게 “이것이 바로 전 왕이 폐위된 원인인데 어찌 경계하지 않으십니까?”라고 간언했다. 이로 인해 연회가 끝나자 이준의는 문극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2. 3. 궁궐 화재와 민심 악화 (1171년)

1171년 10월 을사일 밤, 궁궐에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정중부와 이준의 등은 궁궐 내에서 숙직 중이었으나, 이의방 형제는 변란을 우려하여 대궐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끄려는 사람들의 진입을 막았다. 이로 인해 궁궐은 모두 타버렸고, 산호정(山呼亭)으로 피신한 왕은 슬픔에 잠겨 통곡했다. 이러한 무책임한 태도는 백성들의 분노를 샀고,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

2. 4. 권세 강화와 횡포 (1172년~1173년)

1172년 6월 임술일, 왕이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좌승선(左承宣) 이준의(李俊儀)는 각 주(州)가 관할하는 53현(縣)에 감무(監務)를 두고, 안동 관할의 보주(甫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는 태자의 태실(胎室)이 있는 곳이므로 현령(縣令)으로 승격시키고, 고성현(固城縣 : 지금의 경상남도 고성군)에는 위(尉) 1명을 더 배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왕이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했는데, 당시 이준의의 권세가 높고 성질이 고약하여 아무도 옳고 그름을 따지지 못했다.

1173년 4월, 우승선(右承宣) 이준의는 왕이 대내(大內)로 들어가는 것에 화를 내며 문극겸을 꾸짖었다.

정중부(鄭仲夫)는 성질이 탐욕스러워 재물을 끊임없이 탐했다. 시중이 되자 전원(田園)을 크게 늘였으며, 가동(家僮)과 문객(門客)들이 권세를 믿고 온갖 횡포를 부려 모든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다.

2. 5. 김보당의 난 진압 (1173년)

1173년 9월, 김보당 등이 안북도호부에서 체포되어 이의방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의방은 모든 문신을 살해하려 했으나, 이준의는 진준과 함께 이의방에게 살육 중지를 요구했다. 낭장 김부 또한 정중부와 이의방에게 문관들과 통혼하여 정국을 안정시킬 것을 건의했다. 많은 무신이 이에 동의하여, 이후 문신들에 대한 참화는 점차 줄어들었다.

2. 6. 정중부와의 관계 (1173년)

1173년 김보당이 처형당할 때 문신들도 연루되었다는 거짓 자백을 하면서 많은 문신들이 죽임을 당했다. 이준의는 이러한 상황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의방에게 살육 중지를 요구했다. 낭장 김부도 정중부이의방에게 문관들과 통혼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고, 많은 무신들이 이에 동의하여 참화가 점차 줄어들었다.

정중부는 탐욕스러운 성격으로 재물을 끊임없이 탐했다. 문하시중이 되자 전원(田園)을 크게 늘렸고, 그의 가동(家僮)과 문객(門客)들은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려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이후 이의방이고와 채원을 죽이자, 정중부는 자신도 화를 입을까 두려워 관직에서 물러나려 했다. 이의방 형제가 술을 들고 정중부의 집을 찾아가 성의를 표하고 부자관계까지 맺자 그제야 정중부는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정중부의 아들 정균은 이의방 형제를 암살하려 했고, 정중부는 재물을 탐하며 횡포를 부려 백성들의 고통이 컸다.

2. 7. 이의방과의 갈등과 몰락 (1174년)

1174년 1월, 귀법사(歸法寺) 승려 백여 명이 도성의 북문을 침범하여 선유 승록(宣諭僧錄) 언선(彦宣)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의방은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승려 수십 명을 처형했으나, 관군 역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튿날, 중광사(重光寺)·홍호사(弘護寺)·귀법사(歸法寺)·홍화사(弘化寺) 등 여러 사찰의 승려 2천여 명이 도성 동문에 집결, 숭인문(崇仁門)까지 불태우며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했다. 이의방은 부병(府兵)을 동원해 이들을 진압하고 승려 1백여 명을 죽였으나, 부병 역시 전사자가 많았다. 이의방은 도성 각 문을 지키게 하고 승려의 출입을 금지하는 한편, 여러 사찰을 파괴했다.

이준의는 이의방의 강경 진압을 제지하려 했으나, 이의방은 "형님 말씀대로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라며 사찰을 불태우고 재물을 빼앗았다. 이준의는 이의방에게 임금 시해, 태후 여동생과의 간통, 국정 농단 등 세 가지 큰 잘못을 꾸짖었다. 이의방이 분노하여 이준의를 죽이려 하자, 문극겸이 만류하여 이준의는 목숨을 건졌다.

정중부는 이준의를 체포하려 했으나, 부인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이후 이준의는 이의방에게 사죄했고, 이의방도 이준의를 찾아가 사과했다.

1174년 12월, 이의방이 정균과 종참(宗旵) 등에 의해 살해당했다. 정균은 군사를 동원해 이준의 형제와 그 일당을 모두 죽였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조부이궁진
조모미상
아버지이용부
어머니이씨
부인미상
동생이의방
동생이린
동생이거


4. 이준의가 등장한 작품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배우 김동현이 이준의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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