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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령 알바니아 (1939년~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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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령 알바니아 (1939년~1943년)는 이탈리아가 1939년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수립한 보호령이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알바니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며, 무솔리니는 발칸반도를 세력 확장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알바니아를 침공했다. 알바니아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이탈리아는 알바니아 경제를 지배하고 외교 정책을 장악했다. 2차 세계 대전 중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을 위한 발판이 되었으나, 이탈리아의 실패로 독일군의 점령을 받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알바니아는 공산주의자 탄압, 코소보 지역의 민족 갈등, 유대인 탄압 등 사회적 문제를 겪었다.

2. 역사

1939년 4월 7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5개월 전, 이탈리아 군대는 알바니아를 침공했다.[13] 짧은 방어전 끝에 알바니아는 점령당했고, 1939년 4월 9일 알바니아 국왕 조그 1세는 그리스로 망명했다.[14]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국왕으로 통치하는 동안 셰프케트 벌라치가 총리로 재직하며 이탈리아 보호령의 일상 업무를 관장했다. 1941년 12월 3일, 벌라치는 무스타파 메를리카-크루야에게 총리직을 넘겼다.[20]

1927년 이후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11][15][16] 베니토 무솔리니는 알바니아를 직접 통제하고자 했다. 이는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 나치 독일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에 대응하며,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포함한 미래의 작전을 위해 이탈리아 군대를 배치하기 위함이었다.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이해관계에 종속된 보호령이 되었고,[17]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알바니아 국왕으로 선포되어 이탈리아와 인적 동군 연합을 형성했다. 관세 동맹이 체결되었고, 로마는 알바니아의 외교 정책을 장악했다. 알바니아의 모든 석유 자원은 이탈리아의 국영 석유 회사인 아집(Agip)을 통해 거래되었다.[21]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알바니아 국왕


셰프케트 벌라치,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알바니아 총리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1940년 그리스를 침략했지만 실패했다.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에서 그리스 침공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러나 프렌크 페르비지 대령(후에 장군)[26]의 지휘 아래 알바니아 군대는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을 버리고 탈영하여 이탈리아군 전선에 큰 붕괴를 초래했다. 이들은 전선에서 철수했고, 페르비지 대령과 그의 관리들은 북부 푸카와 슈코드라 산악지대에 고립되었다.[27] 이는 이탈리아 점령에 대한 최초의 반란 행위였다.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당시 그리스의 반격(1940년 11월 13일~1941년 4월 7일)


이탈리아 침공 직후 그리스군이 반격했고, 알바니아의 상당 부분이 그리스의 손에 들어갔다(지로카스터와 코르체 포함). 1941년 4월, 그리스는 독일 침공 이후 항복했고, 알바니아 전체가 이탈리아의 통제하에 돌아왔다.

1943년 9월 이탈리아 항복 후, 알바니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2. 1. 침공 이전: 이탈리아의 영향력과 목표

1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14년 12월, 이탈리아 왕국은 알바니아 블로러 항구를 점령했다.[6] 이탈리아는 전쟁에 참전하면서 1916년 가을부터 알바니아 남부 지역으로 점령을 확대했다.[6] 같은 해 이탈리아군은 알바니아의 불규칙군을 모집하여 함께 복무하게 했다.[6] 이탈리아는 연합군 사령부의 허가를 받아 1916년 8월 23일 에피루스 북부를 점령하고 그리스군의 주둔군을 철수시켰다.[6] 1917년 6월 이탈리아는 알바니아 중부와 남부를 이탈리아의 보호령으로 선포했고, 알바니아 북부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에 할당했다.[6] 1918년 10월 31일 프랑스와 이탈리아군은 알바니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몰아냈다.[6]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이탈리아는 외압과 블로러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1920년 9월 2일 알바니아에서 군대를 철수했다.[6]

1차 세계 대전 당시 알바니아 블로러(Vlorë)에 주둔한 이탈리아 병사들. 이탈리아 국기(사보이 왕가 문장이 새겨진 삼색기)가 알바니아 국기와 함께 이탈리아 본부 발코니에 걸려 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조그 1세 통치 기간 동안 알바니아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침투하여 지배했으며, 그 이전부터 알바니아 병합을 계획하고 있었다. 알바니아는 1926년과 1927년 티라나 조약 체결 후 강력한 이탈리아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9][10][11] 조그 통치하에 알바니아 경제는 1931년 이후 이탈리아로부터 받은 여러 차례의 금융 대출에 의존했다.

1933년 8월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계속 지원하는 대가로 조그에게 엄격한 요구를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알바니아 정부의 주요 직책 임명자는 "이탈리아 교육"을 받아야 한다.
  • 모든 알바니아 정부 부처에 이탈리아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 이탈리아가 알바니아 군대(요새 포함)를 통제해야 한다.
  • 알바니아 헌병대를 훈련시키는 영국 장교를 이탈리아 장교로 교체해야 한다.
  • 알바니아는 다른 국가와의 모든 기존 상업 조약을 무효화하고 이탈리아 정부의 승인 없이 새로운 협정을 체결해서는 안 된다.
  • 이탈리아를 무역에서 알바니아의 "최혜국"으로 만드는 상업 협약에 서명해야 한다.


1934년 알바니아가 이탈리아에 대한 예정된 대출금 상환을 하지 않자, 이탈리아 군함이 알바니아 해안에 도착하여 알바니아가 이 지역에서 이탈리아의 목표에 굴복하도록 위협했다. 그러나 영국은 이탈리아의 행동에 반대했고, 압력을 받은 이탈리아는 물러서서 해상 훈련이 단순히 "우호적인 방문"이었다고 주장했다.

1937년 8월 25일, 이탈리아 외무장관 치아노 백작은 알바니아와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거기에 이탈리아의 안정적인 영향력 중심을 만들어야 한다. 미래가 무엇을 가져올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나타날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1920년처럼 이번에는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남부[이탈리아]에서는 수십만 명의 알바니아인을 수용했다. 아드리아 해 입구 건너편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1938년 3월 26일 치아노는 나치 독일이 그 직전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것처럼 알바니아를 합병하는 것에 대해 "알바니아 상황에 대한 자코모니(Jacomoni)의 보고서. 우리의 침투는 점점 더 강렬해지고 더 유기적으로 되고 있다. 내 방문 후에 내가 그린 프로그램은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고려할 때 일반적인 상황이 이 나라를 더 완벽하게 지배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주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그 나라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그리고 그 해 4월 4일에는 "우리는 알바니아와의 관계에서 보호령 요소를 점진적으로 강조해야 한다"고 적었다.

2. 2. 침공과 이탈리아 정권 수립

1939년 4월 7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5개월 전, 이탈리아 군대는 알바니아를 침공했다.[13] 알바니아군은 이탈리아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했고, 짧은 방어전 끝에 알바니아는 점령당했다. 1939년 4월 9일, 알바니아 국왕 조그 1세는 그리스로 망명했다.[14] 1927년 이후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11][15][16] 이탈리아의 정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알바니아를 직접 통제하고자 했다. 이는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에 대한 대응을 하며,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포함한 미래의 작전을 위해 이탈리아 군대를 배치하기 위함이었다.

알바니아는 이탈리아의 이해관계에 종속된 이탈리아 보호령이 되었다.[17] 이는 독일의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알바니아 국왕으로 선포되어 이탈리아와 인적 동군 연합을 형성했다. 그는 티라나에 총독을 파견했다. 관세 동맹이 체결되었고, 로마는 알바니아의 외교 정책을 장악했다. 공식적으로 이탈리아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알바니아인들은 그 지역을 통제했고,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금지했던 알바니아어 학교를 개설하도록 장려받았다. 이탈리아인들은 또한 주민들에게 알바니아 시민권을 부여하고 알바니아 국기를 게양하도록 허용했다. 알바니아군은 이탈리아군에 편입되었고, 이탈리아 고문관들이 알바니아 행정부의 모든 계층에 배치되었으며, 이탈리아 모델을 본떠 알바니아 파시스트당과 그 부속 조직들이 설립되면서 알바니아는 파시스트화되었다. 알바니아 파시스트당은 이탈리아 국가 파시스트당의 지부였고, 알바니아 파시스트당 당원들은 파시즘의 두체 무솔리니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서약했다.[18] 이탈리아 시민들은 알바니아에 이주민으로 정착하여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점차 이탈리아 영토로 바꾸려고 했다.[5] 알바니아의 이탈리아화는 무솔리니의 계획 중 하나였다.[19]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국왕으로 통치하는 동안 셰프케트 벌라치는 총리로 재직했다. 벌라치는 이탈리아 보호령의 일상적인 업무를 관장했다. 1941년 12월 3일, 셰프케트 벌라치는 무스타파 메를리카-크루야에게 총리직을 넘겼다.[20] 알바니아의 천연 자원도 이탈리아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들어왔다. 알바니아의 모든 석유 자원은 이탈리아의 국영 석유 회사인 아집(Agip)을 통해 거래되었다.[21]

알바니아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민족주의적 목표에 문화적, 역사적으로 중요했다. 알바니아 영토는 로마인들이 북부 이탈리아를 병합하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중세 시대에는 두라초(Durrës)와 같은 일부 해안 지역이 이탈리아 세력, 특히 나폴리 왕국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을 받고 그들의 소유였다 (알바니아 베네타 참조).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슬라브계 유고슬라비아인들과 대조적으로 알바니아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의 인종적 유사성을 선포하는 연구를 통해 알바니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했다.[22]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알바니아인들이 슬라브인이 아닌 이탈리아인들과 민족적 유산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알바니아에 대한 주요 영향력이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소유할 권리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23]

이탈리아는 또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있는 알바니아인이 주로 거주하는 코소보와 그리스의 에피루스 지역, 특히 챔 알바니아인 소수 민족이 거주하는 차메리아 국경 지역을 겨냥한 알바니아 이탈리아 영토 회복주의를 지지함으로써 알바니아에 대한 자신의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고 시도했다.[8]

2. 3.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알바니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발칸반도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1940년 그리스를 침략했지만 실패했다. 이 전쟁으로 알바니아 국경 지방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15]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그리스 침공의 발판으로 삼았다.

1940년 10월,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중 알바니아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그리스 침공을 위한 발판 역할을 했다. 무솔리니는 지중해 연안 대부분을 장악하기 위해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등 주변 국가를 침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프렌크 페르비지 대령(후에 장군)[26]의 지휘 아래 알바니아 군대는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을 버리고 탈영하여 이탈리아군 전선에 큰 붕괴를 초래했다. 이들은 전선에서 철수했고, 페르비지 대령과 그의 관리들은 북부 푸카와 슈코드라 산악지대에 고립되었다.[27] 이는 이탈리아 점령에 대한 최초의 반란 행위였다.

이탈리아 침공 직후 그리스군이 반격했고, 알바니아의 상당 부분이 그리스의 손에 들어갔다(지로카스터와 코르체 포함). 1941년 4월, 그리스는 독일 침공 이후 항복했다. 알바니아 전체가 이탈리아의 통제하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차메리아를 알바니아에 합병하려는 계획을 보류했는데, 이 지역이 거의 완전히 그리스화되었고 이 지역의 그리스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다.[23][28] 독일 또한 같은 이유와[29] 헬레닉 국가의 영토 축소에 반대했기 때문에 그러한 조치에 반대했다.[23]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가 함락된 후, 이탈리아 정부는 독일, 불가리아, 독립국 크로아티아와 협상을 시작했다. 무솔리니는 알바니아의 국경을 확장할 것을 요구했는데, 여기에는 알바니아 내에서 자치 정부를 가질 몬테네그로를 알바니아에 합병하고 알바니아의 국경을 동쪽으로 확장하는 것이 포함되었다.[23] 협상 끝에 이탈리아의 새로운 발칸 국경(알바니아의 새로운 국경 포함)이 1941년 6월 7일 왕령으로 선포되었다.[23]

1943년 9월 이탈리아 항복 후, 알바니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3. 행정 구역

이탈리아는 기존 알바니아의 현(Prefecture) 시스템을 채택했는데, 이탈리아어로는 ''prefetture''였다.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 행정 구조와 일치하도록 이들은 주(province)라고도 불렸으며, 이탈리아어로는 ''provincia''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달리 알바니아의 부현(sub-prefecture)(이탈리아어: ''sotto prefetture'')은 유지되었다. 처음에는 10개의 현이 있었다.[38][39] 이 아래에는 30개의 부현과 23개의 시(municipality)(이탈리아어: ''municipalità'')가 있었다.[40] 각 현은 같은 이름의 도시에 있는 현감(Prefect)이 운영했다. 1941년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이후, 코소보, 메토히야, 데바르 3개의 새로운 현이 5개의 부현과 함께 추가되었다.[41] 또한 울치니(Dulcigno)가 스쿠타리(Shkodër)(Scutari) 현에 부현으로 추가되었다.



현(Prefecture)부현(Sub-prefectures)시(Municipalities)
베라트피에르i
루슈네(Lushnjë)
발시
스크라파르
베라트
피에르i
루슈네
페슈코피부렐리에마트(Burrel)
제르칸
페슈코피
부렐
두르러스(Durrës)카바야(Kavajë)
크루야(Krujë)
시약
두르러스
카바야
시약
크루야
엘바산리브라즈드
그람시
엘바산
지로카스트르(Gjirokastër)차머리아
델비네(Delvinë)
쿠르벨레시
리보호베(Libohovë)
퍼르메트(Përmet)
테펠레네(Tepelenë)
사란더(Sarandë)
지로카스트르
퍼르메트
테펠레네
사란더
델비네
코르처(Korçë)빌리시트i
콜로녀
레스코빅u
포그라데츠i
없음
쿠커스(Kukës)루머
야코바 고지
쿠커스
스쿠타리(Shkodër)레저(Lezhë)
두카긴
울치니
말레시아에마데
미르디터(Mirditë)
푸커(Pukë)
스쿠타리
블로러(Vlorë)히마러(Himarë)블로러
티라나(Tiranë)없음티라나
데바르로스투서(Rostusa)
테토보
데바르
프리즈렌
메토히야야코바(Djakovica)페야(Peć)
코소보라호베츠
수바레카
프리슈티나(Priština)


4. 경제

이탈리아 점령과 새 정부 수립 이후, 알바니아와 이탈리아의 경제는 대부분의 무역 제한을 없앤 관세 동맹을 통해 통합되었다.[18] 이 관세 동맹으로 이탈리아의 관세 제도가 알바니아에 도입되었다.[18] 관세 정책 변경으로 인한 알바니아의 예상되는 경제적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매년 1,500만 알바니아 레크를 알바니아에 지원했다.[18] 이탈리아의 관세법이 알바니아에 적용되었고, 이탈리아만이 제3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18] 이탈리아 자본이 알바니아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으며,[18] 그 결과, 이탈리아 기업들은 알바니아 천연자원 개발에 대한 독점권을 얻었다.[18]

1944년 기업과 산업체 수는 1938년 244개, 1922년 71개에서 430개로 증가했다. 1938년 산업 생산 부문의 노동자 집중도는 1928년에 비해 두 배가 되었다. 당시 알바니아는 21개국과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가장 발달된 무역 관계는 이탈리아였고, 그 다음으로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독일, 그리스 등이었다.

알바니아는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늦게 자본주의 경제 개발에 진입했다. 일부 외국(주로 이탈리아)의 투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바니아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 산업 개발에 거의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노동력의 87% 이상을 차지하는 농업은 경제의 주요 부문이었으며 국민소득의 92.4%를 차지했고, 주요 생산품은 밀, 옥수수, 호밀이었다. 농업은 목조 쟁기를 사용하는 등 원시적인 도구를 사용했고, 비료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배수 시설도 열악했다. 이 시기 농업의 생산성, 조직 및 기계화 수준은 매우 낮았다.

5. 사회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점령하기 전, 조그 1세는 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대를 크게 늘리고 많은 돈을 국방에 썼다. 그러나 외국의 침략을 막지 못한 정부의 무능함이 드러나면서 알바니아에는 공산주의가 크게 확산되었다.[1] 이탈리아는 2차 세계 대전 동안 알바니아의 공산주의자들을 암처럼 여기며 제거하기 위해 고문소를 만들어 탄압하고 살해했다.[1]

6. 민족 문제와 탄압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그들에게 대알바니아를 약속한 추축국과 협력했다.[31] 이는 전간기에 세르비아 정치인들이 시행한 억압적인 조치에 대한 더 나은 대안으로 여겨졌다.[32] 1942년 6월 무스타파 크루야 총리는 세르비아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살해될 것이라고 말했다.[33] 7만 명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코소보 세르비아인들이 프리슈티나와 미트로비차의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거나 세르비아 본토로 추방되어 이 지역을 알바니아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32] 점령 기간 동안 주민들은 강제 노역, 고문, 사유 재산 파괴, 문화 및 역사적 건물과 묘지 파괴 및 손상을 당했다.[34] 세르비아인 추방은 그들이 지역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대부분의 사업, 제분소, 무두질 공장, 공공 시설을 운영하고 대부분의 유용한 농업 생산을 담당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35] 세르비아 측 자료에 따르면, 불네타리와 다른 준군사 조직이 코소보에서 최대 1만 명의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된다.[36][37]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알바니아에는 약 200명의 알바니아 유대인과 400명의 유대인 난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알바니아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보호받았지만 일부 제한을 받았다. 외국 유대인들은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코소보의 유대인들은 이탈리아 당국이 그들을 독일로 넘겨 살해당하거나 알바니아의 수용소로 보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나쁜 처지를 겪었다. 다른 이들은 알바니아 도시로 이송되었고 현지 주민들은 그들을 보호했다.[30] 알바니아의 홀로코스트 참조.

7. 참고 문헌

오언 피어슨, 《20세기 알바니아사: 3권 세트》 (Albania in the Twentieth Century, A History: 3 Volume Set영어) (I. B. Tauris, 2007) ISBN 9781845110161[1]

레지널드 히버트, 《알바니아의 국가 해방 투쟁: 쓰라린 승리》 (Albania's National Liberation Struggle: The Bitter Victory영어) (Pinter Publishers, 1991) ISBN 9780861871094[2]

참조

[1] 웹사이트 Symbols of the Albanian Kingdom (1939–1943) https://www.reddit.c[...] 2022-09-00
[2] 서적 Soldaten-Atlas (Tornisterschrift des Oberkommandos der Wehrmacht, Heft 39) https://archive.org/[...] Bibliographisches Institut
[3] 논문 Questioni storiche: Italy, Greater Albania and Kosovo 1939–1943 https://www.academia[...] Universita degli studi di Roma La Sapienza
[4] 서적 Doing politics in Albania doing World War II: The case of Mustafa Merlika Kruja fascist collaboration https://books.google[...] Založba ZRC, ZRC SAZU
[5] 서적 Axis Rule in Occupied Europe https://books.google[...] The Lawbook Exchange, Ltd.
[6] 서적 Armies in the Balkans 1914–18 Osprey Publishing
[7] 서적 War in the Balkans: An Encyclopedic History from the Fall of the Ottoman Empire to the Breakup of Yugoslavia Bloomsbury Publishing 2014
[8] 서적 Albania at War, 1939–1945 https://books.google[...] C. Hurst & Co. Publishers
[9] 서적 Fascist ideology: territory and expansionism in Italy and Germany, 1922–1945 Routledge
[10] 서적 The lights that failed: European international history, 1919–1933 Oxford University Press
[11] 서적 Remaking Italy in the twentieth century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12] 서적 Invoking Humanity: War, Law, and Global Order https://books.google[...]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2002
[13] 서적 The Second World War (Six Volume Boxed Set) https://books.google[...] Mariner Books
[14] 서적 World War II in Europe: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Garland Pub
[15] 서적 Fascist ideology: territory and expansionism in Italy and Germany, 1922–1945 https://books.google[...] Routledge
[16] 서적 The lights that failed: European international history, 1919–1933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7] 뉴스 Zog I king of Albania https://www.britanni[...] 2017-08-16
[18] 서적 Axis Rule in Occupied Europe The Lawbook Exchange, Ltd.
[19] 서적 Democratization from within: Political Culture and the Consolidation of Democracy in Post-Communist Albania https://books.google[...] Edizioni Nuova Cultura 2016
[20] 서적 Albania in the Twentieth Century, A History : Volume II: Albania in Occupation and War, 1939–45 https://books.google[...] I. B. Tauris
[21] 서적 Albania in Occupation and War: From Fascism to Communism 1940–1945 https://books.google[...] Bloomsbury Academic 2006
[22] 서적 Fascist ideology: territory and expansionism in Italy and Germany, 1922–1945 https://books.google[...] Routledge
[23] 서적 Fascism's European empire: Italian occupation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4] 서적 Albania at War, 1939–1945 https://books.google[...] C. Hurst & Co. Publishers
[25] 논문 The Legal Status of Albania
[26] 서적 General Prenk Pervizi Toena
[27] 서적 The sons of the Eagle
[28] 논문 "Le terre albanesi redente". La Ciameria tra irredentismo albanese e propaganda fascista https://core.ac.uk/d[...] University of Salento 2014
[29] 논문 The Çams of Albania and the Greek State (1923–1945) https://www.academia[...] 2009
[30] 서적 Searching for Justice After the Holocaust: Fulfilling the Terezin Declaration and Immovable Property Restitut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9
[31] 서적 Ethnic Nationalism: The Tragic Death of Yugoslavi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6
[32] 서적 The Three Yugoslavias: State-building and Legitimation, 1918–2005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2006
[33] 서적 Kosovo and the Collateral Effects of Humanitarian Interventi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8
[34] 서적 Албански злочини над Србима на Косову и Метохији у Другом светском рату, документа http://www.muzejgeno[...] Muzej žrtava genocida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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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서적 Kosovo: la spirale de la haine: les faits, les acteurs, l'histoire https://books.google[...] L'Ahe D'Homme 2012-08-21
[37] 서적 Arhivska građa o ljudskim gubicima na Kosovu i Metohiji u Drugome svetskom ratu
[38] 간행물 Italy OR 5301 (1943) Great Britain, War Office
[39] 간행물 Albania OR 5824 (1943) Great Britain, War Office
[40] 웹사이트 "Historia e ndarjes administrative nga Ismail Qemali në '92" | Gazeta Panorama http://www.panorama.[...] 2014-10-29
[41] 서적 Fascism's European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42] 웹인용 Symbols of the Albanian Kingdom (1939–1943) https://www.reddi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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