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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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터성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 5월에 오스트리아 이터 성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독일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무장친위대(SS)에 맞서 싸운 유일한 사례로,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5일 후, 독일 항복 이틀 전에 발생했다. 이터 성은 나치 독일이 프랑스의 고위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전투는 유고슬라비아 레지스탕스 단원의 탈출과 미군의 지원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미군 존 C. 리 대위의 지휘 하에, 독일 국방군 장교 요제프 강글 소령의 협력과 프랑스인 포로들의 참여로 전투가 벌어졌고, 미군과 독일군, 프랑스인 포로들이 함께 싸워 승리했다. 전투 결과, 리 대위는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고, 강글 소령은 오스트리아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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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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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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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명 | 이터 성 전투 |
분쟁 | 제2차 세계 대전 (서부 전선) |
날짜 | 1945년 5월 5일 |
장소 | 오스트리아 티롤 주, 오스트리아, 이터 성 |
결과 | 독일-미국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독일 국방군 미국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 프랑스 포로 |
교전국 2 | 무장친위대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존 C. 리 주니어 해리 바세 요제프 강글 쿠르트-지크프리트 슈라더 |
교전국 2 지휘관 | 게오르크 보흐만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36명 전차 4대 (1대 교전) |
교전국 2 병력 | 150–200명 대공포 3문 |
사상자 및 피해 | |
교전국 1 피해 | 1명 사망, 4명 부상 전차 1대 M4A3E8 파괴 |
교전국 2 피해 | 사망 및 부상자 수 미상 100명 포로 |
참전 부대 | |
교전국 1 부대 | 제12기갑사단 제142보병연대 |
교전국 2 부대 | 제17SS기갑척탄병사단 괴츠 폰 베를리힝엔 |
2. 배경
Schloss ItterDe (이터성)은 오스트리아 이터 마을 근처에 있는 작은 성이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이후, 1940년 말 독일 정부는 공식적으로 성 소유자인 프란츠 그뤼너에게 성을 임대받았다.
1943년 2월 7일,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SS중장 오스왈드 폴이 성을 강제로 장악했다. 4월 25일에는 성을 포로수용소로 완전 개조했으며 이 시설은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관리 하에 두어졌다. 이 감옥에는 국가에 중요인물로 지정된 고위층 인물들을 수용하였다.[16] 이곳에 수용된 인사 중에는 테니스 선수 장 보로트라, 전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폴 레노, 전 참모총장 막심 베이강과 모리스 가믈랭, 샤를 드 골의 누나 마리 아녜스 드 골, 우익연맹의 지도자이자 레지스탕스 최측근인 프랑수아 드 라 로크, 프랑스 노동조합 지휘자 레옹 주오 등이 있었다.
19세기 무렵부터 이터 성은 호텔이나 별장으로 사용되었고, 1925년에는 티롤 주의 부지사 프란츠 그뤼너가 미술품 보관 시설로 매입했다. 안슐루스 이후 1942년에는 담배의 해악과 싸우는 독일 동맹의 오스트마르크 본부로 사용되었지만, 같은 해 11월 23일부터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을 받은 오스발트 폴 SS 중장이 친위대에 의한 접수 절차를 시작했다. 1943년 2월 7일 정식으로 접수된 이터 성은 '명예 수감자(Ehrenhäftlinge)' 즉, 인지도가 높고 독일 측에 충분히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수감자를 수용하는 특별한 수용소로 지정되었다.[12] 4월 28일에는 소장 제바스티안 빈머 SS 대위가 부임했는데, 그는 매우 잔인한 인물이었다. 개조된 성 주변에는 철조망과 투광등이 설치되었다.[13]
1943년 5월 2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전 총리, 모리스 가믈랭 장군, 노동 운동 간부 레옹 주오 3명이 첫 번째 수감자로 도착했다. 그 후 여러 명예 수감자들이 추가되어 총 14명이 되었다. 이터 성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그들은 정치적인 입장 차이와 과거의 갈등으로 인해 종종 충돌했다고 한다.
이터 성 수용소의 생활 환경은 매우 좋았다. 성 안에는 수감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300권의 장서가 있었고, 안뜰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허가를 받으면 감시를 받으면서 이터 마을의 교회를 방문하거나, 군 병원 등의 의료 기관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또한, 레옹 주오의 비서이자 애인인 오귀스타 부르슐랭, 폴 레노의 비서이자 애인인 크리스티안 마비아, 앙리 지로 장군의 사위 마르셀 그랑제등이 수감되었다. 정치인 Michel Clemenceau프랑스어도 수감되었다. 식량도 풍부했고, 체코인 요리사 안드리아스 크로보트가 이를 관리했다. 폴 레노의 방에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저항 운동 멤버이자 전기 기술자로서 이터 성에서 근무했던 수감자 즈보니미르 추코비치(Zvonimir Čučković)가 간수에게서 훔친 라디오가 숨겨져 있었고, 수감자들은 BBC 등의 해외 방송에서 정보를 얻었다. 명예 수감자 외에도, 동유럽 출신 여성 수감자들이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잡역 요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녀들은 팔에 번호가 문신되어 있었기 때문에, '번호 수감자'라고 불렸다.
2. 1. 이터 성
Schloss ItterDe (이터성)은 오스트리아 이터 마을 근처에 있는 작은 성이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이후, 1940년 말 독일 정부는 공식적으로 성 소유자인 프란츠 그뤼너에게 성을 임대받았다.1943년 2월 7일,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SS중장 오스왈드 폴이 성을 강제로 장악했다. 4월 25일에는 성을 포로수용소로 완전 개조했으며 이 시설은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관리 하에 두어졌다. 이 감옥에는 국가에 중요인물로 지정된 고위층 인물들을 수용하였다.[16] 이곳에 수용된 인사 중에는 테니스 선수 장 보로트라, 전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폴 레노, 전 참모총장 막심 베이강과 모리스 가믈랭, 샤를 드 골의 누나 마리 아녜스 드 골, 우익연맹의 지도자이자 레지스탕스 최측근인 프랑수아 드 라 로크, 프랑스 노동조합 지휘자 레옹 주오 등이 있었다.
19세기 무렵부터 이터 성은 호텔이나 별장으로 사용되었고, 1925년에는 티롤 주의 부지사 프란츠 그뤼너가 미술품 보관 시설로 매입했다. 안슐루스 이후 1942년에는 담배의 해악과 싸우는 독일 동맹의 오스트마르크 본부로 사용되었지만, 같은 해 11월 23일부터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을 받은 오스발트 폴 SS 중장이 친위대에 의한 접수 절차를 시작했다. 1943년 2월 7일 정식으로 접수된 이터 성은 '명예 수감자(Ehrenhäftlinge)' 즉, 인지도가 높고 독일 측에 충분히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수감자를 수용하는 특별한 수용소로 지정되었다.[12] 4월 28일에는 소장 제바스티안 빈머 SS 대위가 부임했는데, 그는 매우 잔인한 인물이었다. 개조된 성 주변에는 철조망과 투광등이 설치되었다.[13]
1943년 5월 2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전 총리, 모리스 가믈랭 장군, 노동 운동 간부 레옹 주오 3명이 첫 번째 수감자로 도착했다. 그 후 여러 명예 수감자들이 추가되어 총 14명이 되었다. 이터 성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그들은 정치적인 입장 차이와 과거의 갈등으로 인해 종종 충돌했다고 한다.
이터 성 수용소의 생활 환경은 매우 좋았다. 성 안에는 수감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300권의 장서가 있었고, 안뜰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허가를 받으면 감시를 받으면서 이터 마을의 교회를 방문하거나, 군 병원 등의 의료 기관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또한, 레옹 주오의 비서이자 애인인 오귀스타 부르슐랭, 폴 레노의 비서이자 애인인 크리스티안 마비아, 앙리 지로 장군의 사위 마르셀 그랑제등이 수감되었다. 정치인 Michel Clemenceau프랑스어도 수감되었다. 식량도 풍부했고, 체코인 요리사 안드리아스 크로보트가 이를 관리했다. 폴 레노의 방에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저항 운동 멤버이자 전기 기술자로서 이터 성에서 근무했던 수감자 즈보니미르 추코비치(Zvonimir Čučković)가 간수에게서 훔친 라디오가 숨겨져 있었고, 수감자들은 BBC 등의 해외 방송에서 정보를 얻었다. 명예 수감자 외에도, 동유럽 출신 여성 수감자들이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잡역 요원으로 파견되었다. 그녀들은 팔에 번호가 문신되어 있었기 때문에, '번호 수감자'라고 불렸다.
2. 2. 이터 성 수용소
이터성(Schloss ItterDe)은 오스트리아 이터 마을 근처에 있는 작은 성이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이후, 1940년 말 독일 정부는 성 소유자인 프란츠 그뤼너에게 성을 공식 임대받았다.1943년 2월 7일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SS중장 오스왈드 폴이 성을 강제로 장악했고, 4월 25일에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관리를 받는 포로 수용소로 개조되었다. 이 감옥에는 국가에 중요인물로 지정된 고위층 인사들이 수용되었다.
수감자 중에는 테니스 선수 장 보로트라, 전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폴 레노, 전 참모총장 막심 베이강과 모리스 가믈랭, 샤를 드 골의 누나 마리 아녜스 드 골, 우익 지도자 프랑수아 드 라 로크, 노동조합 지도자 레옹 주오 등이 있었다.[1]
프랑스 VIP 포로 외에도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차출된 동유럽인 포로들이 이터성으로 옮겨져 유지보수 및 기타 잡노동을 맡았다.
3. 전투 발발
1945년 5월 3일, 이터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단원 즈보니미르 추코비치가 수용소 지휘관 제바스티안 비머의 심부름을 핑계로 탈출하여 연합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인스브루크에서 미군 제103보병사단과 접촉하여 수용소 상황을 알렸다. 그러나 구출 작전은 중포격으로 중단되고, 지원 병력은 지프 두 대에 불과했다.
추코비치가 돌아오지 못하고, 다하우 강제 수용소 소장 에두아르트 바이터가 5월 2일 성에서 자살하자, 비머는 성을 버리고 탈출했다. 수감자들은 성을 장악했지만, SS해골부대의 공격을 두려워했다.
5월 4일, 수감자들의 요청으로 체코인 요리사 안드레아스 크로보트가 자전거를 타고 뵈길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와 접촉하고, 독일 국방군의 요제프 강글 소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강글 소령은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에게 항복하려 했지만, 병력이 부족하여 직접 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미군 제12기갑사단의 존 C. "잭" 리 주니어 대위는 쿠프슈타인에서 강글 소령의 요청을 받고 구조 임무를 지원했다. 리 대위는 증원군을 요청했지만, 다리가 약해 일부 병력만으로 성으로 향했다. 도중에 SS 부대를 격파하고, 프랑스인 포로들의 요청으로 방어를 맡게 된 무장친위대 장교 쿠르트-지그프리트 슈라더와 합류했다. 리 대위는 성에 도착하여 방어 준비를 했지만, 병력 수는 적었다. 프랑스인 포로들은 숨으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미군 및 독일군과 함께 싸웠다.
밤 동안 정찰병과 교전 후, 5월 5일 아침에 100-150명의 SS 병력이 공격을 시작했다. 강글 소령은 뵈길에 지원을 요청했고, 소수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셔먼 전차가 화력 지원을 했으나, 8.8 cm 대공포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장 보로트라는 성벽을 넘어 지원군에 합류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 오후 4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SS 병력은 패퇴하고 1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 포로들은 프랑스로 귀환했고, 5월 10일 파리에 도착했다.
3. 1. 탈출과 도움 요청
1945년 5월 3일, 이터성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단원 즈보니미르 추코비치가 수용소 지휘관 제바스티안 비머의 심부름을 핑계로 탈출하여 연합군에 도움을 요청했다.[5] 그는 인스브루크에서 미군 제103보병사단과 접촉하여 수용소 상황을 알렸다. 그러나 구출 작전은 중포격으로 중단되고, 지원 병력은 지프 두 대에 불과했다.
추코비치가 돌아오지 못하고, 다하우 강제 수용소 소장 에두아르트 바이터가 5월 2일 성에서 자살하자, 비머는 성을 버리고 탈출했다. 수감자들은 성을 장악했지만, SS해골부대의 공격을 두려워했다.
5월 4일, 수감자들의 요청으로 체코인 요리사 안드레아스 크로보트가 자전거를 타고 뵈길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와 접촉하고, 독일 국방군의 요제프 강글 소령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강글 소령은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에게 항복하려 했지만, 병력이 부족하여 직접 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미군 제12기갑사단의 존 C. "잭" 리 주니어 대위는 쿠프슈타인에서 강글 소령의 요청을 받고 구조 임무를 지원했다. 리 대위는 증원군을 요청했지만, 다리가 약해 일부 병력만으로 성으로 향했다. 도중에 SS 부대를 격파하고, 프랑스인 포로들의 요청으로 방어를 맡게 된 무장친위대 장교 쿠르트-지그프리트 슈라더와 합류했다. 리 대위는 성에 도착하여 방어 준비를 했지만, 병력 수는 적었다. 프랑스인 포로들은 숨으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미군 및 독일군과 함께 싸웠다.
밤 동안 정찰병과 교전 후, 5월 5일 아침에 100-150명의 SS 병력이 공격을 시작했다. 강글 소령은 뵈길에 지원을 요청했고, 소수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셔먼 전차가 화력 지원을 했으나, 8.8 cm 대공포 공격으로 파괴되었다.[17]
진 보로트라는 성벽을 넘어 지원군에 합류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 오후 4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SS 병력은 패퇴하고 1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19] 프랑스 포로들은 프랑스로 귀환했고,[20] 5월 10일 파리에 도착했다.[21]
3. 2. 독일 국방군 장교 요제프 강글의 협력
이터성 전투에서 독일 국방군 장교 요제프 강글 소령은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와 협력하여 미군과 함께 프랑스인 포로들을 구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5년 5월 4일, 포로들은 체코인 요리사 안드레아스 크로보트를 통해 뵈길 마을의 오스트리아 저항군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뵈길은 독일 국방군이 철수했지만 무장친위대가 다시 점령한 상태였다. 크로보트는 요제프 강글 소령에게 인도되었고, 강글은 원래 무장친위대로부터 지역 주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레지스탕스에 합류했다.
강글은 미군에게 항복할 생각이었으나, 소수의 병력으로 SS부대와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SS가 백기나 오스트리아 국기를 건 집을 공격하고 탈영병을 처형하는 상황에서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유지하며, 미군이 뵈길에 도착하여 항복할 기회를 기다렸다.
한편, 존 리 대위가 지휘하는 미군 제23전차대대의 정찰대가 쿠프슈타인에 도착했다. 강글의 지원 요청을 받은 리 대위는 즉시 구조 임무를 지원하고 본부의 허가를 받았다. 강글과 함께 성을 정찰한 후, 리 대위는 미군 병력 14명, 강글, 운전병, 독일 포병 10명과 함께 성으로 향했다. 도중에 SS 부대를 격파하기도 했다.
이터성에 도착한 리 대위는 방어 준비를 지시했다. 프랑스인 포로들은 리 대위에게 숨으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전투에 참여했다. 제17SS기갑척탄병사단 소속으로 추정되는 100-150명의 SS 병력이 5월 5일 아침 공격을 시작했다. 강글은 뵈길의 오스트리아 저항군 지도자 알로이스 마이어에게 전화하여 지원을 요청했고, 독일군 2명과 오스트리아 저항군 병사 1명이 성에 증원되었다. 성 정문에 배치되었던 셔먼 전차 '베소튼 제니'는 8.8 cm 대공포 공격으로 파괴되었지만, 다행히 승무원은 모두 무사했다.
전투 중, 강글은 폴 르노에게 말을 걸려다 저격수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장 보로트라는 통신선이 끊기기 직전, 리 대위의 요청으로 성벽을 넘어 SS의 방어선을 뚫고 지원군에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오후 4시경,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SS는 패퇴했고, 약 100명이 포로로 잡혔다.
3. 3. 미군 존 C. 리 대위의 결단
1945년 5월 4일, 미군 제23전차대대장 존 C. 리 대위는 오스트리아 쿠프슈타인에서 구호 요청을 받고, 본부의 허가를 받아 이터 성 구출 임무를 지원했다.[2] 리 대위는 요제프 강글 소령의 볼프츠바켄 퀴벨바켄 차를 타고 성을 정찰한 후, 전차 2대를 후방에 두고 제36보병사단 제125보병연대의 지원을 받아 진군했다.[2] 그러나 진군 도중 다리가 약해 지원군을 돌려보내야 했고, 결국 미군 병사 14명, 강글 소령, 운전병, 항복한 독일 포병 병사 10명을 실은 트럭만 남았다.[2][17] 그들은 성으로부터 6km 떨어진 지점에서 SS 병사들을 무력화하고 성에 도착했다.[2]
리 대위는 가용 가능한 병력들을 성 주변을 방어하도록 했으며, M4 셔먼 전차 1대는 성 정문에 배치하였다.[2] 프랑스인 포로들은 미군, 독일 국방군과 함께 싸웠다.[18] 5월 5일 아침, 100-150명 규모의[16] SS 병력이 공격을 시작했고,[17] 8.8 cm 대공포 공격으로 셔먼 전차가 파괴되었다.[17]
진 보로트라는 성벽을 넘어 SS의 방어가 센 지점으로 가서 매복하겠다는 모험적인 제안을 했고,[18] 수비군의 탄약이 떨어지기 전에 증원군에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18] 오후 4시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SS 병력은 패퇴하였고,[19] 100명 정도의 SS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13]
4. 전투의 전개
1945년 5월 3일, 이터성 수용소에서 잡역부로 일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단원 즈보니미르 추코비치가 사령관 세바스탄 비멜에게 심부름을 한다는 핑계로 이터성을 탈출, 연합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영어 편지를 지니고 인스브루크 외곽에서 미군 제103보병사단 제409보병연대 선봉대와 마주쳤다. 이들은 구출작전을 승인할 권한은 없었지만 5월 4일까지 응답을 약속했다. 그러나 새벽에 출발한 중무장 부대는 옌바흐 마을에서 중포격을 받고 진격을 멈췄고, 제36보병사단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프차 2대의 보조지원만 받았다.
한편, 5월 2일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마지막 지휘관 에두아르드 베터가 성에서 자살하자 비멜은 이터성을 버렸고, 이후 죄수들이 성을 장악하고 무장했다. 5월 4일 한낮, 감옥 지도자는 체코인 요리사 안드레아스 크로보트를 통해 뵈길의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와 접촉, 당시 뵈길 마을을 재점령한 SS로부터 마을 주민들을 보호하려던 독일 국방군 조세프 게질 소령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게질 소령은 미군에게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쿠프슈타인에서 제36보병사단을 기다리던 미군 제12기갑사단 23전차대대 정찰대 M4 셔먼 4대는 게질의 지원 요청을 받고 본부 허가를 받아냈다. 게질 소령의 퀴벨바겐 차를 타고 성을 정찰한 후, 리 대위는 제36보병사단 제125보병연대 보병 지원을 받아 진군했지만, 다리가 약해 지원군을 되돌려야 했다. 결국 미군 병사 14명, 게질 소령, 운전병, 항복한 독일 포병 병사 10명을 실은 트럭만 남아 SS 병사들을 무력화하고 성에 도착했다.
프랑스인 포로들은 우호적인 SS장교 쿠르트지그프리드 시라델에게 방어를 부탁했고, 리 대위는 병력들을 성 주변에 배치하였다. 프랑스인 포로들은 밖에서 미군, 독일 국방군과 함께 싸웠다. 밤새 방어군은 그들의 힘을 평가하고 요새의 약점을 탐색하기 위해 파견된 정찰 병력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다. 5월 5일 아침, 100-150명의 SS 병력이 공격을 시작했고, 게질 소령은 뵈길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독일군 2명과 오스트리아 저항군 병사 한스 바틀만 충원할 수 있었다. 셔먼 전차는 8.8 cm 대공포 공격으로 무력화되기 전까지 기관총 화력 지원을 했다.
이른 오후, 통신이 끊기기 전 리 대위는 테니스 선수 보로트라에게 성벽을 넘어 지원군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했고, 보로트라는 수비군의 탄약이 떨어지기 전에 증원군에 합류했다. 오후 4시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SS 병력은 패퇴하였고, 1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날 저녁 프랑스 포로들은 프랑스로 되돌려졌고 5월 10일 파리에 도착했다.
4. 1. 방어 준비
1945년 5월 3일, 이터성 수용소에서 잡역부로 일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단원 즈보니미르 추코비치가 사령관 세바스탄 비멜에게 심부름을 한다는 핑계로 성을 탈출, 연합군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영어 편지를 소지하고 인스브루크의 미군 제103보병사단 제409보병연대 선봉대와 접촉하여 포로들의 상황을 알렸다. 새벽에 중무장한 부대가 파견되었으나 옌바흐 마을에서 중포격을 받고 진격을 멈췄고, 제36보병사단의 지원도 지프차 2대에 그쳤다. 한편 5월 2일 다하우의 마지막 지휘관 에두아르드 베터가 성에서 자살하자, 비멜은 성을 버렸고, 이후 죄수들이 성을 장악하고 무장했다.
5월 4일, 죄수들의 요청으로 체코인 요리사 안드레아스 크로보트가 뵈길의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와 접촉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뵈길은 독일 국방군이 버렸으나 SS가 재점령한 상태였고, 크로보트는 항복한 독일 국방군 지휘관 조세프 게질 소령에게 지휘를 받게 되었다. 게질은 성 공격 대신 SS로부터 마을 주민들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며 미군을 기다렸다.
한편, 존 리 대위가 지휘하는 미군 제12기갑사단 23전차대대의 M4 셔먼 정찰대 4대가 쿠프슈타인에 도착하여 제36보병사단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했다. 게질의 요청을 받은 리 대위는 즉시 구조 임무를 지원, 본부 허가를 받아냈다. 게질과 함께 성을 정찰한 후, 리 대위는 전차 5대와 제36보병사단 제125보병연대의 보병 지원을 받았으나, 다리 문제로 병력을 줄여야 했다. 결국 미군 14명, 게질, 운전병, 독일 포병 10명을 태운 트럭만 남아 SS 병사들을 무력화하고 성으로 향했다.
프랑스인 포로들은 부상으로 성에서 요양 중이던 SS장교 쿠르트지그프리드 시라델에게 방어를 부탁했고, 리 대위는 도착 후 성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고 전차 1대를 정문에 배치했다. 리 대위는 포로들에게 숨으라고 했지만, 그들은 미군, 독일 국방군과 함께 싸웠다. 밤 동안 정찰병과 교전이 있었고, 5월 5일 아침 100-150명 규모의 SS 병력이 공격을 시작했다. 게질은 뵈르글의 저항군 지도자 알로이스 마이어에게 지원을 요청, 독일군 2명과 10대 저항군 병사 한스 바틀이 충원되었다. 셔먼 전차는 8.8 cm 대공포 공격으로 파괴되기 전까지 기관총 지원을 했다.[17]
이른 오후, 지원군 파견 소식이 전해졌고, 리 대위는 테니스 선수 장 보로트라에게 성벽을 넘어 지원군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18] 보로트라는 성공적으로 지원군에 합류했고, 오후 4시 지원군 도착과 함께 SS 병력은 패퇴, 100명이 포로로 잡혔다.[19] 프랑스 포로들은 그날 저녁 프랑스로,[20] 5월 10일 파리에 도착했다.[21]
4. 2. SS 부대의 공격
5월 4일, 미군 제XXI 군단 제12기갑사단 23전차대대의 정찰대 M4 셔먼 4대는 오스트리아 쿠프슈타인에 도착하여 제36보병사단을 기다렸다. 그곳에서 독일 국방군 게질 소령의 구호 요청을 받은 리 대위는 구조 임무를 지원하여 본부의 허가를 받았다. 리 대위는 M4 셔먼 전차 2대를 후방에 두고 증원군과 함께 진군했으나, 다리가 약해 지원군을 되돌려야 했다. 결국 미군 병사 14명, 게질 소령, 운전병, 항복한 독일 포병 병사 10명을 실은 트럭만 남아 SS 병사들을 무력화하며 성으로 향했다.
한편, 프랑스인 포로들은 SS장교 쿠르트지그프리드 시라델에게 방어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리 대위가 성에 도착했을 때 포로들은 환호했으나, 적은 병력에 실망했다. 리 대위는 병력들을 성 주변에 배치하고 전차 1대는 성 정문에 배치했다.
리 대위는 프랑스인 포로들에게 숨어있으라고 했지만, 그들은 미군, 독일 국방군과 함께 싸웠다. 5월 5일 아침, 100-150명의 SS 병력이 공격을 시작했다. 게질 소령은 뵈길의 오스트리아 저항군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독일군 2명과 오스트리아 저항군 병사 한 명만 충원할 수 있었다. M4 셔먼 전차는 8.8 cm 대공포 공격으로 파괴되기 전까지 기관총 화력 지원을 했다.
오후 4시경,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SS 병력은 패퇴하였고, 100명 정도의 SS 병력이 포로로 잡혔다.
4. 3. 격전과 지원군의 도착
5월 3일, 이터성 수용소에서 잡역부로 일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단원 즈보니미르 추코비치가 사령관 세바스탄 비멜에게 심부름을 한다는 핑계로 이터성을 탈출, 연합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영어 편지를 지니고 뵈길을 지나 인스브루크 외곽에서 미군 제4(VI)군단 제103보병사단 제409보병연대 선봉대와 마주쳤다. 이들은 구출작전을 승인할 권한은 없었지만 5월 4일까지 응답을 약속했다. 그러나 새벽에 출발한 중무장 부대는 옌바흐 마을에서 중포격을 받고 진격을 멈췄고, 제36보병사단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프차 2대의 보조지원만 받았다.
한편, 5월 4일 한낮 감옥 지도자는 체코인 요리사 안드레아스 크로보트를 통해 뵈길의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와 접촉, 당시 뵈길 마을을 재점령한 SS로부터 마을 주민들을 보호하려던 독일 국방군 조세프 게질 소령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게질 소령은 미군에게 항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쿠프슈타인에서 제36보병사단을 기다리던 미군 제12기갑사단 23전차대대 정찰대 M4 셔먼 4대는 게질의 지원 요청을 받고 본부 허가를 받아냈다. 게질 소령의 볼프츠바켄 퀴벨바켄 차를 타고 성을 정찰한 후, 리 대위는 제36보병사단 제125보병연대 보병 지원을 받아 진군했지만, 다리가 약해 지원군을 되돌려야 했다. 결국 미군 병사 14명, 게질 소령, 운전병, 항복한 독일 포병 병사 10명을 실은 트럭만 남아 SS 병사들을 무력화하고 성에 도착했다.
프랑스인 포로들은 우호적인 SS장교 쿠르트지그프리드 시라델에게 방어를 부탁했고, 리 대위는 병력들을 성 주변에 배치하였다. 프랑스인 포로들은 밖에서 미군, 독일 국방군과 함께 싸웠다. 5월 5일 아침, 100-150명의 SS 병력이 공격을 시작했고, 게질 소령은 뵈길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독일군 2명과 오스트리아 저항군 병사 한스 바틀만 충원할 수 있었다. 셔먼 전차는 8.8 cm 대공포 공격으로 무력화되기 전까지 기관총 화력 지원을 했다.
이른 오후, 통신이 끊기기 전 리 대위는 테니스 선수 보로트라에게 성벽을 넘어 지원군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했고, 보로트라는 수비군의 탄약이 떨어지기 전에 증원군에 합류했다. 오후 4시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SS 병력은 패퇴하였고, 1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날 저녁 프랑스 포로들은 프랑스로 되돌려졌고 5월 10일 파리에 도착했다.
5. 전투의 결과
리는 이터성 전투 방어 공로로 대위로 진급하고 미국으로 부터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14] 그는 1973년에 사망했다. 현역 시절부터 정치가가 되기를 희망했으며, 민주당의 추천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46년에 귀국, 퇴역 후 풋볼 선수가 되었지만 뚜렷한 활약 없이 은퇴했다. 이후 사업 실패와 아내와의 이혼 등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강글은 전 프랑스 총리 폴 레노를 구하려다 7.92×57mm 마우저탄에 맞아 사망했고, 오스트리아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았다.[14] 뵈르글에는 그의 이름을 딴 제프 강글 거리(Sepp Gangl-Straße)가 있다.[14][13] 강글의 유해는 전투 후 이터 성 요셉 교회에 안치되었다가 곧 베르글의 공영 묘지에 매장되었다.
쿠르트-지크프리트 슈라더는 미국군에 체포되어 나치당과의 전 관련으로 기소된 후 2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터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감형되었다. 슈라더는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전 죄수였던 프랑스 고위 관리들의 노력으로 1947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가족과 함께 살면서 벽돌공이나 주 정부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1990년대 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계 캐나다인 종군 기자 르네 레베크는 크레이머스와 함께 이터 성으로 향한 부대원 중 한 명이었다. 레베크는 후에 정치가가 되어 퀘벡 당을 설립했으며, 퀘벡 주 총리 등을 역임했다.
추코비치는 조국 유고슬라비아로 귀국한 후 전기 공사 관련 회사를 설립했으며, 이터 성 근무 당시의 기록을 정리해 서독 및 프랑스 정부에 제공했다. 전후에도 전 죄수였던 프랑스 고위 관리들과의 교류는 이어졌으며, 1984년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
크로보트와 번호 죄수들은 연합군이 설치한 난민 캠프로 보내졌지만, 그 이후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도망쳤던 빈머는 이후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돕기 위해 전 죄수였던 프랑스 고위 관리들에게 당국 개입을 요청했고, 그 중 일부는 실제로 프랑스 점령 당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949년에 석방된 후 농장에서 일했지만, 이내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1952년에 자살했다.
슈라더는 수용소 사령관으로서 죄수들을 제142보병연대장 린치 대령에게 정식으로 인도했고, 죄수들은 제103보병사단 지휘소가 있는 인스브루크로 보내졌다. 린치는 도착 직후부터 이터 성에 연대 지휘소를 설치하고 휴전 및 티롤 지역 내 모든 독일군 부대의 항복을 정리했다. 5월 7일, 독일 항복에 따라 이터 성에 오스트리아 내 연합국 점령군의 임시 본부가 설치되었다.
스웨덴의 파워 메탈 밴드 사바톤은 2016년 앨범 ''더 라스트 스탠드''에 "The Last Battle"이라는 제목의 이 전투에 관한 노래를 발표했다.
이터 성은 1945년 말에 인스브루크의 호텔 경영자에게 매각되어, 야외 수영장 등을 설치하는 개수 공사를 거쳐 호텔로 다시 개장되었다. 이후 여러 소유자를 거쳤지만, 1980년대 후반에 폐업한 이후 비공개 상태이다.
5. 1. 포로 석방과 독일군 항복
슈라더는 수용소 사령관으로서 죄수들을 제142보병연대장 린치 대령에게 정식으로 인도했고, 죄수들은 제103보병사단 지휘소가 있는 인스브루크로 보내졌다. 린치는 도착 직후부터 이터 성에 연대 지휘소를 설치하고 휴전 및 티롤 지역 내 모든 독일군 부대의 항복을 정리했다. 5월 7일, 독일 항복에 따라 이터 성에 오스트리아 내 연합국 점령군의 임시 본부가 설치되었다.추코비치는 조국 유고슬라비아로 귀국한 후 전기 공사 관련 회사를 설립했으며, 이터 성 근무 당시의 기록을 정리해 서독 및 프랑스 정부에 제공했다. 전후에도 전 죄수였던 프랑스 고위 관리들과의 교류는 이어졌으며, 1984년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 크로보트와 번호 죄수들은 연합군이 설치한 난민 캠프로 보내졌지만, 그 이후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슈라더는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전 죄수였던 프랑스 고위 관리들의 노력으로 1947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가족과 함께 살면서 벽돌공이나 주 정부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1990년대 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글의 유해는 전투 후 이터에 있는 성 요셉 교회에 안치되었고, 곧 베르글의 공영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국민적 영웅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뵈르글에는 그의 이름을 따서 개명된 제프 강글 거리(Sepp Gangl-Straße)가 있다.[14][13]
도망쳤던 빈머는 이후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돕기 위해 전 죄수였던 프랑스 고위 관리들에게 당국 개입을 요청했고, 그 중 일부는 실제로 프랑스 점령 당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949년에 석방된 후 농장에서 일했지만, 이내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1952년에 자살했다.
크레이머스와 함께 이터 성으로 향한 부대 중에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종군 기자 르네 레베크가 있었다. 레베크는 후에 정치가가 되어 퀘벡 당을 설립했으며, 퀘벡 주 총리 등을 역임했다.
이 전투에서의 전공으로, 리는 미군으로 부터 수훈 십자 훈장을 수훈했다. 현역 시절부터 정치가가 되기를 희망했으며, 민주당의 추천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46년에 귀국, 퇴역 후 풋볼 선수가 되었지만 뚜렷한 활약 없이 은퇴했다. 이후 사업 실패와 아내와의 이혼 등 실의의 나날을 보내며, 1973년에 54세로 사망했다.
이터 성은 1945년 말에 인스브루크의 호텔 경영자에게 매각되어, 야외 수영장 등을 설치하는 개수 공사를 거쳐 호텔로 다시 개장되었다. 이후 여러 소유자를 거쳤지만, 1980년대 후반에 폐업한 이후 비공개 상태이다.
5. 2. 관련 인물들의 이후
리는 이터 성 방어 공로로 대위로 진급하고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14] 그는 1973년에 사망했다. 현역 시절부터 정치가가 되기를 희망했으며, 민주당의 추천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46년에 귀국, 퇴역 후 풋볼 선수가 되었지만 뚜렷한 활약 없이 은퇴했다. 이후 사업 실패와 아내와의 이혼 등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강글은 전 프랑스 총리 폴 레노를 구하려다 7.92×57mm 마우저탄에 맞아 사망했고, 오스트리아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았다.[14] 뵈르글에는 그의 이름을 딴 제프 강글 거리(Sepp Gangl-Straße)가 있다.[14][13] 강글의 유해는 전투 후 이터 성 요셉 교회에 안치되었다가 곧 베르글의 공영 묘지에 매장되었다.
쿠르트-지크프리트 슈라더는 미국군에 체포되어 나치당과의 전 관련으로 기소된 후 2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터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감형되었다. 슈라더는 포로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전 죄수였던 프랑스 고위 관리들의 노력으로 1947년에 석방되었다. 이후 가족과 함께 살면서 벽돌공이나 주 정부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1990년대 중반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계 캐나다인 종군 기자 르네 레베크는 크레이머스와 함께 이터 성으로 향한 부대원 중 한 명이었다. 레베크는 후에 정치가가 되어 퀘벡 당을 설립했으며, 퀘벡 주 총리 등을 역임했다.
추코비치는 조국 유고슬라비아로 귀국한 후 전기 공사 관련 회사를 설립했으며, 이터 성 근무 당시의 기록을 정리해 서독 및 프랑스 정부에 제공했다. 전후에도 전 죄수였던 프랑스 고위 관리들과의 교류는 이어졌으며, 1984년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했다.
크로보트와 번호 죄수들은 연합군이 설치한 난민 캠프로 보내졌지만, 그 이후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도망쳤던 빈머는 이후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돕기 위해 전 죄수였던 프랑스 고위 관리들에게 당국 개입을 요청했고, 그 중 일부는 실제로 프랑스 점령 당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949년에 석방된 후 농장에서 일했지만, 이내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1952년에 자살했다.
스웨덴의 파워 메탈 밴드 사바톤은 2016년 앨범 ''더 라스트 스탠드''에 "The Last Battle"이라는 제목의 이 전투에 관한 노래를 발표했다.
이터 성은 1945년 말에 인스브루크의 호텔 경영자에게 매각되어, 야외 수영장 등을 설치하는 개수 공사를 거쳐 호텔로 다시 개장되었다. 이후 여러 소유자를 거쳤지만, 1980년대 후반에 폐업한 이후 비공개 상태이다.
6. 역사적 의의
이터성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이상한 전투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이 전투는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지 5일 후, 독일의 항복문서가 작성되기 이틀 전에 일어난 전투이며, 독일군과 미군이 2차대전 중 같은 편에 서서 전투한 유일한 전투이다.
전투에 참여한 리 대위는 수훈 십자장을 수여받았다. 가젤 소령은 전투 중 전 프랑스 총리 폴 레노를 구출하려다 저격수의 총알에 맞아 사망했으나, 사후 오스트리아의 국가영웅으로 추대되었고 뵈길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지어졌다.
쿠르트-지크프리트 슈라더는 미국군에 체포되어 나치당과의 관련 혐의로 기소된 후 2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터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감형되었다.
스웨덴의 파워 메탈 밴드 사바톤은 2016년 앨범 ''더 라스트 스탠드''에 "The Last Battle"이라는 제목의 이 전투에 관한 노래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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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BATON - The Last Battle (Battle For Castle I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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