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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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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은 1567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에서 태어난 보헤미아의 귀족이자 군인이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복무하고 크로아티아 크라이나에서 토지를 소유했으며, 보헤미아 귀족으로 활동했다. 1618년 프라하의 창밖 투척 사건을 주도하고 보헤미아 반란을 이끌었으나 백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추방당했다. 이후 30년 전쟁에 외교관 및 군인으로 참여했으며, 1640년 에스토니아 파르누에서 사망하여 탈린 성모 대성당에 묻혔다. 그는 또한 자신의 역할을 옹호하는 소책자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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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638년 4월 당시 모습
1638년 4월 당시 모습
현지어 표기Jindřich Matyáš Thurn
다른 이름Henrik Mattias von Thurn (스웨덴어)
Heinrich Matthias Graf von Thurn und Valsassina (독일어)
Enrico Matteo Conte della Torre di Valsassina (이탈리아어)
출생보헤미아 왕국
사망스웨덴 제국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사망일1640년 1월 26일
출생일1567년 2월 24일
종교프로테스탄트
군사 경력
소속 국가보헤미아 왕국
스웨덴 제국
복무 기간1618년-1640년
최종 계급장군
복무스웨덴 육군
주요 참전30년 전쟁 보헤미아 반란

2. 생애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은 1567년 인스브루크에서 태어났으며,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부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아버지 사후 가톨릭 신자인 삼촌에게 양육되었다.[1][2] 젊은 시절 신성 로마 제국 대사관 소속으로 여러 지역을 여행했으며, 1592년부터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1] 결혼, 군 공로 인정, 영지 매입 등을 통해 보헤미아의 주요 귀족(Páni)으로 부상했으며, 보헤미아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의 원수(marshal)로 활동했다.[1] 1617년, 가톨릭 신자인 슈티리아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헤미아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자, 투른은 다른 귀족들과 함께 루돌프 2세 황제가 폐하의 서한으로 보장한 종교적 자유의 존중을 요구하는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2. 1. 가문과 성장 배경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은 1567년 인스브루크에서 태어났다. 얼마 후 그의 가족은 리프니체 영지를 매입하고 그곳으로 이주했으며, 1574년에는 모라비아로 이주했다.[1]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2세의 비밀참사 구성원이었던 프란츠 나푸스 폰 투른 운트 발사시나(프란티셰크 투른, 1508~1586) 백작이었고, 어머니는 슐릭 백작 부인 바르보라(1547~1581)였다. 어머니 바르보라는 슐릭 백작 히에로니무스 슐릭과 글라이헨-토나 백작 부인 카타리나 폰 글라이헨-토나 사이의 딸이었다.[2]

그의 부모 모두 프로테스탄트 신자였으나,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가톨릭 신자인 삼촌 요한 암브로스에게 양육되었다.

젊은 투른 백작은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대사관에서 근무했으며, 이스탄불, 시리아, 이집트,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1592년부터 그는 오스만 제국 튀르크에 대항하는 황제군에서 복무했다. 황제군 복무 중 투른은 대령 및 전쟁평의관의 계급에 올랐다. 결혼을 통해 그는 특히 크로아티아 크라이나 등에서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황제는 헝가리에서 튀르크와의 전투에서 그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그에게 보헤미아 중부의 칼슈타인 성의 부르크그라프(burgraviate) 직위를 부여했다. 그는 보헤미아 북동부에서 1605년 벨리시 영지(이친 마을 근처)를 매입했는데, 이는 그를 보헤미아 귀족 계급(Páni, "lords")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투른은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에 합류하여 귀족들의 원수(marshal)로 활동했다.

1617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대공 슈티리아의 페르디난트는 노령에 자녀가 없는 황제 마티아스의 합스부르크 계승자이자 보헤미아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보헤미아 귀족들은 그에게 고(故) 황제 루돌프 2세의 칙령(폐하의 서한)에 명시된 종교 자유를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투른은 페르디난트에게 보헤미아인들이 비판적으로 답변한 서명자 중 한 명이었다.

2. 2. 군사 경력 및 귀족 지위 획득

1592년부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황제군에서 복무했으며, 이 기간 동안 대령 및 전쟁평의관의 지위에 올랐다.[1] 결혼을 통해 크로아티아 군사 국경지대 등에서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1] 황제는 헝가리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하여, 보헤미아 중부의 칼슈타인 성 부르크그라비아트(성 관리자 직위)를 수여했다.[1] 1605년에는 보헤미아 북동부의 벨리시 영지(지친 마을 근처)를 매입하여 보헤미아 귀족 계급의 일원이 되었다.[1]

3. 보헤미아 반란의 지도자

1617년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위에 올랐으나, 기존에 보장되었던 종교적 자유를 존중하지 않고 귀족들의 요구를 무시하면서 갈등이 고조되었다.[6] 이에 반발한 보헤미아 귀족들은 1618년 프라하 성에서 투른 백작의 주도 하에 프라하의 창밖 투척 사건을 일으켜 페르디난트 2세의 가톨릭 대표들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3] 이 사건은 보헤미아 반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사건 이후 투른은 보헤미아 귀족들(보헤미아 의회)에 의해 선출된 30명의 개신교 신앙 수호자 중 한 명이 되었으며,[4] 1618년 5월 23일 반란이 공식화되자 보헤미아 반란군의 총사령관직을 맡았다.[7][4] 그는 페르디난트 2세를 폐위시키고 개신교도인 프리드리히 5세를 새로운 보헤미아 국왕으로 추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투른이 이끈 반란군의 군사 활동은 전반적으로 비효율적이었고,[8][5] 결국 1620년 백산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맞이했다. 전투 패배 후 투른은 다른 반란 지도자들과 함께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 추방당하고 보헤미아 내 영지를 모두 잃게 되었다.

3. 1.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 (1618)

1617년 보헤미아 왕위에 오른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귀족들의 종교적, 정치적 요구를 들어줄 의향이 없었다.[6] 이러한 강압적인 태도는 귀족들의 불만을 키웠고, 결국 1618년 프라하 성에서 격렬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투른 백작은 이 사건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페르디난트 2세의 가톨릭 대표였던 야로슬라프 보르지타(Jaroslav Bořita of Martinice)와 빌렘 슬라바타(Vilém Slavata of Chlum), 그리고 그들의 서기 필립 파브리시우스(Philip Fabricius)를 왕궁 창밖으로 던져버렸다.[3] 이 사건은 제2차 프라하의 창밖 투척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헤미아 귀족들의 저항 의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창밖 투척 사건 이후, 투른은 보헤미아 귀족들(보헤미아 의회)에 의해 선출된 30명의 개신교 신앙 수호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4] 1618년 5월 23일, 보헤미아 개신교도들이 공식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투른은 보헤미아 반란군의 총사령관직을 맡게 되었다.[7][4]

3. 2. 반란 주도 및 군사 활동

1617년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보헤미아 귀족들의 종교적, 정치적 요구를 수용할 의사가 없었다. 이러한 강경한 태도는 귀족들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결국 1618년 프라하 성에서 투른 백작이 주도하는 사건으로 폭발했다. 투른은 페르디난트 2세의 가톨릭 강경파 대표였던 야로슬라프 보르지타(Jaroslav Bořita of Martinice)와 빌렘 슬라바타(Vilém Slavata of Chlum), 그리고 그들의 서기 필립 파브리시우스(Philip Fabricius)를 성의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 프라하의 창밖 투척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다.[3][6]

이 사건 직후, 투른은 보헤미아 의회(귀족들)에 의해 선출된 30명의 개신교 신앙 수호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1618년 5월 23일 보헤미아 개신교도들의 반란이 공식적으로 시작되면서, 투른은 반란군의 총사령관직을 맡게 되었다.[4][7] 그의 군사 지휘는 여러 차례 비효율적인 작전을 보였으나, 때로는 그의 통제를 벗어난 작전 계획의 결함이 역설적으로 황제군의 신속한 반란 진압 시도를 방해하기도 했다.[5][8] 투른은 페르디난트 2세를 보헤미아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프리드리히 5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운명은 1620년 백산 전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투른은 이 전투에서 연대장으로 참전했지만, 보헤미아군은 가톨릭 동맹군에게 참패했다. 전투 패배의 결과로, 투른은 다른 반란 지도자들과 개신교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 추방당했으며, 보헤미아 내의 모든 영지를 몰수당했다.

4. 망명과 이후 활동

백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 의해 추방되어 보헤미아에 있던 영지를 모두 잃었다. 그러나 망명 생활 중에도 투른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4. 1. 30년 전쟁 참여

망명 후에도 투른은 30년 전쟁에서 외교관이자 군인으로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는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1626년 그는 실레시아에서 일부 군대를 지휘했으며, 이후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 군대에서 중장으로 복무했다. 스웨덴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그의 외아들 프란티셰크 베르나르트 백작은 폴란드 원정 중 병을 얻어 1628년 사망했다.

1633년 10월 11일, 투른은 8,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작센의 슈타이나우 안 데어 오데르 근처에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맞섰으나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그는 곧 석방되어 가족의 새로운 영지가 된 에스토니아의 파르누로 은퇴했다. 투른 백작은 그곳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탈린 성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상속인은 미성년 손자인 파르누의 하인리히 폰 투른-발사시나 백작(1628년 ~ 1656년)이었는데, 그는 프란티셰크 베르나르트(1592년 ~ 1628년)와 마그달레나 폰 투른-발사시나(하르데크 가문 출신)의 아들이었다.

투른 백작은 독일어로 "방어 논문(Defensionsschriftde)"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저술했다. 이 책은 1618년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 등에서 자신의 역할을 종교적 신념에 따른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옹호 행위였다고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스웨덴에서 출판되었다.

4. 2. 가족과 죽음

투른의 외아들인 프란티셰크 베르나르트 백작은 스웨덴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중, 폴란드 원정에서 병을 얻어 1628년 사망했다.

1633년 10월 11일, 투른과 그의 8,000명의 군대는 실레시아의 슈타이나우 안 데어 오데르 근처에서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맞서 싸우다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그는 곧 풀려나 가족의 새로운 영지가 있는 에스토니아의 파르누로 은퇴했다.

투른 백작은 1640년 파르누에서 사망했으며, 탈린 성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상속자는 프란티셰크 베르나르트(1592~1628)와 마그달레나(하르데크 가문 출신)의 아들인 미성년 손자 하인리히 백작(1628~1656)이었다.

5. 저술 활동

투른 백작은 독일어로 Defensionsschrift|데펜지온스슈리프트deu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저술했다. 이 책은 1618년 사건에서 자신의 행동이 종교적 신념을 의식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책자는 스웨덴에서 출판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Exil.cz: Červený lev ve zlatém poli https://cesky.radio.[...] Czech Radio 2023-04-17
[2] 서적 Matrikel öfwer Swea rikes ridderskap och adel https://books.google[...] 1754
[3] 서적 The Thirty Years War Pimlico
[4] 서적 Europe's Tragedy: a history of the Thirty Years War Allen Lane
[5] 서적 ibid
[6] 서적 The Thirty Years War Pimlico
[7] 서적 Europe's Tragedy: a history of the Thirty Years War Allen Lane
[8] 서적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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