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2세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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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돌프 2세는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이자 스페인의 마리아의 아들로, 1576년부터 1612년 사망할 때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예수회의 교육을 받으며 가톨릭 신앙을 지켰고, 1583년 프라하로 수도를 옮겼다. 통치 기간 동안 정신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헝가리, 보헤미아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루돌프 2세는 1609년 칙서를 통해 보헤미아의 신앙 자유를 인정했으나, 이는 30년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예술과 과학을 후원하여 프라하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주세페 아르침볼도,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 등을 후원했다. 루돌프 2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6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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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2세 (신성 로마 황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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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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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신성 로마 황제 (더 보기...) |
통치 기간 | 1576년 10월 12일 – 1612년 1월 20일 |
즉위식 | 1576년 11월 1일, 레겐스부르크 |
즉위식 유형 | 선포 |
선임자 | 막시밀리안 2세 |
후임자 | 마티아스 |
왕가 | 합스부르크 |
아버지 | 막시밀리안 2세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
자녀 | 돈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우스트리아 (사생아) |
자녀 링크 | #Personal life |
추가 정보 | 더 보기... |
출생일 | 1552년 7월 18일 |
출생지 | 빈, 오스트리아 대공국,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612년 1월 20일 (향년 59세) |
사망지 | 프라하, 보헤미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 |
매장지 | 성 비투스 대성당 |
종교 | 가톨릭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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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 | |
자녀 | 돈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우스트리아 (사생아) |
통치 칭호 | |
신성 로마 황제 | 1576년 - 1612년 |
로마왕 | 1575년 - 1612년 |
보헤미아 국왕 | 1575년 - 1611년 |
헝가리 국왕 | 1572년 - 1608년 |
크로아티아 국왕 | 1572년 - 1608년 |
오스트리아 대공 | 해당사항 없음 (정보 없음) |
티롤 백작 | 해당사항 없음 (정보 없음) |
2. 생애
루돌프는 1552년 7월 18일 빈에서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그의 아내이자 사촌인 스페인의 마리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딸이었다. 그는 11세부터 19세까지(1563년~1571년) 8년간 외삼촌인 스페인 국왕 필리프 2세의 마드리드 궁정에서 동생 에르네스트와 함께 교육받으며 성장했다.[3][33] 이 시기 스페인 궁정은 예수회의 영향 아래 엄격한 가톨릭 분위기였으며, 군주와 신하 간의 구별이 명확했다. 루돌프는 이러한 환경에 익숙해졌고, 이는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33] 빈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는 아들의 냉담하고 경직된 스페인식 태도를 우려했으나, 스페인 출신인 어머니는 이를 예의 바르고 세련된 것으로 보았다.[4][34]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살아있는 동안, 루돌프는 헝가리 국왕(1572년), 보헤미아 국왕(1575년), 그리고 레겐스부르크에서 로마 왕(1575년)으로 선출되었다.[5] 1576년 10월 12일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를 계승하고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다.[5] 이는 동생 마티아스와의 필연적인 권력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초기에는 종교적 관용 정책을 유지하려 했으나,[34] 점차 가톨릭 신앙에 기반한 정책으로 기울었다.
루돌프 2세는 평생 내성적이고 비밀스러우며 은둔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는 여행이나 국가의 일상적인 업무 참여를 꺼렸다.[4] 대신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점성술과 연금술 같은 신비주의 학문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말, 시계, 희귀품 수집과 예술 후원에 몰두했다. 1583년에는 제국의 수도를 빈에서 프라하로 옮겼는데,[9] 이는 프라하를 북방 마니에리즘 예술과 과학의 중심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뒤러나 브뤼헐과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수집하고,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거, 한스 폰 아헨, 주세페 아르침볼도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또한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 등을 궁정으로 초빙하여 과학 발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루돌프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주기적인 우울증을 앓았으며, 이는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져 현실 정치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36] 그는 여러 차례 외교적 혼담이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情婦)인 카타리나 스트라다(Catherina Strada)를 비롯한 여러 여성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들을 두었다. 그중 장남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폰 외스터라이히(Don Julius Caesar d'Austria)는 정신 질환을 앓았고, 1608년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잔혹한 살인 사건을 저질러 종신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사망했다.[6] 루돌프 2세의 개인적인 고립과 정신적 불안정은 그의 통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593년부터 1606년까지 이어진 오스만 제국과의 장기 투르크 전쟁은 그의 통치 기반을 크게 흔들었다.[1] 케레츠테스 전투에서의 참패 등으로 군사적 무능함이 드러났고, 전쟁 장기화로 제국 내, 특히 헝가리 지역의 피폐가 극심해졌다. 이는 보츠카이가 주도한 반란(Bocskai uprising)으로 이어졌다. 합스부르크 가문 내부에서도 루돌프 2세의 자질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결국 1605년 가문의 압력으로 동생 마티아스에게 헝가리 문제 해결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종결 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마티아스는 1606년 헝가리 반란 세력과 비엔나 평화 조약을, 오스만 제국과는 지트바토로크 조약을 체결하며 헝가리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루돌프 2세는 마티아스가 맺은 조약들에 불만을 품었으나, 이미 실권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티아스는 형의 실정을 명분으로 반기를 들었고, 루돌프 2세는 보헤미아로 피신하여 개신교 귀족들의 지지를 얻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군사력 확보에 실패하자 마티아스와 표면적으로 화해하며 1608년 헝가리 왕위, 오스트리아 대공위, 모라비아 변경백위를 넘겨주었다. 이후에도 루돌프 2세는 마티아스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보헤미아 귀족들과의 약속 이행을 미루자 귀족들은 하인리히 마티아스 폰 투른을 중심으로 반발했다. 결국 루돌프 2세는 1609년 보헤미아에서의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칙서(Letter of Majesty)를 발표하며 굴복했다.[14] 그러나 보헤미아 귀족들과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1611년 보헤미아 귀족들이 마티아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마티아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루돌프 2세를 프라하 성에 유폐시키고 보헤미아 왕위마저 차지했다.
모든 실권을 잃은 루돌프 2세는 1612년 1월 20일 프라하 성에서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동생 마티아스가 신성 로마 황제위를 계승했다. 루돌프 2세가 보헤미아에 허용한 신앙의 자유 칙서는 이후 해석과 이행을 둘러싼 갈등의 불씨가 되었고, 이는 1618년 프라하의 창밖 투척 사건과 삼십년 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15]
2. 1. 예수회의 개신교 탄압
루돌프 2세는 개인적으로 극단적인 가톨릭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그를 정점으로 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권력은 중부 유럽의 가톨릭화를 위해 프라하와 체코 왕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예수회 교육을 받은 급진 가톨릭교도들을 중요한 행정 기구에 배치하여 재가톨릭화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1598년부터 160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처음에는 보헤미아 지역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모라비아 지역까지 예수회 교도들이 핵심적인 자리들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형제 교단을 비롯한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을 주도했다.[42]3. 동생 마티아스와의 관계
동생 마티아스와의 관계는 합스부르크가 역사상 최악이었다고 평가받는다. 루돌프 2세가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로부터 많은 영지를 물려받으면서 동생 마티아스와의 권력 다툼은 필연적이었다. 마티아스는 종교 문제 등에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는 형 루돌프 2세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동시에 형의 예술적 재능 등에는 열등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인 관계 악화의 계기는 1577년 마티아스가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에 중재자로 파견되었으나 실패한 사건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펠리페 2세가 레판토 해전 비용 등으로 군자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해 일어난 반란을 진압 중이었는데, 루돌프 2세는 마티아스를 이곳에 파견했다. 그러나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루돌프 2세는 마티아스의 빈 귀환을 허락하지 않았고, 마티아스는 루돌프 2세가 프라하로 수도를 옮긴 1583년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1593년부터 시작된 오스만 제국과의 오랜 전쟁(장기 전쟁)은 루돌프 2세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마티아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케레츠테스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이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 내에서도 루돌프 2세의 자질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 결국 가문 전체의 압박으로 루돌프 2세는 마티아스에게 전쟁 종결의 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마티아스는 1606년 지트바토로크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마무리 지었고, 비록 굴욕적인 조약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헝가리인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헝가리에서의 지지를 바탕으로 마티아스는 계속된 실정을 거듭하던 루돌프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1608년 헝가리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루돌프 2세는 결국 마티아스에게 헝가리 왕위, 모라비아 변경백 지위, 오스트리아 대공 지위를 넘겨주며 표면적으로 화해했다.
이후 거의 후계자로 확정된 마티아스에게 대항하기 위해 루돌프 2세는 더 많은 군대와 세금이 필요했고, 자신의 사촌인 레오폴트 5세 대공을 또 다른 후계자로 내세우며 마티아스를 견제하려 했다. 그는 파사우에 비밀리에 용병대를 모집하여 마티아스를 공격하려 했으나, 재정난으로 임금이 체불되자 용병대는 통제를 벗어나 보헤미아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루돌프 2세가 이전에 보헤미아 귀족들에게 약속했던 종교 자유 칙서를 무효화하려는 시도로 여겨져 보헤미아인들의 큰 분노를 샀다.
보헤미아인들은 마티아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마티아스는 군대를 이끌고 보헤미아로 진군하여 파사우 용병대를 진압했다. 이로써 루돌프 2세는 1611년 보헤미아 왕위마저 마티아스에게 빼앗기고 프라하 성에 유폐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의 지위만 유지한 채 감금 상태에 있던 루돌프 2세는 1년 뒤인 1612년 1월 20일 서거했고, 마티아스가 황제 자리를 포함한 모든 군주위를 계승했다.
4. 문화적 업적
정치적 업적과는 별개로, 루돌프 2세는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문화 예술 및 학문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예술과 건축에 많은 관심을 가져 당대의 뛰어난 예술품들을 수집했으며, 예술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프라하를 르네상스 시대 유럽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로 만들었다.
루돌프 2세의 후원으로 주세페 아르침볼도, 바르톨로메우스 스프랑거, 한스 폰 아헨, 아드리안 드 브리스, 루이랑트 사베리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궁정이 있는 프라하로 모여들었다. 특히 아르침볼도는 루돌프 2세의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과일, 채소, 꽃 등을 조합하여 황제의 모습을 그린 독특한 초상화 '베르툼누스로 분장한 루돌프 2세'를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예술가들의 활동을 통해 프라하는 국제적 마니에리즘 양식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고, 이는 1600년 전후 유럽 각국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루돌프 2세는 보헤미아 유리 공예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도 기여했다.
과학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튀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를 궁정으로 초빙하여 후원했다.[4] 케플러는 루돌프 2세 사후, 황제의 이름을 딴 천체 관측 분석서인 ''루돌프 표''를 출판하기도 했다. 식물학자 샤를 드 레클뤼즈 역시 루돌프 2세의 궁정을 드나들었다.
루돌프 2세는 르네상스 시대에 주류 과학 분야로 여겨졌던 점성술과 연금술에도 깊이 매료되었다.[4] 그는 평생 현자의 돌을 찾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에드워드 켈리, 존 디, 마이클 센디보기우스[25] 등 유럽의 유명한 연금술사들을 프라하로 초청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직접 개인 연금술 실험실에서 실험을 수행하기도 했다.[4] 이러한 루돌프 2세의 관심은 프라하에 신비로운 이미지를 더했으며, 프라하 성 내의 황금 소로는 오늘날 연금술사들의 거리로 알려져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었다. 그의 유대인에 대한 관용 정책과 더불어, 그의 치세 동안 프라하의 골렘 전설이 확립되기도 했다.[12]
루돌프 2세는 프라하 성 북쪽 날개에 1597년부터 1605년까지[35] 방대한 양의 예술품, 과학 기구, 희귀한 물건들을 수집하여 전시하는 공간, 이른바 '쿤스트카머(Kunstkammer, 예술 및 경이로운 물건들의 방)'를 조성했다. 하지만 그가 평생에 걸쳐 모은 수집품들의 대부분은 1648년 30년 전쟁 중 프라하가 스웨덴군에 함락되었을 때 전리품으로 약탈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5. 유산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루돌프 2세의 통치 시기 정치적 재난의 원인을 예술, 숨겨진 과학, 그리고 다른 개인적인 관심사에 대한 그의 몰두 때문이라고 비난해왔다.[1]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주류였던 점성술과 연금술과 같은 숨겨진 지식에 매료되었고, 말, 시계, 희귀한 물건 수집, 예술 후원 등 다양한 개인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4] 하지만 최근 역사가들은 그의 예술과 숨겨진 과학에 대한 후원을 르네상스의 중요한 성과로 재평가하며, 그의 정치적 실패는 당시 종교적, 정치적 혼란 속에서 통합된 기독교 제국을 건설하려던 시도가 좌절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1]
루돌프 2세는 예술과 건축에 많은 관심을 가져 당대의 뛰어난 예술품들을 수집하고 주세페 아르침볼도를 궁정 화가로 고용하기도 했다.[1] 과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튀코 브라헤와 요하네스 케플러 같은 저명한 학자들을 궁정으로 초빙했으며, 수많은 연금술사들을 곁에 두었다.[1] 이러한 후원 덕분에 프라하는 당대 유럽 문화와 과학의 중심지 중 하나로 부상했으며, 오늘날에도 프라하에는 그의 영향력이 남긴 유적들이 존재한다.[1] 그러나 그가 애써 수집한 예술품 대부분은 1648년 프라하가 스웨덴군에 함락되었을 때 전리품으로 약탈당하는 비운을 겪었다.[1]
종교 정책 면에서 루돌프 2세는 스페인의 엄격한 가톨릭 궁정에서 교육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티즘과 유대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4] 그의 통치 아래 제국의 관용 정책 덕분에 유대인 문화는 번성했고 인구도 증가했다.[12] 그는 가톨릭 의식 참여를 꺼렸으며, 임종 시에도 마지막 성사를 거부했다.[1] 교황청이 반종교개혁을 추진하려 하자, 루돌프 2세는 특정 종교 편에 서기보다는 중립을 지키려 했고, 공의회주의자, 관용론자, 인문주의자들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1] 하지만 이러한 모호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정치적 혼란을 심화시키고 제국 내 종교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1]
루돌프 2세 통치 기간 동안 심화된 종교적, 정치적 갈등은 그의 사후 30년 전쟁(1618–1648) 발발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1][15] 특히 1609년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루돌프 칙서는 발표되었으나, 이후 이를 둘러싼 정책적 미흡함과 갈등은 계속되었고, 이는 결국 1618년 프라하의 창밖 투척 사건으로 이어져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1][15]
6. 자녀
루돌프 2세는 엘리자베스 1세처럼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4],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 특히 정부(情婦)인 카타리나 스트라다(it, 또는 cs, de로도 알려짐, 약 1568년~1629년)와의 사이에서 6명의 사생아(아들 3명, 딸 3명)를 두었다.[37][38][39][40]
루돌프 2세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생몰년 | 주요 내용 |
---|---|---|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우스트리아(de) | 1584/1586년경 ~ 1609년 | 장남. 정신질환으로 감금 중 사망.[6][37] |
마티아스 다우스트리아(de) | ? ~ 1619년 | 그라츠의 예수회에서 양육됨.[37] |
카를로스 다우스트리아(de) | ? ~ 1650년 | 장교로 복무하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37] |
카롤리나 다우스트리아(de) | 1591년 ~ 1662년 | 캉트크루아 공주(fr). 자녀 중 유일하게 결혼. 샤를 4세 드 로렌의 두 번째 부인.[37] |
도로테아 다우스트리아(de, es) | ? ~ ? | 마드리드에서 수녀로 생활.[37] |
알즈베타 다우스트리아(de, 엘리자베트) | ? ~ ? | 빈에서 수녀로 생활.[37] |
장남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버지로부터 교육과 함께 정치적, 사회적 명성을 얻을 기회를 부여받았다.[6] 1607년, 루돌프는 로젠베르크가(House of Rosenberg)의 마지막 후손인 페터 보크 폰 로젠베르크(cs)로부터 사들인 보헤미아의 체스키 크룸로프 성으로 율리우스를 보냈다. 그러나 1608년, 율리우스는 그곳에서 지역 이발사의 딸을 잔혹하게 학대하고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는 끔찍한 사건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루돌프 2세는 아들의 행위를 강하게 비난하며 종신형에 처해야 한다고 언급했다.[6] 율리우스는 이후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며 목욕을 거부하고 불결하게 생활하다가, 1609년 파열된 궤양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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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mocný syn Rudolfa II. brutálně vražd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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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umlovské monstrum? Levoboček Rudolfa II. zohavil tělo své milen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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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 českokrumlovském zámku zemřel šílený vrah Julius Caesar, syn Rudolfa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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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 Rudolfa II. vrahem. V císařské rodině se odehrálo děsivé 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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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합스부르크가문의 대보헤미아 정책과 보헤미아 귀족들의 대응책
한국서양사학회/서양사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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