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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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상여는 중국 전국 시대 조나라의 정치가로, 외교적 수완과 군사적 능력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화씨지벽을 완벽하게 조나라로 가져온 일화로 유명하며, 진나라와의 민지 회맹에서 조나라의 위상을 드높였다. 또한, 염파와의 갈등을 극복하고 굳건한 우정을 다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상여는 장평대전에서 조괄의 무능함을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조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마천은 그의 지혜와 용기를 높이 평가했으며, 현대에도 외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인물로 회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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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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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중국어 간체 | 蔺相如 |
중국어 번체 | 藺相如 |
병음 | Lìn Xiāngrú |
생몰년도 | 기원전 329년경 ~ 기원전 259년경 |
활동 | |
활동 분야 | 조나라의 대신 |
주요 업적 | 화씨벽 보호 민지회담에서의 공헌 염파와의 화해 |
관련 고사 | |
주요 고사 | 완벽귀조 부형청죄 |
관련 인물 | 조혜문왕, 염파 |
2. 생애
린샹루는 오늘날 산시성 류린현 멍먼진 자오 우링왕 시대에 태어났다.[2] 그는 뛰어난 지성과 능력을 바탕으로 조나라의 관료 조직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사기』「염파·인상여 열전」에 따르면, 본래 조 혜문왕의 환관목현의 식객이었다.
인상여는 조나라 출신으로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오늘날 전해지는 인상여의 행적 대부분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에 일화 형식으로 전해진다.
2. 1. 초기 생애와 목현(繆賢)과의 인연
인상여는 조나라 출신으로, 초기 생애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오늘날 전해지는 인상여의 행적 대부분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에 일화 형식으로 전해진다.인상여는 본래 조나라의 환자령(宦者令) 목현(繆賢)의 사인(舍人)이었다. 한번은 목현이 죄를 지어 조 혜문왕의 노여움을 샀다. 목현은 처벌을 피해 연나라로 망명하려 하였는데, 당시 그의 사인이었던 인상여가 목현을 말리며 연나라로 망명하려는 이유를 물었다. 목현은 "전에 연왕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연왕이 내 손을 잡고 친구가 되자고 했으니 내가 가면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건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연나라는 약소국인데 비해 조나라는 강국입니다. 연왕이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 건 당신이 강국인 조나라의 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어서였기 때문입니다. 총애를 잃고 노여움까지 산 당신이 연에 가봤자 연나라 왕은 숨겨주기는커녕 당신을 잡아 돌려보낼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목현은 그의 정연한 말에 놀랐는데, 인상여는 뒤이어서 "차라리 스스로 웃통을 벗고 형틀을 짊어진 채 죄를 청하면 운좋게 용서받을 길도 있을 것입니다."라 권했고, 인상여의 말을 따랐던 목현은 과연 혜문왕에게 용서받고 신뢰를 되찾을 수 있었다.[15]
2. 2. 완벽(完璧) 고사와 화씨지벽(和氏之璧)
소양왕이 초나라에서 얻은 보물 화씨지벽을 탐내 15개 성(城)과의 교환을 제안하자, 조나라 혜문왕은 진나라의 속임수를 우려했지만, 거절할 경우 침략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어 고민했다. 이때 인상여는 자신이 화씨지벽을 가지고 진나라에 가서 협상하겠다고 자청하며, 성을 받지 못하면 반드시 화씨지벽을 온전하게 조나라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완벽귀조(完璧歸趙)")[16]진나라에서 소양왕이 약속을 지킬 의사가 없음을 간파한 인상여는 "실은 그 벽옥에 하자(瑕疵)가 있으니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화씨지벽을 돌려받았다. 그리고는 기둥에 기대어 선 채 관이 벗겨질 정도로 머리카락이 모두 곤두선 노한 모습으로 소양왕을 협박하며, 화씨지벽을 깨뜨리겠다고 위협했다.[16],[5]
결국 인상여는 기지를 발휘하여 화씨지벽을 되찾아 몰래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5일 후, 인상여는 소양왕에게 "진나라 왕께서 성을 내주실 뜻이 없는 듯하여 이미 조로 돌려보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소양왕은 인상여를 죽여봐야 소용없음을 깨닫고 그를 후대하여 돌려보냈다.[16]
이 일화는 "완벽(完璧)"이라는 고사성어로 남았으며, 중국어로는 "완벽귀조(完璧歸趙)"라고도 부른다. 또한, 인상여가 소양왕에게 화를 내며 머리카락을 곤두세웠던 당시의 일화에서 "노발충관(怒髪衝冠)" · "노발충천(怒髪衝天)"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하였다.[16]

2. 3. 민지(澠池)의 회맹(會盟)
기원전 279년, 진 소양왕은 조 혜문왕에게 민지(澠池)에서 우호를 위한 연회를 열자고 제안했다.[17] 혜문왕은 진나라를 믿을 수 없어 두려워하며 참석을 꺼렸으나, 인상여는 장군 염파와 함께 "왕께서 가지 않으시면 조나라가 약하고 겁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17] 결국 혜문왕은 민지에서 소양왕과 만나기로 결정했고, 인상여가 왕을 수행했다.[17]민지에서 열린 연회에서 소양왕은 혜문왕에게 "조왕께서는 음악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으니 슬(瑟)[7]을 연주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고, 혜문왕은 어쩔 수 없이 한 곡을 연주했다.[9] 그러자 진나라 어사(御史)는 "진왕께서 조왕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조왕에게 거문고를 연주하도록 명했다."고 기록했다.[17] 이를 본 인상여는 "조왕께서는 진왕께서 진나라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진왕에게 분부(盆缻, 질장구)[8]를 드려 함께 즐기고자 하셨습니다."라며 소양왕에게 분부 연주를 요청했다.[17]
소양왕이 거절하자, 인상여는 "대왕과 저 사이는 불과 다섯 걸음 안이니, 제 목의 피로 대왕을 적실 수 있습니다."라고 위협했다.[17] 소양왕의 좌우에서 인상여를 죽이려 했으나, 인상여가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지르자 모두 물러났다. 결국 소양왕은 마지못해 분부를 두드렸다.[17] 인상여는 조나라 어사에게 "진왕이 조왕을 위하여 분부를 두드렸다."라고 기록하게 했다.[17]
이후 진나라 신하들이 혜문왕에게 "진왕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15성을 바치시오."라고 요구하자,[9] 인상여는 "조왕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진나라 수도인) 함양을 바치시오."라고 응수했다.[17]
결국 소양왕은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조나라를 제압할 수 없었다. 조나라 측에서도 병사를 배치하여 진나라에 대비했기에 진나라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17]
2. 4. 염파(廉頗)와의 문경지교(刎頸之交)
민지 회맹 이후 인상여는 그 공을 인정받아 상경(上卿)의 지위에 올랐다.[18] 그러나 염파는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운 자신이 말만 잘하는 인상여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공개적으로 인상여를 모욕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인상여는 염파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항상 그를 피해 다녔다. 인상여의 사인(舍人)들은 염파와 같은 반열에 있는 인상여가 그를 두려워하여 피한다고 생각하고 크게 실망하여 떠나겠다고 말했다.그러자 인상여는 진나라 왕도 겁내지 않은 자신이 염파를 두려워하겠느냐고 반문하며,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두 호랑이가 싸우면 모두 살아남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국가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원한은 뒤로 미루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개인적인 감정보다 국가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인상여의 대인배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크게 뉘우치고, 웃옷을 벗고 가시나무를 짊어진 채 인상여의 집으로 찾아가 사죄했다. ("육단부형(肉袒負荊)" 또는 "부형청죄(負荊請罪)")[19] 그는 "이 어리석은 자가 장군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 몰랐습니다."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19] 인상여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장군이 계시기에 조나라가 있는 것입니다"라며 흔쾌히 염파를 용서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신뢰하며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우정을 나누었다.[19] 이 이야기는 "문경지교(刎頸之交)" 또는 "문경지우(刎頸之友)"라는 고사성어로 남아, 굳은 우정을 상징하게 되었다. 진나라는 인상여와 염파가 건재한 동안에는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했다. 이는 두 사람이 정치와 군사 양면에서 국가를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의 굳건한 유대감이 외세의 침략을 막는 데 큰 힘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2. 5. 제나라 정벌
기원전 271년, 인상여는 조나라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평읍(平邑)까지 진격했다.[20]2. 6. 장평대전(長平大戰)과 말년
기원전 260년, 장평대전에서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 효성왕은 염파에게 진나라에 맞서게 했다. 진나라 군대가 여러 차례 조나라 군대를 격파했으나, 염파는 보루를 굳게 지키며 응전하지 않았다. 이에 진나라는 첩자를 보내 "진나라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 장수가 되는 것뿐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렸다.[21]효성왕은 이 소문을 믿고 조괄을 염파 대신 장수로 삼으려 했다. 이때 병을 앓고 있던 인상여는 효성왕에게 "왕께서 명성만으로 조괄을 쓰려고 하시는데, 이는 아교로 슬(瑟, 거문고)의 발을 붙이고 슬을 연주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그저 그 부친이 전한 책만 읽었을 뿐 합변(合変, 임기응변)을 모릅니다."라고 간언했다.[21] (여기서 교주고슬(膠柱鼓瑟)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12]
그러나 효성왕은 인상여의 간언을 듣지 않고 조괄을 장수로 임명했다. 조괄은 적의 도발에 넘어가 진나라 군을 공격했으나, 이는 백기의 계략이었다. 조나라 군은 대패했고, 조괄은 전사했으며, 조나라는 45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21] 이 패배로 조나라는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3]
인상여는 장평대전 당시 이미 깊은 병을 앓고 있었기에, 이 전투 전후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평가
사마천은 『사기』 염파·인상여 열전에서 인상여를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했다.[13] 사마천은 "죽음을 알면 반드시 용감해진다'고 하지만,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죽음을 처리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는 인상여가 화씨지벽을 빼앗아 기둥 옆에서 노려보며 진나라 왕과 그 좌우를 꾸짖었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용기를 냈다고 평가했다. 또한, 인상여가 한 번 기세를 발휘하면 적국에까지 미칠 정도인데도 염파에게 양보하여 그 이름은 태산보다 무거워졌다고 하며, 이러한 지혜와 용기를 사용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칭찬했다.[13]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인상여의 이야기는 국가 간의 외교에서 지혜와 용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인상여의 애국심과 헌신, 그리고 불의에 굴하지 않는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외교적 지혜를 본받아야 할 점으로 강조한다.
4. 대중 문화
코에이의 게임 《삼국지 11》에 특별 등장인물로 등장한다.[4]
만화 《킹덤》에서는 '린 쇼 조(藺相如)'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염파, 조사와 함께 "조나라 3대 천(天)" 중 한 명으로 묘사된다. 그는 전쟁의 천재로 여겨졌지만 일찍 사망했으며, 그의 부하 대부분은 슬픔에 잠겨 자살 공격을 감행했지만, 단 두 명만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수년 후, 남은 두 명은 죽임을 당한 후 그들의 주군을 따랐다.
드라마 《미월전》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탄양이 특별 출연하여 "환벽(還璧)" 사건을 묘사했다.[14]
참조
[1]
설명
[2]
웹사이트
柳林概述-中国·柳林政府门户网
http://www.liulin.go[...]
2022-02-09
[3]
인용
[4]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an Dynasty II, translated by Burton Watson
Columbia University Press
[5]
문서
怒髪衝冠、「怒髪天を衝く」の語源
[6]
문서
布衣之交、「布衣の交わり」の語源
[7]
문서
しつ、弦楽器の一種
[8]
문서
素焼きの器。瓦盆
[9]
문서
설명
[10]
문서
格は卿・大夫・士で卿が上、位は上・中・下:上卿は最上
[11]
문서
これも本心から罪を認めて詫び、自ら進んで罰を受け入れるという意味の「肉袒負荊」「負荊」の語源となった
[12]
문서
故事「琴柱に膠す」(琴柱を固定すると必ずしも弾く度に[[調律]]しなくてもよくなる代わりに[[転調]]できなくなることから、融通が利かないことの喩え)の由来
[13]
문서
廉頗・藺相如列伝 第二十一 太史公曰く にある
[14]
삼국지
三国志 (歴史書)|三国志』魏書25高堂隆伝
[15]
사기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6]
사기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7]
사기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8]
사기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19]
사기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20]
사기
《사기》 권43 조세가
[21]
사기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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