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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군만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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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군만민론은 율령제에 기원하며, 일본에서 요시다 쇼인과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주장한 사상이다. 막부 말기 토막파 지사들에게 지지받았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조야의 사상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메이지 정부는 신분제 개혁을 단행하고 피차별 부락민을 평등화하는 해방령을 발포했다. 일군만민론은 번벌 체제 타도와 데모크라시 도입의 명분으로, 신분적 특권뿐 아니라 재벌 등 경제적 권력에도 대항하는 이념으로 작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는 공개적으로 주장되지 않았으며, 일본국 헌법에서 화족 제도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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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군만민론

2. 일본에서의 전개

일본에서 일군만민론은 율령제에 기원을 두며, 요시다 쇼인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이 주장하였다.[1]

2. 1. 메이지 유신 이전

막부 말기에는 토막지사들에게 널리 지지받은 사상이었다.[1]

2. 2.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일군만민론은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사상적 기반으로 깊게 자리 잡았으며, 천황의 권위는 강화되고 황실 이외의 신분 특권은 점차 축소되었다.[1] 메이지 정부는 화족 제도를 만들고 무사 신분을 사족으로 편입하는 등 초기에는 이전의 신분 제도를 일부 계승했다. 그러나 폐번치현, 징병령, 치록 처분 등의 정책을 통해 특권 신분 개혁을 추진했고, 에도 시대까지 차별받던 피차별 부락민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해방령도 발표했다.

사족 제도는 빠르게 유명무실해졌고, 귀족원에 의존하며 상당한 특권을 누리던 화족 제도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특권 신분 제도가 세습되는 것에 의문을 품고 화족 작위를 사퇴하려 '사작표(辞爵表)'를 제출했으나, 천황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삼고초려 끝에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후, 장남 이타가키 호코타로는 작위를 반납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일대화족론'에서 자신이 토막을 추진한 목적이 국민의 자유를 회복하고 일군만민을 실현하는 데 있었다고 밝혔다.[2][3]

2. 3. 쇼와 시대

일군만민론은 번벌 체제 타도와 데모크라시 도입의 대의로 내걸렸으며, 신분적 특권뿐만 아니라 재벌 등의 경제적 권력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로서도 기능했다. 쇼와 전기에는 재야의 지식층뿐만 아니라 청년 장교나 혁신 관료가 일군만민론의 지지 세력으로 등장했다. 2·26 사건에서 반란군으로 여겨지는 세력에 의한 '궐기취의서'는 일군만민론에 기초하여 기안된 것으로, 황국의 "팔굉일우" 완성에 대한 장애로서 "만민의 생성화육"을 억압하고 있는 특권 계급을 탄핵하고 있다.[4][5]

2. 4. 일본국 헌법 시행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일본이 점령된 이후에는 일군만민론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일본국 헌법에서 화족 제도가 폐지되어 천황·황족 이외의 제도적으로 고정된 신분은 소멸되었다.

참조

[1] 서적 一代華族論
[2] 논문 日本型平等思想の成立における宗教的要素 : 「一君万民」と「天皇赤子」をめぐって https://www.agulin.a[...] 青山学院宗教センター 2019-03-25
[3] 간행물 一代華族論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
[4] 웹사이트 二・二六事件/蹶起趣意書 https://kotobank.jp/[...]
[5] 서적 二・二六事件 中公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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