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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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번벌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에서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번 출신 인사들이 관직을 독점하며 형성한 정치 세력을 의미한다. 이들은 폐번치현 이후 정부 요직을 차지하며 번벌 정부를 수립했다. 주요 인물로는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있다. 번벌은 의회 정치와 자유민권운동의 비판을 받았으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는 타파의 대상이 되었다. 육군과 해군, 경찰, 사법부 등 각 분야에서 번벌의 영향력이 나타났으며, 긍정적, 부정적 측면 모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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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번현 삼치제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시행된 지방 행정 체제로, 막부 직할지를 부와 현으로 나누고 번을 존속시키다가 1871년 폐번치현으로 종료되었다.
번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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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주요 인물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오쿠마 시게노부 (大隈重信) 사이고 다카모리 (西郷隆盛) 기도 다카요시 (木戸孝允)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
배경 | |
형성 시기 | 메이지 유신 이후 |
구성 | 조슈 번 (長州藩) 사쓰마 번 (薩摩藩) 도사 번 (土佐藩) 히젠 번 (肥前藩) 출신자 중심 |
영향력 | 메이지 정부 주요 요직 장악 막강한 정치 권력 행사 군부 및 관료 조직 지배 |
특징 | |
권력 기반 | 번벌 출신 군인과 관료 |
정치 성향 | 보수적 성향 관료주의적 경향 |
비판 | 과두제 정치 권력 독점 족벌주의 부패 및 특권 |
영향 | |
일본 정치 | 메이지 시대 정치의 주요 특징 형성 정치적 폐단 야기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의 배경 |
군부 | 군부 내 영향력 강화 군국주의화에 영향 이후 일본 제국주의 팽창의 원인 중 하나 |
기타 | |
관련 사건 | 세이난 전쟁 |
2. 메이지 유신과 번벌의 형성
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대 국가 수립의 기점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히젠 번 출신 인사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출신 번 | 주요 인물 |
---|---|
궁정 귀족 | 이와쿠라 도모미 (1825-1883), 사이온지 킨모치 (1849-1940), 산죠 사네토미 (1837-1891) |
사쓰마 번 | 고다이 토모아쓰 (1836-1885), 구로다 기요타카 (1840-1900), 마쓰카타 마사요시 (1835-1924), 모리 아리노리 (1847-1889), 오쿠보 도시미치 (1830-1878), 오야마 이와오 (1842-1916), 사이고 다카모리 (1827-1877), 사이고 쓰구미치 (1843-1902), 테라시마 무네노리 (1836-1893) |
조슈 번 | 이노우에 가오루 (1835-1915), 이토 히로부미 (1841-1909), 키도 다카요시 (1833-1877), 오무라 마스지로 (1824-1869), 다카스기 신사쿠 (1837-1867), 야마가타 아리토모 (1838-1922), 가쓰라 다로 (1848-1913) |
도사 번 | 고토 쇼지로 (1838-1897), 이타가키 타이스케 (1837-1919), 사카모토 료마 (1836-1867) |
히젠 번 | 에토 심페이 (1834-1874), 오키 타카토 (1832-1899), 오쿠마 시게노부 (1838-1922), 소에지마 타네오미 (1828-1905) |
이들은 번벌을 형성하여 메이지 정부의 요직을 차지했다. 번벌은 의회 정치에 대한 저항 세력이었고, 자유민권운동의 비판 대상이 되었으며,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는 “타파벌족·옹호헌정”의 구호가 나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번벌이 정부와 군의 각 부서 사이에 "유기적인 연계"를 형성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2. 1. 폐번치현과 번벌 정부 수립
1871년의 폐번치현 이후 새롭게 정비된 관제에서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히젠 번 출신 인사들이 참의와 각 성의 경 등 요직을 독점하면서 번벌 정부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과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의 주요 인물들이었다.번벌 구성원이 각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각을 번벌정부 또는 번벌내각이라고 한다.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도사와 히젠 출신자는 소수에 그쳤고, 사쓰마와 조슈 출신자가 압도적으로 대규모의 번벌(삿쵸벌)을 형성했다. 다만, 실무에 능한 인재가 많았던 히젠은 일시적으로 참의 8명 중 4명을 차지하는 등 실무 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지만, 번벌로서 정국을 주도하지는 못했다.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물러나고 세이난 전쟁에서 전사했으며, 오쿠보 도시미치가 기오이자카의 변에서 암살되면서 사쓰마 번벌은 기세를 잃었다. 특히 최고 지도자층은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조슈 번벌의 독점 체제가 되었다.
2. 2.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주도권 경쟁
사이고 다카모리의 하야와 세이난 전쟁에서의 전사, 기오이자카의 변에서의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등으로 사쓰마 번은 세력이 약화되었다.[1] 특히 최고 지도자층은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조슈 번 출신이 독점하게 되었다.[1] 사쓰마 번은 중견층을 중심으로 이에 대항할 만한 세력을 유지했지만, 막말 시기에 비해 열세에 놓였다.[1]3. 번벌 내각과 주요 인물
藩閥(번벌)은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에서 각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력을 의미하며, 주로 사쓰마 번, 조슈 번 출신이 주도했다. 이들은 의회 정치에 대한 저항 세력이었고, 자유민권운동의 비판 대상이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는 "타파벌족·옹호헌정"이 구호로 제시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 이후 새롭게 정비된 관제에서 사쓰마, 조슈, 도사 번, 히젠 번 출신자가 참의와 각 성의 경의 대부분을 독점했기 때문에 번벌정부(藩閥政府)가 형성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하야와 세이난 전쟁에서의 전사, 기오이자카의 변에서의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로 사쓰마 번벌은 기세가 약해졌고,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조슈 번벌의 독점 체제가 되었다.
1885년 내각 제도가 생긴 후에는 사쓰마계 중견층이 성장하여 실추된 것을 만회하기도 했고, 사쓰마와 조슈 출신 다수가 내각총리대신, 국무대신, 원로가 되었다. 번벌은 민본주의 또는 일군만민론적인 이상론과는 양립할 수 없는 인맥 중심의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당시부터 비판적으로 다루어졌다.
한편, 정부와 군의 각 부서 사이의 "유기적인 연계"가 번벌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지적하는 견해도 있으며, 번벌의 소멸로 인한 긴장감 저하가 정당의 부패를 초래하고 관료와 군부에 영합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3. 1. 번벌 출신 내각총리대신
출신 번 | 이름 | 역대 내각총리대신 |
---|---|---|
조슈 번 | 이토 히로부미 | 1, 5, 7, 10대 |
사쓰마 번 | 구로다 기요타카 | 2대 |
조슈 번 | 야마가타 아리토모 | 3, 9대 |
사쓰마 번 | 마쓰카타 마사요시 | 4, 6대 |
히젠 번 | 오쿠마 시게노부 | 8, 17대 |
조슈 번 | 가쓰라 다로 | 11, 13, 15대 |
사쓰마 번 | 야마모토 곤베에 | 16, 22대 |
조슈 번 | 데라우치 마사타케 | 18대 |
조슈 번 | 다나카 기이치 | 26대 |
3. 2. 번벌 출신 각료 경험자
메이지 시대 내각(제1차 이토 내각부터 제2차 사이온지 내각까지)의 각료 경험자는 총 79명이었다.[1] 출신 번별로 보면 사쓰마 번 14명, 조슈 번 14명, 도사 번 9명, 사가 번(히젠 번) 5명이었다. 그 외 출신자 중 동일 번 출신자가 2명인 경우는 오와리 번, 도요오카 번 등 몇몇 예가 있지만, 3명이 되는 경우는 구마모토 번[2] 및 도쿠시마 번이 구 번주 핫토리 시게나가를 포함해서[3] 간신히 도달하는 정도였다. 또한, 그 외 출신자라고 해도 이토 미요지, 가네코 겐타로, 스에마쓰 겐초 등 명백히 번벌 정치가의 측근인 사람도 많았다.3. 3.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를 제외한 원로 9명은 모두 조슈 번 또는 사쓰마 번 출신이었다.[1]이름 | 출신 번 |
---|---|
이토 히로부미 | 조슈 번 |
구로다 기요타카 | 사쓰마 번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조슈 번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사쓰마 번 |
이노우에 가오루 | 조슈 번 |
사이고 쓰구미치 | 사쓰마 번 |
오야마 이와오 | 사쓰마 번 |
가쓰라 다로 | 조슈 번 |
야마다 아키요시 | 조슈 번 |
4. 각 분야에서의 번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군대, 경찰, 사법부에는 출신 지역에 따른 파벌, 즉 번벌이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사쓰마의 해군, 조슈의 육군”이라고 불렸다.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서 파벌 출신자가 고관을 독점하는 일은 없어졌다. 육군삼장관을 역임한 조슈 출신은 테라이 토시카즈 육군대장 한 명뿐이었고, 해군 현직에 취임한 사쓰마 출신도 자이부 푱 대장, 야마모토 에이스케 대장, 노무라 나오쿠니 대장 등 소수에 그쳤다.[4]
4. 1. 육군과 해군
"사쓰마의 해군, 조슈의 육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해군은 야마모토 곤베에, 도고 헤이하치로, 사이고 츠구미치를 대표로 하는 사쓰마 번 출신이, 육군은 노기 마레스케, 고다마 겐타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를 대표로 하는 조슈 번 출신이 요직을 장악했다고 알려져 있다.[4] 그러나 러일 전쟁에서 만주군 총사령관은 사쓰마 출신의 오야마 이와오가 맡았고, 총참모장에 조슈 출신의 고다마 겐타로가 임명되는 등, 파벌 간의 균형을 고려하기도 했다.육군에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력이 커져 데라우치 마사타케, 다나카 기이치 등이 야마가타 파벌을 형성하여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다이쇼 시대 후기에 야마가타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육군 내 파벌은 통제파와 황도파로 나뉘게 되었다.[4]
해군에서는 출신지 파벌보다 계벌이 중요시되는 경향이 있었으며, 해외 유학 경험, 해군병학교에서의 석차와 함께, 부인의 혈연이 출세의 조건이라고 알려졌다. 이후 해군 내 파벌에는 조약파와 함대파가 생겨났다.
4. 2. 경찰
일본 경찰의 요직은 사쓰마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1874년부터 1901년까지 경시총감 14명 중 12명이 사쓰마 번 출신이었다.[5] 육군이 헌병 제도를 창설한 이유 중 하나는 경시청의 사쓰마 번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6] 그러나 헌병을 설립할 때 경시청은 헌병부를 설치하고, 세이난 전쟁에 동원된 경찰관을 헌병으로 전출시키는 등 경찰관에서 헌병으로의 전출 인사를 실시했다.[7] 그래서 육군의 헌병에도 세이난 전쟁에서 경시대로 싸운 사쓰마 번 출신자가 많이 들어갔다.메이지 시대 역대 경시총감은 다음과 같다.
순서 | 이름 | 출신 번 |
---|---|---|
1 | 가와지 도시요시(川路利良) | 사쓰마 번 |
2 | 오야마 이와오(大山巌) | 사쓰마 번 |
3 | 카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 사쓰마 번 |
4 | 오사코 사다키요(大迫貞清) | 사쓰마 번 |
5 | 미시마 미치쓰네(三島通庸) | 사쓰마 번 |
6 | 오리타 헤이나이(折田平内) | 사쓰마 번 |
7 | 타나카 미치아키(田中光顕) | 도사 번 |
8 | 소노다 야스카타(園田安賢) | 사쓰마 번 |
9 | 야마다 타메아키(山田為暄) | 사쓰마 번 |
10 | 소노다 야스카타(園田安賢) | 사쓰마 번 |
11 | 니시야마 시스미(西山志澄) | 도사 번 |
12 | 오우라 케무타케(大浦兼武) | 사쓰마 번 |
13 | 안라쿠 케미치(安楽兼道) | 사쓰마 번 |
14 | 오우라 케무타케(大浦兼武) | 사쓰마 번 |
15 | 안류 쓰나유키(安立綱之) | 사쓰마 번 |
16 | 세키 키요히데(関清英) | 사가 번 |
17 | 안라쿠 케미치(安楽兼道) | 사쓰마 번 |
18 | 카메이 에이사부로(亀井英三郎) | 구마모토 번 |
19 | 안라쿠 케미치(安楽兼道) | 사쓰마 번 |
20 | 가와카미 친하루(川上親晴) | 사쓰마 번 |
21 | 안라쿠 케미치(安楽兼道) | 사쓰마 번 |
4. 3. 사법부
메이지 시대의 사법부는 사쓰마(薩摩), 조슈(長州), 도사(土佐), 히젠(肥前) 출신, 이른바 "사쵸도히(薩長土肥)"라 불리는 번벌의 영향력이 강했다.[8] 사법성 간부의 경우, 사법경(司法卿)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顕義)와 사법대보(司法大輔) 이와무라 미치토시(岩村通俊) 이하 국장·과장급 12명 중 6명이 사쵸도히 출신으로 절반을 차지했다.[8]대심원(大審院) 판사 21명 중 10명, 전국 7곳의 항소재판소(控訴裁判所) 판사 59명 중 17명, 1심 재판소 판사 186명 중 41명이 사쵸도히 출신이었다.[8]
항소재판소(控訴裁判所) 소장 및 검사장급 14명 중에서는 7명이 사쵸도히 출신이었으며, 특히 대심원(大審院)과 도쿄 및 오사카 항소재판소는 번벌이 장악하고 있었다.[8] 1심 재판소 소장 및 상석 검사(検事)의 경우, 전국 46곳 중 각각 15명씩 번벌 출신이 차지했으며, 특히 검사의 경우 도쿄, 요코하마, 오사카, 교토 등 주요 재판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8]
대심원(大審院), 항소재판소(控訴裁判所), 1심 재판소를 합친 전국 판사 총 266명 중 번벌 출신은 68명으로 약 26%였지만, 이들이 사법부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었다.[8]
5. 번벌 정치에 대한 비판과 평가
번벌(藩閥)은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 폐번치현으로 새롭게 정비된 관제에서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출신자가 참의와 각 성의 경 대부분을 독점하면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각료 대부분을 차지하여 '''번벌정부'''(藩閥政府) 또는 '''번벌내각'''(藩閥内閣)이라고 불렸다. 특히 사쓰마와 조슈 출신자가 압도적인 대규모 벌족(삿쵸벌)을 형성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하야와 세이난 전쟁에서의 전사, 기오이자카의 변에서의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로 사쓰마벌은 기세가 약해졌고,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조슈벌의 독점 체제가 되었다. 1885년 내각 제도가 생긴 후에는 사쓰마계 중견층이 성장하여 실추된 것을 만회하기도 했고, 사쓰마와 조슈 출신 다수가 내각총리대신, 국무대신, 원로가 되었다.
번벌 정치는 인맥 중심의 시스템으로, 자유민권운동의 비판 대상이 되었고,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는 "타파벌족·옹호헌정"이 구호가 될 정도로 비판받았다.[3]
5. 1. 번벌 정치의 긍정적 측면 (야마모토 시치헤이 등의 견해)
야마모토 시치헤이 등은 번벌이 정부와 군의 각 부서 사이에 유기적인 연계를 형성했다고 지적한다. 번벌의 소멸로 인해 이러한 긴장감이 저하되어 정당의 부패를 초래하고 관료와 군부에 영합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다이쇼 이후 시험이나 육성 기관에서 채용된 관료와 군인이 부서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직할 행정의 폐해가 심해지고 국가의 방침이 정해지지 않아 표류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5. 2. 번벌 정치의 부정적 측면
번벌은 의회 정치에 대한 저항 세력이었고, 민본주의 또는 일군만민론적인 이상론과는 양립할 수 없는 인맥 중심의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당시부터 비판적으로 다루어졌다.[3] 자유민권운동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는 “타파벌족·옹호헌정”이 구호가 되었다.[3]한편, 번벌의 소멸로 인한 긴장감 저하가 정당의 부패를 초래하고 관료와 군부에 영합하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4] 이러한 입장에서는 다이쇼 이후 시험이나 육성 기관에서 채용된 관료와 군인이 부서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직할 행정의 폐해가 심해지고 국가의 방침이 정해지지 않아 표류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4]
6. 번벌의 후대에 대한 영향
야마구치현에서 자민당의 힘은 장주파의 잔재라고 여겨진다.[9]
호사카 마사야스는 기시 노부스케와 아베 신조를 장주형 정치가였다고 평가하며, 그 특징으로 천황관을 들었다. 호사카 마사야스에 따르면 기시는 "황국사관과 천황신권설의 헌법을 몸에 익혔지만, 실제로는 천황기관설을 철저히 따랐고", 아베는 "천황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일반적인 우익과는 달랐지만, 그렇다고 상징천황제에서 민주주의를 추구한 것도 아니었다"고 평가하며, 이들을 친미 우익이자 ""국수""주의자로 묘사하였다.[10]
7. 주요 인물 목록 (영어 위키백과 참고)
출신 번 | 인물 |
---|---|
구게 | 이와쿠라 도모미, 사이온지 긴모치, 산조 사네토미 |
사쓰마 번 | 고다이 도모아쓰, 구로다 기요타카, 마쓰카타 마사요시, 모리 아리노리, 오쿠보 도시미치, 오야마 이와오, 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쓰구미치, 데라시마 무네노리 |
조슈 번 | 이노우에 가오루, 이토 히로부미, 기도 다카요시, 오무라 마스지로, 다카스기 신사쿠,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
도사 번 | 고토 쇼지로, 이타가키 다이스케, 사카모토 료마 |
히젠 번 | 에토 신페이, 오키 다카토, 오쿠마 시게노부, 소에지마 다네오미 |
기타 | 하야시 다다스, 이노우에 고와시, 가쓰 가이슈, 요코이 쇼난, 유리 기미마사, 와타나베 구니타케, 스에마쓰 겐초 |
참조
[1]
웹사이트
明治六十大臣:逸事奇談
https://dl.ndl.go.jp[...]
[2]
인물
山田信道、井上毅、清浦奎吾
[3]
인물
芳川顕正、松岡康毅
[4]
텍스트
[5]
서적
士族と士族意識―近代日本を興せるもの・亡ぼすもの
春秋社
[6]
서적
警視庁史 明治編
警視庁史編さん委員会
1959
[7]
서적
日本近代国家の成立と警察
校倉書房
[8]
간행물
法制史研究
法制史学会
2002
[9]
뉴스
世襲の県になった山口、戦後も続く長州閥 「明治維新」の精神どこへ - 衆議院議員総選挙(衆院選) [衆参補欠選挙2023] [山口県]
https://www.asahi.co[...]
朝日新聞デジタル
[10]
웹사이트
《戦後政治の闇》アメリカには逆らえない…安倍晋三の祖父が「天皇に嫌悪感を抱かれていた」ワケ
https://gendai.media[...]
週刊現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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