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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독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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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기독교단은 1941년 33개 개신교 교파가 통합되어 설립된 일본의 개신교 연합체이다. 일본 제국 정부의 요청 또는 압력과 메이지 시대부터의 교파 통합 운동의 결과로 설립되었으며, 설립 당시 국민의례를 따르고 일본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등 전시 체제에 협력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전쟁 협력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고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을 펼쳤다. 현재는 신앙 고백, 사회적 역할, 내부 갈등 등 다양한 과제를 안고 있으며, 일본 최대의 개신교 연합체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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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테 마사무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다이묘이며 센다이 번의 초대 번주로, '독안룡'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오슈 지역을 장악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복속, 임진왜란과 오사카 전투에 참전, 센다이 번 건설과 스페인과의 통상 추진, 문화 예술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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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기독교단
기본 정보
일본기독교단
일본기독교단
종류개신교 연합교단
국가일본
설립일1941년 6월 24일
위치도쿄도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통계 (2017년 12월 31일 기준)
교회 수1,719개
목사 수2,035명
교인 수118,965명
조직
총회 의장 목사石橋秀雄 (이시바시 히데오)
서기장菅原力 (스가와라 치카라)
교단 사무소 소재지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니시와세다 2-3-18
역사
설립 배경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 정부의 종교 통제 정책에 따른 개신교 교단 통합
주요 사건전시 체제 협력
전후 전쟁 책임 고백
신학적 특징
강조점성서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사회 참여
주요 신학개혁주의
복음주의
자유주의
국제 관계
주요 협력 기관세계 교회 협의회 (WCC)
아시아 기독교 협의회 (CCA)
해외 교단 및 선교 단체
관련 단체
주요 산하 기관신학교
사회복지 시설
출판사
기타
특징일본 최대의 개신교 교단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가진 교회가 연합
사회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2. 역사

1937년 중일 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 제국 정부는 종교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1939년 종교단체법을 제정하여 종교 단체를 통제하려는 목적을 분명히 했다.[2] 1940년 황기 2600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개신교 교파 통합이 결의되었는데, 이는 일본기독교단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2]

개신교 교파 통합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압력뿐만 아니라, 메이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개신교 내부의 통합 운동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개신교 교파들에게는 (구) 일본기독교회가 독립적인 교단을 구성하고 나머지 교회들이 통합하여 별도의 교단을 구성하는 방안과, 33개 교파 전체가 통합하여 하나의 교단을 구성하는 방안,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결국 33개 교파 통합이라는 후자의 방안이 선택되었는데, 이는 전시 체제하에서 정부의 요청, 혹은 압력과 개신교 교파 통합 운동의 전통적인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2]

1941년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후지미초 교회에서 일본기독교단 창립 총회가 열렸다. 총회는 기미가요 제창, 궁성요배, 황군 병사들을 위한 묵도, 황국신민의 맹세 등 국민의례로 시작되었다. 총회에서는 "우리는 기독교 신자임과 동시에 일본 신민으로서 황국에 충성을 다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맹세하였다.[3][4] 당시 일본기독교회 대회 의장이었던 도미타 미츠루 목사가 교단의 대표인 통리자(統理者)로 임명되었으며, 통리자는 종교단체법에 따른 권한을 부여받고 칙임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3][4]

도미타 미츠루 목사


통합된 33개 개신교 교파는 각 교파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11개의 부(部)로 조직되었다.

소속 교파
제1부(구) 일본기독교회
제2부일본메소디스트교회, 일본미보교회, 일본성원교회
제3부일본조합기독교회, 일본기독동포교회, 일본복음교회, 기독우회, 기독교회
제4부일본침례기독교단
제5부일본복음루터교회
제6부일본성교회(홀리니스 계열)
제7부일본전도기독교단(일본예수그리스도교회, 일본협동그리스도교회, 기독교전도교회(현 시온기독교단), 기독교전도대, 기독교부흥교회, 일본전도기독교단, 일본오순절교회, 일본성결교회)
제8부일본성화기독교단(일본동맹기독교협회, 일본자유감리교회, 일본나사렛교회(동부-서부), 세계선교단)
제9부기요메교회(홀리니스 계열), 일본자유기독교회
제10부일본독립교회동맹(웨슬리안감리교회, 보급복음교회, 일본일치기독교단, 도쿄기독교단, 일본하나님의교회, 일본성서교회(현 일본성서공회), 일본성령교회, 활수교회)
제11부구세단 (현 구세군)



설립 당시 일본기독교단은 독자적인 신앙고백 없이 간략한 문서인 "교리의 대요"를 기반으로 설립 승인을 받았다.

1942년 1월 11일, 도미타 미츠루 통리는 이세신궁에 참배하여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교단 설립을 보고하였다.[5]

홀리니스 탄압 사건은 1942년 6월 26일, 홀리니스 계열 교직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된 사건이다. 일본기독교단은 "경솔한 행동을 삼가고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라", "황국민으로서의 자각에 서서 충성을 다하라"라고 지시했다.[6] 교단의 주요 인사들은 홀리니스 계열 검거를 환영하는 태도를 보였다.[7]

도미타 미츠루 통리는 사건의 원인으로 교단의 부제(部制) 문제를 지적하며, "현 시국에 부제를 유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했다.[8][9][10] 1942년 11월 열린 제1회 교단 총회에서 부제 해소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이후 부제는 폐지되고 지역 단위의 교구 제도로 전환되었다.

1943년 4월 문부성에서 교단에 통지를 보냈고, 도미타 통리는 홀리니스 계열 목사들에게 자진 사임하지 않으면 신분을 박탈하겠다는 뜻을 전하며 사임을 권고했다.[13][14]

1942년 11월 26일, 도미타 미츠루 통리는 쇼와 천황을 알현하였다. 도미타 통리는 이를 두고 "오늘과 같은 영광은 종교계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해 종교 보국의 정신으로 총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15]

1943년 11월 25일과 26일 열린 일본기독교단 제2회 총회에서는 군용기 헌납 운동이 결의되었다. "날아라 일본기독교단호"라는 슬로건 아래 헌금을 모아 일본 해군에 "보국 3338 제1 일본기독교단호", "보국 3339 제2 일본기독교단호"(모두 99식 함상폭격기)를,[16][17] 일본 육군에 "애국 3331 제1 일본기독교단호", "애국 3332 제2 일본기독교단호"(기종 미상)를 헌납하였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일본기독교단은 새로운 체제 구축과 전시 체제 청산을 시도했다. 쇼와 천황옥음방송을 수용하고 국가 재건을 위한 기도를 올렸으며, 전국의 목회자들에게 "황국 재건"을 강조하며 충성 서약을 촉구하는 지령을 내렸다.[19][20]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교단의 전쟁 책임을 묻지 않기로 결정했고, 미국 교회 대표단 역시 교단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며 책임 추궁을 하지 않았다.[21] 1947년 1월 9일 북미 에큐메니칼 8개 교단이 일본을 방문해 일본기독교단을 지원하는 위원회를 조직하고 자금을 지원했으며, 전후에도 전시 간부가 교단에 지원된 자금을 배분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22]

종교단체법이 폐지된 이후, 일본기독교단은 통리자제를 폐지하고 회의제로 전환하며 새로운 체제를 마련했다. 하지만 1941년 교단 통합 자체를 반대하던 교파들은 교단을 떠났으며, 남아있는 교파들 사이에서는 교파 문제와 신앙 고백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었다. 1954년, 일본기독교단은 신앙 고백을 제정했지만, 신앙 고백의 구속력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교파적 전통을 중시했던 일부 교회들은 교단에서 이탈해 독립 교회를 설립했으며, 일본기독개혁파교회와 일본복음루터교회 등이 그 예이다.

1967년, 교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통칭 전쟁 책임 고백)을 발표하며 과거의 전쟁 협력을 반성했다. 그러나 교단 내에서도 이 고백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존재해 일부 지도자는 이를 교단의 신앙적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1948년, 교단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며 국제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교단 총회 의장이었던 고사키 미치오는 일본을 대표해 WCC 첫 총회에 참석했으며, 이후 일본기독교단은 전쟁 책임을 넘어 세계 교회와 협력하며 국제적 위상을 회복해 나갔다.[23][24][25]

1970년대 이후, 교단은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파와 교회 중심의 전통을 중시하는 교회파 간의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대립은 반박람회 투쟁과 같은 사건으로 심화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성찬 논쟁으로 이어졌다. 2010년, 교단은 처음으로 자유 성찬을 행한 목회자를 면직시키며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전후 일본기독교단은 다양한 내부 갈등과 외부 도전에 직면하면서도, 일본 최대의 개신교 연합체로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전쟁 책임, 신앙 고백, 교회 체제와 사회적 역할을 둘러싼 문제는 여전히 교단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2. 1. 일본기독교단 설립 배경 (1937-1941)

1937년 중일 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 제국 정부는 종교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1939년 종교단체법을 제정하여 종교 단체를 통제하려는 목적을 분명히 했다.[2]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40년 황기 2600년 기념행사를 계기로 개신교 교파 통합이 결의되었는데, 이는 일본기독교단 설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2]

개신교 교파 통합의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압력뿐만 아니라, 메이지 시대부터 이어져 온 개신교 내부의 통합 운동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개신교 교파들에게는 (구) 일본기독교회가 독립적인 교단을 구성하고 나머지 교회들이 통합하여 별도의 교단을 구성하는 방안과, 33개 교파 전체가 통합하여 하나의 교단을 구성하는 방안,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결국 33개 교파 통합이라는 후자의 방안이 선택되었는데, 이는 전시 체제하에서 정부의 요청, 혹은 압력과 개신교 교파 통합 운동의 전통적인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2]

1941년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후지미초 교회에서 일본기독교단 창립 총회가 열렸다. 총회는 기미가요 제창, 궁성요배, 황군 병사들을 위한 묵도, 황국신민의 맹세 등 국민의례로 시작되었다. 총회에서는 "우리는 기독교 신자임과 동시에 일본 신민으로서 황국에 충성을 다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맹세하였다.[3][4] 당시 일본기독교회 대회 의장이었던 도미타 미츠루 목사가 교단의 대표인 통리자(統理者)로 임명되었으며, 통리자는 종교단체법에 따른 권한을 부여받고 칙임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3][4]

통합된 33개 개신교 교파는 각 교파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아래의 11개의 부(部)로 조직되었다.

소속 교파
제1부(구) 일본기독교회
제2부일본메소디스트교회, 일본미보교회, 일본성원교회
제3부일본조합기독교회, 일본기독동포교회, 일본복음교회, 기독우회, 기독교회
제4부일본침례기독교단
제5부일본복음루터교회
제6부일본성교회(홀리니스 계열)
제7부일본전도기독교단(일본예수그리스도교회, 일본협동그리스도교회, 기독교전도교회(현 시온기독교단), 기독교전도대, 기독교부흥교회, 일본전도기독교단, 일본오순절교회, 일본성결교회)
제8부일본성화기독교단(일본동맹기독교협회, 일본자유감리교회, 일본나사렛교회(동부-서부), 세계선교단)
제9부기요메교회(홀리니스 계열), 일본자유기독교회
제10부일본독립교회동맹(웨슬리안감리교회, 보급복음교회, 일본일치기독교단, 도쿄기독교단, 일본하나님의교회, 일본성서교회(현 일본성서공회), 일본성령교회, 활수교회)
제11부구세단 (현 구세군)



설립 당시 일본기독교단은 독자적인 신앙고백 없이 간략한 문서인 "교리의 대요"를 기반으로 설립 승인을 받았다.

2. 2. 일본기독교단 창립과 전시체제 협력 (1941-1945)

1941년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후지미초 교회에서 일본기독교단 창립 총회가 열렸다. 총회는 기미가요 제창, 궁성요배, 황군 병사들을 위한 묵도, 황국신민의 맹세 등의 국민의례로 시작되었다.[3][4] 총회에서는 "우리는 기독교 신자임과 동시에 일본 신민으로서 황국에 충성을 다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고 맹세하였다. 당시 일본기독교회 대회 의장이었던 도미타 미츠루 목사가 교단의 대표인 통리자(統理者)로 임명되었으며, 통리자는 종교단체법에 따른 권한을 부여받고 칙임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1941년 설립 당시, 통합된 33개 개신교 교파는 각 교파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아래의 11부로 조직되었다.

구성 교파
제1부(구) 일본기독교회
제2부일본메소디스트교회, 일본미보교회, 일본성원교회
제3부일본조합기독교회, 일본기독동포교회, 일본복음교회, 기독우회, 기독교회
제4부일본침례기독교단
제5부일본복음루터교회
제6부일본성교회(홀리니스 계열)
제7부일본전도기독교단(일본예수그리스도교회, 일본협동그리스도교회, 기독교전도교회(현 시온기독교단), 기독교전도대, 기독교부흥교회, 일본전도기독교단, 일본오순절교회, 일본성결교회)
제8부일본성화기독교단(일본동맹기독교협회, 일본자유감리교회, 일본나사렛교회(동부-서부), 세계선교단)
제9부기요메교회(홀리니스 계열), 일본자유기독교회
제10부일본독립교회동맹(웨슬리안감리교회, 보급복음교회, 일본일치기독교단, 도쿄기독교단, 일본하나님의교회, 일본성서교회(현 일본성서공회), 일본성령교회, 활수교회)
제11부구세단 (현 구세군)



설립 당시 일본기독교단은 독자적인 신앙고백 없이, 간략한 문서인 "교리의 대요"를 기반으로 설립 승인을 받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고 성경에 증거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의 죄와 구원을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를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의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영생을 주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은혜에 의해 부름 받은 자들의 공동체로서, 예배를 지키고 성례를 행하며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존재이다.

1942년 1월 11일, 도미타 미츠루 통리는 이세신궁에 참배하여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교단 설립을 보고하였다.[5]

홀리니스 탄압 사건은 1942년 6월 26일, 홀리니스 계열 교직자들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된 사건이다. 일본기독교단 제6부(구 일본성교회) 소속 교직자 60명, 제9부(구 기요메 교회) 소속 교직자 62명이 체포되었다. 일본기독교단은 "경솔한 행동을 삼가고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라", "황국민으로서의 자각에 서서 충성을 다하라"라고 지시했다.[6] 교단의 주요 인사들은 홀리니스 계열 검거를 환영하는 태도를 보였다.[7]

도미타 미츠루 통리는 사건의 원인으로 교단의 부제(部制) 문제를 지적하며, "현 시국에 부제를 유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했다.[8][9][10] 1942년 11월 열린 제1회 교단 총회에서 부제 해소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이후 부제는 폐지되고 지역 단위의 교구 제도로 전환되었다.

1943년 4월 문부성에서 교단에 통지를 보냈고, 도미타 통리는 홀리니스 계열 목사들에게 자진 사임하지 않으면 신분을 박탈하겠다는 뜻을 전하며 사임을 권고했다.[13][14]

1942년 11월 26일, 도미타 미츠루 통리는 쇼와 천황을 알현하였다. 도미타 통리는 이를 두고 "오늘과 같은 영광은 종교계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해 종교 보국의 정신으로 총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15]

1943년 11월 25일과 26일 열린 일본기독교단 제2회 총회에서는 군용기 헌납 운동이 결의되었다. "날아라 일본기독교단호"라는 슬로건 아래 헌금을 모아 일본 해군에 "보국 3338 제1 일본기독교단호", "보국 3339 제2 일본기독교단호"(모두 99식 함상폭격기)를,[16][17] 일본 육군에 "애국 3331 제1 일본기독교단호", "애국 3332 제2 일본기독교단호"(기종 미상)를 헌납하였다.

2. 3. 전후 일본기독교단의 변화와 과제 (1945-현재)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일본기독교단은 새로운 체제 구축과 전시 체제 청산을 시도했다. 쇼와 천황옥음방송을 수용하고 국가 재건을 위한 기도를 올렸으며, 전국의 목회자들에게 "황국 재건"을 강조하며 충성 서약을 촉구하는 지령을 내렸다.[19][20]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교단의 전쟁 책임을 묻지 않기로 결정했고, 미국 교회 대표단 역시 교단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며 책임 추궁을 하지 않았다.[21] 1947년 1월 9일 북미 에큐메니칼 8개 교단이 일본을 방문해 일본기독교단을 지원하는 위원회를 조직하고 자금을 지원했으며, 전후에도 전시 간부가 교단에 지원된 자금을 배분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22]

종교단체법이 폐지된 이후, 일본기독교단은 통리자제를 폐지하고 회의제로 전환하며 새로운 체제를 마련했다. 하지만 1941년 교단 통합 자체를 반대하던 교파들은 교단을 떠났으며, 남아있는 교파들 사이에서는 교파 문제와 신앙 고백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었다. 1954년, 일본기독교단은 신앙 고백을 제정했지만, 신앙 고백의 구속력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교파적 전통을 중시했던 일부 교회들은 교단에서 이탈해 독립 교회를 설립했으며, 일본기독개혁파교회와 일본복음루터교회 등이 그 예이다.

1967년, 교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통칭 전쟁 책임 고백)을 발표하며 과거의 전쟁 협력을 반성했다. 그러나 교단 내에서도 이 고백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존재해 일부 지도자는 이를 교단의 신앙적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1948년, 교단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며 국제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교단 총회 의장이었던 고사키 미치오는 일본을 대표해 WCC 첫 총회에 참석했으며, 이후 일본기독교단은 전쟁 책임을 넘어 세계 교회와 협력하며 국제적 위상을 회복해 나갔다.[23][24][25]

1970년대 이후, 교단은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파와 교회 중심의 전통을 중시하는 교회파 간의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대립은 반박람회 투쟁과 같은 사건으로 심화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성찬 논쟁으로 이어졌다. 2010년, 교단은 처음으로 자유 성찬을 행한 목회자를 면직시키며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전후 일본기독교단은 다양한 내부 갈등과 외부 도전에 직면하면서도, 일본 최대의 개신교 연합체로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전쟁 책임, 신앙 고백, 교회 체제와 사회적 역할을 둘러싼 문제는 여전히 교단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3. 교단 조직 및 현황

일본기독교단은 1941년 33개 개신교 교파 통합으로 설립되었으며, 각 교파의 전통을 유지하고자 11개 부(部)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942년 홀리니스 계열 교직자 체포 사건[8][9][10] 이후 부제는 폐지되고 지역 단위 교구 제도로 전환되었다.[11] 이는 일본 정부가 부제를 "비일본적"이라며 폐지를 요구했기 때문이며, 도미타 미츠루 통리는 정부와 1~3년 내 부제 폐지 밀약을 맺은 상태였다.[11]

3. 1. 조직 구조

1941년 일본기독교단 설립 당시, 통합된 33개 개신교 교파의 전통을 유지하고자 11개의 부(部)로 조직되었다. 각 부는 기존 교파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구성 교파
제1부(구) 일본기독교회
제2부일본메소디스트교회, 일본미보교회, 일본성원교회
제3부일본조합기독교회, 일본기독동포교회, 일본복음교회, 기독우회, 기독교회
제4부일본침례기독교단
제5부일본복음루터교회
제6부일본성교회(홀리니스 계열)
제7부일본전도기독교단(일본예수그리스도교회, 일본협동그리스도교회, 기독교전도교회(현 시온기독교단), 기독교전도대, 기독교부흥교회, 일본전도기독교단, 일본오순절교회, 일본성결교회)
제8부일본성화기독교단(일본동맹기독교협회, 일본자유감리교회, 일본나사렛교회(동부-서부), 세계선교단)
제9부기요메교회(홀리니스 계열), 일본자유기독교회
제10부일본독립교회동맹(웨슬리안감리교회, 보급복음교회, 일본일치기독교단, 도쿄기독교단, 일본하나님의교회, 일본성서교회(현 일본성서공회), 일본성령교회, 활수교회)
제11부구세단 (현 구세군)



1942년, 교단 내 홀리니스 계열 교직자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도미타 미츠루 통리는 부제(部制)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부제 해소를 추진했다.[8][9][10] 같은 해 11월, 제1회 교단 총회에서 부제 폐지안이 통과되어 부제는 폐지되고 지역 단위의 교구 제도로 전환되었다.[11] 이는 일본 정부가 부제를 "비일본적"이라고 여겨 폐지를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미타 미츠루 통리는 1941년 정부와 1~3년 내 부제를 폐지하겠다는 밀약을 맺은 상태였다.[11]

4. 신학적 입장 및 논쟁

일본기독교단은 다양한 신학적 입장과 그로 인한 논쟁을 겪어왔다. 1954년 신앙 고백 제정 이후에도 신앙 고백의 구속력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었고, 일부 교회는 교단을 이탈하여 독립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1967년 전쟁 책임 고백을 발표하며 과거의 전쟁 협력을 반성했으나, 교단 내 의견 차이는 여전했다. 1990년대 성찬 참여 자격 논쟁, 1970년대 이후 사회적 역할 논쟁(사회파 vs 교회파) 등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2]

4. 1. 신앙고백

일본기독교단은 1941년 설립 당시 독자적인 신앙고백 없이, 간략한 문서인 "교리의 대요"를 기반으로 설립 승인을 받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고 성경에 증거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의 죄와 구원을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를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의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고, 영생을 주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은혜에 의해 부름 받은 자들의 공동체로서, 예배를 지키고 성례를 행하며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존재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 일본기독교단은 새로운 체제 구축과 전시 체제의 청산을 시도했다. 종교단체법이 폐지된 이후, 일본기독교단은 통리자제를 폐지하고 회의제로 전환하며 새로운 체제를 마련했다. 하지만 1941년 교단 통합 자체를 반대하던 교파들은 교단을 떠났으며, 남아있는 교파들 사이에서는 교파 문제와 신앙 고백을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었다. 1954년, 일본기독교단은 신앙 고백을 제정했지만, 신앙 고백의 구속력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교파적 전통을 중시했던 일부 교회들은 교단에서 이탈해 독립 교회를 설립했으며, 일본기독개혁파교회와 일본복음루터교회 등이 그 예이다.

1967년, 교단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통칭 전쟁 책임 고백)을 발표하며 과거의 전쟁 협력을 반성했다. 그러나 교단 내에서도 이 고백을 둘러싼 의견 차이가 존재해 일부 지도자는 이를 교단의 신앙적 정체성을 위협한다고 보았다.

4. 2. 주요 논쟁

일본기독교단은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하여 전쟁 책임 문제, 성찬 논쟁, 사회적 역할 논쟁 등 다양한 논쟁을 겪었다.
전쟁 책임 문제일본기독교단은 일본 제국 정부의 요청으로 설립되어 전시 체제에 협력했다.[2] 1967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통칭: 전쟁 책임 고백)을 발표하며 전쟁 협력을 반성했다.[23] 그러나 이 고백에 대한 교단 내 의견 차이도 존재했다.[24][25]
성찬 논쟁 (1990년대)1990년대에는 성찬 참여 자격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했다. 2010년에는 자유 성찬을 행한 목회자가 면직되면서 갈등이 표면화되기도 했다.
사회적 역할 논쟁 (사회파 vs 교회파)1970년대 이후, 교단은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파와 교회 중심의 전통을 중시하는 교회파 간의 갈등을 겪었다.[2] 이러한 대립은 반박람회 투쟁과 같은 사건으로 심화되었다.

5. 주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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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도미타 미츠루



도미타 미츠루는 1941년 일본기독교단의 초대 통리자(統理者)로 임명되어 1945년까지 재임했다.[3][4] 통리자는 종교단체법에 따라 칙임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1942년 1월 11일, 도미타 미츠루는 이세신궁을 참배하여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교단 설립을 보고했다.[5]

1942년 홀리니스 탄압 사건 당시, 일본기독교단은 "경솔한 행동을 삼가고 당분간 사태를 관망하라", "황국민으로서의 자각에 서서 충성을 다하라"는 입장을 밝혔다.[6] 도미타 미츠루는 사건의 원인이 교단의 부제(部制) 문제에 있다고 지적하며, 부제 해소를 통해 하나의 신앙으로 결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9][10]

1942년 11월 26일, 도미타 미츠루는 쇼와 천황을 알현했다. 그는 "대동아전쟁 완수를 위해 종교 보국의 정신으로 총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15]

1943년 일본기독교단은 군용기 헌납 운동을 전개하여 일본 해군에 "보국 3338 제1 일본기독교단호", "보국 3339 제2 일본기독교단호"(99식 함상폭격기)를,[16][17] 일본 육군에 "애국 3331 제1 일본기독교단호", "애국 3332 제2 일본기독교단호"(기종 미상)를 헌납했다.[18]

5. 2. 고사키 미치오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일본기독교단이 가입하면서, 당시 교단 총회 의장이었던 고사키 미치오는 일본을 대표해 WCC 첫 총회에 참석했다. 이후 일본기독교단은 전쟁 책임을 넘어 세계 교회와 협력하며 국제적 위상을 회복해 나갔다.[23][24][25]

6. 한국 교회와의 관계

일본기독교단은 일제강점기에 한국 교회를 식민 통치에 협력하도록 강요했다.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종교적인 탄압을 가했다.[19][20][21][22]

해방 이후, 일본기독교단은 전쟁 책임을 반성하고 한국 교회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 징용 문제 등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교회는 꾸준히 교류하며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23][24][25]

7. 평가 및 과제

일본기독교단은 일본 최대 개신교 교단으로서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으며, 과거사 문제와 교단 내 갈등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전쟁 수행에 협력한 점은 비판받고 있으며, 이에 대한 책임 문제와 다양한 신학적, 사회적 입장 차이로 인한 교단 내 갈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2]

7. 1. 긍정적 평가

일본기독교단은 일본 내 최대 개신교 교단으로 평가받으며, 2020년 기준으로 전국에 1,666개 교회, 161,103명의 신도, 1,931명의 현직 목회자를 보유하고 있다.[2]

전후 일본기독교단은 1967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기독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 (전쟁 책임 고백)을 발표하며 전쟁 협력을 반성했다.[24]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여 국제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23]

7. 2. 부정적 평가

일본 제국중일 전쟁제2차 세계 대전 수행에 협력한 점은 일본기독교단의 부정적 평가의 주된 이유 중 하나이다.[23][24][25] 이는 종교단체법에 따른 정부의 통제와 압력에 의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기독교단은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전후 일본기독교단은 전쟁 책임에 대한 고백을 발표하고,[19][20][21][22]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는 등 국제적인 화해와 협력을 추구했다. 그러나 교단 내부에서는 여전히 신학적, 사회적 입장 차이로 인한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하는 그룹과 교회 형성과 전도를 중시하는 그룹 간의 대립은 1970년대 이후 심화되었으며, 성찬 논쟁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7. 3. 과제

일본기독교단은 과거사 문제와 교단 내 갈등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과거사 문제 해결: 일본기독교단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전쟁 수행에 협력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책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2] 1967년 전쟁 책임 고백을 발표했지만, 여전히 논란이 남아있다.[23]
교단 내 갈등 해소: 일본기독교단은 다양한 교파가 통합되어 만들어진 연합 교회이기 때문에, 신학적, 사회적 입장이 다른 여러 그룹 간의 갈등이 존재한다.[2] 특히,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파'와 교회 형성과 전도를 중시하는 '교회파' 간의 갈등이 심각하며, 이는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현재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참조

[1] 서적 キリストこそ我が救い-日本伝道150年の歩み 日本基督教団日本伝道150年記念行事準備委員会
[2] 웹인용 統計 Statistics|日本基督教団公式サイト https://uccj.org/org[...] 日本基督教団 2021-11-11
[3] 간행물 信徒の友 2006-05
[4] 서적 戦時下キリスト教の抵抗と挫折 新教出版社
[5] 간행물 教団時報 日本基督教団 1942-01-15
[6] 기타 日本基督教団史資料集第二巻
[7] 서적 ホーリネス・バンドの軌跡 新教出版社
[8] 서적 キリスト者であることと日本人であること いのちのことば社
[9] 서적 戦時下キリスト教の抵抗と挫折 新教出版社
[10] 보고서 特高月報 1942-11
[11] 서적 戦時下キリスト教の抵抗と挫折 新教出版社
[12] 서적 日本における福音派の歴史 いのちのことば社
[13] 기타 日本基督教団史資料集第二巻
[14] 서적 日本キリスト教宣教史 いのちのことば社
[15] 간행물 教団時報 1942-12-15
[16] 웹사이트 Christian Press「終戦から75年 キリスト教と戦争 日本基督教団 軍用機献納献金運動」 https://christianpre[...]
[17] 웹사이트 「陸軍愛國號献納機調査報告」付録「海軍報国号リスト2」 https://www.ne.jp/as[...]
[18] 서적 主を畏れる-資料に見る戦時下の金城学院と基督教 キリスト新聞社
[19] 기타 日本基督教団資料集
[20] 서적 教会の戦争責任・戦後責任 いのちのことば社
[21] 서적 敬虔に威厳をもって いのちのことば社
[22] 서적 日本キリスト教宣教史 いのちのことば社
[23] 서적 教会の戦争責任・戦後責任 いのちのことば社
[24] 논문 <研究ノート>「小崎道雄所蔵資料」についての紹介と解説 https://cir.nii.ac.j[...] 同志社大学神学部
[25] 논문 ナタナエルの信仰-エキュメニカル運動における小崎道雄 https://ci.nii.ac.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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