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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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활약했다. 1583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나, 1591년 정철의 일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강원도도사로 춘천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회양 부사, 길주 목사를 거쳐 1597년 남원부사로 재직 중 남원성 전투에서 소서행장의 군대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때 충간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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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현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임현 |
| 원래 이름 | 任鉉 |
| 출생일 | 1547년 |
| 사망일 | 1597년 음력 8월 16일 (51세) |
| 본관 | 풍천(豊川) |
| 배우자 | 이씨 부인 |
| 학력 | 1583년 정시문과 급제 |
| 직책 | 승문원 정자 |
| 정당 | 무소속 |
| 종교 | 유교(성리학) |
| 자녀 | 임익지(아들) |
| 부모 | 임몽신(부), 야로 송씨 부인(모) |
| 친인척 | 신계봉(첫째사위) |
| 형제 | 임탁(형) |
| 정치 경력 | |
| 임기 | 1583년 ~ 1591년 |
| 군주 | 조선 선조 이연 |
2. 생애
임현은 중종 때 한성판윤, 공조판서를 역임한 임유겸의 친족으로, 재상 임권, 임추 형제는 그의 재종조부였다. 1583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1591년 정철의 일파로 몰려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597년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후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1706년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나아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2. 1. 관직 생활과 파직
1583년( 1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으나, 1591년( 24년) 서인 정철의 일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2]1592년(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서 춘천에서 왜군 400여 명을 잡아 죽였으며[2], 같은 해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1594년( 27)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1597년 4월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부임했다.[3][4]
1597년( 30) 8월 남원성이 수만의 왜군에게 포위되고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도망간 상황에서도 분전했으나, 결국 남원 전투에서 전사했다.
사후 의정부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으며, 1706년( 32)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2]
2. 2. 임진왜란과 활약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서 춘천에서 왜군 400여 명을 잡아 죽였으며[2], 같은 해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1594년(선조 27)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1597년 4월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부임하였다.[3][4]1597년(선조 30) 8월 남원성이 수만의 왜군에게 포위되고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도망간 상황에서도 분전했으나, 결국 남원 전투에서 전사했다.
2. 3. 남원성 전투와 최후
1597년(선조 30) 8월 남원성이 수만의 왜군에게 포위되고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도망간 상황에서도 분전했으나, 결국 전사했다.[2] 소서행장(小西行長) 군에 함락되자, 성을 되찾기 위해 남원 전투에서 싸웠으나 패하여 전사하였다.2. 4. 사후 추증
사후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1706년(숙종 32)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2] 나아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3. 가족 관계
참조
[1]
웹사이트
任鉉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
[2]
서적
임현 신도비명
[3]
서적
선조실록
[4]
서적
선조수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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