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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주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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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작가주의 영화는 영화 제작자가 예술적, 극적인 관점에서 영화를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감독이 최종 편집을 통제할 수 있을 때 해당된다. 195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에서 시작되어, 감독의 개인적인 창작을 강조하고, 상업적인 틀에서 벗어난 영화들을 지칭한다.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 영국의 프리 시네마, 미국의 뉴 할리우드 등 각 국가별로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으며, 한국에서도 1980년대 이후 작가주의 영화가 등장하여 사회 비판적 시각과 개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작가주의 영화는 상업 영화와 대비되며, 때로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영화 예술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기원

1950년대 말, 프랑스 영화계에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당시 주류 영화의 틀에 박힌 방식에 대한 반발로, 누벨 바그라는 새로운 영화 운동이 시작되었다.

누벨 바그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다.


  • 문학 작품을 각색하거나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시대극을 거부하고, 저예산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면서, 감독의 개인적인 창작 방식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 이야기 전개에 있어 기승전결 식의 짜여진 구성을 따르지 않았다.
  • 고급 문학보다는 삼류 소설을 각색하는 것을 선호했다.
  • 대중에게 인기 있는 스타 배우를 기용하지 않았다.
  • 프랑스 영화의 상징주의가 사라졌다.
  • 영화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 당대의 풍속을 반영했지만, 정치, 사회적인 내용과는 거리를 두었다.


누벨 바그 운동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등장했다.

  • 1953년 이후 프랑스 정부가 영화 제작 지원금을 제공하면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젊고 재능 있는 감독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 필름, 카메라, 녹음 장비 등 기술이 발달하면서 야외 촬영과 즉흥 연출, 여러 실험적인 요소들이 영화에 도입되었다.
  • 제작자들이 젊은 영화 작가들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흥행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작가주의 영화''라는 개념은 1950년대 프랑스에서 누벨바그의 프랑수아 트뤼포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존 포드와 같은 미국 영화감독들에게 영감을 받아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트뤼포는 1955년 ''영화 노트''지에 자크 베케르의 알리바바에 대한 글에서 "작가주의 정책"이라는 이론적 개념을 정의했다.[1] 이 이론은 영화를 특정 장르나 이야기에 속하는 독립된 작품이 아닌, 영화 제작자의 미학적 선택들이 이어진 것으로 보았다.[1] 결과적으로, ''작가''가 된다는 것은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모티프를 새기는 사람을 뜻했다.[1]

3. 정의

1950년대 말, 프랑스 영화계에는 기존 주류 영화의 틀에 박힌 방식에 반발하는 새로운 경향, 즉 누벨 바그 운동이 일어났다.

누벨 바그는 문학 각색이나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된 시대극을 지양하고, 저예산 영화 제작 방식을 택했다.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면서 개인의 창작 논리가 강조되었고, 기승전결식 구성에서 벗어난 전개를 보였다. 고급 문학보다는 삼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유명 스타 배우 기용을 피했다. 또한, 프랑스 영화의 상징주의가 사라지고, 감독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자신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누벨 바그 운동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있었다.


  • 1953년 이후 프랑스 정부의 사전제작지원금 제공으로 젊은 감독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 필름, 카메라, 녹음 기자재 등 기술 발달로 야외 촬영과 즉흥 연출, 실험적 요소 도입이 가능해졌다.
  • 제작자들이 젊은 영화 작가들에게 주목하면서, 흥행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누벨 바그의 주요 감독과 작품으로는 로제 바딤의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1956), 클로드 샤브롤의 <미남 세르쥬>(1959)와 <사촌들>(1959),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 <쥴 앤 짐>(1961), 장뤼크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1959), <중국 여인>(1967), <주말>(1967), 아녜스 바르다의 <짧은 송곳>(1954) 등이 있다.

영화 작가주의는 감독이 영화를 예술적, 극적인 관점에서 통제하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최종 편집 권한(파이널 컷)을 가질 때 작가주의 영화로 인정된다. 많은 평론가들은 작가가 개인적인 세계관을 가지며, 선호하는 이야기, 등장인물 유형, 배우, 미적 선택(조명, 구도, 사운드 디자인, 전환, 카메라 움직임 등)에서 그 특징이 드러난다고 본다.[5] 작가는 자신에게 충실하면서도 작품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일부에서는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여야만 작가주의 영화로 인정하거나,[5] 독립 영화, 실험 영화 등 스튜디오 시스템 밖에서 제작된 영화만을 작가주의 영화로 보는 제한적인 시각도 있다. 작가주의 영화는 종종 "장르 영화"와 대립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장뤼크 고다르의 ''알파빌'', 프랑수아 트뤼포의 ''화씨 451''처럼 SF 영화나, 모리스 피알라의 ''경찰''과 같은 탐정 영화도 작가주의 영화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감독들은 종종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며, 프랑수아 트뤼포[6], 장뤼크 고다르[7], 모리스 피알라, 앙드레 테시네는 고몽 영화사와 같은 대형 영화사로부터 자금 지원이나 배급을 받았다.

4. 국가별 작가주의 영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는 전쟁의 후유증이 사라지고 경제가 회복되면서 영화 산업도 다시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탈리아 영화는 농촌에서 도시로, 노동 계층에서 부르주아로, 현실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관심을 옮겨갔다. 새로운 감독들은 인간 본성, 의사소통의 불가능성, 현대인의 무기력한 삶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에르마노 올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타비아니 형제 등 신인 감독들은 혁신적인 테마와 독창적인 스타일로 사회 문제를 다루었다. 이들은 네오 리얼리즘처럼 느슨한 플롯 구조를 선호했지만, 현실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세밀하게 관찰하는 방식을 택했다. 프랑스누벨 바그처럼 이전 세대와 단절하기보다는 선배 작가들의 고민을 공유하며 전통을 세련화시켰다.

주요 감독과 작품은 다음과 같다.



독일에서 작가주의 영화는 뉴 저먼 시네마 운동으로 대표된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베르너 헤어조크, 빔 벤더스 등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은 영화를 통해 자신의 비전과 스타일을 담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카메라-펜" 비유, 즉 영화는 단순한 오락 상품이 아니라 작가의 작품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영국 영화산업은 좌경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실주의 전통을 부활시켰다. 젊은 비평가와 감독들은 다큐멘터리 운동인 "프리 시네마"를 시작했는데, 이는 "자유, 인간, 그리고 일상생활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었다.[2] 이들은 독립 제작 방식을 통해 노동 문제나 계급 문제를 다루며, 영화 작가를 사회 논평가로 보았다. 그러나 소수 작가의 개인적인 노력에만 의존하여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3] 카렐 라이스, 린제이 앤더슨, 토니 리처드슨은 프리 시네마를 창립하여 기존 제작 방식에서 벗어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3]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린제이 앤더슨의 《오, 꿈의 나라》(1954), 카렐 라이스의 《우리는 램베스의 소년들》(1959), 토니 리처드슨의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1960)과 《꿀맛》(1961) 등이 있다.

1960년대 동유럽에서는 일부 공산주의 국가에서 검열이 완화되면서 혁신적인 스타일이나 사회적 관찰의 정확성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젊은 작가들이 등장했다.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새로운 세대의 영화 제작자들은 프랑수아 트뤼포가 정의한 '작가'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대형 스튜디오 내의 재정적 위기를 이용하여 영화 기획 및 제작의 중심에 자신들을 위치시켰고,[4] 뉴 할리우드 감독들은 자신들이 예술적 관점을 형성한 영화 작품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주장했다.[4]

1990년대 덴마크에서는 도그마 95의 창작자들이 작가주의 영화를 재창조하는 급진적인 과정을 시작했다.

4. 1. 프랑스

1950년대 말, 프랑스 영화계에는 당대 주류 영화의 틀에 박힌 형식에 반발하는 새로운 경향의 영화 운동, 즉 누벨 바그 운동이 시작되었다.

누벨바그는 문학 작품 각색이나 대규모 제작비를 투입한 시대극을 지양하고, 저예산 영화 제작 방식을 추구했다.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면서 개인적인 창작 논리가 강조되었고, 기승전결식 구성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내러티브 전개를 시도했다. 고급 문학보다는 삼류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으며, 대중 스타 배우 기용을 피했다. 영화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었으며,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누벨바그는 당대 풍속을 반영했지만, 정치 사회적인 내용과는 거리를 두었다.

이러한 누벨바그 운동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발전했다. 1953년 이후 프랑스 정부는 사전제작지원금을 제공하여 젊고 재능 있는 감독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필름, 카메라, 녹음 기자재 등 기술 발달로 야외 촬영과 즉흥 연출, 실험적인 요소 도입이 가능해졌다. 제작자들은 흥행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젊은 영화 작가들에게 주목했고, 재능 있는 젊은이들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지원받았다.

주요 감독과 작품으로는 로제 바딤의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1956), 클로드 샤브롤의 <미남 세르쥬>(1959)와 <사촌들>(1959),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1959),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 <쥴 앤 짐>(1961), 장뤼크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1959), <중국 여인>(1967), <주말>(1967), 아녜스 바르다의 <짧은 송곳>(1954) 등이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쥴 앤 짐>은 누벨바그 영화로, 카메라 움직임, 우아하고 부드러운 패닝, 미디엄 롱 쇼트, 딥 포커스, 뛰어난 서정성 등은 장 르누아르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 트래킹, 패닝 쇼트가 대담해지고, 와이드 스크린 영화 도입으로 공간이 확대되었으며, 희비극 테마는 영화에서 모던의 주요 시기(1920, 1960년대)를 연결시켰다.[11] 앙리 피에르 로슈의 자전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문학적 보이스 오버와 서정적인 편집, 씌어진 내러티브와 움직이는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었다. 부르주아의 압박을 벗어던진 보헤미안식 삼각관계를 그리며, 1960년대의 새로운 감수성과 프랑스의 비판적인 젊은 세대에게서 새롭게 떠오르는 실존적이고 불경스러운 정서 구조를 담아냈다. 양식화된 의상, 자유로운 이동을 보여주며, 트뤼포에게 역사는 전진 운동이자 회귀 운동이었다. 물결치는 360도 팬은 순환 운동을 강화하며, 사물이 시간을 통과해 가고, 등장인물들이 늙어가고, 카트린느가 노년기를 두려워하게 됨에 따라 이미지와 공간은 그 자체로 반복된다. 같은 집을 방문하고, 같은 친구를 만나고, 같은 대화를 나누고, 똑같이 갈등 어린 열정을 느낀다.[12]

4. 2. 독일

독일에서 ''작가주의 영화''는 뉴 저먼 시네마 운동(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베르너 헤어조크, 빔 벤더스 등)으로 대표된다.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은 문학 작가처럼 영화에 자신의 비전과 스타일을 담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카메라-펜" 비유로 설명된다. 즉, 영화는 할리우드의 "꿈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단순한 오락 상품이 아니라 작가의 작품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3. 영국

1950년대 중반, 영국 영화산업은 좌경적인 정치 분위기 속에서 영국 특유의 사실주의 전통을 부활시켰다. 젊은 비평가와 감독들은 다큐멘터리 운동인 "프리 시네마"를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자유, 인간, 그리고 일상생활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2] 이들이 추구한 자유는 개인적인 생각을 '개인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상업적인 제작 시스템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프리 시네마 운동은 독립 제작 방식을 취했으며, 주로 노동 문제나 계급 문제를 다루었다. 영화 작가는 현실과 사회를 비판하고, 동시대 영국 사회를 솔직하게 관찰하며 탐구하는 사회 논평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공동체와 청년 문화에 관심을 가졌으며, 노동 계급의 여가 시간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체로 무정부주의적이고 허무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비교훈적이고 탐미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소수 작가의 개인적인 노력과 작품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하나의 유파로서 영향력을 지속하지는 못했다.[3]

카렐 라이스, 린제이 앤더슨, 토니 리처드슨프리 시네마를 창립하여 대부분의 영국 작품의 관습적인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들은 더 진정성 있고, 독창적이며, 특정 사회적 현실에 뿌리내린 영화를 추구했다. 라이스는 1956년 프리 시네마 시작 당시 "우리는 산업의 일반적인 틀 밖에서 일하며, 우리의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사회적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고 선언했다.[3]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린제이 앤더슨의 《오, 꿈의 나라》(1954), 카렐 라이스의 《우리는 램베스의 소년들》(1959), 토니 리처드슨의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1960)과 《꿀맛》(1961) 등이 있다. 스티븐 프리어즈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1985)도 주목할 만하다.[14]

4. 4. 동유럽

1960년대에 일부 공산주의 국가에서 통치가 일시적으로 완화되고 검열 위원회의 규제가 상대적으로 완화되면서 (체코 뉴 웨이브, 폴란드 영화 등) 혁신적인 스타일이나 사회적 관찰의 정확성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젊은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4. 5. 미국

1960년대 말 미국에서, 새로운 세대의 영화 제작자들은 프랑수아 트뤼포가 정의한 '작가'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대형 스튜디오 내의 재정적 위기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영화 기획 및 제작의 중심에 자신들을 위치시켰는데,[4] 이전에는 이 위치에서 배제되었었다.[4] 이후 뉴 할리우드 감독들은 자신들이 예술적 관점을 형성한 영화 작품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주장했다.[4]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스타일의 일관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했다.[4]

4. 6. 덴마크

1990년대 덴마크에서는 도그마 95의 창작자들이 ''작가주의 영화''를 재창조하는 급진적인 과정을 시작했다.

5. 현대적 사용례

대중 매체에서 "작가주의 영화"는 종종 "상업 영화"와 대립되는데, 전자는 까다롭고, 지적이며, 엘리트적이고, 예산이 적은 반면, 후자는 다수를 위한 것이거나 가족적이고, 오락적이며, 상당한 자금으로 제작된다고 여겨진다.[5] 일부 비평가들에게 "작가주의 영화"의 개념은 질적인 가치를 가지며 일종의 꼬리표가 된다. 반대로, 일부 관람객들에게 "작가주의 영화"는 엄격하고 지루한 유형의 예술 영화를 연상시킨다.

6. 비판

노엘 버치를 비롯한 일부 비평가들은 작가주의 영화, 특히 프랑스 영화가 쇠퇴하면서 허황된 태도, 모더니즘, 밀실주의, 게으른 형식주의와 같은 진부한 표현과 시각적 특징에 매몰되어 대본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비판한다.[1]

영화 평론지는 2012년 12월호에서 현대 작가주의 영화의 "10가지 결점"(거장 숭배, 사제의 진지함, 대체 가능한 배우, 몽타주의 비-장면 등)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제시했다.[8]

7. 관련 영화제

나뮈르 프랑스어 영화제(FIFF)는 프랑스어권의 작가주의 영화를 선정한다.[9] 라바트 국제 작가주의 영화 영화제는 독립 작가들을 조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칸 영화제,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베를린 국제 영화제, 로카르노 영화제, 산세바스티안 국제 영화제와 같은 주요 국제 영화제들은 선정작을 통해 작가주의 영화, 예술·실험 영화, 연구 영화의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10]

참조

[1] 웹사이트 Balade cinéphilique: 'Contre l'auteurisme' https://www.liberati[...] 1998-08-05
[2] 웹사이트 Biographie de Tony Richardson http://www.cineartis[...]
[3] 문서 Article dedicated to Karel Reisz in Le Dictionnaire du cinéma : les réalisateurs (1895-1995) Robert Laffont edition 1995
[4] 웹사이트 Le Nouvel Hollywood https://www.cineclub[...] 2002-07-06
[5] 문서 Notwithstanding, the proponents of the New Wave extolled directors such as Alfred Hitchcock or John Ford, who did not themselves write the scripts for their films, as models of cinéma d'auteur.
[6] San Francisco Film Festival The Last Metro http://history.sffs.[...]
[7] French New Wave Director JEAN-LUC GODARD - French New Wave Director https://www.newwavef[...]
[8] 웹사이트 Le cinéma d'auteur sur une mauvaise pente? http://www.cahiersdu[...] 2012-12
[9] 웹사이트 FIFF - A propos du FIFF / Accueil http://www.fiff.be/f[...]
[10] 웹사이트 "Le charme décontracté de la Berlinale" http://www.slate.fr/[...] 2013-02-07
[11] 웹인용 트뤼포 http://archive.sense[...] 2009-11-02
[12] 깨진 링크 쥴 앤 짐 http://movie.naver.c[...]
[13] 깨진 링크 뉴 저먼 시네마 http://100.naver.com[...]
[14] 깨진 링크 영국 프리 시네마 http://k.daum.net/q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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