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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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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우는 신나라 시기 활동한 인물로, 왕망 정권에서 흉노 정벌에 참여하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등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대사마, 납언장군 등을 역임하며 녹림군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으나, 곤양 전투에서 패배한 후 유망에게 투항했다. 이후 경시제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유신에게 패하여 사망했다. 《한서》에는 지략 있는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후일 유수의 재능을 평가하기도 했다.

2. 행적

시건국 2년(10년), 왕망흉노선우의 칭호를 항노복우(降奴服于)로 바꾸었다. 또 손건 등 열두 명을 장군에 임명하여 다섯 갈래로 나아가 흉노를 치게 하였는데, 이때 장우는 토예장군(討穢將軍)으로써 일원이 되어 주맥장군(誅貉將軍) 양준(陽俊)과 함께 어양에서 출격하였다.

시건국 4년(12년), 왕망은 고구려에게 흉노 정벌을 명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듣지 않고 물러났다. 요서대윤 전담(田譚)이 제지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살해되었고, 노한 왕망은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다. 장우는 고구려를 용서하라고 간하였으나, 왕망은 듣지 않고 장우에게 고구려 토벌을 명하였다. 장우는 고구려후 추(騶)[2]를 죽이고 수급을 서울로 보냈고, 왕망은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바꾸어 불렀다.

천봉 3년(16년) 7월, 일식이 일어났다. 대사마 진무는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고, 무건(武建伯) 장우가 후임이 되었다.

천봉 6년(19년), 왕망은 장우에게 흉노 토벌을 명하였다. 장우는 먼저 적미군을 토벌하여야 한다고 간하였으나, 왕망의 분노를 사 관작을 빼앗기고 고향으로 쫓겨났다.

지황 3년(22년), 납언장군 장우는 질종장군 진무와 함께 형주에서 일어난 반란군인 녹림군의 일파로 왕상·장앙·성단 등이 지휘하는 하강군(下江軍)을 물리쳤다.

지황 4년(23년), 녹림군의 일당인 용릉병의 유인군에게 육양(淯陽)에서 패한 장우는 진무와 함께 달아나 왕읍·왕심이 이끄는 주력부대와 합류하였다. 녹림군은 경시제를 추대하고 스스로 한나라(현한)라 일컫기에 이르렀다.

같은해 5월, 유인이 완(宛)을 침략하였다. 왕읍 등이 곤양(昆陽)을 먼저 치려 하니 장우는 유인을 먼저 물리칠 것을 주장하였으나, 왕읍 등은 듣지 않고 곤양을 계속 포위하였다. 또 곤양에서 농성하던 현한의 왕봉왕상이 투항하려 하였으나 왕읍은 받아들이지 않고 포위를 견고히 하였다. 장우는 전의를 잃은 적에게는 퇴로를 하나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간하였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왕봉 등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고, 그 사이에 완 또한 유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6월에는 유수가 곤양을 빠져나가 원군을 데려왔고, 왕읍군은 크게 패하였다(곤양 전투).

초(譙)로 달아난 장우와 진무는 신나라를 저버리고 한의 장군을 칭하였다. 장우는 한나라가 부흥하여야 한다고 패군의 관리와 민중을 설득하였으나, 경시제에게 투항하지는 않았다.

경시 원년(23년) 8월, 여남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한 유성에게 진무와 함께 투항하였다. 장우는 대사마에, 진무는 승상에 임명되었다. 곧 경시제가 유사를 보내 공격하니 장우 등은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10월, 뒤이어 침공한 유신에게 패하여 죽었다.[1]

2. 1. 흉노 및 고구려와의 관계

시건국 2년(10년), 왕망흉노 선우의 칭호를 강노복우로 고치고, 입국장군 손건에게 12명의 장군을 거느리게 하여, 오로(五路)에서 이를 토벌하게 했다. 장우는 토예장군으로서 12명의 장군 중 한 명이 되어, 주학장군 양준과 함께 어양에서 출격했다.

시건국 4년(12년), 왕망은 고구려에게 흉노 토벌을 명했지만, 고구려군은 이를 바라지 않고 퇴각했고, 퇴각을 막으려던 요서대윤 전담은 고구려군에게 살해당했다. 왕망이 노하여 고구려를 토벌하려 하자, 장우는 고구려를 사면하도록 진언했지만, 왕망은 듣지 않고, 장우에게 고구려 토벌을 명했다. 장우는 고구려후 추(騶)를 쳐서 죽이고, 그의 수급을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은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바꾸어 불렀다.

천봉 6년(19년), 장우는 왕망으로부터 흉노 공격을 명받았지만, 장우는 먼저 국내의 적미군 등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사를 들어 완곡하게 간했다. 그러나 왕망의 격노를 사, 대사마, 무건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2. 1. 1. 흉노 정벌

시건국 2년(10년), 왕망흉노 선우의 칭호를 강노복우로 고치고, 입국장군 손건에게 12명의 장군을 거느리게 하여, 오로(五路)에서 이를 토벌하게 했다.[2] 장우는 토예장군으로서 12명의 장군 중 한 명이 되어, 주학장군 양준과 함께 어양에서 출격했다.[2]

시건국 4년(12년), 왕망은 고구려에게 흉노 토벌을 명했지만, 고구려군은 이를 바라지 않고 퇴각했고, 퇴각을 막으려던 요서대윤 전담은 고구려군에게 살해당했다.[2] 왕망이 노하여 고구려를 토벌하려 하자, 장우는 고구려를 사면하도록 진언했지만, 왕망은 듣지 않고, 장우에게 고구려 토벌을 명했다.[2] 장우는 고구려후 추(騶)를 쳐서 죽이고, 그의 수급을 장안으로 보냈다.[2]

천봉 6년(19년), 장우는 왕망으로부터 흉노 공격을 명받았지만, 장우는 먼저 국내의 적미군 등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고사를 들어 완곡하게 간했다.[2] 그러나 왕망의 격노를 사, 대사마, 무건백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2]

2. 1. 2. 고구려 공격

시건국 4년(12년), 왕망고구려에게 흉노 정벌을 명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듣지 않고 물러났다. 요서대윤 전담(田譚)이 제지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살해되었고, 노한 왕망은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다. 장우는 고구려를 용서하라고 간하였으나, 왕망은 듣지 않고 장우에게 고구려 토벌을 명하였다. 장우는 고구려후 추(騶)[2]를 죽이고 수급을 서울로 보냈고, 왕망은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바꾸어 불렀다.

2. 2. 신나라의 관료

시건국 2년(10년), 왕망흉노선우의 칭호를 항노복우(降奴服于)로 바꾸었다. 또 손건 등 열두 명을 장군에 임명하여 다섯 갈래로 나아가 흉노를 치게 하였는데, 이때 장우는 토예장군(討穢將軍)으로써 일원이 되어 주맥장군(誅貉將軍) 양준(陽俊)과 함께 어양에서 출격하였다.

시건국 4년(12년), 왕망은 고구려에게 흉노 정벌을 명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듣지 않고 물러났다. 요서대윤 전담(田譚)이 제지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살해되었고, 노한 왕망은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다. 장우는 고구려를 용서하라고 간하였으나, 왕망은 듣지 않고 장우에게 고구려 토벌을 명하였다. 장우는 고구려후 추(騶)[2]를 죽이고 수급을 서울로 보냈고, 왕망은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바꾸어 불렀다.

천봉 3년(16년) 7월, 일식이 일어났다. 대사마 진무는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고, 무건(武建伯) 장우가 후임이 되었다.

천봉 6년(19년), 왕망은 장우에게 흉노 토벌을 명하였다. 장우는 먼저 적미군을 토벌하여야 한다고 간하였으나, 왕망의 분노를 사 관작을 빼앗기고 고향으로 쫓겨났다.

지황 3년(22년), 납언장군 장우는 질종장군 진무와 함께 형주에서 일어난 반란군인 녹림군의 일파로 왕상·장앙·성단 등이 지휘하는 하강군(下江軍)을 물리쳤다.

지황 4년(23년), 녹림군의 일당인 용릉병의 유인군에게 육양(淯陽)에서 패한 장우는 진무와 함께 달아나 왕읍·왕심이 이끄는 주력부대와 합류하였다. 녹림군은 경시제를 추대하고 스스로 한나라(현한)라 일컫기에 이르렀다.

같은해 5월, 유인이 완(宛)을 침략하였다. 왕읍 등이 곤양(昆陽)을 먼저 치려 하니 장우는 유인을 먼저 물리칠 것을 주장하였으나, 왕읍 등은 듣지 않고 곤양을 계속 포위하였다. 또 곤양에서 농성하던 현한의 왕봉왕상이 투항하려 하였으나 왕읍은 받아들이지 않고 포위를 견고히 하였다. 장우는 전의를 잃은 적에게는 퇴로를 하나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간하였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왕봉 등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고, 그 사이에 완 또한 유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6월에는 유수가 곤양을 빠져나가 원군을 데려왔고, 왕읍군은 크게 패하였다(곤양 전투).

2. 2. 1. 대사마 임명

시건국 3년(16년) 7월, 일식이 일어났다. 대사마 진무는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고, 무건(武建伯) 장우가 후임이 되었다.[2]

2. 2. 2. 납언장군과 녹림군 진압

시건국 4년(12년), 왕망고구려에게 흉노 정벌을 명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듣지 않고 물러났다. 요서대윤 전담(田譚)이 제지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살해되었고, 노한 왕망은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다. 장우는 고구려를 용서하라고 간하였으나, 왕망은 듣지 않고 장우에게 고구려 토벌을 명하였다. 장우는 고구려후 추(騶)[2]를 죽이고 수급을 서울로 보냈고, 왕망은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바꾸어 불렀다.[2]

지황 3년(22년), 납언장군 장우는 질종장군 진무와 함께 형주에서 일어난 반란군인 녹림군의 일파로 왕상·장앙·성단 등이 지휘하는 하강군(下江軍)을 물리쳤다.

2. 3. 곤양 전투와 최후

지황 4년(23년), 녹림군의 일당인 용릉병의 유인군에게 육양(淯陽)에서 패한 장우는 진무와 함께 달아나 왕읍·왕심이 이끄는 주력부대와 합류하였다. 녹림군은 경시제를 추대하고 스스로 한나라(현한)라 일컫기에 이르렀다.

같은해 5월, 유인이 완(宛)을 침략하였다. 왕읍 등이 곤양(昆陽)을 먼저 치려 하니 장우는 유인을 먼저 물리칠 것을 주장하였으나, 왕읍 등은 듣지 않고 곤양을 계속 포위하였다. 또 곤양에서 농성하던 현한의 왕봉왕상이 투항하려 하였으나 왕읍은 받아들이지 않고 포위를 견고히 하였다. 장우는 전의를 잃은 적에게는 퇴로를 하나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간하였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왕봉 등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고, 그 사이에 완 또한 유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6월에는 유수가 곤양을 빠져나가 원군을 데려왔고, 왕읍군은 크게 패하였다(곤양 전투).

초(譙)로 달아난 장우와 진무는 신나라를 저버리고 한의 장군을 칭하였다. 장우는 한나라가 부흥하여야 한다고 패군의 관리와 민중을 설득하였으나, 경시제에게 투항하지는 않았다.

경시 원년(23년) 8월, 여남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한 유성에게 진무와 함께 투항하였다. 장우는 대사마에, 진무는 승상에 임명되었다. 곧 경시제가 유사를 보내 공격하니 장우 등은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10월, 뒤이어 침공한 유신에게 패하여 죽었다.[1]

2. 3. 1. 곤양 전투

시건국 4년(12년), 왕망고구려에게 흉노 정벌을 명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듣지 않고 물러났다. 요서대윤 전담(田譚)이 제지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살해되었고, 노한 왕망은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다. 장우는 고구려를 용서하라고 간하였으나, 왕망은 듣지 않고 장우에게 고구려 토벌을 명하였다. 장우는 고구려후 추(騶)[2]를 죽이고 수급을 서울로 보냈고, 왕망은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바꾸어 불렀다.


지황 4년(23년), 녹림군의 일당인 용릉병의 유인군에게 육양(淯陽)에서 패한 장우는 진무와 함께 달아나 왕읍·왕심이 이끄는 주력부대와 합류하였다. 녹림군은 경시제를 추대하고 스스로 한나라(현한)라 일컫기에 이르렀다.[1]

같은해 5월, 유인이 완(宛)을 침략하였다. 왕읍 등이 곤양(昆陽)을 먼저 치려 하니 장우는 유인을 먼저 물리칠 것을 주장하였으나, 왕읍 등은 듣지 않고 곤양을 계속 포위하였다. 또 곤양에서 농성하던 현한의 왕봉왕상이 투항하려 하였으나 왕읍은 받아들이지 않고 포위를 견고히 하였다. 장우는 전의를 잃은 적에게는 퇴로를 하나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간하였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왕봉 등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고, 그 사이에 완 또한 유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6월에는 유수가 곤양을 빠져나가 원군을 데려왔고, 왕읍군은 크게 패하였다(곤양 전투).[1]

2. 3. 2. 유망(劉望)에게 투항

시건국 2년(10년), 왕망흉노선우의 칭호를 항노복우(降奴服于)로 바꾸었다. 또 손건 등 열두 명을 장군에 임명하여 다섯 갈래로 나아가 흉노를 치게 하였는데, 이때 장우는 토예장군(討穢將軍)으로써 일원이 되어 주맥장군(誅貉將軍) 양준(陽俊)과 함께 어양에서 출격하였다.[1]

경시 원년(23년) 8월, 한에서는 종무후였던 유망(『한서』에서는 「유성」)이 여남군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장우와 진무는 이에 투항하여, 장우는 대사마, 진무는 승상에 임명되었다.[1]

경시제는 황제를 칭한 유망의 정권을 적으로 간주하고, 대사도 유사를 파견하여 이를 토벌하게 했지만, 장우 등은 유사를 격퇴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잇따라 토벌하러 온 분위대장군 유신에게 패하여, 유망·장우·진무는 모두 전사했다[1]

2. 3. 3. 죽음

시건국 4년(12년), 왕망고구려에게 흉노 정벌을 명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듣지 않고 물러났다. 요서대윤 전담(田譚)이 제지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군에게 살해되었고, 노한 왕망은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다. 장우는 고구려를 용서하라고 간하였으나, 왕망은 듣지 않고 장우에게 고구려 토벌을 명하였다. 장우는 고구려후 추(騶)[2]를 죽이고 수급을 서울로 보냈고, 왕망은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로 바꾸어 불렀다.

천봉 6년(19년), 왕망은 장우에게 흉노 토벌을 명하였다. 장우는 먼저 적미군을 토벌하여야 한다고 간하였으나, 왕망의 분노를 사 관작을 빼앗기고 고향으로 쫓겨났다.

지황 4년(23년), 녹림군의 일당인 용릉병의 유인군에게 육양(淯陽)에서 패한 장우는 진무와 함께 달아나 왕읍·왕심이 이끄는 주력부대와 합류하였다. 녹림군은 경시제를 추대하고 스스로 한나라(현한)라 일컫기에 이르렀다.

같은해 5월, 유인이 완(宛)을 침략하였다. 왕읍 등이 곤양(昆陽)을 먼저 치려 하니 장우는 유인을 먼저 물리칠 것을 주장하였으나, 왕읍 등은 듣지 않고 곤양을 계속 포위하였다. 또 곤양에서 농성하던 현한의 왕봉왕상이 투항하려 하였으나 왕읍은 받아들이지 않고 포위를 견고히 하였다. 장우는 전의를 잃은 적에게는 퇴로를 하나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간하였으나,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왕봉 등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였고, 그 사이에 완 또한 유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6월에는 유수가 곤양을 빠져나가 원군을 데려왔고, 왕읍군은 크게 패하였다(곤양 전투).

초(譙)로 달아난 장우와 진무는 신나라를 저버리고 한의 장군을 칭하였다. 장우는 한나라가 부흥하여야 한다고 패군의 관리와 민중을 설득하였으나, 경시제에게 투항하지는 않았다.

경시 원년(23년) 8월, 여남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한 유성에게 진무와 함께 투항하였다. 장우는 대사마에, 진무는 승상에 임명되었다. 곧 경시제가 유사를 보내 공격하니 장우 등은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10월, 뒤이어 침공한 유신에게 패하여 죽었다.[1]

3. 평가

한서』 왕망전에서는 장우가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후한서』 광무본기의 주석에 따르면, 유수와 면식이 있었으며,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유수가 반신 거병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장우는 "저 수염(턱수염)과 눈썹이 아름다운 사내가 어찌 그렇게 (큰 인물이) 되었는가"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참조

[1] 서적 漢書王莽伝
[2] 서적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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