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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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원예는 1910년 일본령 타이완에서 태어나 일본 국적을 가진 작곡가이다. 중국 푸젠성 출신 객가계 후손으로, 일본 유학 중 음악을 시작하여 콜롬비아 레코드의 바리톤 가수로 활동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예술 경기에 '대만의 무곡'을 출품하여 명예로운 언급을 받았으며, 1938년 중일 전쟁 중 베이징 사범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활동했다. 1945년 일본 항복 후 일본 국적을 상실하고 중화민국으로 귀속되었으며, 문화 대혁명 시기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78년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1983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후 동아시아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져 작품 연주 및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2003년에는 영화 《카페 뤼미에르》에서 그의 삶을 다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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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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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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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江文也 |
본명 | 강문빈 (江文彬) |
일본어 이름 | 고 분야 (こう ぶんや) |
별칭 | 우에다 고분 (上田 耕文) |
출생일 | 1910년 7월 11일 |
출생지 | 타이완 타이베이 다다오청 |
사망일 | 1983년 10월 24일 |
사망지 | 베이징 |
직업 | 작곡가 |
대표 작품 | "포모사 무용"(Formosan Dance) "보편적인 빛의 교향곡"(Symphonia Lucis Universalis) |
레이블 | 일본 콜롬비아 |
음악 스타일 | |
장르 | 클래식 음악 |
2. 생애
장원예는 1910년 일본령 타이완 단수이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샤먼으로 이주했다. 1923년 일본 유학을 떠나 나가노현 우에다시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이후 무사시 공업대학(현재 도쿄 도시 대학)과 도쿄 음악 학교에서 공부했다. 1932년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바리톤 가수로 활동하며 야마다 고사쿠, 하시모토 구니히코에게 작곡을 배웠고, 1933년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1936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예술 경기에 대만의 무곡을 출품하여 주목받았다.[1][2]
1938년 중일 전쟁 중 베이징 사범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일본 국적을 상실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 남게 되었다. 국민당 정권에서는 '문화 한간'(문화 반역자)으로 구금되기도 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앙 음악원 교수로 재직했다.[2]
그러나 반우파 투쟁과 문화 대혁명 시기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비판받으며 탄압받았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하방 노동에 처해지기도 했다.[2] 1978년 명예 회복되었으나, 이미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1983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1] 사후 동아시아 각지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2. 1. 타이완 출생과 일본 유학 (1910-1938)
1910년 일본령 타이완 단수이구에서 중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중국 푸젠성 룽옌시 융딩구 출신의 객가계 후손이다.[1] 1923년 나가노현 우에다시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이후 무사시 공업대학(현재 도쿄 도시 대학) 전기과에서 공부하며, 도쿄 음악 학교 야간 강좌에서 성악을 배웠다.[2]1932년 콜롬비아 레코드의 바리톤 가수가 되었다. 이때부터 야마다 고사쿠, 하시모토 구니히코에게 작곡을 배웠다. 1933년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도쿄 방송국에 출연하여 "탄호이저", "라 보엠" 등을 불렀으며, "육탄 삼용사의 노래" 등의 전시 가요와 『제2생번 가곡집』 자작곡 등을 녹음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예술 경기에 관현악곡 '대만의 무곡'을 출품하여 명예로운 언급을 받았다.[1] 당시에는 "3위 입상"으로 보도되었지만, 실제로는 선외 가작이었다.[2]
2. 2. 중국에서의 활동과 친일 논란 (1938-1945)
1938년, 중일 전쟁이 한창일 때, 장원예는 당시 일본의 통치를 받던 베이징 사범대학의 음악 예술 교수로 임명되었다. 일본 정부는 그를 양국 일반 대중의 호응을 얻는 데 중요한 도구로 여겼다.[1]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베이징과 가족이 여전히 거주하는 도쿄를 오가며 생활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일본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장원예는 일본 국적을 상실하게 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곡가가 되었다. 이후 그의 이름은 일본 음악계에서 사라졌다.[1]
2. 3.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탄압 (1945-1978)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장원예는 일본 국적을 상실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 하에서는 "문화 한간"(文化漢奸, 문화 반역자)으로 10개월간 구금되었지만, 미군 클럽의 재즈 밴드 지휘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2] 1947년 베이징의 중앙 음악원 교수로 취임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1950년부터 톈진 중앙 음악원 교수로 재직했다.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장원예는 일본과의 문화적, 정치적 유대 관계와 유럽 모더니즘에 대한 미적 친밀함 때문에 반역자이자 부르주아로 여겨졌다.[1] 그는 숙청되지 않기 위해 정부의 온건한 취향에 맞춰 작곡 스타일을 수정해야 했다. 1957년부터의 반우파 투쟁, 그리고 1966년부터의 문화 대혁명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비판받아 지위를 박탈당했다. 대부분의 작품의 자필 악보와 피아노 등을 불태워지고, 하방 노동에 보내졌다.[2] 작품번호가 붙은 세 개의 교향곡을 포함한 그의 일부 작품들은 이러한 비난 속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에도 몰래 작곡을 계속했고, 문화 대혁명 종결 후 1978년에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이미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2]
2. 4. 사망과 사후 재평가 (1978-현재)
1978년 장원예는 명예가 회복되었으나, 이미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1] 그는 1983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1]사후, 타이완, 중국, 홍콩,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졌다.[1] 그의 작품 연주 및 녹음이 증가했으며, 그의 이름은 일본 음악계에서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카페 뤼미에르에서 장원예를 주제로 다루었다.[1] 이 영화는 작곡가에 대해 연구하는 젊은 일본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영화 내에서 그의 작품이 사운드트랙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그의 일본인 아내와 딸이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1]
3. 주요 작품
장원예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다음은 주요 작품 목록의 일부이다.
하위 섹션에서 상세하게 다루는 관현악곡, 성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오페라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을 표에 간략하게 포함했다.
3. 1. 관현악곡
- 대만 무곡 Op.1 (1936년) … 피아노 버전도 있음.[1]
- 속요에 기초한 교향적 에튀드 (1937년)[1]
- 푸가적 서곡 (1937년)[1]
- 전원시곡 (1938년) "국민시곡" 중 하나로 JOAK의 위촉에 의해 작곡.[1]
- 고도 소묘 (북경 점점) (1939년)[1]
- 공묘 대성 악장 (1940년)[1]
- 교향곡 제1번 (1940년)[1]
- 미영 격멸 대행진곡 『밝아오는 세계』 (1943년)[1]
- 남벽의 하늘에 울려 퍼지는 비둘기 피리에 (1943년)[1]
- 세기의 신화에 부치는 송가 (1943년) … 영화 음악 『저 깃발을 쏴라』를 위해[1]
- 교향곡 제2번 『북경』 (1943년)[1]
- 관현악 일우 동광 (1943)[1]
- 목관과 관현악을 위한 시곡 (1943년)[1]
- 손오공과 우마왕[1]
- 기념 굴원 교향시 멱라침류 (1953년)[1]
- 교향곡 제3번 (1957년) … 작사: 사설강[1]
- 현악을 위한 소교향곡 (1951년)[1]
- 교향곡 제4번 『정성공에 의한 대만 해방 300주년을 축하하며』 (1962년)[1]
- 아리산의 노랫소리 (1980년대) … 유작.[1]
3. 2. 성악곡
- 제1생번 가곡집 Op.6 (소프라노와 실내 관현악 편곡 존재)[1]
- 제2생번 가곡집 Op.10 (1936년) (바리톤과 실내 관현악 편곡 존재)[1] (사에키 타카오 작사)
- 『せせり』|세세리일본어 (관현악 반주 합창곡) (1936년) (시마자키 도손 작사)[1]
- 체레프닌 컬렉션 No.15 『생번 4 가곡집』 (1936년)[1]
3. 3. 실내악곡
제전 소나타중국어 (피아노, 플루트) (1910년)[1]3. 4. 피아노곡
- 소품 Op.3-1[1]
- 탄시곡 Op.3-2[1]
- 5개의 스케치 (지쿠마가와 스케치) Op.4 (1934년) (체레프닌 컬렉션 No.16)[1]
- 성내의 밤 (1935년경)[1]
- 3개의 무곡 op.7 (1935년경)[1]
- 바가텔 Op.8 (1935년경)[1]
- 한 명과 여섯 명 op.12-1 (1935년경)[1]
- 오월의 모음곡 (1935년경)[1]
- 인형극 (1935년경)[1]
- 포르모사 댄스 작품 1[1]
- 다섯 개의 스케치 (1935)[1]
- 4개의 세이반 가요 (1936)[1]
-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댄스 작품 7[1]
- 16개의 바가텔 작품 8[1]
- 북경 만화경 작품 22[1]
- 공주 시안페이 작품 34[1]
- 피아노 소나타 3번 "강남 풍경" 작품 39[1]
- 민속 축제에 관한 12개의 시 작품 53[1]
- 피아노 소나타 4번 "카니발 데이즈" 작품 54[1]
- 카프리치오 "어부의 배 노래" 작품 56[1]
- 알리산의 노래[1]
- 대만 댄스[1]
- "고향 축제" (모음곡)[1]
3. 5. 오페라
泰雅族的婚禮|타이야르의 사랑중국어 Op.9 (미완성)[1]4. 저서
- 相對支那正樂考|상대지나정악고중국어 (1942, 2008 복각)
- 北京銘|북경명중국어 (1942)
- 大同石佛頌|대동석불송중국어 (1942)
5. 평가와 영향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이전 출력을 제공해주시면 수정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Chiang Wen-yeh
https://www.olympedi[...]
2020-08-01
[2]
뉴스
日本音楽紹介のため創設、十九人に栄誉『東京日日新聞』(昭和14年1月25日夕刊)『昭和ニュース事典第7巻 昭和14年-昭和16年』本編p798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刊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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