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다 고사쿠
1. 개요
야마다 고사쿠는 일본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며,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나 1965년 사망했다. 그는 도쿄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독일 유학을 통해 작곡을 배웠다. 귀국 후 도쿄 필하모닉 협회 지휘자를 맡았으나, 이후 미국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작품을 연주했다. 오페라, 관현악곡, 실내악, 피아노곡, 가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동요 "빨간 잠자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쟁 시기 협력 행위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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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 관계자 -
사이토 마코토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로, 해군대신,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 등을 역임하며 해군력 확장, 문화 통치 추진, 만주국 승인, 국제연맹 탈퇴 등의 행적을 남겼으나 2·26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
스카우트 관계자 -
노기 마레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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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지휘자 -
오자와 세이지
오자와 세이지는 만주국에서 태어나 사이토 히데오에게 지휘를 사사받고 여러 거장들을 거치며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을 29년간 역임,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를 설립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힘쓴 세계적인 일본인 지휘자였으나 2024년 심부전으로 별세했다. -
일본의 지휘자 -
오가 노리오
소니의 사장과 회장을 역임한 오가 노리오는 소니 브랜드 이미지 구축, CD 및 플레이스테이션 개발 주도 등 소니의 엔터테인먼트 사업 확장에 기여했으며, 음악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친 일본의 기업 경영자이자 음악가이다. -
근현대 작곡가 -
이케베 신이치로
이케베 신이치로는 도쿄국립예술대학 출신으로 다수의 상을 수상한 일본의 작곡가로, 영화 음악, 드라마 음악, 교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전일본합창연맹 임원, 요코하마 미나토미라이홀 관장 등을 역임했고, 전위음악부터 크로스오버까지 다양한 음악 스타일 변화를 보였다. -
근현대 작곡가 -
엘리엇 카터
엘리엇 카터는 복잡한 리듬과 불협화음, 다층적인 텍스처를 탐구하여 독창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하고 현대 음악의 지평을 넓힌 미국의 현대 음악 작곡가로, 20세기 후반의 주요 작곡가 중 한 명이다.
2. 생애
야마다 고사쿠(山田耕筰)는 일본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서구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고사쿠 야마다(Kôsçak Yamada)로 표기하기도 했다.
도쿄 출신으로, 도쿄 음악학교에서 초기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독일 프러시아 예술 아카데미에서 막스 브루흐 등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다. 유학 중이던 1912년에는 일본 최초의 교향곡으로 평가받는 '승리와 평화'를 완성했다.
귀국 후 작곡과 지휘 양면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약 1,600여 곡의 방대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예술 가곡(Lieder) 분야에서 "아카톤보"(붉은 잠자리, 1927)와 같은 유명한 곡들을 작곡했다. 그의 오페라 구로후네(흑선)는 일본 오페라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지휘자로서는 클로드 드뷔시, 안토닌 드보르자크, 조지 거슈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등 서양 작곡가들의 주요 작품들을 일본에 소개하고 초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카네기 홀 연주회를 열고 뉴욕 필하모닉 등을 지휘하기도 했다.
1930년에는 이름 표기를 '耕作(코사쿠)'에서 '耕筰(코우사쿠)'로 바꾸었으며, 이는 동명이인과의 혼동을 피하고 자신의 지휘 모습에 대한 지적을 계기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알파벳 표기는 베를린 유학 시절부터 'Kósçak Yamada'를 사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일본음악문화협회 회장을 맡는 등 체제 협력적인 활동으로 인해 종전 후 전쟁 책임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194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건강 문제를 겪었으나, 1950년 일본지휘자협회 회장 취임, 1956년 문화훈장 수훈 등 음악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1965년 12월 29일, 도쿄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1886-1910)
야마다 고사쿠는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 후쿠시마번 출신의 의사이자 기독교 선교사인 야마다 켄조였다. 1896년,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스가모 미야시타(현재의 남오쓰카(도시마구))에 있던 자영관(후의 일본기독교단 스가모교회)에 들어가 13세까지 시설에서 고학했다.
1899년, 13세 때 누이인 간틀렛 코우의 도움을 받아 오카야마시의 양충학교에 입학했다. 오카야마에서 누이의 남편인 에드워드 간틀렛에게 서양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14세 때 관서학원 중학부로 전학했으며, 재학 중이던 16세 가을에 첫 작품인 "MY TRUE HEART"를 작곡했다.
1904년 관서학원 본과를 중퇴한 후 도쿄 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도쿄 음악학교에서는 독일 출신 작곡가 아우구스트 윤커(August Junker)와 하인리히 베르크마이스터(Heinrich Werkmeister)에게 사사했다. 1908년 도쿄 음악학교(현재의 도쿄예술대학) 성악과를 졸업했다. 이후 1910년에는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2.2. 독일 유학 (1910-1913)
1910년부터 1913년까지 3년간 미쓰비시 재벌 총수 이와사키 코야타의 지원을 받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베를린 왕립 예술 아카데미(당시 프러시아 예술 아카데미) 작곡과에 입학하여 막스 브루흐와 칼 레오폴트 볼프에게 작곡을, 칼 아우구스트 하이만-라인넥(Carl August Heymann-Rheineck)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베를린 유학 중이던 1912년에는 일본인 최초의 교향곡인 F장조 교향곡 '승리와 평화'를 작곡했다. 이 곡의 서주는 가가쿠에 기반한 일본 국가를 연상시키는 펜타토닉 음계(G-A-D-E)를 사용했으며, 4악장으로 구성된 일본 최초의 완전한 교향곡으로 평가받는다. 야마다는 1913년 말 일본으로 돌아왔다.
2.3. 귀국과 활동 (1914-1926)
1913년 말 독일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1914년에는 미쓰비시 재벌 총수 이와사키 코야타가 후원하던 도쿄 필하모닉 협회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이와사키는 1910년에 음악 감상 서클로 이 협회를 조직했으며, 야마다의 독일 유학 비용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야마다가 일으킨 연애 문제로 이와사키의 분노를 사 자금 지원이 중단되었고, 결국 협회는 1916년 2월 해산되었다.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자신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연주회를 열었다. 1918년에는 맨해튼에서 뉴욕 필하모닉과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들로 구성된 임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1920년 12월에는 제국극장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일부를 발췌하여 일본 초연을 지휘했다. 1921년에는 문화학원 음악과 주임으로 취임했다.
1924년에는 코노에 히데마로와 함께 하얼빈의 오케스트라 단원과 일본인 연주자들을 모아 '일러 교환 교향 관현악 연주회'를 주최했다. 이를 모체로 코노에와 함께 일본 교향악 협회를 설립했는데, 이는 현재 NHK 교향악단의 전신이다. 그러나 협회 운영 중 야마다의 불투명한 회계 처리가 문제가 되어 내분이 발생했다. 특히 수입금 배분 방식(수익 100엔 중 야마다가 50엔을 갖고 나머지 단원 전체가 50엔을 나누는 방식)에 대한 단원들의 불만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1926년 9월 8일, 코노에 히데마로가 탈퇴를 선언하자 쿠로야나기 모리츠나 등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단원이 코노에를 따라 신교향악단(新交響楽団)을 창설하면서 야마다가 주도하던 일본 교향악 협회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오케스트라 운영 실패로 많은 빚을 지게 된 야마다는 1926년 무렵 가나가와현 치가사키시로 거처를 옮겨 재기를 도모했다. 이 시기에 "아카톤보"(1927)와 같은 동요 명곡들을 작곡했다.
2.4. 쇼난 시대와 재기 (1926-1945)
1926년, 40세 무렵 일본 교향악 협회 운영 실패로 인한 내분과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야마다는 쇼난의 카가야마 정(현재의 가나가와현 치가사키시)에 거처를 마련하고 약 6년간 머물며 재기를 도모했다. 이 시기에 "빨간 잠자리"를 비롯한 여러 유명 동요를 작곡했다.
1930년(쇼와 5년), 기존에 사용하던 이름 코사쿠(耕作)를 코우사쿠(耕筰)로 개명했다. 개명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야마다 본인은 동명이인과의 혼동을 피하고 자신의 지휘 모습에 대한 지적을 계기로 이름에 '대나무 관'(竹冠)을 씌우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호적상의 이름은 이후 1956년 재혼 시점에 변경되었다.
1936년(쇼와 11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했다. 1937년(쇼와 12년)에는 상애여자전문학교(현재의 상애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같은 해 6월, 나치 독일 선전성의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하여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1940년(쇼와 15년), 일본의 전시 체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연주가 협회를 발족시켜 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자신의 오페라 "흑선"(초기 제목은 "여명")을 초연했으며, 황기 2600년 기념 봉축 연주회에서는 프랑스 작곡가 자크 이베르가 일본 정부를 위해 작곡한 "축전 서곡"을 지휘했다.
1941년(쇼와 16년), 아사히 문화상을 수상했다. 또한 정보국 산하 단체로 설립된 일본음악문화협회의 부회장으로 취임했으며, 음악 척신대를 결성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점령지에서 음악 지도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당시 장관급 대우를 받으며 군복 차림으로 활동했던 이력은 훗날 그의 전쟁 협력 행위에 대한 비판과 "전범 논쟁"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
1942년(쇼와 17년), 제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쇼와 19년)에는 일본음악문화협회 회장에 취임하며 전시 체제 하 음악계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2.5. 전후 활동과 사망 (1945-1965)
1945년 9월 21일, 종전 후 도쿄도 음악단을 결성하고 단장으로서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전시 중의 행동에 관하여 도쿄신문에서 음악 평론가 야마네 긴지와 전범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이 수그러들 무렵인 1948년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이후 몸이 불편해졌다.
1950년에는 일본지휘자협회 회장에 취임했으며, NHK방송문화상을 수상했다. 1956년에는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이 시기 이혼과 재혼을 계기로 호적상의 이름도 '코우사쿠(耕筰)'로 개명했으며, 사인에는 “Kósçak Yamada”라는 표기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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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1월 상순, 성루가국제병원에 입원했으나, 가족들이 마련한 도쿄도 세타가야구 세이죠의 자택으로 12월 4일 퇴원했다. 그해 12월 29일,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으며, 당시 아내 테루코(Teruko)가 있었다. 향년 79세였다. 묘소는 도쿄도 아키루노시에 있는 쓰키지 본원사 니시타마 영원이다.
3. 주요 작품
야마다 고사쿠는 오페라, 관현악곡, 실내악, 피아노곡, 합창곡, 가곡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약 1,600곡의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예술 가곡(Lieder)은 학교, 지자체, 기업 의뢰 작품을 제외하고도 700여 곡에 달하며, 그중 미키 로후 작사의 아카톤보(붉은 잠자리, 1927)는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노래 중 하나이다. 그의 가곡은 캐슬린 배틀, 어니스트 헤플리거, 메라 요시카즈 등 세계적인 성악가들에 의해 불리고 녹음되었다.
오페라 분야에서는 구로후네(흑선)가 대표작으로 꼽히며, 가장 유명한 일본 오페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관현악 분야에서는 일본 작곡가에 의한 최초의 본격적인 4악장 교향곡인 F장조 교향곡 "승리와 평화"(1912)와 일본 전통 악기를 사용한 교향곡 "메이지 찬가"(1921) 등이 있다. 그는 또한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와 협력하여 다수의 국민 가요와 교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1936년 하계 올림픽 예술 경연대회 음악 부문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작품, 특히 관현악곡과 실내악곡은 악보가 출판되지 않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실되어 연주될 기회가 적었다. 현재 그의 악보 대부분은 일본 근대 음악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최근 일부 작품의 복원 및 출판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야마다 고사쿠 작품의 저작권 보호 기간은 2015년 12월 31일부로 만료되었다.
3.1. 오페라
* 아야메 (붓꽃) (1931)
* 구로후네 (흑선) (1940)
* 향비 (1946) (4막 7장, 서곡 포함 – 향비 참조)
3.2. 관현악곡
야마다 고사쿠는 일본 근대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곡가로, 다수의 관현악곡을 남겼다. 그의 F장조 교향곡 "승리와 평화"(1912)는 일본 작곡가가 쓴 최초의 완전한 4악장 교향곡으로 평가받는다. 이 교향곡의 서주에는 펜타토닉 음계(G-A-D-E)를 기반으로 한 주제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가가쿠의 영향을 받은 일본 국가(기미가요)를 연상시킨다. 또한, 그의 교향곡 "메이지 찬가"(1921)는 히치리키와 같은 일본 전통 악기와 다른 아시아 악기들을 관현악 편성에 포함시킨 점이 특징적이다.
야마다의 관현악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서곡 D장조 (1912)
* 교향곡 F장조 "승리와 평화" (1912)
* 교향시 쿠라이 토비라 (1913)
* 교향시 마다라노 하나 (1913)
* 발레 교향곡 마리아 막달레나 (1918) (발레를 위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작곡되었으며, 카네기 홀에서 초연되었다.)
* 교향곡 "메이지 찬가" (1921)
* 나가우타 교향곡 "학과 두루미" (성악, 샤미센, 관현악 편성) (1934)
* 서곡 C장조
* 『기미가요』에 의한 즉위식 축하 전주곡
* 관현악곡 『별의 세계로』 (키시다 모쿠타로의 희곡에 의함)
* 관현악곡 『나도 모른다』 (무샤코지 사네아쓰의 희곡에 의함)
* 무도 시곡 『푸른 불꽃』
* 무도 시곡 『명암』
* 무도 시곡 『맹조』
*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곡
야마다의 관현악곡 중 상당수는 미출판 상태이며, 자필 악보의 대부분이 전쟁으로 소실되어 필사본 형태로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로 출판되거나 연주될 기회가 적었다. 악보의 대다수는 일본 근대 음악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 가극 협회가 관리하고 있다. 1997년 춘추사에서 작품 전집 제1권으로 관현악곡 악보가 출판되었으나, 파트 악보는 제작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일본 가극 협회의 감수 하에 주식회사 크래프톤에 의해 일부 악보의 교정 및 대여 악보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3.3. 실내악
* 현악 사중주 제1번 F장조
* 현악사중주 제2번 G장조
* 현악 사중주 제3번 C단조
* 피아노 오중주를 위한 Hochzeitsklänge독일어 (결혼의 울림) (1913)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Chanson triste japonaise프랑스어 (1921)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Suite japonaise프랑스어 (1924)
*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この道일본어 변주곡 (1930)
3.4. 피아노곡
* 새해 전야 (1903)
* 변주곡 (1912)
* 새벽의 종소리 (1916)
* 스크랴빈에게 바치는 시들 (1917)
* 피아노 독주를 위한 카라타치노 하나 (탱자꽃) (1928)
* 《겐지 이야기 그림책》(전7곡)
3.5. 합창곡
* 혼성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가을 축제 (1912년) - 에두아르트 뫼리케 작사. 베를린 왕립 고등 음악학교 졸업 작품으로 작곡되었다.
* 칸타타 성전 찬가 대륙의 여명
3.6. 가곡
야마다 고사쿠는 약 1600곡의 작품을 작곡했는데, 그중 예술 가곡(Lieder)은 학교, 지자체, 회사의 의뢰 작품을 제외하더라도 700곡에 달한다. 그의 가곡 중에서는 기타하라 하쿠슈가 작사한 "아카톤보"(붉은 잠자리, 1927)가 특히 유명하다. 그의 노래는 캐슬린 배틀, 어니스트 헤플리거, 메라 요시카즈 등 많은 유명 가수들에 의해 공연되고 녹음되었다.
야마다는 기타하라 하쿠슈와 공동으로 수많은 국민적 가요와 교가 등을 작곡하기도 했다.
다음은 야마다 고사쿠의 주요 가곡 목록이다.
* "아이얀의 노래" (1922)
* 중국 지방의 자장가 (편곡)
* 카라타치노 하나 (작사: 기타하라 하쿠슈)
* "페치카"
* 이 길 (작사: 기타하라 하쿠슈)
* 아카톤보 (붉은 잠자리) (1927)
* "유인"
* "쓸쓸한 밤의 노래" (1920)
4. 평가 및 논란
기타하라 하쿠슈와 공동으로 여러 국민가요와 교가 등을 작곡했다.
야마다의 관현악곡이나 실내악곡 등은 출판되지 않은 작품이 많으며, 자필 악보의 상당수가 전쟁으로 소실되어 필사본으로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아 연주될 기회가 적다. 악보 대부분은 일본 근대 음악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 가극 협회가 관리하고 있다. 1997년 춘추사에서 작품 전집의 일부로 관현악곡 악보가 출판되었으나, 파트 악보는 제작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일본 가극 협회의 감수 아래 주식회사 크래프톤([http://www.craftone.co.jp/ 크래프톤])이 일부 악보의 교정 및 대여 악보 제작을 진행하고 있다.
2015년 12월 31일부로 야마다 고사쿠 작품의 저작권 보호 기간이 만료되었다.
4.1. 부정적 평가
여성 관계가 문란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연회석에서의 음담패설과 음담가요도 유명했다고 전해진다. 제자인 다카기 토우로쿠(高木東六)는 "연회석에서는 3분의 2 이상이 음담패설이었다고 들었다"고 증언했으며, 또 다른 제자인 단 이쿠마(團伊玖磨)는 "현대라면 성희롱으로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야마다의 화술이 능숙하여 그 이야기가 크게 음란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에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 수행을 독려하는 다수의 음악을 작곡하여 전쟁에 협력했다는 비판이 있다. 모리와키 사키코는 자신의 저서에서 야마다 고사쿠가 107곡의 전쟁 협력 음악을 작곡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곡들은 다음과 같다.
* 타오르는 창공(燃ゆる大空)
* 날개의 개가
* 미영 격멸의 노래(米英撃滅の歌)
* 아츠섬 결전 용사 헌장 국민가(アッツ島決戦勇士顕彰国民歌)
* 사이판 순국의 노래(サイパン殉国の歌)
* 여명에 서다(曙に立つ)
* 소국민 결의의 노래(小国民決意の歌)
* 난데 공습(なんだ空襲)
4.2.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내용 없음)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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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는 약 1600곡의 작품을 남겼으며, 이 중 예술 가곡(Lieder)은 학교, 지자체, 회사의 의뢰 작품을 제외하고도 700곡에 달한다. 그의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는 아카톤보(붉은잠자리, 1927)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노래들은 캐슬린 배틀, 어니스트 헤플리거, 메라 요시카즈 등 많은 유명 가수들에 의해 공연되고 녹음되었다. 그의 오페라 구로후네(흑선)는 가장 유명한 일본 오페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의 F장조 교향곡 "승리와 평화"(1912)는 가가쿠를 기반으로 한 일본 국가를 반영하는 펜타토닉 음계(G-A-D-E) 주제를 서주에 사용했으며, 일본 최초의 4악장 구성 교향곡이었다. 또한 교향곡 "메이지 찬가"(1921)에는 히치리키와 같은 일본 전통 악기 및 다른 아시아 악기들이 포함되었다. 그의 작품은 1936년 하계 올림픽 예술 경연대회 음악 부문에서 연주되기도 했다.
지휘자로서 야마다는 서양 오케스트라 작품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힘썼다. 그는 일본에서 클로드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조지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 알렉산더 모솔로프의 철강 공장, 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번,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푸른 도나우 강, 리하르트 바그너의 지그프리트 이딜 등을 초연 지휘했다. 또한 자크 이베르가 1940년 일본 건국 기념일 260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천황과 정부에 헌정한 축전 서곡을 초연 지휘하기도 했다.
야마다는 1965년 12월 29일 도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당시 부인 테루코(Teruko)가 곁을 지켰다.
주요 음반
*《야마다 고사쿠 기념 음반 – 모과꽃》 – 컬럼비아 BLS-4001 (1966?)
*장-피에르 람팔(플루트)와 앙상블 루네르가 녹음한 "아카 톤보", 야시로 아키오 편곡, 《일본 민요》 소니 뮤직(CBS 레코드), 1978
*고사쿠 야마다, D장조 서곡, F장조 교향곡 '승리와 평화', 그리고 교향시 《어둠의 문》과 《마다라노하나》, 울스터 오케스트라와 뉴질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유아사 다쿠오 지휘. 낙소스, 2004
*고사쿠 야마다, 《나가우타 교향곡》 "츠루카메", 《메이지 찬가》, 《마리아 막달레나》, 도쿄 메트로폴리탄 심포니 오케스트라, 유아사 다쿠오 지휘. 낙소스, 2007
작곡한 교가
야마다는 여러 교육기관의 교가를 작곡했다.
| 학교 | 교가명 | 작사자 |
|---|---|---|
| 이와테 의학 전문학교 (현: 이와테 의과대학) | 교가 | 토이 반스이 |
| 시바우라 공업대학 | 교가 | 기타하라 하쿠슈 |
| 도쿄대학 (운동회가) | 「대공과」 | 기타하라 하쿠슈 |
| 니혼 대학 | 교가 | 소마 기후 |
| 추오 대학 | 제2교가 | 고바야시 이치로 |
| 메이지 대학 | 「흰 구름 흐르는」 | 코다마 카가이 |
| 도요 대학 | 「아시아의 혼」 | 하야시 코케이 |
| 고마자와 대학 | 교가 | 기타하라 하쿠슈 |
| 도쿄 미술학교 (현: 도쿄 예술대학) | 교가 | 가와지 류코 |
| 도쿄 고등 사범학교·도쿄 문리과대학 (후: 도쿄 교육대학) | 「푸른 구름 하늘 높이」 | 기타하라 하쿠슈 |
| 도쿄 고등 상선학교 (현: 도쿄 해양대학 공학부) | 교가 | 기타하라 하쿠슈 |
| 히토츠바시 대학 | 「히토츠바시의 노래(무사시노 깊은)」 | 은행회 동인 |
| 간사이 대학 | 학가 (1922년) | 하토리 요시카 |
| 간사이 가쿠인 대학 | 교가 | |
| 류코쿠 대학 | 학가 | 학가 제작 위원회 |
| 마쓰야마 고등 상업학교 (현: 마쓰야마 대학) | 교가 | 누마나미 타케오 |
| 규슈 법학교 (현: 규슈 국제대학) | 교가 | 타카기 코센 |
| 도요 에이와 여자학원 대학 | 교가 | 기타하라 하쿠슈 |
5.1. 에피소드
* 1914년, 미쓰비시 재벌 총수 이와사키 코야타의 후원으로 조직된 도쿄 필하모닉 협회 관현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맡았으나, 야마다 본인의 연애 문제가 원인이 되어 이와사키의 지원이 끊기고 악단은 다음 해 해산되는 일을 겪었다.
* 1924년 코노에 히데마로와 함께 일본 교향악 협회(현재 NHK 교향악단의 전신)를 창단했으나, 불투명한 회계 처리 문제로 내분이 일어났다.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아버지인 바이올리니스트 쿠로야나기 모리츠나 등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단원이 코노에를 따라 탈퇴하면서 야마다 측은 큰 타격을 입었다.
* 1925년에는 점성술에 관한 책인 『탄생월의 신비』를 출판했다. 야마다는 이 책이 외국 서적의 번역이라고 밝혔으나, 원본이 되는 책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책은 여러 차례 재출간되며 꾸준히 읽혔다.
* 1930년(쇼와 5년), 원래 이름 '코사쿠'(耕筰)를 '코우사쿠'(耕作)로 개명했다. 이후 1956년경 이혼과 재혼을 거치면서 호적상의 이름도 '코우사쿠'(耕作)로 공식 변경했다. 서명에는 “Kósçak Yamada”라는 독특한 표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5년, 전쟁 시기 일본음악문화협회 회장을 맡는 등 군국주의 체제에 협력했던 행적이 문제가 되어 음악 평론가 야마네 긴지와 도쿄신문 지면을 통해 소위 '전범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5.2.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비고 |
|---|---|---|
| 부친 | 야마다 켄조(山田謙造) | 의사, 기독교 선교사. 구 후쿠시마번 출신. 1896년 야마다가 10세 때 사망했다. |
| 모친 | 히사(久) | 이타쿠라번 메부케(目付)의 딸. 켄조와 재혼했다. |
| 누나 | 간틀렛 코우(ガントレット恒) | 야마다가 13세 때 오카야마의 양충학교에 입학하도록 도왔다. 남편은 Edward Gauntlett영어으로, 야마다는 그에게 서양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
| 전처 | 나가이 이쿠코(성악가) | 성악가. 1915년 결혼했으나 이듬해 이혼했다. (1893-1983) |
| 전처 | 무라카미 기쿠오(河合磯代) | 어린 시절 친구이자 제국극장 여배우. 1916년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으나 1956년 이혼했다. (1893년생) |
| 후처 | 츠지 테루코(辻輝子) | 성악가. 1956년 결혼했으며, 야마다 사망 당시 부인이었다. (1907-1973) |
| 장녀 | 미사(美沙) | 1917년생. (어머니: 무라카미 기쿠오) |
| 장남 | 야마다 코우지(山田耕嗣) | 1920년생. 아카츠키 성(暁星), 게이오기주쿠 대학 졸업. 에어프랑스 등 외국계 회사 근무 후 요코하마 선원 클럽 "유나이티드 시멘스 클럽" 지배인을 지냈다. (어머니: 무라카미 기쿠오) |
| 차녀 | 히사(日沙) | 1926년생. 수녀가 되었다. (어머니: 무라카미 기쿠오) |
| 양녀 | 야마다 코우코(山田浩子) | 일본가극협회(日本楽劇協会) 이사장. |
| 외숙모 | 오츠카 카네(大塚かね) | 한센병 환자를 위한 시설인 위폐원(慰廃園)을 남편이자 목사인 오츠카 마사코린(大塚正心)과 함께 운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