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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자키 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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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마자키 도손은 1872년 일본에서 태어난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일본 근대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낭만주의 시인으로 시작하여 자연주의 문학을 선도했으며, 소설 《파계》를 통해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그의 작품은 개인의 내면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으며, 자전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시집 《와카나집》, 소설 《파계》, 《집》, 《신생》 등이 있으며, 그의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는 국제 펜클럽 일본 지부 초대 회장을 역임했고, 1943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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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자키 도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시마자키 도손
''
본명시마자키 하루키 (島崎 春樹)
출생일1872년 3월 25일
출생지일본, 기후현나카쓰가와시마고메
사망일1943년 8월 22일
사망지일본, 가나가와현오이소
직업시인
소설가
국적일본
모어일본어
학력메이지가쿠인 본과
문학 활동
활동 기간1897년 - 1943년
장르
소설
사조낭만주의
자연주의 문학
주요 작품와카나슈 (1897년, 시집)
파계 (1906년)
봄 (1908년)
집 (1911년)
지쿠마강의 스케치 (1912년)
벚나무 열매가 익을 때 (1919년)
신생 (1919년)
아라시 (1926년)
여명 전 (1929년 - 1935년)
수상
수상아사히 문화상 (1936년)
가족 관계
친척우에다 리히토 (현손, 아역 배우)

2. 생애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은 1872년 나가노현 마고메주쿠(현재 기후현 나카쓰가와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하루키(春樹)이다. 아버지 시마자키 마사키는 국학자였으나 정신 질환을 앓았고, 도손이 14세 때 감금된 상태에서 사망했다. 이는 도손의 삶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1]

1881년 도쿄로 상경하여 교육을 받았고, 1887년 메이지 학원에 입학하여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 이곳에서 바바 코초, 토가와 슈코츠 등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 졸업 후 잠시 메이지 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으나 곧 사직하고, 1893년 기타무라 도코쿠 등과 함께 문학 잡지 『문학계』를 창간하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1]

1896년 센다이의 도호쿠 학원 교사로 부임하여 시 창작에 몰두했다. 1897년 첫 시집 『와카나집』(若菜集|와카나슈일본어, 새싹집)을 발표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히토하부네』(一葉舟, 일엽편주), 『나쓰쿠사』(夏草, 여름풀)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메이지 시대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901년 마지막 시집 『라쿠바이슈』(落梅集, 낙매집)를 끝으로 시 창작을 중단하고 산문으로 전환을 모색했다.

1906년 첫 장편 소설 《파계》(破戒)를 발표하며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인정받았다. 이 소설은 부라쿠민 출신임을 숨기고 살아가는 주인공의 고뇌를 그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1][2] 이후 자전적 성격의 소설 《봄》(1908), 《집》(1910-1911) 등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1][3]

1910년 아내 후유코가 사망한 후, 집안일을 돕던 조카 코마코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임신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1913년 이 문제를 피해 프랑스로 건너갔으나, 귀국 후 1918년 이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신생》(新生)을 발표하여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1]

1928년 가토 시즈코와 재혼했으며, 1929년부터 아버지 시마자키 마사키를 모델로 한 대하 역사 소설 《여명 전에》(夜明け前)를 집필하여 1935년 완간했다. 이 작품은 메이지 유신 전후의 격동기를 그린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1][4][6]

말년에는 일본 펜클럽 초대 회장(1935)을 맡고, 1940년 제국 예술원 회원이 되는 등 문단의 원로로서 활동했다. 전시 체제 하에서는 「전진훈」 작성에 참여하고 일본 문학 보국회 명예 회원이 되는 등 체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43년 8월, 《동방의 문》(東方の門)을 집필하던 중 가나가와현 오이소정 자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1][2]

2. 1. 초기 생애 (1872-1891)

1872년3월 25일 (메이지 5년 음력 2월 17일), 지쿠마현 제8대구 5소구 마고메 촌[16] (이후 나가노현을 거쳐 현재의 기후현 나카쓰가와시 마고메)에서 아버지 시마자키 마사키와 어머니 누이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878년 (메이지 11년) 가미사카 학교에 입학하여 아버지로부터 『효경』과 『논어』를 배웠다.[1]

1881년 (메이지 14년), 9세 때 교육을 받기 위해 형과 함께 도쿄로 상경했다. 타이메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타 영학교(현 킨조가쿠엔 고등학교 전신), 쿄리츠 학교(현 카이세이 고등학교 전신) 등 당시의 진학 예비학교에서 수학했다.[1] 아버지 마사키는 점차 기이한 행동과 환각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가족에 의해 집에 지어진 감옥에 감금되었고, 도손이 14세이던 1886년 (메이지 19년) 11월에 고향에서 사망했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은 이후 도손의 문학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맏누이 역시 만년에 정신 질환을 앓았다.[1]

1887년 (메이지 20년) 9월, 기독교 계열 학교인 메이지 학원 보통부 본과(현 메이지가쿠인 대학의 전신)에 입학했다. 재학 중 서양 문학에 심취하는 한편, 마쓰오 바쇼사이교 등 일본 고전 문학도 깊이 공부했다. 쿄리츠 학교 시절 은사의 영향으로 1888년 (메이지 21년) 6월, 기무라 구마지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1] 메이지 학원에서 수필가이자 번역가인 바바 코초, 토가와 슈코츠, 나카지마 쿠마키치 등과 교류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 학생 문학 잡지인 ''Sumire-gusa''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으나, 이 잡지는 당시 학원 총장인 이와모토 요시하루에 의해 발간이 금지되었다.[1]

메이지 학원 24년도 졸업 사진,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후지무라, 네 번째가 토가와 슈코츠, 중앙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바바 코초


1891년 (메이지 24년) 6월, 메이지 학원 본과를 제1기 졸업생으로 졸업했으며, 교가 작사에도 참여했다. 졸업 후 잠시 이와모토 요시하루가 발행하는 잡지 『여학잡지』에 번역을 기고하며 소액의 봉급을 받았다.[1]

2. 2. 문학계 활동과 낭만주의 시인 (1891-1905)

졸업 후, 『여학잡지』에 번역문을 기고했으며, 1892년 9월, 20세의 나이로 메이지 여학교 고등과 영어과 교사가 되었다. 이듬해인 1893년, 교류하던 기타무라 도코쿠, 호시노 덴치 등과 함께 문학 잡지 『문학계』(文學界) 창간에 참여하여 동인으로서 극시와 수필을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재직 중 제자였던 사토 스케코(佐藤輔子)와의 사랑 문제로 교사로서의 자책감을 느껴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학교를 사직했다. 이후 잠시 간사이 지방을 방랑하다가 1894년 여학교에 복직했으나, 그해 기타무라 도코쿠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겪었다. 또한 형 히데오(秀雄)가 수도 철관 공사와 관련된 부정 혐의로 수감되고, 이듬해인 1895년에는 사토 스케코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등 개인적인 시련이 이어졌다.[18] 결국 도손은 1895년 다시 메이지 여학교를 사직했으며,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소설 『봄』(春)의 소재가 되었다.

1896년 9월 8일, 도호쿠 학원의 교사로 부임하여 약 1년간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지냈다.[19] 같은 해 10월 25일 어머니의 부고를 접한 그는, 당시 거주하던 히로세강이 내려다보이는 하세쿠라마치(支倉町)의 집에서 본격적으로 시 창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후 센다이역 근처의 미우라야(三浦屋) 여관으로 거처를 옮겨 첫 시집 『와카나집』(若菜集, 새싹집)을 집필했다.[19][20]

1897년 『와카나집』을 발표하며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했으며, 이 시집은 근대인의 감수성을 섬세하게 담아내 일본 근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히토하부네』(一葉舟, 일엽편주), 『나쓰쿠사』(夏草, 여름풀)를 연이어 발표하며 메이지 시대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당시 미야기현 센다이 출신의 시인 도이 반스이와 함께 두 사람의 이름(도손의 藤, 반스이의 晩)을 딴 "도반 시대"(藤晩時代) 또는 "반도 시대"(晩藤時代)로 불리며 일본 낭만주의 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01년 마지막 시집 『라쿠바이슈』(落梅集, 낙매집)를 간행하며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이후 시에서 산문으로 창작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도손의 시 중 일부는 가곡으로 만들어져 현재까지도 널리 불리고 있다. 특히 『낙매집』에 수록된 「야자 열매」(椰子の実)는 야나기타 구니오에게 들은, 아이치현 이라코곶 해안에 야자 열매가 떠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시로, 1936년 오나카 도라지가 작곡하여 국민적인 애창곡이 되었다. 같은 시집의 「치쿠마강 여정의 노래」(千曲川旅情の歌) 역시 1925년 히로타 류타로에 의해 작곡되어 널리 알려졌다.

2. 3. 소설가로의 전향과 자연주의 문학 (1905-1943)

시마자키 도손, 1900년경


1899년 (메이지 32년) 나가노현 기타사쿠군 고모로정의 고모로 기주쿠 영어 교사로 부임하여 6년간 머물렀다(고모로 시대). 이 시기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출신의 하타 후유코와 결혼했고[22], 이듬해 장녀 미도리가 태어났다.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점차 산문으로 창작 방식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고모로를 중심으로 한 지쿠마강 일대를 묘사한 사생문 「지쿠마강의 스케치」를 쓰며 시와의 결별을 모색했다. 1901년 마지막 시집 ≪낙매집≫을 발표한 후 본격적으로 '시에서 산문'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1905년 (메이지 38년) 고모로 기주쿠를 사임하고 도쿄로 돌아왔다. 1906년 (메이지 39년) 「녹음총서」 제1편으로 첫 장편 소설 《파계》를 자비 출판했다.[1][2] 이 소설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라쿠민 신분을 숨겨야 하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그리며,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영향 아래 작가 자신의 문제를 투영하여 근대적 자아를 탐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파계》는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으로 즉시 매진되었고 문단의 절찬을 받았다. 그러나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영양실조로 인해 세 딸이 잇따라 사망했으며, 이는 당시 가족의 재정적 어려움 때문으로 여겨져 작가 시가 나오야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1][3] 《파계》의 등장인물 중 이치무라 대의원은 이와무라다정(현재의 사쿠시 이와무라다)의 다테카와 운페이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이후 도손은 자전적 성격의 소설들을 발표하며 자연주의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1908년 (메이지 41년)에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그림에서 제목을 딴 《봄》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1893년부터 1896년까지 기타무라 도코쿠 등 낭만주의 운동의 젊은 시인들과 교류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자전적 소설 시리즈의 첫 작품이며, 처음으로 신문에 연재된 작품이기도 하다.[1][4] 1910년부터 요미우리 신문에 연재한 《집》(1910-1911)은 1898년부터 1910년 사이 두 지방 가문(고이즈미 가문과 하시모토 가문)의 쇠퇴를 그린 소설로, 작가의 분신인 산키치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일본 문학계에서 도손의 대표작 중 하나로 널리 인정받는다.[1][3] 그러나 《집》 연재 종료 직후인 1910년 8월, 아내 후유코가 넷째 딸 류코를 낳은 뒤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1]

아내가 사망하자, 둘째 형 히로스케의 딸인 조카 코마코가 집안일을 돕기 위해 도손의 집으로 왔다. 1912년 (메이지 45년/다이쇼 원년) 중반부터 도손은 코마코와 불륜 관계를 맺게 되었고, 곧 그녀는 임신했다. 1913년 (다이쇼 2년) 5월 말, 도손은 친척들과의 문제를 피하기 위해 고베 항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 마르세유로 떠났다.[1] 파리에서 아리시마 이쿠마의 소개로 하숙하며 사와키 시호키치, 가와카미 하지메 등과 교류하고, 『아사히 신문』에 「불란서 소식」을 연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1914년 7월부터 11월까지 화가 마사무네 토쿠사부로와 함께 리모주로 피난하기도 했다.

1916년 (다이쇼 5년) 7월, 영국 런던을 거쳐 고베 항으로 귀국했다. 이듬해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과 강사가 되었다. 1918년 (다이쇼 7년)에는 자신의 불륜 경험과 프랑스 체류, 귀국 과정을 담은 소설 《신생》(1918-1919)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비롯한 독자들과 동료 작가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도손은 이 소설을 통해 코마코와의 관계를 청산하려 했으며, 이 일로 형 히로스케와 장남 히데오로부터 의절당했다. 친척들의 주선으로 코마코는 대만에 있는 백부에게 보내졌고, 이후 두 사람의 접촉은 금지되었다.[1] 《신생》은 예술을 위한 고백, 혹은 떠도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된다. 이 사건 이후 가족들과 소원해져 여동생 소노의 죽음조차 뒤늦게 알게 되었고, 1921년 단편 소설 《어느 여성의 생애》에서 그녀의 마지막 삶을 그렸다.[5] 1926년에는 《신생》 스캔들 이후 자신과 네 자녀의 삶을 그린 《폭풍》을 발표했다.

1928년 (쇼와 3년), 20세 이상 연하인 가토 시즈코와 재혼했다.[1] 이듬해부터 아버지 시마자키 마사키를 모델로 한 대하 역사 소설 《여명 전에》의 집필을 시작하여 1929년 4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주오코론』에 연재했다. 이 소설은 메이지 유신 전후 격동기를 국학 활동가의 시각에서 그린 작품으로, 《집》과 더불어 도손의 대표작이자 가장 인기 있는 소설로 평가받는다.[1][4][6][7][8]

1935년, 야나기사와 겐의 권유로 새로 창립된 일본 펜클럽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2] 1936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하여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이 여행에서 그는 서구의 우월주의와 일본의 공격적 민족주의 양쪽에 내재된 위험성을 지적했다. 1937년에는 개인적인 이유로 제국 예술원 회원 초청을 거절했으나,[2] 1940년 (쇼와 15년)에는 제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41년 (쇼와 16년)에는 당시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의 지시로 만들어진 「전진훈」의 문안 작성에 참여했으며, 1942년 (쇼와 17년)에는 일본 문학 보국회 명예 회원이 되는 등, 시대적 상황 속에서 체제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43년 (쇼와 18년),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의 그림에서 제목을 딴 《동방의 문》 연재를 시작했으나, 같은 해 8월 22일 가나가와현 오이소정의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2] "시원한 바람이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동방의 문》은 두 개의 장만이 완성된 채 미완으로 남았다. 그의 묘는 오이소의 지후쿠지(地福寺)에 있다.

3. 주요 작품

시마자키 도손은 초기에는 낭만주의 시인으로 활동하며 『와카나집』(若菜集일본어) 등 여러 시집을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후 산문으로 전환하여 자연주의 소설을 개척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첫 장편 소설인 『파계』(破戒일본어), 자전적 소설 『가족』(家일본어), 메이지 유신 시기를 다룬 역사 소설 『여명 전』(夜明け前일본어)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시에서 산문으로 이어지는 일본 근대 문학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로 평가받는다.

3. 1. 시집

1892년 메이지 여학교 교사 시절, 기타무라 도코쿠, 호시노 덴치 등과 교류하며 잡지 『문학계』에 동인으로 참여하여 극시와 수필을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18]

1896년 9월 8일, 도호쿠 학원의 교사가 되어 미야기현 센다이시로 부임했다.[19] 같은 해 10월 25일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히로세강이 내려다보이는 하세쿠라마치의 거처에서 본격적으로 시를 짓기 시작했다. 이후 센다이역 근처의 미우라야로 옮겨 첫 시집 『와카나집』(若菜集|일본어) 집필에 몰두했다.[19][20]

1897년 8월, 『와카나집』을 슌요도에서 출간하며 문단에 정식으로 등장했다.[19][20] 이 시집은 근대인의 감정과 사고를 섬세하게 담아내 일본 근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이치요후네』(一葉舟|일본어, 1898년 6월)와 『여름 풀』(夏草|일본어, 1898년 12월)을 슌요도에서 연이어 발표하며 메이지 시대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당시 센다이 출신의 시인 도이 반스이와 함께 "도반 시대"(藤晩時代|일본어) 또는 "반도 시대"(晩藤時代|일본어)로 불리며 일본 시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1년 8월, 마지막 시집인 『낙매집』(落梅集|일본어)을 슌요도에서 출간한 후 시 창작 활동을 점차 줄이고 산문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네 권의 시집은 1904년 9월, 『후지무라 시집』(藤村詩集|일본어)이라는 제목의 합본으로 슌요도에서 다시 출간되었다.

도손의 시 중 일부는 노래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널리 불리고 있다. 『낙매집』에 수록된 「야자 열매」(椰子の実|일본어)는 야나기타 구니오에게 들은 이라코 해안(아이치현)에 야자 열매가 떠내려온다는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로, 1936년 국민 가요의 하나로 선정되어 오나카 도라지가 작곡했다. 같은 시집의 「해변의 노래」(海のほとりにて|일본어)는 슈베르트의 가곡 「백조의 노래」 중 제12곡에 가사를 붙인 것으로, 악보와 함께 시집에 수록되었다.[21] 또한, 「아침」(朝|일본어, 작곡: 오다 신고)과 1925년 히로타 류타로가 작곡한 가곡 「치쿠마강 여정의 노래」(千曲川旅情の歌|일본어) 역시 『낙매집』에 실린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 || 슌요도

|-

| 1898년 6월 || 이치요후네 || 一葉舟|일본어 || 슌요도

|-

| 1898년 12월 || 여름 풀 || 夏草|일본어 || 슌요도

|-

| 1901년 8월 || 낙매집 || 落梅集|일본어 || 슌요도

|-

| 1904년 9월 || 후지무라 시집 || 藤村詩集|일본어 || 슌요도 (※ 위 4권 합본)

|}

3. 2. 소설



1901년 마지막 시집 ≪낙매집≫을 끝으로 시 창작을 멈추고 ‘시에서 산문’으로 전향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 파계 (破戒) ===

1906년 자비로 출판된 《파계》(破戒|하카이일본어)는 시마자키 도손의 첫 장편 소설이자 일본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로 널리 평가받는다.[1][2]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영향을 받았으며, 주인공을 통해 작가 자신의 문제를 투영하여 자아에 눈뜨는 인간의 마음을 그려 근대문학의 중요한 성과로 여겨진다. 내용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라쿠민 신분을 숨겨야 한다는 약속과 자신의 출신을 고백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교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도손은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세 명의 자녀를 병으로 잃었는데, 이는 당시 가족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한 영양실조 때문으로 여겨지며, 이로 인해 작가 시가 나오야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1][3] 《파계》는 출간 즉시 매진되었고, 문단으로부터 본격적인 자연주의 소설이라는 절찬을 받았다.

=== 봄 (春) ===

두 번째 소설 《봄》(春|하루일본어, 1908)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명 그림에서 제목을 따왔다. 이 작품은 1893년부터 1896년까지 낭만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젊은 시인들과의 교류 및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자전적 소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1][4] 《봄》은 도손의 작품 중 처음으로 신문에 연재되었으며, 이후 그의 자체 출판 시리즈인 '녹음총서'(緑蔭叢書)를 통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도손은 책의 표지 디자인을 포함한 제작 전 과정을 직접 감독했다.[1]

=== 가족 (家) ===

《가족》(家|이에일본어, 1910–1911)은 1898년부터 1910년 사이 고이즈미 가문과 하시모토 가문이라는 두 지방 가문의 몰락 과정을 그린다. 주인공인 고이즈미 가문의 막내아들 산키치는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진다. 이 소설은 일본 문학계에서 도손의 입지를 확고히 했으며, 많은 학자들에게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1][3] 1910년 8월, 소설 연재 종료 직후 아내 후유코가 넷째 딸 류코를 낳고 사망했다.[1]

=== 신생 (新生) ===

1913년, 도손은 아내 사후 집안일을 돕던 조카 코마코(형 히로스케의 딸)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임신시키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친척들과의 갈등을 피해 프랑스로 떠났지만, 1916년 귀국했다. 소설 《신생》(新生|신세이일본어, 1918–1919)은 이 불륜 사건과 프랑스 체류, 귀국 과정을 다루며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이 일로 도손은 형 히로스케 등 친척들과 의절당했으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비롯한 독자들과 동료 작가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신생》은 예술지상주의적 작품, 고백록, 의도적인 스캔들 유발, 혹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된다. 소설 발표 후 코마코는 도손과의 결혼을 원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더 이상 접촉하지 못하게 되었다.[1]

=== 어떤 여자의 생애 (ある女の生涯) ===

《신생》 출판 이후 가족들과 소원해진 도손은 가장 가까웠던 여동생 소노의 죽음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그는 1921년 단편 소설 《어떤 여자의 생애》(ある女の生涯|아루 온나노 쇼가이일본어)를 통해 주로 요양 시설에서 보낸 여동생의 마지막 삶을 그렸다.[5]

=== 폭풍 (嵐) ===

《폭풍》(嵐|아라시일본어, 1926)은 《신생》 스캔들 이후 도손 자신과 네 자녀의 생활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 여명 전 (夜明け前) ===

1928년부터 집필 준비를 시작하여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연재된 《여명 전》(夜明け前|요아케 마에일본어)은 메이지 유신 시기를 국학 사상을 가진 지방 활동가의 시각에서 그린 역사 소설이다. 주인공 아오야마 한조는 도손의 아버지 시마자키 마사키를 모델로 하고 있다. 《여명 전》은 《가족》과 더불어 도손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그의 소설 중 가장 큰 인기를 얻었다.[1][4][6][7][8]

=== 동방의 문 (東方の門) ===

1943년, 도손은 《여명 전》의 속편 격인 《동방의 문》(東方の門|토호노 몬일본어)의 연재를 시작했다. 제목은 프랑스 화가 피에르 퓌비 드 샤반의 그림에서 따왔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22일, 오이소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하면서(향년 71세) 두 개의 장만이 완성된 채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1][2]

=== 주요 소설 작품 목록 ===

발간 연도제목원제출판사
1897년 8월와카나집{{lang|ja|若菜集|}
발표 연도제목 (원제)비고
1906년파계 (破戒)최초의 장편 소설, 자비 출판
1908년봄 (春)자비 출판
1911년가족 (家)자비 출판
1919년벚나무 열매가 익을 때 (桜の実の熟する時)춘양당 출판
1919년신생 (新生)춘양당 출판 (전 2권)
1921년어떤 여자의 생애 (ある女の生涯)신초샤 출판
1926년폭풍 (嵐)개조사 출판
1935년여명 전 (夜明け前)신초샤 출판 (전 2권, 1929년, 1935년)
1943년동방의 문 (東方の門)미완


3. 3. 사생문

1899년 고모로 기주쿠의 영어 교사로 나가노현 기타사쿠군 고모로정에 부임한 시마자키 도손은 이후 6년간 이곳에서 생활했다. 이 시기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산문 중심으로 창작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그는 고모로를 중심으로 한 지쿠마강 일대의 풍경과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사생문 「지쿠마강의 스케치」를 집필하며, 이를 통해 이전까지 주력했던 시 창작에서 벗어나려 했다. 「지쿠마강의 스케치」는 1912년 12월에 출간되었다.

4. 작품의 특징과 영향

시마자키 도손의 문학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개척하고 이끈 선구자적 역할과 함께, 자신의 삶과 경험을 깊이 투영한 자전적 성격, 그리고 당대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사회 비판적 시각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초기 시인 활동 이후 산문으로 전향한 도손은 첫 장편 소설 《파계》(1906)를 통해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중요한 시작을 알렸다.[1][2] 이 작품은 부라쿠민 출신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을 통해 당시 사회의 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압박 사이의 고뇌를 사실적으로 그려내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봄》(1908), 《》(1910) 등을 발표하며 자연주의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의 작품 세계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강한 자전적 요소이다. 《봄》은 자신의 청년 시절 문학 활동을,[1][4]》과 《가족》(1910-1911)은 자신의 집안과 친척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 가문의 몰락 과정을 그렸다.[1][3] 특히 조카와의 근친상간 경험을 고백적으로 다룬 《신생》(1918–1919)은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며 작가의 사생활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불러왔다.[1] 후기 대표작인 역사 소설 《여명 전에》(1929–1935)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인물을 통해 메이지 유신 전후의 격동기를 그려내며 자전적 성격을 드러낸다.[1][4]

이러한 자전적 서사는 단순히 개인사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대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통로로 작용하기도 했다. 《파계》의 신분 차별 문제 제기, 《가족》에서의 봉건적 가족 제도의 모순 지적, 《신생》을 통한 사회적 위선과 금기에 대한 도전, 《여명 전에》에서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비판적 성찰 등[1][4][6][7][8] 그의 작품들은 개인의 삶과 시대적 고민을 긴밀하게 연결하며 일본 근대 사회의 다양한 단면을 깊이 있게 조명했다.

4. 1.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

시인으로 활동하던 시마자키 도손은 1901년 마지막 시집 ≪낙매집≫을 발표한 후 시 창작을 멈추고 산문으로 전향하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06년 발표한 장편 소설 파계는 일본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도손을 자연주의 소설가로 인정받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파계≫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지만, 주인공을 통해 작가 자신의 고민을 투영하며 자아에 눈뜨는 인간의 내면 심리를 사실적으로 그려내 일본 근대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첫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소설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빛나는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파계≫ 발표 이후 도손은 장편 소설 ≪봄≫(1908)과 ≪≫(1910)을 연이어 발표하며 자연주의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그의 소설들은 개인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당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담아내며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이끄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이후 발표한 ≪신생≫(1918)은 조카딸과의 관계를 소재로 다루어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4. 2. 자전적 소설



시마자키 도손의 소설은 자신의 삶과 경험, 가족사를 깊이 반영하는 자전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의 문학 세계는 개인적인 고백과 성찰을 통해 시대의 모습을 담아내려는 시도로 점철되어 있다.

도손의 첫 소설 《파계》(1906)는 부라쿠민 출신 교사가 자신의 출신을 숨겨야 하는 사회적 압박과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를 다루며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효시로 평가받는다.[1][2] 이 작품 집필 당시 도손은 세 자녀를 병으로 잃었는데, 이는 당시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관련이 있다는 비판을 시가 나오야 등으로부터 받기도 했다.[1][3] 이러한 개인적 고통은 이후 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자전 소설의 시작은 《봄》(1908)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1893년부터 1896년까지, 기타무라 도코쿠 등 젊은 문학가들과 교류하며 잡지 ≪문학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자신의 청년 시절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1][4]

이후 발표된 《》(1910)과 《가족》(1910-1911)은 도손 자신의 집안과 친척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메이지 시대 두 지방 가문(고이즈미 가문과 하시모토 가문)의 점진적인 몰락 과정을 상세하게 그렸다. 특히 《가족》의 주인공 산키치는 작가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지며, 이 작품은 일본 문단에서 도손의 입지를 확고히 한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1][3]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연재된 《신생》은 도손의 자전적 소설 중 가장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첫 아내 후유코가 사망한 후 집안 살림을 돕던 조카 고마코(형 히로스케의 딸)와의 근친상간 관계, 그로 인한 임신, 관계를 숨기기 위한 프랑스 도피, 그리고 귀국까지의 과정을 고백적으로 담아냈다.[1] 이 소설은 작가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는 점에서 큰 스캔들이 되었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비롯한 동료 작가들과 독자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불륜 사실을 숨기려 했던 형 히로스케를 포함한 가족들과의 관계 단절을 초래하기도 했다.[1] 그럼에도 《신생》은 예술을 위한 고백, 사회적 금기에 대한 도전, 혹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 등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다.[1]

도손은 이후에도 자신의 삶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단편 《어느 여성의 생애》(1921)에서는 병고에 시달리다 주로 요양 기관에서 마지막 생을 보낸 여동생 소노의 삶을 그렸고,[5] 《폭풍》(1926)에서는 《신생》 스캔들 이후 자신과 네 자녀의 삶의 모습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역사 소설 《여명 전에》(1929–1935) 역시 메이지 유신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격변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주인공 아오야마 한조는 국학 활동가였던 자신의 아버지 시마자키 마사키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이를 통해 아버지 세대의 이상과 좌절을 그리면서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탐구하려는 자전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1][4]

4. 3. 사회 비판적 시각



시마자키 도손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당대 일본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특히 봉건적인 신분 제도의 잔재, 전통적인 가족 관계의 모순, 여성에 대한 억압 등을 주요 주제로 다루었다.

그의 첫 소설인 《파계》(1906)는 부라쿠민 출신 교사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1][2] 주인공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차별적인 신분을 비밀로 하라는 약속과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는 당시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던 신분 차별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 이 작품은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가족》(1910–1911)에서는 근대화 과정 속에서 몰락해가는 두 지방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 전통적인 가족 제도가 해체되는 모습과 그 안에서 개인이 겪는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1][3]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당대 가족 관계의 복잡한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루었으며, 시마자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킨 《신생》(1918–1919)은 작가 자신의 조카딸과의 불륜 관계를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이다.[1] 이 작품은 개인적인 고백을 넘어, 당시 사회의 도덕적 위선과 폐쇄적인 가족 관계의 이면을 드러내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인간 내면의 욕망과 사회적 규범 사이의 갈등을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또한 단편 소설 《어느 여성의 생애》(1921)에서는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자신의 여동생 이야기를 통해 여성이 겪는 사회적 억압과 고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5]

역사 소설 《여명 전에》(1929–1935)는 메이지 유신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혼란과 좌절을 겪는 지방 지식인의 삶을 통해 근대화 과정의 어두운 단면을 비판적으로 조명했다.[1][4][6][7][8] 주인공 아오야마 한조는 시마자키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인물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통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개인의 비극을 보여준다.

이처럼 시마자키 도손은 자신의 문학 작품을 통해 신분 차별, 가족 문제, 여성 억압 등 당대 사회의 모순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비판함으로써 일본 근대 문학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4. 4. 한국 문학에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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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및 논란

시마자키 도손은 일본 근대 문학, 특히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초기 시집과 첫 장편 소설 ≪파계≫ 등을 통해 일본 근대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작품 활동에는 심각한 논란 또한 존재한다. ≪파계≫ 집필 당시 세 자녀가 영양실조로 사망한 일과 관련하여 작가로서의 책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1][3] 특히 조카 시마자키 고마코와의 근친상간 관계 및 이를 상세히 묘사한 소설 ≪신생≫의 발표는 당대에 큰 사회적 파문과 함께 동료 작가 및 독자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1] 이처럼 그의 문학적 업적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삶에서 드러난 윤리적 문제들은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5. 1. 긍정적 평가

시마자키 도손은 일본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초기 시집 ≪새싹집≫은 근대인의 감정과 사고를 섬세하게 담아내어 일본 근대시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일엽편주≫, ≪여름풀≫ 등을 발표하며 메이지 시대 낭만주의 시인으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1906년에 발표한 첫 장편 소설 ≪파계≫는 그의 문학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주인공을 통해 작가 자신의 내면적 고뇌를 투영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일본 근대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파계≫는 자연주의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이를 계기로 도손은 일본 문단에서 주요 자연주의 소설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뛰어난 문학성을 바탕으로 근대인의 내면과 시대상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5. 2. 부정적 평가와 논란

시마자키 도손의 첫 소설 《파계》(1906) 집필 당시, 그의 세 자녀가 병으로 사망했다. 이는 당시 가족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한 영양실조 때문으로 여겨지며, 이로 인해 시마자키는 작가 시가 나오야를 비롯한 많은 이들에게서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1][3]

1913년, 시마자키는 오랫동안 부양해 온 형 히로스케의 딸이자 조카인 코마코와 불륜 관계를 맺고 그녀를 임신시켰다. 그는 친척들과의 대립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로 도피하여 코마코를 남겨두었으나, 1916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코마코와의 불륜, 프랑스 체류, 귀국 과정을 다룬 소설 《신생》(1918–1919)을 발표하여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 일로 시마자키는 불륜 사실을 숨기려 했던 형 히로스케와 히데오에게 의절당했으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같은 독자 및 동료 작가들로부터도 심한 비판에 직면했다.[1] 《신생》은 예술을 위한 예술, 고백, 의도적인 파문 유발, 혹은 떠도는 소문을 차단하기 위한 공개적 해명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소설을 읽은 코마코는 시마자키와 결혼하기 위해 가족의 동의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두 사람은 더 이상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었다.[1]

5. 3. 가족 관계

시마자키 도손의 집안은 나가노현 마고메주쿠(현 기후현 나카쓰가와시 마고메)에서 대대로 혼진, 쇼야, 도야를 겸임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그의 조상은 사가미국 미우라반도 쓰쿠이(현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유래한 미우라씨 일족으로, 시마자키 시게쓰나 대에 기소 요시마사를 섬기며 기소 계곡으로 이주했다. 장남 시게미치가 마고메를 개척하여 나카센도의 역참 마을로 정비한 이래 대대로 지역 유지 역할을 맡았다.

도손은 아버지 시마자키 마사키와 어머니 누이 사이에서 7남매 중 막내(넷째 아들)로 태어났다.[16] 그의 가족사는 순탄치 않았으며, 이는 그의 문학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도손 자신도 작품 속에서 "친가로부터 물려받은 우울"을 여러 차례 언급했으며, 이는 아버지와 큰누나의 정신 질환, 바로 위 형의 출생 배경, 그리고 조카 시마자키 고마코와의 근친상간 등 복잡한 가족사와 관련이 있다.

아버지 마사키는 히라타파 국학자이자 시마자키 가문 17대 당주였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 개화의 흐름에 실망하고 기소 산림 해방 운동에 투신하다가 관직에서 면직되고 가세를 기울게 했다. 이후 교부성 고용, 히다이치노미야 미나시 신사 구지 등을 역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했다. 행차 중인 메이지 천황에게 우국적인 시를 적은 부채를 던져 불경죄 혐의를 받는 등 좌절을 겪다가 결국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집안에 마련된 다다미방 감옥에 갇혀 지내다 도손이 14세 때 사망했다.[1][31] 그는 소설 『여명전』의 주인공 아오야마 한조의 모델이 되었으며, 이복 여동생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도 후에 밝혀졌다.[33] 어머니 누이는 장남 가족과 도쿄로 이주한 후 콜레라로 사망했다.

큰누나 다카세 소노코 역시 말년에 정신 질환을 앓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1] 그녀는 도손의 단편 소설 「어느 여성의 생애」와 장편 소설 『』의 등장인물의 모델이 되었다. 맏형 히데오는 기소 어료림 문제와 관련된 사문서 위조 혐의로 투옥된 후 대만으로 건너갔으며, 『』의 고이즈미 미노루의 모델이 되었다. 둘째 형 히로스케는 어머니 쪽 집안인 쓰마고주쿠 혼진의 양자로 들어가 시마자키 가문 15대 당주가 되었다. 그림 공부를 위해 상경했다가 조선으로 건너가기도 했으며, 후에 도쿄로 돌아와 기소 어료림 문제 해결에 힘썼다. 그의 딸이 바로 도손과 불륜 관계였던 고마코이다. 셋째 형 토모야는 어머니 누이와 다른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으로 여겨지며[33], 요코하마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국학과 와카를 배웠으며, 『』에 등장한다.

도손은 1899년 하코다테 상인의 딸이자 메이지 여학교 졸업생인 하타 후유코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첫 세 딸(미도리, 타카코, 누이코)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는 도손이 『파계』를 집필하던 시기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관련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3] 1910년, 아내 후유코는 넷째 딸 야나기코를 낳은 후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1] 이후 도손은 집안 살림을 돕던 둘째 형 히로스케의 딸, 즉 조카 고마코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임신시키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도손은 친척들과의 갈등을 피해 프랑스로 떠났다가 1916년에 귀국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신생』(1918-1919)은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고, 형 히로스케, 히데오와 의절하게 되었으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동료 작가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1] 고마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양자로 보내졌으나,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행방불명되었다.

1928년, 도손은 20세 이상 연하인 가토 시즈코와 재혼했다. 시즈코는 쓰다 에이 가쿠주쿠를 중퇴하고 기독교에 입신했으며, 도손이 창간한 잡지 『처녀지』의 편집자로 일하다가 인연을 맺었다.[1]

도손의 자녀로는 장남 구스오, 차남 게이지(화가, 도손의 비서로 일하다 전사), 셋째 아들 시마자키 오스케(화가, 공산주의 운동가), 넷째 딸 야나기코가 있다.

이처럼 시마자키 도손의 가족사는 아버지와 누나의 정신 질환, 형제들과의 복잡한 관계, 조카와의 불륜 등 비극적이고 어두운 측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문학 작품에 깊이 투영되어 중요한 모티프를 형성했다.

'''시마자키 도손 가계도 요약'''
관계이름생몰년주요 정보 및 비고
아버지시마자키 마사키1831년 ~ 1886년국학자, 마고메주쿠 혼진/쇼야/도야 17대 당주. 메이지 유신 후 좌절, 정신 질환으로 다다미방 감옥에서 사망. 『여명전』 주인공 모델. 이복 여동생과 관계.[31][33]
어머니누이? ~ 1896년장남 가족과 상경 후 콜레라로 사망.
누나다카세 소노코1855년? ~ 1921년정신병원에서 사망. 「어느 여성의 생애」, 『』 모델.
맏형히데오1858년? ~ 1924년사문서 위조로 투옥 후 대만행. 『』 모델. 후손: 니시마루 시호, 시마자키 도시키, 니시마루 신야, 니시마루 유코(증손녀).
둘째 형히로스케1861년? ~ 1928년쓰마고주쿠 혼진 양자, 15대 당주. 조선 거주 경험. 딸 시마자키 고마코는 도손과 불륜 관계.
셋째 형토모야1868년? ~ 1911년어머니와 다른 남성 사이의 자식으로 추정[33]. 방탕한 생활, 건강 악화. 국학, 와카 학습. 『』 등장.
본인시마자키 도손1872년 ~ 1943년7남매 중 막내(넷째 아들). 조카 고마코와 근친상간.
전처하타 후유코1878년 ~ 1910년메이지 여학교 졸업. 1899년 결혼, 7자녀 출산. 넷째 딸 출산 후 사망.
후처가토 시즈코1896년 ~ 1973년쓰다 에이 가쿠주쿠 중퇴. 『처녀지』 편집자. 1928년 결혼.
장녀미도리1900년 ~ 1906년요절.
차녀타카코1902년 ~ 1906년요절.
셋째 딸누이코1904년 ~ 1905년요절.
장남구스오1905년 ~ 1981년농업 종사. 후지무라 기념향 초대 이사장.
차남게이지1907년 ~ 1944년화가. 도손의 비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사.
셋째 아들시마자키 오스케1908년 ~ 1992년화가, 공산주의 운동가.
넷째 딸야나기코1910년 ~ ?이데 고로에게 시집감.
서자(이름 미상)1913년 ~ ?조카 고마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양자로 보내졌으나 간토 대지진으로 행방불명.


5. 4. 만년과 죽음

1928년(쇼와 3년), 시마자키는 24세 연하인 가토 시즈코와 재혼했다.[28][1] 이듬해인 1929년부터 1935년까지 메이지 유신 시기를 국학 연구자의 관점에서 그린 대하 역사 소설 《여명 전》을 잡지 『주오 공론』에 연재하고 출판했다.[1][4][6][7][8] 이 작품의 주인공 아오야마 한조는 시마자키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인물로, 《가족》과 더불어 그의 대표작이자 가장 인기 있는 소설로 평가받는다.[1][4][6][7][8] 그러나 말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고향 나카쓰가와시의 토지 매매 증서를 이용해 자금을 마련하려 하기도 했다.[9]

1935년에는 새로 창립된 일본 펜 클럽의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2][29] 1936년에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 일본 대표로 참석했으며, 이 여정에서 미국과 유럽을 방문했다.[2][29]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서구 중심주의와 당시 일본의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가진 위험성을 지적하기도 했다.[2] 이듬해인 1937년에는 일본 예술원(당시 제국 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으나 개인적인 이유로 이를 고사했다.[2]

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1년, 가나가와현 오이소정으로 이주했다.[30] 1943년에는 《여명 전》의 속편 격인 《동방의 문》 집필을 시작했으나,[1][2] 같은 해 8월 22일 오이소의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2] 이로 인해 《동방의 문》은 두 개의 장만이 완성된 채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1][2]

그의 묘는 가나가와현 오이소정에 위치한 지후쿠지(地福寺)에 마련되었다. 또한 그의 고향인 마고메 마을(현 기후현 나카쓰가와시)의 에이쇼지에도 그의 머리카락과 유골 일부가 안치된 분묘가 있다. 1949년에는 고향 마고메주쿠에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도손 기념 박물관이 세워졌다.[10]

5. 5. 기념관

시마자키 도손 사후,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여러 기념 시설이 세워졌다. 1952년에는 그의 출생지인 나가노현 마고메주쿠 (현재 기후현 나카쓰가와시의 일부)[16]에 후지무라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1958년에는 나가노현 고모로시의 회고원 내에 고모로 시립 후지무라 기념관이 설치되었다.

도손이 만년을 보낸 가나가와현 오이소정의 자택은 "구 시마자키 도손 주택 ~시즈의 초가집~"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공개되어 있으며, 오이소정 지정 유형문화재이다. 도쿄도 신주쿠구 가부키초에는 "시마자키 도손 옛집터"를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또한, 1963년 현대시 동인지 『역정』은 도손을 기념하여 후지무라 기념 역정상을 만들었다.

참조

[1] 서적 The Kiso Road: The Life and Times of Shimazaki Tōso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 서적 The A to Z of Modern Japanese Literature and Theater Scarecrow Press 2009
[3] 서적 The Family University of Tokyo Press
[4] 웹사이트 Shimazaki Tōson https://www.britanni[...] 2021-11-17
[5] 서적 The Columbia Anthology of Modern Japanese Literature. Volume 1: From Restoration to Occupation, 1868-1945 Columbia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島崎藤村 (Shimazaki Tōson) https://kotobank.jp/[...] 2021-11-17
[7] 웹사이트 夜明け前 (Before the Dawn) https://kotobank.jp/[...] 2021-11-17
[8] 문서 "The Secret of Shimazaki Toson" Yushindo 1966
[9] 뉴스 Fujimura's family, a record of poverty / My father's sale of the field, found a certificate "Yomiuri Shimbun" 2018-10-06
[10] 웹사이트 Toson Memorial Museum http://toson.jp/publ[...] 2021-11-19
[11] 웹사이트 島崎藤村 (Shimazaki Tōson) http://www.kinenote.[...] 2021-11-18
[12] 웹사이트 島崎藤村 (Shimazaki Tōson) http://www.jmdb.ne.j[...] 2021-11-18
[13] 웹사이트 Official page of the movie "Ie" http://www.kaerucafe[...] 2022-12-07
[14] 문서 Oiso: Shimazaki Toson Old House (Kanagawa Prefecture) https://www.pref.kan[...]
[15] Tweet 第2話に出てきた『#椰子の実』を作詞した #島崎藤村 の玄孫・上田理仁 『#ちむどんどん』 明日4/15(金)第5話に出演致します🌺 理仁は歌っていませんが、ぜひご覧下さい!! #Andmo #上田理仁 #ちむどんどん #朝ドラ #アババ #歴史好き #時代劇に出たい #沖縄 #理仁画伯 #okinawa @asadora_nhk 2022-04-14
[16] 문서
[17] 서적 自然主義 日本図書センター 1992-03
[18] 웹사이트 横浜山手病院について 29. 閑話編:布施家と星家 (3) https://paperzz.com/[...] 2021-08-02
[19] 문서 「若き日の藤村 -仙台時代を中心に-」 本の森 1998-11-23
[20] 문서 「仙台雑詩」
[21] 문서
[22] 뉴스 島崎藤村の妻・冬の半生知って 函館奉仕会が27日に朗読会 https://digital.hako[...] 2017-07-22
[23] 웹사이트 文豪 島崎藤村 http://www.city.komo[...] 小諸市 2013-08-29
[24] 웹사이트 コトバンク 立川 雲平とは(20世紀日本人名事典) https://kotobank.jp/[...]
[25] 문서 島崎藤村の結婚した日 http://www.city.komo[...] 小諸市役所、藤村記念館だより4 2017-10-05
[26] 서적 秀選 名著複刻全集 近代文学館1 復刻版 千曲川のスケッチ 日本近代文学館
[27] 간행물 婦人文芸雑誌『処女地』と島崎藤村. ー大正期の婦人雑誌および婦人運動における『処女地』の位相 https://doi.org/10.1[...] 筑波大学国語国文学会 2003-02
[28] 문서 島崎静子 しまざき しずこ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9] 문서 日本ペンクラブ 歴史 http://www.japanpen.[...]
[30] 문서
[31] 문서 島崎正樹 しまざき まさき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32] 뉴스 藤村実家 困窮の記録/父が田地売却 証明書見つかる 2018-10-06
[33] 서적 『島崎藤村の秘密』 有信堂 1966
[34] 문서 大磯の邸園めぐり歩き:4.旧島崎藤村邸、鴫立庵 https://machimori.ma[...]
[35] 웹사이트 島崎藤村旧居跡 https://www.kanko-sh[...] 新宿観光振興協会 2024-02-15
[36] 웹사이트 文学碑の散歩道 島崎藤村 https://www.tokyo-np[...] 東京新聞 2020-11-28
[37] 웹사이트 映画『家』公式ページ http://www.kaeru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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