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와야 노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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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와야 노리코는 1907년 아오모리현에서 태어나 일본의 가수, 배우, 텔레비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10년 화재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도쿄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1929년 가수로 데뷔하여 '이별의 블루스' 등의 히트곡으로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위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후에도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으며, 1998년 아오모리시 명예 시민으로 추대되었다. 1999년 사망했으며, 샹송, 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일본 대중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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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야 노리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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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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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와야 노리 |
출생일 | 1907년 8월 12일 |
출생지 | 아오모리, 일본 |
사망일 | 1999년 9월 22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별칭 | 기리시마 노부코 아와야 노리코와 그 악단 |
명예 시민 | 아오모리시 |
음악 활동 | |
직업 | 가수 |
장르 | 류코카 샹송 팝 음악 |
활동 시기 | 1929년–1999년 |
레이블 | 콜롬비아 테이치쿠 빅터 |
웹사이트 | |
공식 웹사이트 | 일본 샹송관 |
2. 생애
아와야 노리코는 1907년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에서 부유한 상인의 장녀로 태어났으나, 십 대 시절 가업이 도산하고 1910년 아오모리 대화재(青森大火)로 집을 잃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2] 1923년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도쿄로 상경하여 동양음악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했으나,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성악과로 전과하여 오페라 가수를 꿈꿨다.[2]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누드 모델로 일하기도 했다.[2] 1929년 동양음악학교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11] 클래식 가수로 활동했으나 수입이 적어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1937년 "이별의 블루스"가 히트하며 스타덤에 올랐고,[11] 1938년에는 "비의 블루스"를 발표했다.[2] 1939년에는 영화 《도쿄의 여성》의 삽입곡 "밤의 플랫폼"을 녹음했으나, 일본 당국에 의해 금지되었다.[7]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위문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11]
아와야 노리코는 비혼모였다.[8] 노년에는 엔카를 비판했으며, 사이죠 히데키와 마츠다 세이코를 비판하기도 했다.[8] 미카와 케니치는 그녀를 존경했고,[8] 1996년 아와야는 마지막 공연에서 미카와에게 "비의 블루스"를 건넸다.[8] 1998년 고향인 아오모리시 명예시민으로 선출되었고,[6] 1999년 사망했다.[6]
2007년, 토쿠나가 히데아키는 콘서트에서 아와야의 "이별의 블루스"를 커버했다.[9]
일부 노래 제목에 사용된 "블루스"라는 용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노래들은 서양 블루스와 전혀 유사하지 않으며,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가요곡(歌謡曲)으로 알려진 느리고 서정적인 노래를 가리킨다.[1]
2. 1. 유년 시절 및 학창 시절
아와야 노리코는 1907년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2][13] 1910년 아오모리 대화재(青森大火)로 집이 불에 탔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다.[2][11]1923년 아오모리 고등여학교를 중퇴하고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도쿄로 이주했다.[2][11] 도쿄 음악대학의 전신인 동양음악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했으나, 오기노 아야코의 권유로 성악과로 전과했다.[14] 오기노와 구보타 이네코에게 클래식 음악을 배우며 오페라 가수를 목표로 했다.[14]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1년 정도 학업을 중단하고, 1924년 3월부터 누드 모델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2][11][15] 당시 "키리시마 노부코(霧島のぶ子)"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11] 오카다 사부로스케, 타구치 쇼고, 마에다 히로하루 등의 화가들이 그녀의 누드화를 그렸다.[16]
1926년 동양음악학교에 복학하여 1929년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11] 같은 해 요미우리 신문 주최 신인 연주회에서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소프라노'라는 극찬을 받았다.[11]
2. 2. 가수 데뷔 및 전성기
1929년 폴리도르에서 '쿠지하마 온도'로 가수 데뷔했다.[11] 이듬해 1931년 일본 컬럼비아로 이적하여, 고가 메로디의 '私此頃(このごろ)憂鬱よ'[12]가 히트하여 유행 가수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11] 1935년에 발표한 샹송곡 '돈냐 마리키타'가 히트하면서 일본에서 샹송 가수 1호가 되었다.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의 '이별의 블루스'는 하토리 료이치가 아와야의 노래 소리를 마음에 들어해 "그녀에게 일본의 블루스를 부르게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제작되었다.[11] 이 곡은 100만 장을 넘는 대히트를 기록하며 아와야를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렸다.[11] 이 곡 녹음에서는 블루스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밤새도록 담배를 피우고 잠도 자지 않고 일부러 목을 쉬게 한 후 녹음에 참여했으며,[11] 소프라노 음역을 알토로 낮춰 불렀다. 이듬해 1938년에 발매한 '비의 블루스'도 만주 주둔 병사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등 히트했다.[11] 1939년에는 하라 세츠코가 주연한 영화 《도쿄의 여성》의 삽입곡으로 '밤의 플랫폼'을 녹음했으나, 일본 당국에 의해 금지되었다.[7]
아와야 노리코의 대표곡들은 다음과 같다.
발표 년도 | 제목 | 비고 |
---|---|---|
1930년 | 구지하마 온도(久慈浜音頭) | 데뷔곡 |
1931년 | 요즘 나는 우울해 (私此頃憂鬱よ) | |
1935년 | 도냐 마리키타(ドンニャ・マリキータ) | |
1937년 | 이별의 블루스 | |
1938년 | 비의 블루스 | |
1939년 | 밤의 플랫폼 (夜のプラットホーム) | 녹음은 완료되었으나 검열로 인해 발매 금지 |
2. 3. 전쟁 중 활동
1939년경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와야 노리코는 위문 활동을 하면서도 군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반골 정신을 보였다.[11] "몬페(일종의 작업복 바지) 같은 것을 입고 노래해도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 "화장과 드레스는 사치가 아니라 가수에게 있어 '전투복'이다"라는 신념 아래, 당시 금지되었던 파마를 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다.[11] 미와 아키히로는 훗날 아와야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헌병과의 마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전지를 위문했을 때 헌병과 싸웠어요. 헌병에게서 '네 화장은 뭐냐! 민낯으로 노래해라'라고 말을 들었지만, '민낯으로 나가면 (본인의 경우) 눈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화장은 눈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11]또한, 위문 공연에서는 군가를 부르지 않고, 죽음을 앞둔 병사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이별의 블루스' 등을 불렀다.[11] 아와야의 노래를 들은 젊은 병사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그녀의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잡은 후 전장으로 향했다고 한다.[11] 일본군에게 등을 돌리고 연합군 포로를 위해 영어로 노래를 부르거나, 연애 관련 노래를 많이 선곡하는 등의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11] 이러한 소신 있는 행동으로 인해 귀국 후에는 수 센티미터 두께의 시말서를 써야 했다.[11]
2. 4. 전후 활동 및 말년
전후에는 테이치쿠(테이치쿠 엔터테인먼트), 빅터(빅터 엔터테인먼트), 도시바 EMI(EMI 뮤직 재팬) 등 여러 음반사에서 활동을 이어갔다.[11] 1953년 제4회 NHK 홍백가합전에 처음 출연하여 홍팀 마지막 순서를 맡았다.[11] NHK 공식 자료에 따르면 첫 출연에 마지막 순서를 맡은 것은 2022년 현재까지 아와야 노리코가 유일하다.[21]이 무렵부터 텔레비전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이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며 활동 범위를 넓혔다.[11] 프로 의식이 강하고 직설적인 발언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특히 쇼와 후기에 나타난 어두운 내용의 엔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11] 1965년 제16회 NHK 홍백가합전에서는 출전 가수에 대해 "더 노래를 공부하라"고 비판했고,[11] "지금의 젊은 가수들은 가수가 아니라 '노래꾼'에 불과하다. 가수가 아니라 '쓰레기'"라고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11]
1971년 제13회 일본 레코드 대상 특별상, 1972년 자수포장 등을 수상했다.[11] 1979년에는 쓰가루 3년 된장(카네사) 광고에 출연하여 "たいしたたまげた!"(たいしたたまげた!|타이시타 타마게타!일본어) (아오모리 사투리로 "정말 놀랐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었다.[11]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후지 TV '모노마네 왕좌 결정전'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여 젊은 세대에게도 인기를 얻었다.[11] 특히 시미즈 아키라의 저속한 모방에는 엄격한 표정으로 낮은 점수를 주었지만,[24][25] 코로케나 쿠리타 칸이치의 개그에는 웃는 모습을 보였다.[11]
199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건강이 악화되어 활동을 줄였다.[11] 1998년 고향 아오모리시 명예 시민으로 추대되었다.[6] 1999년 노쇠(老衰)로 도쿄 자택에서 사망했다.[11] 향년 92세.[11]
3. 평가 및 영향
아와야 노리코는 뛰어난 가수이자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소신 있는 행동과 발언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클래식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대중가요를 부르며 더 큰 인기를 얻었다. 1937년 "이별의 블루스(別れのブルース)"와 1938년 "비의 블루스"(雨のブルース)가 연이어 히트하며 스타덤에 올랐다.[2] "비의 블루스"는 대만에서 "한우곡"(寒雨曲)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했다.[2] 1939년에는 "밤의 플랫폼"(夜のプラットホーム)이 일본 당국에 의해 금지되기도 했다.[7]
엔카(演歌)를 비판했으며, 사이죠 히데키(西城秀樹)와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를 비판했다. 사이죠는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고, 마츠다는 감정 없이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였다.[8] 고통과 괴로움, 노력 없이 만들어진 노래는 사기라고 말했다.[8] 미카와 켄이치(美川憲一)는 그녀를 존경했고,[8] 1996년 마지막 공연에서 미카와에게 "비의 블루스"를 건넸다.[8] 1998년 고향인 아오모리시 명예시민으로 선출되었고, 1999년 사망했다.[6] 2007년, 토쿠나가 히데아키(德永英明)는 콘서트에서 "이별의 블루스"를 커버했다.[9]
그녀의 노래 제목에 사용된 "블루스"는 서양의 블루스와는 다르며, 일본에서 가요곡(歌謡曲)으로 알려진 느리고 서정적인 노래를 가리킨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 위문 활동에서 군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했다.[11] "화장과 드레스는 사치가 아니라 가수에게 있어 '전투복'이다"라고 말하며, 당시 금지되었던 파마를 하고 드레스를 입고 공연했다.[11] 군가를 부르지 않고 '이별의 블루스' 등을 불러 병사들의 마음을 위로했다.[11] 말년에는 후지TV "모노마네 왕좌 결정전"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여 신랄한 평가로 젊은 세대에게도 인기를 얻었다.
3. 1. 음악적 평가
아와야 노리코는 성악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진 실력파 가수였다.[11] 오디션에서 마이크 사용에 익숙하지 않아 너무 큰 성량으로 불합격된 일화가 있을 정도로 풍부한 성량을 자랑했다.[11] 데뷔 후에는 무대 위치를 정하고 마이크 앞에서 움직이지 않는 가창 스타일을 유지했다.[11]폭넓은 음역대를 소화했으며, 소프라노 음역을 알토로 낮춰 부르는 등 뛰어난 가창력을 선보였다.[11] 샹송, 블루스, 탱고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일본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혔다. 특히 1937년 발표한 別れのブルース(이별의 블루스)는 작곡가 服部良一(하토리 요이치)가 아와야의 목소리에 감명받아 "일본의 블루스를 부르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제작한 곡이다.[11] 이 곡의 녹음에서 아와야는 블루스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밤새도록 담배를 피우고 잠도 자지 않아 일부러 목을 쉬게 한 후 녹음에 참여했다.[11] 이 곡을 통해 아와야는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미와 아키히로는 아와야의 목소리에 대해 "아름다운 목소리의 샹송 가수는 세계에 여러 명 있지만, 그녀처럼 아름답고 요염한 목소리는 단 한 사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목소리 자체가 ‘아름다움’입니다. 보석에 비유하자면 최고급 다이아몬드이죠. 방울을 흔드는 듯한, 매우 듣기 좋게 떨리는(비브라토) 노랫소리였습니다."라고 평가했다.[11]
3. 2. 사회문화적 영향
아와야 노리코는 소신 있는 행동과 직설적인 발언으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지 않던 시대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당당한 여성상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1]1939년경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중 위문 활동에서 군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당시 금지되었던 파마를 하고 드레스를 입고 공연했다. "화장과 드레스는 사치가 아니라 가수에게 있어 '전투복'이다"라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11] 군가를 부르지 않고 '이별의 블루스' 등을 불러 병사들의 마음을 위로했다.[11]
미와 아키히로는 아와야 노리코가 "헌병에게 '네 화장은 뭐냐! 민낯으로 노래해라'라고 말을 들었지만, '민낯으로 나가면 (본인의 경우) 눈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화장은 눈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증언했다.[11] 미영국 포로가 있는 곳에서는 일본군에게 등을 돌리고 영어로 노래를 부르거나 연애 관련 노래를 선곡하는 등의 행동을 하여 귀국 후 시말서를 쓰기도 했다.[11]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후지TV "모노마네 왕좌 결정전"의 심사위원으로 출연하여 신랄한 평가로 젊은 세대에게도 인기를 얻었다.
엔카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한국 대중음악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아와야 노리코는 미소라 히바리를 싫어했으며, 엔카에 대해 "가련해진다. 좁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서 희망이 없어진다."라고 말했다.[11]
3. 3. 한국과의 관계
아와야 노리코의 '블루스'는 트로트에 영향을 주었다.[2] 일제 강점기 때 '비의 블루스'는 '한우곡'이라는 제목으로 번안되어 불리기도 했다.[2] 아와야 노리코의 엔카 비판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트로트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촉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8]4. 대표곡
발매년도 | 곡명 | 비고 |
---|---|---|
1937년 | 이별의 블루스 | 別れのブルース|와카레노 부루스일본어 |
1938년 | 비의 블루스 | 雨のブルース|아메노 부루스일본어 |
1935년 | 돈냐 마리키타 | ドンニャ・マリキータ|돈냐 마리키타일본어 |
1936년 | 어두운 일요일 | 暗い日曜日|구라이 니치요비일본어 |
1939년 | 밤의 플랫폼 | 夜のプラットホーム|요루노 푸랏토호무일본어, 미발매 |
1960년 | 잊을 수 없는 블루스 | 忘れられないブルース|와스레라레나이 부루스일본어 |
1952년 | 라 센 | ラ・セーヌ|라 세누일본어 |
1959년 | 마리아 라 오 | マリア・ラ・オ|마리아 라 오일본어 |
5. 수상 경력
6. 출연 작품
종류 | 제목 | 역할 | 비고 |
---|---|---|---|
TV 프로그램 | 전일본가요선수권 (요미우리 TV) | ||
TV 프로그램 | 닛신 치비코 노도지망 (후지 TV) | ||
TV 프로그램 | 모노마네 왕좌 결정전 (후지 TV) | 화요 와이드 스페셜 枠에 불규칙 출연 | |
TV 프로그램 | 일본의 노래 (TV 도쿄) | ||
TV 드라마 | 아버지의 부엌 (1981년, 텔레비 아사히) | 난죠 사유리 역 | |
TV 드라마 | 화요 서스펜스 극장 "두 번째 작별" (1985년, 일본TV / PDS) | 서양관의 부인 역 | ※특별출연 |
TV 드라마 | 히타치 텔레비 시티 "쇼와 랩소디" (1985년, TBS) | ※특별출연[4] | |
영화 | 끝없는 열정(1949년, 도호) | 블루스를 부르는 여자 역 | |
영화 | 로파 가곡의 도시로 가다(1939년, 도호) | 콜롬비아 유행 가수 아와야 노리코 역 | |
광고 | 카네사 "카네사 된장" (1979년)[29] | "대단해, 깜짝 놀랐어. 쓰가루 3년" (※"대단해, 깜짝 놀랐어"는 쓰가루 사투리로 "정말, 놀랐다"는 뜻) | |
광고 | 클라시에 푸즈 "컵 시루코" (1980년대) | 이와사키 요시미와 함께 출연.[29] | |
광고 | 라이온 "룩" (1982년 - 1983년)[29][30] | 1982년: (연말에 놀고 있는 사람에게)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연말 청소 끝났어요?"라며 룩 제품을 건넴.[29] | |
광고 | 마쓰시타 전기 "가라오케 대상" (1984년)[30] | 음정 심사위원 역 | "죄송해요, 잤어요" |
6. 1. TV 프로그램
- 전일본가요선수권 (요미우리 TV)
- 닛신 치비코 노도지망 (후지 TV)
- 모노마네 왕좌 결정전 (후지 TV) (그 외에도, 화요 와이드 스페셜 枠에 불규칙 출연)
- 일본의 노래 (TV 도쿄)
6. 2. TV 드라마
- 아버지의 부엌 (1981년, 텔레비 아사히) - 난죠 사유리 역
- 화요 서스펜스 극장 "두 번째 작별" (1985년, 일본TV / PDS) - 서양관의 부인 역 ※특별출연
- 히타치 텔레비 시티 "쇼와 랩소디" (1985년, TBS) ※특별출연[4]
6. 3. 영화
- 끝없는 열정(1949년, 도호) - 블루스를 부르는 여자 역
- 로파 가곡의 도시로 가다(1939년, 도호) - 콜롬비아 유행 가수 아와야 노리코 역
6. 4. 광고
- 카네사 "카네사 된장" (1979년)[29]
- * 아와야는 "대단해, 깜짝 놀랐어. 쓰가루 3년"이라고 말한다(※"대단해, 깜짝 놀랐어"는 쓰가루 사투리로 "정말, 놀랐다"는 뜻).
- 클라시에 푸즈 "컵 시루코" (1980년대) 이와사키 요시미와 함께 출연.[29]
- 라이온 "룩" (1982년 - 1983년)[29][30]
- * 1982년에는 (연말에 놀고 있는 사람에게 아와야가)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연말 청소 끝났어요?"라고 말하며 룩 제품을 건네는 CM이 방영되었다.[29]
- * 1983년에는 아키시카 산마, 니시카와 노리오, 카츠라 붕친과 각각 함께 출연했다.[30]
- 마쓰시타 전기 "가라오케 대상" (1984년)[30]
- * 음정 심사위원 역으로 출연했는데, 사회자가 그 평가에 대해 묻자 아와야는 "죄송해요, 잤어요"라고 대답하는 결말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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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iko Awaya | Biography &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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ブギウギ:明日から! 「ブルースの女王」淡谷のり子がモデル 菊地凛子がヒロインの良きライバル役
https://mantan-web.j[...]
202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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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ヌードモデルは「ブルースの女王」か 朝ドラ「ブギウギ」が結びつけた2点の裸婦像と淡谷の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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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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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朝ドラで注目されるブルースの女王・淡谷のり子の貴重な音源、配信スタート
https://natalie.mu/m[...]
202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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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憶の歌姫<ディーヴ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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酒は涙か溜息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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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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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フェサンスーシ 淡谷のり子の二人の恩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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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ヌードモデルは、当時女性が最も高収入を得られる仕事だったとい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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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武田鉄矢の昭和は輝いていた
2017-02-24
[17]
문서
당시 사토 치요코의 활약을 받아, 아와야 외 오쿠다료조, 가와사키 유타카, 우치다 에이이치, 요이카 푼코 등 성악가의 유행가 진출이 두드러졌다.
[18]
문서
동교 출신 성악가로는 당시 아와야 외에 아오키 하루코, 하고이 우타코 등이 유행가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19]
문서
뮤지션 카마야츠 히로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20]
웹사이트
ジャズ・ピアニスト 和田肇さん
http://koji128.web.f[...]
2022-04-11
[21]
문서
하지만, 같은 홍백에서 와타나베 하마코가 홍조 트리를 잡았다는 설도 있으며, 고다 도진의 저서에서는 와타나베를 홍조 트리로 하는 설이 채택되고 있다.
[22]
방송
ザ・ベストテン
1982-04-01
[23]
웹사이트
https://linda-yamamo[...]
[24]
문서
시미즈 아키라의 경우, 원래의 가사를 함부로 바꿔서 점잖지 못한 가사로 바꾸거나, 얼굴에 셀로판테이프를 감고 등장하여 비판받는 경우가 많았다(예: 무라타 히로유키나 키타지마 사부로나 타니무라 신지 등). 참고로 시미즈는 한 번 아와야의 모방을 선보인 적이 있으며, 그 후 아와야는 '가슴이 아팠다'고 혹평하며 '8점'을 주었다.
[25]
문서
하지만, 웃음을 전혀 넣지 않은 진지한 모방(예: 이노우에 요스이, 타바타 요시오 등)을 선보였을 때는 코멘트를 요청받았을 때 극찬하거나 10점을 주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결코 신랄한 일변도는 아니었다.
[26]
서적
三枝の爆笑美女対談
講談社
[27]
웹사이트
コロッケ「ものまねはしょせん偽者」
https://www.asagei.c[...]
アサ芸プラス
2012-11-30
[28]
웹사이트
名誉市民
https://www.city.aom[...]
2022-07-26
[29]
문서
상품 영상 후, 아와야는 "노래는 마음, 청소는 룩이지"라고 말한다.
[30]
문서
아와야가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각각 부르는 3명에게 노래를 갈고닦는 것보다 자택을 갈고닦도록 꾸중하는 결말이 있다(※산마에게는 "노래를 갈고닦을 필요 없다"고 꾸중했다).
[31]
Youtube
淡谷のり子さんの思い出
https://www.youtube.[...]
[32]
문서
5회까지(1회 제외)는 홍백 어느 쪽이 대트리를 잡았는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33]
웹사이트
朝ドラ『ブギウギ』第1弾キャストに水川あさみら 菊地凛子が趣里の生涯のライバル歌手役に
https://realsound.jp[...]
blueprint
2023-02-02
[34]
웹인용
Honorary Citizens
http://www.city.aomo[...]
Aomori City
200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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