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의문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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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준하 의문사 사건은 1975년 8월 17일, 민주화 운동가 장준하가 호림산악회 산행 중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함께 산행했던 김용환의 진술에 따르면, 장준하는 험한 암벽 지형에서 실족하여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신 상태, 부실한 초동 수사, 권력 개입 의혹 등으로 인해 타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1993년과 2002년 두 차례의 진상 규명 시도가 있었으나,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2012년 유골 검시 결과 머리 뒤쪽에서 함몰된 구멍이 발견되었고, 2013년 조사위원회는 '타살 후 추락'으로 결론 내렸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다. 현재까지도 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 약사계곡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장준하는 평소 지인들과 산행을 즐겼으나, 이날 호림산악회 산행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는지, 아니면 강권에 의해 따라나섰는지는 진술이 엇갈린다.
장준하 사망 직후, 호림산악회 회원들은 포천경찰서 이동지서에 신고하고 가족에게 알리는 한편, 인근 군부대에 신고하여 사망 사실을 확인받았다.[2]
2. 사망 사건 정황
사건 당일, 호림산악회 회원들은 약사계곡에서 등산을 하고 오후 1시 30분경 점심식사를 했다. 그러나 장준하가 점심식사 장소에 도착했는지에 대해서도 회원들의 진술이 엇갈린다.
산행에 동행했던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은 장준하의 사체를 발견했을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 장준하는 두 손을 가슴에 나란히 얹고 편안한 자세로 자는 듯 누워 있었다. 등산모는 바위 중간쯤 나무 등걸에 걸려 있고 시계는 1시 40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왼쪽 귀밑이 약간 찢어진 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1]
김용환은 호림산악회 회원들에게 사고 소식을 알렸고, 김용덕 등 회원들이 현장에 도착하여 사체를 발견하였다.
2. 1. 호림산악회 산행과 의문점
장준하는 평소 지인들과 등산을 즐겼다. 그러나 1975년 8월 17일 호림산악회 40여 명의 산행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는지, 아니면 호림산악회 회장 김용덕 또는 최후 동행인 김용환의 강권에 의해 동행했는지는 진술이 엇갈린다. 장준하의 비서 이철우는 대절된 관광버스 자리가 꽉 찼다는 말을 듣고 동행하지 않았다. 정오경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한 호림산악회 회원들은 차례로 계곡 등산에 나섰다. 이들은 약사계곡 중간 지점에서 오후 1시 30분경부터 점심 식사를 했다. 그러나 장준하가 점심 식사 장소에 도착했는지에 대해서도 회원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최후 동행인 김용환의 진술에 따르면, 김용환은 점심 식사 장소에 도착해서 장준하를 찾았는데 이때 일행 중 누군가가 장준하가 산으로 올라갔다고 해서 뒤쫓아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장준하를 따라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하산길에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어 김용환이 앞장서서 계곡 쪽으로 하산을 했는데, 험한 암벽 지형에서 소나무를 붙잡고 내려가던 도중에 뒤에서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장준하가 보이지 않아 실족하여 추락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어 김용환은 절벽 아래로 내려와서 장준하의 사체를 발견하였다. 산행에 동행했던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은 후일 당시 현장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장준하는 두 손을 가슴에 나란히 얹고 편안한 자세로 자는 듯 누워 있었다. 등산모는 바위 중간쯤 나무 등걸에 걸려 있고 시계는 1시 40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왼쪽 귀밑이 약간 찢어진 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1]
김용환은 이후 호림산악회 회원들의 점심 식사 장소로 달려가 사고 소식을 알렸다. 김용덕 등 산악회원들은 김용환을 따라 사고 혹은 살해 현장으로 갔으며, 20여 분 뒤 사체를 발견하였다.
2. 2. 최후 동행인 김용환의 진술
김용환의 진술에 따르면, 김용환은 점심식사 장소에서 장준하를 찾았는데, 이때 일행 중 누군가가 장준하가 산으로 올라갔다고 해서 뒤쫓아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장준하를 따라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하산 길에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어 김용환이 앞장서서 계곡 쪽으로 하산을 했는데, 험한 암벽 지형에서 소나무를 붙잡고 내려가던 도중에 뒤에서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장준하가 보이지 않아 실족하여 추락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어 김용환은 절벽 아래로 내려와서 장준하의 사체를 발견하였다. 산행에 동행했던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은 후일 당시 현장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 장준하는 두 손을 가슴에 나란히 얹고 편안한 자세로 자는 듯 누워 있었다. 등산모는 바위 중간쯤 나무 등걸에 걸려 있고 시계는 1시 40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왼쪽 귀밑이 약간 찢어진 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1]
김용환은 이후 호림산악회 회원들의 점심식사 장소로 달려가 사고 소식을 알렸다. 김용덕 등 산악회원들은 김용환을 따라 사고 혹은 살해 현장으로 갔으며, 20여 분 뒤 사체를 발견하였다.
2. 3. 김용환의 증언과 엇갈리는 진술들
장준하는 평소 지인들과 등산을 즐겼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1975년 8월 17일 호림산악회 40여 명의 산행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는지, 아니면 호림산악회 회장 김용덕 또는 최후 동행인 김용환의 강요로 따라나섰는지는 진술이 엇갈린다. 장준하의 비서 이철우는 대절된 관광버스 자리가 꽉 찼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지 않았다. 정오쯤 약사계곡 입구에 도착한 호림산악회 회원들은 차례로 계곡 등산을 시작했다. 이들은 약사계곡 중간 지점에서 오후 1시 30분경부터 점심식사를 했다. 그러나 장준하가 점심식사 장소에 도착했는지에 대해서도 회원들의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최후 동행인 김용환의 진술에 따르면, 김용환은 점심식사 장소에 도착해서 장준하를 찾았는데, 이때 일행 중 누군가가 장준하가 산으로 올라갔다고 해서 뒤쫓아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장준하를 따라 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어 김용환이 앞장서서 계곡 쪽으로 내려왔는데, 험한 암벽 지형에서 소나무를 붙잡고 내려가던 도중에 뒤에서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장준하가 보이지 않아 실족하여 추락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어 김용환은 절벽 아래로 내려와서 장준하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산행에 동행했던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은 훗날 당시 현장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 장준하는 두 손을 가슴에 나란히 얹고 편안한 자세로 자는 듯 누워 있었다. 등산모는 바위 중간쯤 나무 등걸에 걸려 있고 시계는 1시 40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왼쪽 귀밑이 약간 찢어진 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1]
김용환은 이후 호림산악회 회원들의 점심식사 장소로 달려가 사고 소식을 알렸다. 김용덕 등 산악회원들은 김용환을 따라 사고 혹은 살해 현장으로 갔으며, 20여 분 뒤 시신을 발견하였다.
3. 사망 후 초기 조사 과정과 문제점
포천경찰서는 현장검증 전까지 사망 경위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고, 현장감식 및 사진 촬영도 하지 않았다. 당시 경찰관들은 외부 지시로 사건 조사에서 배제되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사건 기록을 가져갔다고 진술했다.[2]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검사와 검안 의사는 현장 도착 후 검안 결과, 오른쪽 귀 뒤쪽 후두부 함몰 골절로 인한 추락사로 추정된다는 소견을 냈다. 검사는 이를 바탕으로 5분 만에 현장검증을 종결하고, 부검 없이 목격자 증언만으로 추락사로 내사 종결했다.[2]
3. 1. 부실한 초동 수사
호림산악회 회원들은 역할을 나누어 일부는 포천경찰서 이동지서에 가서 장준하의 사망을 신고했고, 일부는 서울로 가서 전화로 사고 소식을 접한 아들 장호권, 장호성을 대동하고 사고 현장으로 돌아왔다. 또 다른 일부는 인근 군 부대에 신고하여 부대원 일부가 현장에 와서 사망 사실을 확인한 뒤에 복귀하였다.[2]
포천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당일 밤 12시경 실시된 현장검증시까지 사망 경위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며, 현장감식과 사진 촬영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당시 경찰관들은 외부 지시로 자신들은 사건 조사에서 완전 배제되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현장검증 후 사건기록을 복사해갔다고 진술하였다.[2]
이후 사건 당일 밤 12시경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소속 담당 검사와 검안 의사, 사진사 등이 시신이 옮겨진 지점에 도착하여 사체 검안 및 현장검증을 실시하였다. 검안 의사 조철구는 검안 결과 오른쪽 귀 뒤쪽 후두부가 함몰 골절되어 추락사로 추정된다는 진술을 하였고, 담당 검사는 이를 수용하여 5분 만에 현장검증을 종결하였다. 이후 부검은 실시되지 않았다. 담당 검사는 다음 날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의 실족 증언을 근거로 추락사로 내사 종결하였다.[2]
3. 2. 권력 개입 의혹
호림산악회 회원들은 역할을 나누어 일부는 포천경찰서 이동지서에 가서 장준하의 사망을 신고했고, 일부는 서울로 가서 전화로 사고 소식을 접한 아들 장호권, 장호성을 데리고 사고 현장으로 돌아왔다. 또한 일부는 인근 군 부대에 신고하여 부대원 일부가 현장에 와서 사망 사실을 확인한 뒤에 복귀하였다.
포천 이동지서로부터 사고 사실을 보고받은 포천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당일 밤 12시경 실시된 현장검증 때까지 사망 경위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며, 현장감식과 사진촬영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당시 경찰관들은 외부 지시로 자신들은 사건조사에서 완전 배제되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현장검증 후 사건기록을 복사해갔다고 진술하였다.[2]
이후 사건 당일 밤 12시경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소속 담당검사와 검안의사, 사진사 등이 시신이 옮겨진 지점에 도착하여 사체 검안 및 현장검증을 실시하였다. 검안의사 조철구는 검안 결과 오른쪽 귀 뒤쪽 후두부가 함몰 골절되어 추락사로 추정된다는 진술을 하였고, 담당검사는 이를 수용하여 5분 만에 현장검증을 종결하였다. 이후 부검은 실시되지 않았다. 담당검사는 다음 날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의 실족 증언을 근거로 추락사로 내사 종결하였다.[2]
3. 3. 검찰의 성급한 수사 종결
사체 확인 후 호림산악회 회원들은 역할을 나누어 일부는 포천경찰서 이동지서에 가서 장준하의 사망을 신고했고, 일부는 서울로 가서 전화로 사고소식을 접한 아들 장호권, 장호성을 대동하고 사고 현장으로 돌아왔다. 또한 일부는 인근 군 부대에 신고하여 부대원 일부가 현장에 와서 사망 사실을 확인한 뒤에 복귀하였다.
포천경찰서 이동지서로부터 사고 사실을 보고받은 포천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은 당일 밤 12시경 실시된 현장검증시까지 사망 경위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으며, 현장감식과 사진촬영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당시 경찰관들은 외부 지시로 자신들은 사건조사에서 완전 배제되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현장검증 후 사건기록을 복사해갔다고 진술하였다.
이후 사건 당일 밤 12시경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소속 담당검사와 검안의사, 사진사 등이 시신이 옮겨진 지점에 도착하여 사체 검안 및 현장검증을 실시하였다. 검안의사 조철구는 검안 결과 오른쪽 귀 뒤쪽 후두부가 함몰골절되어 추락사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진술을 하였고, 담당검사는 이를 수용하여 5분 만에 현장검증을 종결하였다. 이후 부검은 실시되지 않았다. 담당검사는 다음 날 유일한 목격자 김용환의 실족 증언을 근거로 추락사로 내사 종결하였다.[2]
4. 타살 의혹과 증거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 단순 추락사라는 초기 발표에도 불구하고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특히 후두부 함몰 골절 외에 다른 외상이 거의 없다는 점은 타살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되었다.
동아일보의 장봉진 기자는 이 사건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는 기사를 보도했으나, 긴급 조치법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검찰은 기자 회견을 통해 실족사가 분명하다고 주장했지만,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3][4]
사고 당시 유일한 목격자였던 김용환의 정체가 불분명하다는 점과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진상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점도 의혹을 증폭시켰다.[4]
1988년 의정부지청의 지휘로 재조사가 이루어졌고, 1993년에는 민주당 주도로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진상 조사 위원회'가 결성되어 재조사가 진행되었으나,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2002년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타살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조사에 착수했다.[7] 조사위원회는 장준하 선생이 사체 발견 장소 위에서 추락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결론 내렸지만,[8] 초동 수사 기록 및 변사 기록 부족, 국가정보원의 자료 비협조로 인해 진상 규명에는 실패했다.[9][10]
이러한 결과에 대해 위원회가 추락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강조하고도 진상 규명 불능 결론을 내려 객관성과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11][12]
4. 1. 의문스러운 시신 상태
추락사로 발표되었음에도 후두부 함몰골절 이외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다는 점 때문에 이후 타살 의혹이 거듭 제기되었다.[3][4] 사망 당일 검안의사였던 조철구는 민주당 조사 위원회에 제출한 사체 검안 소견에서 "직접 사망 원인은 우측두 기저부 함몰 골절상으로 인한 두개강내 손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를 감정한 문국진은 '중앙 부분이 오목한 형태의 인공적인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충격을 가한 것'이라고 법의학적 소견을 밝혔다.[6]민주당 조사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 추락 지점이 경사 75도의 가파른 암벽이어서 장비 없이는 내려갈 수 없는 곳이다.
- 시신이 발견된 암벽은 경사도를 볼 때 굴러떨어지는 물체가 멈출 수 없는 곳이다.
- 시신에는 외상이나 골절이 전혀 없고, 휴대한 보온병과 안경이 깨지지 않았다.
- 당시 시신을 검안한 조철구 씨에 따르면 오른쪽 귀 뒤에 가로 세로 2cm 크기의 흉기로 찍힌 자국이 있고, 또 팔과 엉덩이에 주사바늘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 어깨 안쪽에 피멍이 들어 있어, 어깨를 붙들려 억지로 끌려간 듯한 흔적이라 생각된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실물 모형을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대부분의 경우에 두개골 함몰골절 이외에 다른 외상이 크게 동반됨을 확인하였다. 서울대 법의학교실 또한 변사자 손상 정도로 보아 자유 낙하에 의한 추락으로 보기 어렵다고 감정하였다. 이를 근거로 조사위원회는 장준하가 사체발견 장소 위에서 추락사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8]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4. 2. 임춘원 등 주변인들의 증언
임춘원은 장준하와 사건 당일 아침 식사를 함께 한 측근이었다. 그는 경찰이 추락사의 증거로 제시한 장준하 손바닥의 상처가 사실은 사건 며칠 전 산소 벌초 때문에 이미 나 있던 상처라고 증언했다.[5] 장준하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임춘원에게 며칠 전 망우리 부모 산소에 벌초를 다녀온 이야기를 하며 직접 손을 펴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임춘원은 경찰의 왜곡 발표에 항의했다가 남대문 경찰서에 일주일간 구금되기도 했다.[5]4. 3. 법의학적 소견
추락사로 발표되었음에도 후두부 함몰골절 외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다는 점 때문에 이후 타살 의혹이 거듭 제기되었다.[3][4] 1993년 3월 민주당의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진상 조사 위원회'는 재조사를 통해 장준하의 사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사망 당일 검안의사였던 조철구는 민주당 조사 위원회에 제출한 사체 검안 소견에서 "직접 사망 원인은 우측두 기저부 함몰 골절상으로 인한 두개강내 손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를 감정한 문국진은 '중앙 부분이 오목한 형태의 인공적인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충격을 가한 것'이라고 법의학적 소견을 밝혔다.[6]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실물 모형을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대부분의 경우에 두개골 함몰골절 외에 다른 외상이 크게 동반됨을 확인하였다.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 또한 변사자 손상 정도로 보아 자유 낙하에 의한 추락으로 생긴 손상으로 보기 어렵다고 감정하였다.[8]
5.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들
1993년 민주당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진상 조사 위원회'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장준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재조사를 실시했다.
1993년 민주당 조사 위원회는 검안의 조철구와 법의학자 문국진의 소견을 바탕으로 타살 가능성에 대한 여러 의문점을 제기했다.[4]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실물 모형 실험과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의 감정을 통해 장준하가 추락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8] 그러나 수사 기록 부족과 국가정보원의 자료 미제출로 인해 진상 규명에는 실패했다.[9][10]
이후 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객관성과 공정성 문제가 제기되었다.[11][12]
5. 1. 1993년 민주당 진상조사위원회
1993년 3월, 민주당은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진상 조사 위원회'를 결성하여 재조사를 실시했다. 사망 당시 검안의였던 조철구는 민주당 조사 위원회에 제출한 사체 검안 소견에서 "직접 사망 원인은 우측두 기저부 함몰 골절상으로 인한 두개강내 손상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를 감정한 문국진은 '중앙 부분이 오목한 형태의 인공적인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충격을 가한 것'이라는 법의학적 소견을 제시했다.[6]민주당 조사 위원회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으나,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하며 타살 가능성을 시사했다.[4]
의문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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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조사[7]에 착수했다. 조사위원회는 실물 모형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대부분의 경우 두개골 함몰 골절 외에 다른 외상이 크게 동반됨을 확인했다.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 또한 변사자의 손상 정도로 보아 자유 낙하에 의한 추락으로 보기 어렵다고 감정했다. 이를 근거로 조사위원회는 장준하가 사체 발견 장소 위에서 추락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8] 된다고 결론 내렸다.그러나 사고 당시 초동 수사 기록 및 변사 기록이 부족하거나 이미 폐기되었고, 국가정보원도 추가 자료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여 명확한 사망 원인과 공권력의 직간접 개입 여부는 최종 판단이 불가능했다. 이에 위원회는 '정보기관의 자료 미확보'를 이유로 진상 규명 불능으로 최종 발표했다.[9][10]
이러한 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추락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강조하고도 진상 규명 불능이라는 결론을 내려 객관성과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11][12]
6. 유골 검시와 새로운 의혹
2012년 장준하 선생의 묘 이장 과정에서 유골 검시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상임고문을 맡고, 박형규 목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이 참여하는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가 2012년 10월에 발족되었다. 같은 해 12월, 이 위원회와 민주통합당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공동으로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자체 재조사에 착수하였다.
6. 1. 두개골 함몰 골절의 재확인
2012년 여름, 파주시 천주교 나사렛공동묘원에 있던 장준하 묘소 뒤편 석축이 비 피해로 붕괴되었다.[13] 같은 해 8월 1일, 유골은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의 장준하공원으로 이장되었다.이장 과정에서 유골을 검시한 결과, 머리 뒤쪽에서 지름 5~6cm 크기의 원형으로 함몰된 구멍과 금이 간 흔적이 발견되었다.[14] 이는 사고 당시 검안의사가 확인했고, 이후 재조사 과정에서도 결정적 사인으로 지적된 두개골 함몰 골절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아들 장호권은 서울대 법의학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망치 사이즈와 같은 크기로 두개골이 함몰돼, 사인은 망치에 의한 가격으로 보인다"고 전했다.[15]
반면 유골 검시를 맡은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이윤성 교수는 '뒷머리 함몰에 의한 사망'이라는 의견만 밝혔으며,[6] '망치로 인한 타살'로 단언할 수 없는 다음 근거들을 제시하며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16]
- 타원형 골절 바깥의 방사형 골절은 일반적인 망치 가격보다 훨씬 큰 충격에 의해 발생한다.
- 망치에 맞은 시신에는 여러 차례 내리친 상처 자국이 흔히 발견되나 장준하의 시신은 자국이 단 하나뿐이다.
- 시신 두피에 망치 가장자리 모양이 찢어진 상처가 남아야 하나 과거 조철구 검안의사의 소견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
한편, 사단법인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이를 근거로 사건에 대한 전면적 재조사와 진상규명에 착수할 것을 요구하였다.[17]
6. 2. 이정빈 교수의 '타살 후 추락' 결론
2013년 3월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이정빈 서울대학교 의대 명예교수의 유골 감식 결과를 발표했다. 이정빈 교수는 '타살 후 추락'으로 결론을 내렸으며[18][19],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추락으로 머리뼈가 함몰되었다면 반대 방향으로 충격이 전달되어 왼쪽 안와(안구 주위 뼈)도 함께 손상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이 깨끗하다.
- 머리뼈와 엉덩이뼈가 추락으로 손상되었다면 어깨뼈도 골절되었어야 하는데, 시신의 어깨뼈는 멀쩡하다.
- 머리에 강한 외부 충격이 가해지면서 즉사하면 목등뼈에 있는 혈액순환 기능이 멈춰 출혈이 발생하지 않으며, 이는 출혈이 적었다는 사고기록과 일치한다.
반면, 이장 당시 유골 검안을 실시했던 서울대 이윤성 교수는 이정빈 명예교수가 조사 이전부터 타살에 대한 심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조사위원회의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윤성 교수는 이정빈 교수가 유골을 보기도 전에 언론에 '타살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학자적 태도가 아니며,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감식을 한다면 과학적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20]
6. 3. 이윤성 교수의 반론과 논쟁
2012년 이장 당시 유골 검안을 맡았던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이윤성 교수는 '뒷머리 함몰에 의한 사망'이라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망치에 의한 타살'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6] 이윤성 교수는 최초 검안 시 망치에 의한 가격으로 보였으나, 다음과 같은 근거로 인해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타원형 골절 바깥의 방사형 골절은 일반적인 망치 가격보다 훨씬 큰 충격에 의해 발생한다.
- 망치로 가격당한 시신에는 보통 여러 차례 맞은 자국이 발견되지만, 장준하의 시신에는 단 하나의 자국만 있었다.
- 망치에 맞았다면 시신 두피에 망치 가장자리 모양으로 찢어진 상처가 있어야 하는데, 과거 조철구 검안의사의 소견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었다.[16]
한편,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정빈 교수는 '타살 후 추락'으로 결론을 내렸다.[18][19] 이에 대해 이윤성 교수는 이정빈 교수가 조사 이전에 이미 타살에 대한 심증을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윤성 교수는 이정빈 교수로부터 조사위원회 참여를 권유받았으나, 이정빈 교수가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과학적인 논의가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거부했다고 밝혔다.[20]
참조
[1]
뉴스
사상계와 장준하
http://news.naver.co[...]
[2]
서적
장준하 평전
시대의창
[3]
서적
한권으로 보는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http://book.naver.co[...]
[4]
서적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5, 장준하
웅진
[5]
웹인용
임춘원, <<내 속에 살아 숨쉬는 등불>>, '아 장준하' 추모의 글 모음, 장준하기념사업회
http://www.peacewave[...]
2018-09-10
[6]
뉴스
장준하 선생 유골 최초 공개…유족 “망치 가격 확실”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09-08-16
[7]
뉴스
의문사진상규명위 성과와 한계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9-08-19
[8]
뉴스
“장준하씨 '등산중 추락사'아닌 듯”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9-08-19
[9]
뉴스
장준하 의문사 또 '진상규명 불능' 결정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9-08-19
[10]
뉴스
"흙탕물 한국 현대사의 한떨기 연꽃" - [새책]『장준하 평전』…‘금지된 동작’을 제일 먼저 시작한 혁명가
http://www.redian.or[...]
레디앙
2009-08-19
[11]
뉴스
장준하 선생 추락사 재조사 의문 쌓이는 의문사委 발표 - 시뮬레이션 결과와 결정 엇갈려 …“추락 가능성 희박” 강조하고도 “진상규명 불능”
http://www.munhwa.co[...]
주간동아
2009-08-19
[12]
뉴스
"[길을찾아서] 막무가내 3류소설 ‘장준하 실족사’"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09-08-19
[13]
뉴스
붕괴된 장준하 선생 묘소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2-08-16
[14]
뉴스
장준하 선생 유골 공개... 기념사업회 "타살 분명"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2-08-17
[15]
뉴스
“누군가 망치로 부친의 뒷머리 때렸다”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2-08-16
[16]
뉴스
장준하 선생 死因 논란 재점화 핵심 3인 인터뷰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2-08-24
[17]
뉴스
"장준하 명백한 타살"…기념사업회-유족, 靑에 재조사 공식 요구
http://www.newsis.co[...]
뉴시스
2012-08-20
[18]
뉴스
“故장준하 선생, 머리에 둔기 맞아 숨진 뒤 추락했다”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2-08-28
[19]
뉴스
"장준하 선생 머리 가격으로 숨진 뒤 추락"
http://news.sbs.co.k[...]
SBS
2012-08-28
[20]
뉴스
"[최보식이 만난 사람] 38년 된 장준하 유골을 감식한… 이정빈 교수와의 논쟁"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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