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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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춘원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대 입시학원을 운영하며 성공을 거두었으나,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아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장준하,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으며, 제12, 13, 1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김대중의 측근으로 활동하다 결별 후 김영삼의 대선 캠프에 참여하여 당선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는 경제 전문가로서 야당의 핵심 브레인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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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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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임춘원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일 | 1938년 3월 1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부 |
본관 | 조양 |
학력 | |
학사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 학사 |
석사 |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
박사 |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행정대학원 행정학 박사 |
병역 | |
가족 | |
경력 | |
정치 활동 | |
정당 | 무소속 |
지역구 | (12) 서울 서대문구 을(13·14) |
의원 선수 | 3 |
의원 대수 | 12·13·14 |
기타 정보 | |
웹사이트 | 나우루 공식 홈페이지 |
헌정회 | 1872 |
2. 학력
2. 1. 비학위 수료
3. 정치 입문 이전
1960년대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대한민국 입시학원의 효시격이라 할 수 있는 상아탑학원을 설립하고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당시 학생 수 8,000여 명, 강사 수 250여 명으로 웬만한 종합대학보다도 그 규모가 클 정도였다. 그때 당시 매월 순익이 8000만원 이상으로 그 당시 재벌들을 제치고 은행 예금 순위 전국 1위를 할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정권의 탄압 속에 시사교양지 사상계를 힘들게 출판하고 있던 장준하가 당장 종잇값을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알고 자신의 보증수표로 사상계 운영 자금을 남몰래 대주던 것이 빌미가 되어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되었고, 결국 정치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5]
장준하의 권유로 정치에 투신했다.[5] 1970년 통일문제연구회 회장을 맡았다.[1] 1971년 윤보선, 장준하, 박기출 등과 함께 국민당 창당에 참여했고,[2] 국민당 정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3] 같은 해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국민당 비례대표 4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4]
1974년 윤보선, 장준하, 김대중 등과 함께 박정희 유신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했다.[5] 각계에 포진한 인사들이 장준하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유신 정권에 저항하는 거사를 진행하던 중 감시의 표적으로 운신이 어려운 장준하의 비밀 연락책으로 김대중과 인연을 맺었다. 1975년 8월 17일 장준하가 등산 도중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날에도 거사와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장준하의 집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그 후 장준하의 실족사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며 항의를 하다가 남대문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5]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부산 동아대학교 재단 이사를 역임했다.[1]
4. 민주화 운동
임춘원은 1970년 통일문제연구회 회장을 맡으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1] 1971년 윤보선, 장준하, 박기출 등과 국민당을 창당하고 정무위원이 되었으며,[2][3]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국민당 비례대표 4번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4]
1974년 윤보선, 장준하, 김대중 등과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했고,[5] 1975년 장준하 의문사 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다 연행, 체포, 고문 조사를 받았다.[5]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민주헌정연구회(민헌연) 상임운영위원을 맡았고,[1] 1985년 이민우, 김영삼, 김대중 등과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6] 제12대 국회의원 (신민당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되었다.[7]
1986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국제문제위원장과 민주인권연구회 창설에 참여했고,[10][11] 1987년 신민당 부대변인, 원내부총무를 역임했으며,[12][13] 직선제개헌1천만명서명운동과 6월 민주항쟁에 참여했다.[14][15]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평민당, 서울 서대문구 을) 당선 후,[17] 국회 5공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 제5공화국 부실기업비리 조사반장을 맡았다.[19][20] 1990년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 당시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의 주요 민간인 사찰 대상자였다.[23]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민주당, 서울 서대문구 을)에 당선되었다.[24]
전두환 정권 당시 6월 민주항쟁에 참여했으나, 1987년 10월 12일 '제9차 대한민국헌법개정안'에 대해 절차, 민주인사 사면 복권 문제 등을 지적하며 반대했다.[35] 12대 국회 5공비리조사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며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전두환이 박근혜에게 전달한 6억 원이 청와대 비서실 공금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마련했다.[36]
5. 정계 활동
1970년 통일문제연구회 회장을 맡았다.[1] 1971년 윤보선, 장준하, 박기출 등과 함께 국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정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2][3] 같은 해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국민당 비례대표 4번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4]
1974년 윤보선, 장준하, 김대중 등과 함께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했다.[5] 1975년 장준하 의문사 사건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가 연행되어 체포, 고문 조사를 받았다.[5]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와 민주헌정연구회(민헌연) 상임운영위원을 맡았다.[1] 1985년 이민우, 김영삼, 김대중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에 참여했다.[6] 같은 해부터 1988년까지 제12대 국회의원 (신민당 비례대표 2번)을 지냈다.[7] 국회 재무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8][9]
1986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국제문제위원장을 맡았고,[10] 민주인권연구회 창설에 참여했다.[11] 1987년 신민당 부대변인[12]과 원내부총무[13]를 역임했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직선제개헌1천만명서명운동에 참여하고 6월민주항쟁에도 참여했다.[14][15]
1987년부터 1992년까지 김대중 총재 경제특보를 지냈다.[16]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제13대 국회의원 (평민당, 서울 서대문구 을)을 지냈으며,[17] 국회 재무위원회 위원과 제1야당 간사를 맡았다.[18] 1988년 국회 5공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19], 제5공화국 부실기업비리 조사반장으로 활동했다.[20] 같은 해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파견 대표단으로 참여했다.[21]
1990년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을 지냈다.[22] 같은 해 보안사 민간인 사찰 사건 당시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의 주요 민간인 사찰 대상자였다.[23]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민주당, 서울 서대문구 을)에 당선되었다.[24] 1996년까지 국회 재무위원회 위원을 지냈다.[25]
1994년 신민당 사무총장[26], 1995년 최고위원을 역임했다.[27] 1995년 신민당(1996년에 무정파전국연합으로 이름을 바꿈) 총재를 역임했다.[28] 1996년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장준하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으며, 1970년대 초 박정희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 활동 당시 장준하와 김대중 간의 비밀연락책을 담당했다. 김대중의 야당 총재 시절에는 그의 재정 및 경제분야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했으나, 1992년 김대중과 그의 가신들의 민주당 사당화 및 비민주적 정당운영 등을 비판하며 결별했다.[5][30]
김대중과 결별 후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하던 중, 민주자유당 내에서 소수파로 고립되어 있던 김영삼의 오랜 삼고초려 끝에 1992년 대선 직전 김영삼의 대선캠프에 참여했다.[31] 기독교계 대표로 지지운동에 나서 김영삼의 제14대 대통령 당선 및 문민정부 수립에 공헌했다.[32] 그러나 대선 직후 김영삼에게 아들 김현철을 권력에서 배제하라는 직언을 했다가 오히려 김현철 라인을 중심으로 한 당시 신주류 집권세력의 타깃이 되었고, 결국 정권 초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공직자재산공개의 대혼란 속에 박준규 국회의장 등과 함께 당을 떠났다.[33]
1994년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김으로 대표되는 구태정치 청산을 목표로 반3김 비주류 세력과 함께 김동길이 대표로 있던 국민당, 박찬종이 대표로 있던 신정치개혁당 등을 합쳐 통합신당 신민당을 창당하였고, 사무총장,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26][27] 창당 후 공동대표를 맡은 김동길, 박찬종이 주도권을 놓고 서로 심각한 갈등을 벌이다가 둘 다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박한상, 한영수 새 공동대표 체제 하에서 김대중이 정계은퇴 한 민주당, 김영삼의 민주자유당에서 갈라져 나온 새한국당, 김근태 등 재야 운동권세력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통일시대 국민회의 등과 함께 야권통합 협상을 진행했다.[34] 하지만 당내 대구, 경북 세력을 기반으로 당 대표에 선출된 김복동이 반3김 구태정치 청산이란 당초 합의를 져버리고 충청권을 기반으로 하는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과 경북-충청 지역연합 성격의 합당을 추진하자 이를 반대하고 탈당, 이후 당 잔류파와 함께 다시 신민당을 재건하고 당 총재를 역임하였다.[28]
전두환 정권 당시 현역의원으로서 동료 야당의원들 및 시민들과 함께 거리에서 최루탄을 맞아가며 6월 민주항쟁에 앞장 섰으나, 그 결과로 1987년 10월 12일 '제9차 대한민국헌법개정안'이 당시 여야 4당의 합의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자 신상발언 형식으로 단상에 올라 반대토론에 나섰다. 당시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먼저 "6.29 이전의 문제들에 대해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를 앞두고 있지만 아직도 사면 복권되지 않은 민주인사와 양심수들이 있다"며 문익환 목사와 재야인사 이부영, 민주화 운동으로 수배 수감되어 있는 수 백명의 애국청년학생들을 "국민투표 이전에 수배해제와 함께 사면 복권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야당 동료였던 통일민주당 의원들에겐 비록 "김대중 선생 등 많은 분들이 사면 복권되고 석방된 바 있으나" 이들 정치인 외에 아직도 다른 수 많은 재야의 민주인사, 양심수, 청년학생들이 교도소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이런 현안의 해결 없이 급하게 헌법개정에 합의해준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이재형 국회의장에겐 국회법에 따른 심의나 반대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과 헌법개정특위위원장 명의로 개헌안을 발의하지 않았다는 점 등 절차적 하자들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또한 헌법개정 논의가 민정-민주 양당의 이해관계에 따라 졸속으로 진행되어 다수 국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 결국 제10차 헌법개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헌법개정의 대전제인 "대통령직선제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이와 같은 방법의 헌법개정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밝히고 항의 표시로 개헌안에 반대표를 던졌다.[35]
12대 국회 5공비리조사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한 1979년 10월 26일 당시의 "청와대 비품목록과 주요 재산목록, 예금 잔고 및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족예금 잔고, 1980년 5월 17일 당시 청와대의 비품목록과 주요재산목록, 예금 잔고 및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족예금 잔고" 등 관련자료 제출을 대통령 비서실에 요구해, 추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청문회에 직접 출석하여 10.26 이후 사건수사과정에서 청와대비서실에서 발견된 자금 "총 9억6천만원 중 2억 원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5천만 원은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에게 주어 활용토록하고 1억 원은 계엄사령관의 승인을 받아서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비로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유족에게 전달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라는 증언을 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이 증언은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박근혜에게 전달한 6억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인재산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의 공금인 만큼 이 돈을 국고에 반납해야 한다는 주장의 사실적인 근거가 되었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괴롭히는 주요 이슈 중에 하나가 되었다.[36]
6. 김대중과의 관계
임춘원은 김대중 총재의 경제특보(1987년~1992년)를 역임했다.[16] 박정희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 활동 당시 장준하와 김대중 간의 비밀연락책을 담당했던 인연으로,[5] 김대중이 야당 총재였을 때 그의 재정 및 경제분야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했다.[30]
그러나 1992년 김대중과 그의 가신들의 민주당 사당화 및 비민주적 정당운영 등을 비판하고 결별하였다.[5][30] 이후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하던 중, 김영삼의 대선캠프에 참여하였다.[31]
7. 김영삼과의 관계
김대중과 결별한 후, 민주자유당 내에서 소수파로 고립되어 있던 김영삼의 오랜 삼고초려 끝에 1992년 대선 직전 김영삼의 대선 캠프에 참여하였다.[31] 기독교계 대표로 지지 운동에 나서 김영삼의 제14대 대통령 당선 및 문민정부 수립에 공헌하였다.[32] 하지만 대선 직후 김영삼에게 아들 김현철을 권력에서 배제하라는 직언을 했다가 오히려 김현철 라인을 중심으로 한 당시 신주류 집권 세력의 타깃이 되었고, 결국 정권 초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공직자 재산 공개의 대혼란 속에 박준규 국회의장 등과 함께 당을 떠났다.[33]
8. 3김 정치 청산 노력
장준하의 권유로 정치에 투신했다가 1970년대 초 박정희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 활동 당시 장준하와 김대중 간에 비밀연락책을 담당했던 인연으로 김대중의 야당 총재 시절 그의 재정 및 경제분야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했으나, 1992년 김대중과 그의 가신들의 민주당 사당화 및 비민주적 정당운영 등을 비판하고 결별하였다.[5][30]
김대중과의 결별 후 무소속 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하던 중, 민주자유당 내에서 소수파로 고립되어 있던 김영삼의 오랜 삼고초려 끝에 1992년 대선 직전 김영삼의 대선캠프에 참여하였고,[31] 기독교계 대표로 지지운동에 나서 김영삼의 제14대 대통령 당선 및 문민정부 수립에 공헌을 하였다.[32] 하지만 대선 직후 김영삼에게 아들 김현철을 권력에서 배제하라는 직언을 했다가 오히려 김현철 라인을 중심으로 한 당시 신주류 집권세력의 타깃이 되었고, 결국 정권 초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공직자재산공개의 대혼란 속에 박준규 국회의장 등과 함께 당을 떠났다.[33]
1994년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3김으로 대표되는 구태정치 청산을 목표로 반3김 비주류 세력과 함께 김동길이 대표로 있던 국민당, 박찬종이 대표로 있던 신정치개혁당 등을 합쳐 통합신당 신민당을 창당하였고, 사무총장,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26][27] 창당 후 공동대표를 맡은 김동길, 박찬종이 주도권을 놓고 서로 심각한 갈등을 벌이다가 둘 다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박한상, 한영수 새 공동대표 체제 하에서 김대중이 정계은퇴 한 민주당, 김영삼의 민주자유당에서 갈라져 나온 새한국당, 김근태 등 재야 운동권세력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통일시대 국민회의 등과 함께 야권통합 협상을 진행했다.[34] 하지만 당내 대구, 경북 세력을 기반으로 당 대표에 선출된 김복동이 반3김 구태정치 청산이란 당초 합의를 져버리고 충청권을 기반으로 하는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과 경북-충청 지역연합 성격의 합당을 추진하자 이를 반대하고 탈당, 이후 당 잔류파와 함께 다시 신민당을 재건하고 당 총재를 역임하였다.[28]
9. 1987년 9차 개헌 반대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현역 의원으로서 동료 야당 의원들 및 시민들과 함께 거리에서 최루탄을 맞으며 시위에 참여했다.[35] 1987년 10월 12일 '제9차 대한민국헌법개정안'이 당시 여야 4당의 합의로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자 신상발언 형식으로 단상에 올라 반대토론에 나섰다.[35]
민주정의당에게는 "6.29 이전의 문제들에 대해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문익환 목사와 재야인사 이부영 등 민주화 운동으로 수배 및 수감된 애국청년학생들을 "국민투표 이전에 수배해제와 함께 사면 복권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35]
통일민주당 의원들에게는 김대중 등 정치인 외에 "아직도 다른 수 많은 재야의 민주인사, 양심수, 청년학생들이 교도소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이런 현안의 해결 없이 급하게 헌법개정에 합의해준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다.[35]
이재형 국회의장에게는 국회법에 따른 심의나 반대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과 헌법개정특위위원장 명의로 개헌안을 발의하지 않았다는 점 등 절차적 하자를 지적했다.[35]
헌법개정 논의가 민정-민주 양당의 이해관계에 따라 졸속으로 진행되어 다수 국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 결국 제10차 헌법개정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 주장하며, "대통령직선제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이와 같은 방법의 헌법개정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밝히고 항의 표시로 개헌안에 반대표를 던졌다.[35]
10. 5공 청문회 활동
임춘원은 제12대 국회 5공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이자 5공화국 부실기업비리 조사반장으로서, 5공화국의 비리를 파헤치는 데 앞장섰다.[19]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당시와 1980년 5월 17일 당시의 청와대 비품 및 재산 목록, 예금 잔고,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 예금 잔고 등의 자료 제출을 대통령 비서실에 요구했다.[36]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청문회에 직접 출석하여 증언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 과정에서 발견된 총 9억 6천만 원 중 2억 원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5천만 원은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에게 주어 활용토록 하고, 1억 원은 계엄사령관의 승인을 받아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비로 사용했으며, 나머지는 유족에게 전달했다고 증언했다.[36]
이 증언은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박근혜에게 전달한 6억 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인 재산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의 공금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으며, 이 돈을 국고에 반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문제는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공격하는 주요 이슈 중 하나가 되었다.[36]
11. 평가
임춘원은 군사정권 시절, 야당에서 보기 드문 경제 전문가였다.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던 장준하를 돕다가 그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고, 장준하 사후에는 김대중 야당 총재의 경제 특보를 오랫동안 지냈다.[16]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3선을 하면서 주로 경제 관련 상임위(재무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김대중, 이중재 의원 등에 이어 야당 경제통의 계보를 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8][9][18][22][25]
군사정권 시절, 대부분의 야당 의원들이 정치 공세에만 집중했던 것과는 달리, 임춘원은 실물 경제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 민주화를 위한 대안 제시와 정책 비판을 통해 야권의 핵심 경제 브레인으로 활약했다.[29]
1960년대에는 서울 종로에 입시학원인 상아탑학원을 설립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학생 수 8,000여 명, 강사 수 250여 명으로 규모가 매우 컸으며, 매월 순이익이 8000만원 이상으로 은행 예금 순위 전국 1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나 장준하의 사상계 운영 자금을 지원한 것이 빌미가 되어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되면서 정치에 투신하게 되었다.[5]
임춘원은 장준하의 비밀 연락책으로 김대중과 인연을 맺었다. 1975년 장준하 의문사 당일, 장준하의 집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함께 했으며, 이후 장준하의 실족사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며 항의하다가 구금되기도 했다.[5]
장준하의 권유로 정치에 뛰어든 임춘원은 박정희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 활동 당시 장준하와 김대중 사이의 비밀 연락책을 맡았던 인연으로 김대중의 야당 총재 시절 그의 경제 분야 핵심 참모로 활동했지만, 1992년 김대중과 그의 측근들의 민주당 사당화 및 비민주적인 정당 운영을 비판하며 결별했다.[5][30]
김대중과 결별 후, 임춘원은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하던 중 김영삼의 오랜 간청 끝에 1992년 대선 직전 김영삼의 대선 캠프에 참여했고,[31] 기독교계 대표로 지지 운동에 나서 김영삼의 제14대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32] 그러나 대선 직후 김영삼에게 아들 김현철을 권력에서 배제하라는 직언을 했다가 오히려 김현철 라인을 중심으로 한 당시 신주류 집권 세력의 표적이 되었고, 결국 정권 초 공직자 재산 공개의 혼란 속에 박준규 국회의장 등과 함께 당을 떠났다.[33]
1994년, 임춘원은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으로 대표되는 구시대 정치 청산을 목표로 김동길의 국민당,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 등을 합쳐 통합 신당 신민당을 창당하고 사무총장, 최고위원을 역임했다.[26][27] 창당 후, 김동길, 박찬종이 당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다가 둘 다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박한상, 한영수 새 공동 대표 체제 하에서 야권 통합 협상을 진행했다.[34] 하지만 당내 대구, 경북 세력을 기반으로 당 대표에 선출된 김복동이 3김 청산 합의를 어기고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과 합당을 추진하자, 이를 반대하고 탈당하여 다시 신민당을 재건하고 당 총재를 역임했다.[28]
전두환 정권 당시, 임춘원은 현역 의원으로서 6월 민주 항쟁에 앞장섰으나, 1987년 10월 12일 '제9차 대한민국 헌법 개정안'에 대해 반대 토론을 했다. 그는 민주정의당의 잘못 인정, 민주 인사와 양심수들의 사면 복권, 헌법 개정 절차의 문제점 등을 지적하며 헌법 개정 논의가 졸속으로 진행되었다고 비판했다.[35]
12대 국회 5공 비리 조사 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임춘원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청문회 증언을 이끌어냈다. 이 증언은 박근혜에게 전달된 6억 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인 재산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의 공금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주요 이슈 중 하나가 되었다.[36]
12. 저서 및 역서
순번 | 제목 | 발행 기관 | 발행 연도 |
---|---|---|---|
1 | 私設學院의 敎育的 地位와 社會敎育의 問題點 | 한국교육생산성연구소교육연구사 | 1969 |
2 | 3저시대의 통화정책 | 월간 부동산 | 1986 |
3 | 民衆과 함께 | 금문당 | 1986 |
4 | 社會正義의 認識과 實踐 | 국회의원 동우회 | 1987 |
5 | 지도자: 현대 세계사를 움직인 정치지도자들의 생애와 철학 | Richard M. Nixon영어, 금문당 | 1987 |
6 | 銀行法 改正 이렇게 본다: 대기업 경제력집중 해소에 촛점맞춰야 | 금융경제 154, 금융경제사 | 1989 |
7 | 개혁정책을 요구한다 | 금융경제 159, 금융경제사 | 1990 |
8 | 金融制度의 개선방안: 豫金保險制의 내용과 도입 가능성 검토 | 국회보 306, 국회사무처 | 1992 |
9 | 經濟力集中의 實態와 改善方向;與信管理制度 改編을 중심으로 | 국회보 317, 국회사무처 | 1993 |
10 | 종교의 자유와 종교입법의 과제: 기독교재산관리법안을 중심으로 | 국회보 332, 국회사무처 | 1994 |
11 | 기독교재산관리법제정 이루어져야 한다 | 월간목회 216 | 1994 |
12 | 宗敎의 自由와 宗敎立法의 課題;기독교재산관리법안을 중심으로 | 국회보 332, 국회사무처 | 1994 |
13 | 기독교재산관리법(안) 세미나 제안설명 요지서 | 1994 | |
14 | 세계경제의 지역주의화와 한국경제 | 국회보 339, 국회사무처 | 1995 |
13.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71년 | 총선 | 국민당1971 | 454,257표 (4.1%) | 낙선 | 전국구 4번 |
1985년 | 총선 | 신한민주당 | 5,843,827표 (29.3%) | 당선 | 전국구 2번, 초선 |
1988년 | 총선 | 평화민주당 | 35,478표 (38.43%) | 당선 | 서울 서대문구 을, 재선 |
1992년 | 총선 | 민주당1991 | 40,762표 (42.86%) | 당선 | 서울 서대문구 을, 3선 |
참조
[1]
간행물
헌정회
1872
[2]
웹사이트
'국민당' - 네이트 백과사전
http://100.nate.com/[...]
[3]
뉴스
국민당 운영위원 임명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1-03-27
[4]
뉴스
8대 국회의원 입후보자 명단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71-05-07
[5]
웹인용
장준하기념사업회, <<내 속에 살아 숨쉬는 등불>>, '아 장준하' 추모의 글 모음
http://www.peacewave[...]
2012-06-26
[6]
웹사이트
'신한민주당'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7]
뉴스
12대 국회의원 당선자 명단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5-02-13
[8]
뉴스
국회 상임위별 의원명단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5-05-15
[9]
뉴스
국회예결위 구성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신문
1985-08-26
[10]
뉴스
소식: 민추협 국제문제위원장 선임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6-01-15
[11]
뉴스
동교동 민주인권연 개설
http://newslibrary.n[...]
매일경제신문
1986-04-12
[12]
뉴스
신민 강삼재 부대변인 사표, 후임에 임춘원 의원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87-01-22
[13]
뉴스
신민 부총무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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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7-05-04
[14]
뉴스
최루가스 덮힌 서울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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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86-11-29
[15]
뉴스
자구본능 시민은 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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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6-11-29
[16]
뉴스
서울 총선현장 여야 바람보다 인물대결 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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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
1992-03-02
[17]
뉴스
13대 국회의원 당선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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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88-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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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16 상위 첫 회의 간사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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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88-06-21
[19]
뉴스
평민 공화 특위위원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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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1988-07-05
[20]
뉴스
5공 부실기업조사반, 장영자 씨등 진술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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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1989-03-09
[21]
뉴스
미 민주당 전당대회 대표단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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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8-07-11
[22]
뉴스
여야 예결위원 확정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0-07-03
[23]
뉴스
보안사 주요 민간인 사찰 명단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0-10-06
[24]
뉴스
제14대 지역구 의원 당선자 및 득표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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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1992-03-26
[25]
뉴스
무소속 12명 상임위 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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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1992-07-08
[26]
뉴스
신민당 총장 임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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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4-07-02
[27]
뉴스
신민 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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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1995-03-28
[28]
뉴스
신민당 창당대회 총재에 임춘원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5-06-24
[29]
뉴스
경제불안 반영 대폭 물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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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
1992-03-26
[30]
뉴스
임춘원 의원 민주당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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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92-05-27
[31]
뉴스
임춘원 의원 민자당 입당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2-11-13
[32]
뉴스
김영삼 지지 기도회 잇달아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2-12-02
[33]
뉴스
박 의장, 임춘원 의원 탈당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3-03-30
[34]
뉴스
야권통합 본격화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5-02-13
[35]
간행물
제137회 국회본회의회의록 제5호
http://likms.assembl[...]
대한민국 국회
1987-10-12
[36]
뉴스
박근혜에 건넨 6억은 공금, 국고 반납해야
http://www.poweroftr[...]
진실의 길
2012-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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