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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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주 전투는 1950년 10월 29일부터 30일까지 한국 전쟁 중 호주군 제3 왕립 호주 연대(3 RAR)가 정주에서 북한군과 벌인 전투이다. 한국 전쟁 초기, 호주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P-51 머스탱 전투기, 해군 함정 등을 파견했다. 3 RAR은 제27 영국 연방 여단에 배속되어 북진 작전에 참여했다. 전투 전, 미 공군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정주 주변 산등성이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전투 결과, 호주군은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 다수의 전차를 파괴했지만, 찰스 그린 중령이 전사하는 등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 정주 전투는 영국 연방 제27여단이 북한에서 가장 북쪽으로 진격한 지점이었으며, 이후 중국군의 개입으로 인해 유엔군의 진격이 중단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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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정보 | |
| 전투 | 정주 전투 (1950년) |
| 일부 | 한국 전쟁 |
| 날짜 | 1950년 10월 29일 – 1950년 10월 30일 |
| 장소 | 정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결과 | 유엔군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유엔군 |
| 참가국 1 |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미국 |
| 교전국 2 | 조선인민군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지휘관 1 | 배질 오브리 코어드 |
| 지휘관 2 | 찰스 허큘리스 그린 |
| 지휘관 3 | 미상 |
| 부대 | |
| 부대 1 | 제27 영국 연방 여단 |
| 참가 부대 1 |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 |
| 참가 부대 2 | 제1 아가일 및 서덜랜드 고지 연대 |
| 참가 부대 3 | 제1 미들섹스 연대 |
| 부대 2 | 조선인민군 제17 탱크 여단 |
| 병력 | |
| 병력 1 | 약 200명 |
| 병력 2 | 약 500–600명 |
| 피해 | |
| 사상자 1 | 사망 9명, 부상 30명 |
| 사상자 2 | 사망 162명, 포로 10명, 탱크 11대, 자주포 2대 |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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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2. 1. 군사적 상황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이른 아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1] 수적으로 우세하고 장비가 더 좋았던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했고, 열세에 있던 대한민국 육군(ROK)을 쉽게 제압했다.[2] 이에 대응하여 국제 연합(UN)은 대한민국의 편에 서서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회원국들에게 사태를 복구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할 것을 요청했다.[2]
그 결과, 미국의 지상군은 한국군의 붕괴를 막기 위해 급하게 투입되었지만, 병력과 장비가 부족했고, 8월 초까지 북한군에 의해 부산 주변의 고립된 지역, 즉 부산 교두보로 밀려났다.[3]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영국, 캐나다, 호주도 병력을 파견했지만, 처음에는 해군 병력에 국한되었고 미국에서는 주로 상징적인 노력으로 여겨졌다.[4] 호주는 더글러스 맥아더가 지휘하는 UN군에서 작지만 때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7] 영연방 점령군의 일부로 일본에 배치된 병력이 호주의 대응의 기반이 되었고, 제77비행대 RAAF 소속의 P-51 머스탱 전투 폭격기가 7월 2일에 첫 임무를 수행했으며, 쇼얼헤이븐(Shoalhaven)(K535)과 구축함 바탄(Bataan)(I91)도 해상 작전에 투입되었다.[7]
1950년 9월 23일, 제3대대, 왕립 호주 연대(3 RAR)는 한국으로 향했고, 9월 28일 부산에 집결했다. 그곳에서 영국이 8월 말 부산 교두보 주변의 상황 악화에 따라 미국 제8군을 지원하기 위해 홍콩에서 급하게 투입한 제27보병여단에 합류했다.[9] 준장 바실 오브리 코아드가 지휘하는 이 여단은 제27영연방 여단으로 개명되었으며 제1대대, 아르길과 서덜랜드 하이랜드 연대(1 ASHR), 제1대대, 미들섹스 연대(1 MR) 및 3 RAR로 구성되었다.[10]
2. 2. 호주군의 참전
호주는 한국 전쟁 발발 초기 국제 연합(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국가 중 하나였다.[7] 호주는 영연방 점령군의 일부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기반으로 참전하였다.[7] 제77비행대 RAAF 소속 P-51 머스탱 전투기[7], 쇼얼헤이븐(Shoalhaven)(K535)과 구축함 바탄(Bataan)(I91) 등 해군 전력을 파견하였다.[7]호주 정부는 제3대대, 왕립 호주 연대(3 RAR)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7] 3 RAR은 K Force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병되기 전 훈련과 재장비를 거쳤다.[8]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뉴기니 전역에서 일본군과 싸운 경험이 있는 찰스 그린 중령이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8]
1950년 9월 28일, 3 RAR은 부산에 도착하여 제27보병여단에 합류했다.[9] 이 여단은 제27영연방 여단으로 개명되었으며, 제1대대, 아르길과 서덜랜드 하이랜드 연대(1 ASHR), 제1대대, 미들섹스 연대(1 MR) 및 3 RAR로 구성되었다.[10] 3 RAR의 합류로 여단은 전술적 역량이 강화되었고, 호주군은 미국 부대가 아닌 익숙한 조직 환경에서 작전할 수 있게 되었다.[10]
2. 3. 제27 영국 연방 여단 합류
3. 전개
3. 1. UN군의 반격 작전

인천 상륙 작전과 부산 교두보 방어전의 성공으로 UN군은 북한군을 38선 북쪽으로 몰아내는 반격 작전을 개시했다.[12][9] 제27 영국 연방 여단은 미 육군 소장 호바트 R. 게이의 지휘를 받는 미군 제1 기병 사단에 배속되어 북진 작전에 참여했다.[13]
10월 16일, 여단은 북한으로의 UN 진격의 선봉 부대로 미 제7 기병 연대를 인수받았으며, 그 축선은 개성, 금천 및 흥수리를 거쳐 사리원으로, 그 다음 황주를 거쳐 북한의 수도인 평양으로 향할 계획이었다.[13] 조선인민군이 이전 몇 주 동안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저항했고, 정확한 지도 부족과 도로의 협소함으로 인해 진격하는 UN군이 신속하게 이동하기 어려웠다.[13]
그 후 제27 영국 연방 여단은 금천에서 70km 이동했으며, 10월 17일 사리원을 점령한 아가일 연대는 인민군 215명을 사살하고 많은 포로를 잡았으며, 전사 1명과 부상 3명의 손실을 입었다.[14] 10월 21일, 여단은 존 H. 처치 소장의 지휘를 받는 미 제24 보병 사단의 지휘를 받았으며, 미 제1 기병 사단은 평양에 남아 점령을 완료했다.[15] 제27 영국 연방 여단은 이후 정주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6]
10월 22일 호주군은 영주에서 첫 번째 주요 전투를 벌여 인민군 150명을 사살하고 여단 포로 800명 중 239명을 생포했으며, 부상 7명의 손실을 입었다.[17] 인민군을 격파하고 전쟁을 종결하려는 의도로, UN군은 중국 국경에 있는 압록강으로 진격했다.[18] 여단이 청천강을 건너면서 저항이 계속되었으며, 이제 박천으로 이동했다. 10월 24일, 맥아더는 압록강 남쪽으로 부대의 이동에 대한 모든 제한을 해제하고, 미국 합참의 지시를 거부하고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중국의 개입 위험을 감수하면서 UN 진격의 마지막 단계를 준비했다.[19]
10월 25일 오후, 3 RAR 소대원들은 대령강을 건너 서쪽 강둑을 정찰하던 중 인민군 2개 중대의 공격을 받았으며, 결국 철수했지만 호주군은 10명의 포로를 데려갔다.[19] 정보에 따르면 영국군과 호주군은 20대의 전차를 장비한 인민군 제17 전차 여단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정주에서 70km 떨어진 곳에 최후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20][21]
전쟁이 거의 끝났다고 여겨지면서 제27 영국 연방 여단은 다음 3일 동안 정주를 향해 인민군을 계속 추격했지만, 만주 국경의 압록강에 접근하면서 탱크와 자주포의 지원을 받아 참호전에 들어간 인민군 보병의 강력한 저항에 점점 더 직면하게 되었다.[19]
3. 2. 사리원 전투
3. 3. 영주 전투
3. 4. 구진 전투
4. 정주 전투 (1950년 10월 29일 ~ 30일)
4. 1. 전투 전 상황
1950년 10월 29일, 27 영국 연방 여단의 선두 대대인 제3 왕립 호주 연대(3 RAR)는 정주에서 6km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23] 오전 10시, 미국 공군(USAF) LT-6G 모스키토 경정찰기는 500~600명의 보병 대대 규모 조선인민군(KPA) 부대가 전차와 자주포의 지원을 받으며 정주 주변 산등성이에 배치되어 있다고 보고했다.[23] 이들은 잘 구축된 참호에 자리 잡고 도로 양쪽의 전방 경사면을 점령하고 있었다.미국 공군 F-80 슈팅 스타가 8차례 출격하여 네이팜탄 공격을 가했고, 조종사들은 T-34 전차 7대와 SU-76 자주포 2문을 파괴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과장된 것으로 드러났다.[18][24] 해가 몇 시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린 중령은 두 개 중대를 투입하여 대대 공격을 계획했다. D 중대는 도로 왼쪽, A 중대는 오른쪽을 공격할 예정이었다.[25] 제90 야전 포병 대대의 155mm 곡사포와 제3 RAR 지원 중대의 3인치 박격포가 준비 포격을 가했다.[26]
4. 2. 전투 경과
1950년 10월 29일, 영국 연방(영연방) 제27여단의 제3 왕립 호주 연대(3 RAR)는 정주에서 6km 떨어진 곳에서 북한군과 교전했다.[23] 미군 LT-6G 모스키토 경정찰기는 북한군 부대가 전차와 자주포의 지원을 받으며 정주 주변 산등성이에 배치되어 있다고 보고했다.[23] 미 공군 F-80 슈팅 스타가 공습을 가해 북한군에 피해를 입혔다고 보고되었으나, 실제 피해는 크지 않았다.[18][24]오후 2시 30분, D 중대는 미군 제89 전차 대대 D 중대의 셔먼 전차 2개 소대의 지원을 받아 도로 남쪽 능선을 공격했다.[27] 셔먼 전차 1대가 피격되었지만, 미군 전차의 지원에 힘입어 D 중대는 오후 4시 30분까지 고지를 점령했다.[18] D 중대는 다수의 T-34 전차, SU-76 자주포와 교전했으며, 존 스태포드 일병은 브렌 경기관총 사격으로 전차를 격파하여 실버 스타를 수여받았다.[29][30][31]
해가 지기 직전, A 중대는 정주 북쪽 산등성이를 공격하여 오후 5시 30분까지 능선을 확보했다.[18][28] 이 과정에서 호주군은 M20 3.5인치 바주카포로 T-34 전차 3대를 파괴했다.[29] 이날 전투에서 호주군과 미군 전차는 총 11대의 T-34 전차와 2대의 SU-76 자주포를 파괴했다.[24]
B 중대는 D 중대와 A 중대 사이 도로에, 대대 본부는 B 중대 뒤에, C 중대는 예비대로 배치되었다.[32] 밤이 되자 북한군은 D 중대를 공격했고, 격전 끝에 호주군은 진지를 지켜냈다.[23][33] 데이비드 매닛 중위는 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27][34] 북한군은 A 중대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오후 10시 15분에 철수했다.[37][32]
다음 날 아침, 호주군은 진지를 유지하고 북한군 시신 150구 이상을 발견했다.[32] 제3대대는 태천강으로 이동해 오전 11시까지 정주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진지를 구축했다.[35] 호주군은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며 정주를 점령했다.[35][36]
10월 30일, 북한군의 포격으로 찰스 그린 중령이 중상을 입고 11월 1일에 사망했다.[40]
4. 3. 찰스 그린 중령의 사망
1950년 10월 30일 오후 6시 10분경, 찰스 그린 호주군 중령은 정주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자주포 또는 전차에서 발사된 포탄 파편에 복부를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40][38] 당시 그린 중령은 36시간 동안 잠을 자지 못해 들것에 누워 있었다.[40] 포탄은 총 6발이었으며, 5발은 앞면에 떨어졌고, 마지막 6번째 포탄은 능선을 넘어 나무를 맞고 C 중대 후방에서 폭발했다.[38]그린 중령은 안주의 야전외과병원 (MASH)으로 후송되었지만, 결국 상처로 인해 11월 1일 이틀 후에 사망했다.[40] 포탄이 떨어진 근처에 있던 다른 40명은 다치지 않았다.[38] 인기 있고 존경받는 지휘관이었던 그린 중령의 죽음은 호주군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37]
4. 4. 전투 결과
정주 전투는 호주군이 한국 전쟁 참전 이후 겪은 가장 격렬한 전투 중 하나였다.[23] 이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은 162명이 사살되고 10명이 포로로 잡혔다.[32][42] 반면, 호주군은 9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중에는 그린 중령도 포함되어 있었다.[32][42] 호주 왕립 연대는 이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정주" 전투 명예를 수여받았다.[43]
5. 영향
5. 1. 중공군의 개입
1950년 10월 말, 중국 인민지원군은 팽덕회 원수의 지휘 하에 18개 사단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인민군을 지원했다.[45][46] 미국과 대한민국 정보기관에 탐지되지 않은 제13집단군은 10월 16일 북한으로 100km까지 진격했으며, 11월 초에는 제9집단군의 12개 사단이 추가 증원되어 총 30개 사단, 38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투입되었다.[45][46]중공군은 분산된 맥아더의 부대를 매복 공격하여 온정 전투에서 대한민국 제2군단을 궤멸시키고, 운산 전투에서 미군 제8기병연대를 포위 섬멸했다.[47] 정주 전투는 27 영국 연방 여단이 가장 북쪽으로 진격한 지점이었다.[37] 박천 전투에서 큰 손실을 본 후, 중공군의 공세는 물류 문제로 인해 일시 중단되었다.[49]
5. 2. 호주군의 이후 작전
10월 마지막 주 동안 중공군 18개 사단이 압록강을 건너 팽덕회 원수의 지휘 하에 조선인민군의 잔여 병력을 증원했다.[45][46] 미국과 대한민국 정보기관에 탐지되지 않은 제13집단군은 10월 16일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100km까지 진격했으며, 11월 초 제9집단군의 12개 사단이 증원되어 총 38만 명으로 구성된 30개 사단이었다. 중공군은 이후 널리 분산된 맥아더의 부대를 매복 공격하여, 온정 전투에서 대한민국 제2군단을 궤멸시키고, 운산 전투에서 미군 제8기병연대를 포위 섬멸했다.[47] 결국 정주는 영국 연방 제27여단이 가장 북쪽으로 진격한 지점이었다.[37]월시 중령은 그린의 사망 후 3 RAR의 지휘를 재개했으나, 박천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고 해임되었다.[48] 브루스 퍼거슨 소령이 3 RAR의 지휘권을 인수했다.[48] 상당한 사상자를 낸 인민지원군의 공세는 다음 날 물류 문제로 인해 중단되었다.[49]
6. 평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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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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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Chongju – 29 October 1950
http://www.awm.gov.a[...]
Australian War Memorial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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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London Gazette
195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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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Gazette
195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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