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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키치너 백작 허버트 키치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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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버트 키치너는 1850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영국군 장교로 복무한 인물이다. 스위스에서 교육을 받고 보불 전쟁에 참전한 후 왕립 공병대에 임관했으며,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지에서 측량 임무를 수행하며 중동 전문가로 성장했다. 이집트 군 재건에 참여하고 수단 총독을 역임하며 옴두르만 전투에서 승리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제2차 보어 전쟁 중에는 강제 수용소 운영으로 비판을 받았다. 1914년 육군 장관으로 임명되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나, 1916년 러시아로 향하던 중 기뢰에 의해 침몰한 HMS 햄프셔에 탑승했다가 사망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사후 그의 성적 취향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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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키치너 백작 허버트 키치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키치너, 정복
키치너, 정복
전체 이름호레이쇼 허버트 키치너
존칭 접두사육군 원수, 각하
존칭 접미사KG, KP, GCB, OM, GCSI, GCMG, GCIE, PC
별칭키치
출생1850년 6월 24일
출생지아일랜드 케리주 타버트
사망1916년 6월 5일
사망지스코틀랜드 오크니 제도 서쪽 HMS 햄프셔
사망 원인전사
형제자매헨리 키치너, 제2대 키치너 백작 (형), 월터 키치너 경 (동생)
서명Peace Treaty of Vereeniging, South Africa, 31 May 1902 (page 4 crop) - Kitchener signature.jpg
군 경력
소속 국가영국
군대영국 육군
복무 기간1871년 – 1916년
최종 계급육군 원수
지휘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관 (1902년–1909년)
남아프리카 영국군 총사령관 (1900년–1902년)
이집트군 (1892년–1899년)
참전보불전쟁
마흐디 전쟁
제2차 보어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정치 경력
정치 체제귀족제
직위상원 의원
세습 귀족
임기 시작1898년 11월 1일
임기 종료1916년 6월 5일
이전키치너 백작 작위 신설
이후헨리 키치너, 제2대 키치너 백작
주요 보직
직위육군 장관
임기 시작1914년 8월 5일
임기 종료1916년 6월 5일
이전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이후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외교 경력
직위이집트 총영사
임기 시작1911년 7월 12일
임기 종료1914년 8월 5일
이전엘돈 고스트 경
이후밀른 치덤 경
총독 경력
직위수단 총독
임기 시작1898년 9월 2일
임기 종료1899년 12월 22일
이전압달라히 이븐 무함마드 (마흐디 국가)
이후레지널드 윙게이트 (영국-이집트 수단)
훈장

2. 어린 시절

허버트 키치너는 1850년 6월 24일 아일랜드 남서부 케리주 발리롱포드에서 영국군 장교 헨리 호레이쇼 키치너 중령과 프랜시스 앤 슈발리에의 아들로 태어났다.[120]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에 땅을 구매하기위해 장교직을 팔았다.[121] 그 후 가족은 스위스로 이주했고, 키치너는 몽트뢰와 울리치 왕립 군사 학교에서 교육받았다.[121][2] 1871년 보불 전쟁에 프랑스군으로 참전했다가, 왕립 공병대에 임관하였다.[4]

어머니 무릎에 앉아 있는 키치너, 형제와 자매와 함께


그는 팔레스타인, 이집트 헤디비국, 영국령 키프로스에서 측량 임무를 수행하며 아랍어를 배우고 중동 지역 전문가로 성장했다.[3] 1879년 아나톨리아(현 터키) 부영사[2][6], 1884년 수단의 고든 장군 구출대에 정보 장교로 참여했다.[122] 이 시기, 그의 약혼녀 베이커가 장티푸스로 카이로에서 사망하여,[122]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3. 이집트, 수단, 하르툼

1883년 대위로 진급한 키치너는 터키 계급인 빈바시 (소령)를 받고 이집트로 파견되어 이집트군 재건에 참여했다.[2][7]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지만, 군대는 여전히 케디브 (이집트 부왕)와 오스만 술탄의 주권 하에 있었다.[2] 키치너는 찰스 조지 고든을 구출하기 위한 나일 탐험에 참여했고, 1885년 7월에는 잔지바르 경계 위원회의 영국 위원이 되었다.[2][10]

1886년 9월에는 동 수단 및 홍해 연안의 이집트 주지사가 되었고,[2] 1888년 1월 한두브 전투에서 턱에 부상을 입었다.[2] 1889년 8월 토스키 전투에서 이집트 기병대를 지휘했으며,1890년 초 이집트 경찰의 감찰감으로 임명되었다가 1892년 4월 이집트 육군의 사르다르 (총사령관)가 되었다.[2]

1896년 영국 총리 솔즈베리 경은 프랑스아프리카의 뿔에서 물러나도록 하기 위해 수단 북부를 침공하라고 명령했다. 키치너는 1896년 6월 페르케 전투와 9월 하피르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2][15] 수단 군사 철도 건설을 담당한 퍼시 지로아드와 함께 진격하여,1898년 4월 아트바라 전투와 9월 옴두르만 전투에서 승리했다.[2] 옴두르만 전투에서 키치너는 마흐디의 무덤을 폭파하고 그의 뼈를 흩뿌렸으며, 마흐디의 시신을 발굴하여 참수했다.[16] 이 상징적인 참수는 1885년 마흐디스트 군대의 손에 고든 장군이 죽은 것을 되풀이한 것이었다.[17][18]

키치너, 이집트 육군 사령관(오른쪽 두 번째), 1898년


옴두르만 전투 승리후, 키치너는 솔즈베리의 밀봉된 특별 서신을 열었는데, 수단 정복 명령의 진짜 이유가 프랑스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1898년 9월 18일 파쇼다 (현재 코도크, 말라칼 북쪽 나일강 서안)에 있는 프랑스 요새에 도착하여 파쇼다 사건이 발생하였고, 1898년 11월 프랑스가 수단에서 철수하기로 합의하면서 위기는 끝났다.[20]

1898년 9월 수단 총독이 된 키치너는 고든 기념 칼리지를 설립하고, 하르툼의 모스크를 재건하고, 이슬람교 휴일인 금요일을 휴일로 정하는등 수단의 모든 시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13][14]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1898년 10월 31일 하르툼과 서퍽주 아스팔의 '''키치너 남작'''으로 임명되었다.[21]

4. 보어 전쟁

제2차 보어 전쟁 중 키치너는 1899년 12월 RMS 던오타 캐슬을 타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로버츠 경 원수와 함께 대규모 영국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공식적으로 참모장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22] 실제로는 부사령관이었으며, 1900년 2월 파아데베르크 전투에서 실패한 정면 공격을 이끌기 전에 킴벌리 구원에 참여했다. 보어 정규군이 패배한 후 키치너는 1900년 11월 로버츠의 뒤를 이어 전체 사령관이 되었다.[24] 그는 또한 1900년 11월 29일에 중장으로 진급했고[2][25] 1900년 12월 12일에는 현지 대장으로 진급했다.[24]

그는 이후 로버츠가 개발한 성공적인 전략을 물려받아 확장하여 보어 코만도에게 항복을 강요했는데, 여기에는 강제 수용소 건설과 농장 방화가 포함되었다. 로버츠가 파괴한 농가의 가족을 통제하기 위한 형태로 고안된 강제 수용소의 상황은 대규모의 보어 유입으로 인해 소규모 영국군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초과하면서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수용소에는 공간, 식량, 위생 시설, 의약품, 의료 서비스가 부족하여 질병이 만연하고 수용소에 들어온 보어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결국 26,370명의 여성과 어린이(81%가 어린이)가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26]

|left|thumb|216x216px|리지 반 질, 강제 수용소에 갇힌 남아프리카 소녀. 제2차 보어 전쟁 중 키치너의 대반란 전술의 결과]]

수용소에 대한 가장 큰 비판자는 영국의 인도주의자이자 사회 복지사 에밀리 홉하우스였다.[27] 그녀는 키치너의 군인들과 행정부가 저지른 잔혹 행위를 강조하는 저명한 보고서를 발표하여 런던에서 전쟁에 대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28] 키치너는 계엄령 조항을 발동하여 홉하우스가 남아프리카로 돌아오는 것을 막았다.[28]

전쟁을 종식시키는 베레니깅 조약은 긴장된 6개월 후인 1902년 5월에 서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키치너는 케이프 식민지 총독(알프레드 밀너, 제1대 밀너 자작)과 영국 정부에 대항하여 고군분투했다. 밀너는 강경 보수주의자였으며,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보어인)을 강제로 영국화시키고 싶어했고, 밀너와 영국 정부 모두 보어인에게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승리를 주장하고 싶어했다. 반면 키치너는 아프리카너들에게 특정 권리를 인정하고 미래의 자치 정부를 약속하는 보다 관대한 타협적 평화 조약을 원했다.[29]

1902년 6월 1일에 정식으로 대장으로 진급한 키치너는[2][30] 6월 23일 케이프타운에서 환송회를 받았으며, 같은 날 SS ''오로타바''를 타고 영국으로 떠났다.[31] 그는 다음 달 도착 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7월 12일 사우스햄턴에 상륙한 그는 시의회로부터 자유 시민권을 받았다. 런던에서는 조지 5세 웨일스 공이 기차역에서 그를 맞이했고, 70개의 다른 부대에서 온 군인들이 늘어선 거리를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진했으며,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공식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는 또한 최근 충수염 수술을 받고 병실에 갇혀 있었지만, 그의 도착을 환영하고 그에게 공로 훈장 (OM)을 직접 수여하고자 했던 에드워드 7세 국왕을 방문했다.[32] 키치너는 1902년 7월 28일에 하르툼과 트란스발 식민지의 바알강 및 서퍽 카운티의 아스팔의 '''키치너 자작'''으로 임명되었다.[2][33]

브레이커 모란트 사건에서, 부시벨트 카빈니어스라는 비정규 부대의 호주 장교 5명과 영국 장교 1명이 보어인 포로 12명을 즉결 처형하고, 보어인 동조자로 여겨지는 독일 선교사를 살해한 혐의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모든 행위는 키치너의 승인을 받은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알려졌다. 유명한 기수이자 부시 시인인 해리 "브레이커" 모란트 중위와 피터 핸콕 중위는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1902년 2월 27일 피터스버그에서 사격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들의 사형 집행 영장은 키치너가 직접 서명했다. 그는 세 번째 병사인 조지 위튼 중위의 사형을 감형했고, 위튼 중위는 32개월을 복역한 후 석방되었다.[34]

5. 인도, 다시 이집트

브룸 공원, 키치너의 캔터베리에 있는 별장


키치너는 1902년 인도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35] 인도군 재편성을 시작했다. 그는 고정 주둔군의 규모를 줄이고 두 개의 군대로 재편성하여 전쟁에 대비하도록 하는 "인도 육군의 재편성 및 재분배" 계획을 추진했다.[36]

정복을 거친 후 촬영한 전신 제복을 입은 필드 마셜 키치너의 초상화


키치너의 개혁은 케들스턴의 커존 경의 지지를 받았으나, 군사 행정 문제와 서명 방식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키치너는 군사 위원 통제 시스템에 반대했고, 결국 런던 정부의 지지를 얻어 커존 경은 사임했다.[36] 이후 키치너의 군사적 의사 결정 권한 집중 시도는 옳았음이 증명되었으나, 군사 위원과의 업무 처리 방식은 비효율적이라는 "이중성의 성격 부여"라는 비판을 받았다.

1910년 ''더 퀸즐랜드 화보''에 실린 기마 키치너


키치너는 1905년 라왈핀디 열병식을 주재하고[37] 퀘타에 인도 참모대학을 설립했다. 1909년에는 육군 최고 계급인 야전 원수로 진급했으며,[38]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순방했다. 그는 인도 총독이 되기를 열망했지만, 존 모릴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09년 11월, 우쓰노미야에서 열린 일본 육군의 대연습 참관을 위해 에드워드 7세의 대리인으로 방일했으며, 일본 체류 중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에도 참석했다.

1911년, 키치너는 조지 5세와 메리 여왕의 대관식에 참여하여 호위대장 역할을 맡았고,[39] 델리 두르바르로 가는 국왕과 여왕을 포트사이드에서 맞이했다.[40] 같은 해 6월, 압바스 힐미 2세가 케디브로 공식 통치하는 동안 영국 대표이자 이집트 주재 총영사로 이집트에 돌아왔다. 1910년에 원수로 진급했으며,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이집트 주재 영국 대표 겸 총영사를 역임했다.

아가디르 위기 당시, 키치너는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쉽게 제압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14년 6월, 하르툼과 켄트주 브룸의 '''키치너 백작'''으로 서임되었다. 그는 스카우트 운동의 옹호자였으며, "한 번 스카우트는 영원한 스카우트"라는 문구를 만들었다.[41] 1914년 6월에는 백작 작위가 수여되었으며, 아내와 자녀가 없었던 그를 위해 형제와 조카에게 상속되도록 특별히 규정되었다.

6.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애스퀴스 총리는 키치너를 즉시 육군 장관으로 임명했다.[42] 영국 내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키치너는 최소 3년 이상 지속될 장기전, 독일을 격파하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새로운 군대가 필요할 것이며, 종전 전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대규모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육군으로의 징병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곧 잡지 표지에서 따온 키치너 경, 당신을 원합니다의 키치너의 독특한 포스터가 등장했다. 이 포스터는 많은 자원병을 장려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후 여러 번 복제되고 패러디되면서 전쟁의 가장 오래 지속되는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1914년의 상징적이고 많은 모방을 낳은 키치너 경, 당신을 원합니다 포스터


런던 화이트홀에 있는 징병 사무실을 포위한 젊은이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키치너 엽서. 사진에는 그가 젊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키치너는 영국이 장기전을 위해 자원을 비축해야 한다고 믿고 초기 BEF는 약속된 5개 또는 6개 사단이 아닌 4개 보병 사단(기병 1개)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결정했다. 존 프렌치 경이 자신의 병력이 더 강했다면 진격하는 독일군의 코앞으로 더 멀리 진격하려는 유혹을 받았을 때 BEF를 재앙으로부터 구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 경은 르 카토 전투에서 영국군의 막대한 손실에 대해 우려하여 연합군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소집된 각료 회의에서 권한을 위임받은 키치너는 9월 1일 존 경과의 회담을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그들은 르네 비비아니 (프랑스 총리)와 알렉상드르 밀레랑 (당시 프랑스 전쟁부 장관)과 함께 만났다. 회담 후 키치너는 내각에 영국 원정군이 전선에 남을 것이지만 측면을 공격받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며, 프렌치에게 이를 "지시"로 간주하라고 전보를 보냈다.

1915년 독일 선전 메달, ''키치너의 꿈''


1915년 1월, 육군 원수(Field Marshal) 프렌치는 신설 군대를 사단 전체로 보내는 대신 기존 사단에 대대 형태로 통합시키기를 원했다. 프렌치는 키치너를 제치고 아스퀴스 수상에게 직접 호소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아스퀴스는 키치너의 결정을 뒤집기를 거부했다. 이는 마른 전투 동안 프렌치에게 연합군 전선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하기 위해 프랑스로 여행을 갔던 프렌치와 키치너 사이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서부 전선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키치너는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육군 군단(ANZAC), 신설 군대, 인도 군대를 동원하여 알렉산드레타를 침공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윈스턴 처칠의 재앙적인 갈리폴리 전역을 지원하도록 설득당했다.[43] 결국 실패로 끝난 이 작전은 1915년 포탄 위기와 함께 키치너의 정치적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키치너는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아스퀴스는 새로운 아스퀴스 연립 내각에서도 그를 유임시켰지만, 탄약에 대한 책임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새로운 부서로 옮겨졌다.

1915년 11월, 안작에서 윌리엄 버드우드 장군과 함께 있는 키치너


1915년 가을, 아스퀴스의 연립 정부가 징병제 문제로 붕괴 직전에 이르자, 그는 그 조치에 반대하고 처칠이나 리처드 홀데인과 같은 민간인들이 전략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여 시나이, 메소포타미아, 살로니카에서 임시방편식 캠페인이 벌어지도록 한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았다.

키치너와 아스퀴스는 로버트슨이 CIGS가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로버트슨은 키치너가 "자신의 CIGS로 계속 남을" 경우 이를 거부했다. 이 합의는 1916년 1월 추밀원 명령으로 공식화되었다.

1916년 초 키치너는 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BEF)의 새 사령관인 더글러스 헤이그를 방문했다. 키치너는 헤이그의 전임자인 존 프렌치 경을 제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와는 좋지 않은 관계였다. 헤이그는 키치너가 "초췌하고, 피곤하고, 늙었다"고 생각했으며, 헤이그와 로버트슨이 보기에 서부 전선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시기가 다가오면서 그의 정신이 "이해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키치너는 1916년 6월 2일, 전쟁 수행에 대해 정치인들이 제기한 질문에 직접 답변했다. 그는 자신을 심문하기 위해 모인 200명의 국회의원들로부터 그의 솔직함과 군대를 무장시키려는 노력에 대해 열렬한 감사의 표결을 받았다.

키치너의 징병 포스터 '영국은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작:알프레드 리트)

6. 1.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활약상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애스퀴스 총리는 키치너를 즉시 육군 장관으로 임명했다.[42] 영국 내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키치너는 최소 3년 이상 지속될 장기전, 독일을 격파하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새로운 군대가 필요할 것이며, 종전 전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 대규모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육군으로의 징병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곧 잡지 표지에서 따온 키치너 경, 당신을 원합니다의 키치너의 독특한 포스터가 등장했다. 이 포스터는 많은 자원병을 장려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후 여러 번 복제되고 패러디되면서 전쟁의 가장 오래 지속되는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키치너는 영국이 장기전을 위해 자원을 비축해야 한다고 믿고 초기 BEF는 약속된 5개 또는 6개 사단이 아닌 4개 보병 사단(기병 1개)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결정했다. 존 프렌치 경이 자신의 병력이 더 강했다면 진격하는 독일군의 코앞으로 더 멀리 진격하려는 유혹을 받았을 때 BEF를 재앙으로부터 구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 사령관 존 프렌치 경은 르 카토 전투에서 영국군의 막대한 손실에 대해 우려하여 연합군 전선에서 병력을 철수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소집된 각료 회의에서 권한을 위임받은 키치너는 9월 1일 존 경과의 회담을 위해 프랑스로 떠났다. 그들은 르네 비비아니 (프랑스 총리)와 알렉상드르 밀레랑 (당시 프랑스 전쟁부 장관)과 함께 만났다. 회담 후 키치너는 내각에 영국 원정군이 전선에 남을 것이지만 측면을 공격받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며, 프렌치에게 이를 "지시"로 간주하라고 전보를 보냈다.

1915년 1월, 육군 원수(Field Marshal) 프렌치는 신설 군대를 사단 전체로 보내는 대신 기존 사단에 대대 형태로 통합시키기를 원했다. 프렌치는 키치너를 제치고 아스퀴스 수상에게 직접 호소하는 조치를 취했지만, 아스퀴스는 키치너의 결정을 뒤집기를 거부했다. 이는 마른 전투 동안 프렌치에게 연합군 전선으로 복귀하라고 명령하기 위해 프랑스로 여행을 갔던 프렌치와 키치너 사이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서부 전선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키치너는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육군 군단(ANZAC), 신설 군대, 인도 군대를 동원하여 알렉산드레타를 침공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1915년부터 1916년까지 윈스턴 처칠의 재앙적인 갈리폴리 전역을 지원하도록 설득당했다.[43] 결국 실패로 끝난 이 작전은 1915년 포탄 위기와 함께 키치너의 정치적 명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키치너는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아스퀴스는 새로운 아스퀴스 연립 내각에서도 그를 유임시켰지만, 탄약에 대한 책임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새로운 부서로 옮겨졌다.

1915년 가을, 아스퀴스의 연립 정부가 징병제 문제로 붕괴 직전에 이르자, 그는 그 조치에 반대하고 처칠이나 리처드 홀데인과 같은 민간인들이 전략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여 시나이, 메소포타미아, 살로니카에서 임시방편식 캠페인이 벌어지도록 한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았다.

키치너와 아스퀴스는 로버트슨이 CIGS가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지만, 로버트슨은 키치너가 "자신의 CIGS로 계속 남을" 경우 이를 거부했다. 이 합의는 1916년 1월 추밀원 명령으로 공식화되었다.

1916년 초 키치너는 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BEF)의 새 사령관인 더글러스 헤이그를 방문했다. 키치너는 헤이그의 전임자인 존 프렌치 경을 제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와는 좋지 않은 관계였다. 헤이그는 키치너가 "초췌하고, 피곤하고, 늙었다"고 생각했으며, 헤이그와 로버트슨이 보기에 서부 전선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시기가 다가오면서 그의 정신이 "이해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키치너는 1916년 6월 2일, 전쟁 수행에 대해 정치인들이 제기한 질문에 직접 답변했다. 그는 자신을 심문하기 위해 모인 200명의 국회의원들로부터 그의 솔직함과 군대를 무장시키려는 노력에 대해 열렬한 감사의 표결을 받았다.

7. 사망

키치너는 동부 전선의 악화되는 상황, 특히 1915년 중반부터 압박이 심화된 러시아 제국 육군에 대한 막대한 양의 군수 물자 제공 문제에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1916년 5월, 레지널드 맥케나 재무부 장관의 제안과 니콜라이 2세 차르의 공식 초청으로 키치너는 러시아와의 군사 협력을 위한 특사로 파견되었다. 1916년 6월 5일, 키치너는 스크래브스터에서 HMS ''Oak''를 타고 스카파 플로우로 항해하여, 존 젤리코 제독과 점심을 먹고 장갑순양함 HMS ''Hampshire''를 타고 러시아 아르한겔스크로 향했다.[46]

키치너의 마지막 사진 중 하나. 그는 1916년 6월 5일, 스카파 플로우에서 HMS ''Oak''에서 HMS ''Iron Duke''에 승선하여 젤리코 제독과 회담을 가졌다.
같은 날 저녁 7시 30분 직전, ''Hampshire''는 오크니 제도 서쪽에서 U-75가 설치한 기뢰에 맞아 침몰했다. 이 사고로 키치너를 포함한 737명 중 12명만이 살아남았다. 키치너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키치너의 사망 소식은 대영 제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46]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은 "그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말했고,[47] 조지 5세 국왕은 "그것은 나에게 정말 큰 타격이며 국가와 동맹국에게 큰 손실이다"라고 일기에 썼다.[48]

키치너의 죽음에는 여러 음모론이 제기되었는데, 앨프리드 더글러스 경은 키치너의 죽음, 유틀란트 해전, 윈스턴 처칠, 그리고 유대인 음모 사이의 연관성을 주장했다.[49] 보어 군인이자 스파이였던 프리츠 주베르 뒤케인은 자신이 키치너를 암살했다고 주장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에서 독일 스파이 조직을 운영하다 FBI에 체포되기도 했다.[56]

그의 죽음 1개월 후, 키치너 경 기념 재단이 조직되어 전쟁 부상자 지원과 귀환병 및 그 자녀들의 고등 교육 장학금 지원 사업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의 키치너 기념비

8. 유산

키치너는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북서쪽 모퉁이의 예배당에 공식적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를 기리는 추모식이 열렸다.[61]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의 올 소울스 예배당은 1925년에 키치너 기념관으로 재헌납되었다.[61] 기념관은 정문 로비에서 볼 수 있으며, 엎드린 흰색 대리석 조각상은 데트마 블로우가 디자인했고,[69] 조각상과 성 조지, 성 미카엘의 조각상, 예배당의 피에타는 윌리엄 리드 딕이 조각했다.[70]

호스 가드 퍼레이드에 있는 키치너 기념비


키치너가 사망한 지 한 달 후, 런던 시장은 그의 기억을 기리기 위해 키치너 경 국립 기념 기금을 설립했다.[71] 이 기금은 전쟁 부상자들을 지원하고, 전쟁 후에는 군인, 전직 군인, 그들의 아들, 딸들에게 대학 교육을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71] 헤들리 르 바스 경의 편집으로 키치너의 동료들이 쓴 찬사와 회고록을 담은 기념 도서가 발간되어 이 기금에 기여했다.[72] 켄트주 채텀에 있는 키치너 경 기념 홈은 키치너 사망 후 대중의 기금으로 건설되었으며, 현역 군인 및 여성 또는 그들의 미망인 및 과부에게 저렴한 임대 주택을 제공한다.[73]

오크니 본토의 마윅 헤드에 있는 키치너 기념비


오크니 본토의 키치너 기념관은 키치너가 바다에서 사망한 지점 근처인 마윅 헤드(HY2325)의 절벽 가장자리에 있다. 이 기념관은 사각형의 치상 석조 탑으로, "이 탑은 그의 나라에서 그가 충실히 봉사했던 구석, 즉 그가 임무 수행 중 사망한 곳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카르툼의 키치너 백작 필드 마샬을 기리기 위해 오크니 사람들이 세웠다. 그는 1916년 6월 5일 HMS ''햄프셔''의 장교, 거의 모든 병력과 함께 사망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76][77][78]

키치너가 가장 좋아했던 군마인 데모크라트를 탄 키치너의 동상이 켄트주 채텀의 카르툼 로드(포트 앰허스트 근처)에 있다. 이 동상은 1920년 카르툼에 세워졌다가 수단의 독립 이후 1959년 영국으로 옮겨졌다.[74][75]

1916년 주민투표를 거쳐 베를린시가 키치너로 개명되었다.[62] 1920년대 초, 우스터셔주 더들리의 케이트스 힐 지역에 있는 새로운 시의회 주택 단지의 도로가 키치너를 기리기 위해 키치너 로드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79] 웨스트 서섹스주 이스터게이트에 있는 세인트 조지 교회의 성가대석 동쪽 창문에는 키치너를 기념하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80]

"조국은 당신을 필요로 한다!"라는 문구와 함께 등장하는 그의 지휘하는 모습은 징병 포스터에서 인용되었으며, 대중문화에서 여전히 인식되고 패러디되고 있다.[63] 1972년 영화 ''젊은 처칠''에서 키치너는 존 밀스가 연기했고,[64] 2021년 영화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는 찰스 댄스가 연기했다.[65] 2013년 12월, 영국 왕립 조폐국은 2014년에 키치너의 "호소"가 새겨진 기념 2파운드 동전을 주조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81]

키치너를 위한 기념 십자가가 1916년 세인트 보톨프-없이-비숍스게이트 교회(리버풀 스트리트 역 근처)에서 공개되었으며, 이는 아마도 영국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최초의 기념비 중 하나일 것이다.[82] 인도 데라둔에 있는 라스트리야 인도 육군 사관학교의 세 개의 기숙사 중 하나는 키치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83] 키치너가 사망한 지 한 달 후, 이전 유랙 타운의 명예의 거리를 따라 키치너를 위한 기념수가 헌정되었으며, 주변 타운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84]

1970년 이후, 새로운 기록들이 공개되면서 역사가들은 키치너의 명성을 어느 정도 회복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로빈 닐랜즈는 키치너가 진급할수록 일관되게 능력이 향상되었다고 지적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현재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그의 전략적 비전을 칭찬하는데, 특히 탄약 생산 확대를 위한 기반을 다지고 1914년과 1915년 영국군을 증강하여 영국이 대륙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을 제공한 그의 중심적인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3]

9. 키치너의 성적 취향에 대한 논쟁

키치너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87] 1892년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그는 "키치너의 소년단"이라는 별명을 가진 열정적이고 미혼인 젊은 장교들을 주변에 모았다. 이들 중에는 그의 부관이자 "끊임없이 함께 하는 동반자"였던 오스왈드 피츠제럴드 대위가 있었는데, 그는 러시아로 가는 항해에서 키치너와 함께 사망했다. 키치너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가끔 돌았고, 사후 여러 전기 작가들이 그가 잠재적 또는 적극적인 동성애자였을 것이라고 시사하거나 암시했다.[87] 키치너의 비판가였던 이집트 원정 및 보어 전쟁 참전 용사인 A. E. 웨언 소령은 그가 "대부분의 이집트 장교들이 얻은 결함, 즉 남색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87] 그의 동성애를 주장하는 후기 학자들로는 H. 몽고메리 하이드와 로널드 하이엄이 있는데, 하이엄은 "그가 여자를 사랑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썼다.

전기 작가 C. 브래드 포트는 키치너가 도자기를 수집하고 만찬을 조직하는 데서 "잔여적인 여성성"을 인정했고, 그의 계급과 시대에 전형적인 감정 억제를 인정했지만, 양쪽 모두 증거가 없다는 점은 "역사가들이 거의 아무 쓸모 있는 말도 할 수 없는 문제"를 남긴다고 결론지었다. 반면, 전기 작가 조지 H. 카사르는 키치너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이성적인 매력에 대한 증거가 포함되어 있으며, 키치너가 동성애자였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가 있었다면 그가 생전에 수많은 반대자들에 의해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추측에 반하여, 2001년 애스터 부인의 아들 로버트 굴드 쇼 3세가 보퍼트 공작 11세에게 키치너가 자신의 첫 번째 유혹자였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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