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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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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1863년 웨일스에서 태어나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하여, 1890년 카에르나르폰 자치구의 자유당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웨일스 민족주의를 옹호하며, 국회의원으로서 웨일스 교회 독립, 금주 운동 등을 주도했다. 1905년 무역위원회 의장, 1908년 재무장관을 역임하며 사회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1916년 육군장관을 거쳐 같은 해 보수당의 지지를 받아 총리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시 내각을 이끌며 전쟁 승리에 기여했으나, 전후 처리와 외교 정책에서 논란을 겪었다. 총리직 사임 후 자유당 재건에 힘썼지만, 다시 권력을 잡지는 못했고 1945년 사망했다. 그는 사회 개혁과 제1차 세계 대전 승리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지도력 스타일과 외교 정책 등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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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이드 조지 (1919년경)
존칭 접두사존경하는 각하
이름데이비드 조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출생일1863년 1월 17일
출생지잉글랜드, 맨체스터, 코를턴온메들록
사망일1945년 3월 26일
사망지웨일스, 슬라나스티무두이
안장 위치슬라나스티무두이, 웨일스
직업변호사
정치인
잉크로 쓴 필기체 서명
서명
배우자마거릿 오언(1888년 1월 24일 결혼, 1941년 1월 20일 사망)
프랜시스 스티븐슨(1943년 10월 23일 결혼)
자녀리처드 로이드 조지
데임 올웬 케리 에번스
귈림 로이드 조지, 제1대 텐비 자작
레이디 메건 로이드 조지
친척윌리엄 조지(형)
정치 경력
영국 총리재임 시작: 1916년 12월 6일
재임 종료: 1922년 10월 19일
군주조지 5세
전임자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후임자보나 로
자유당 대표재임 시작: 1926년 10월 14일
재임 종료: 1931년 11월 4일
전임자H. H. 애스퀴스
후임자허버트 새뮤얼
영국 육군부 장관재임 시작: 1916년 7월 6일
재임 종료: 1916년 12월 5일
총리H. H. 애스퀴스
전임자키치너 백작
후임자더비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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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H. H. 애스퀴스
전임자신설된 직책
후임자에드윈 몬태규
재무장관재임 시작: 1908년 4월 12일
재임 종료: 1915년 5월 25일
총리H. H. 애스퀴스
전임자H. H. 애스퀴스
후임자레지널드 매케나
통상부 장관재임 시작: 1905년 12월 10일
재임 종료: 1908년 4월 12일
총리헨리 캠벨 배너먼
H. H. 애스퀴스
전임자솔즈베리 후작
후임자윈스턴 처칠
하원 원로재임 시작: 1929년 5월 31일
재임 종료: 1945년 2월 13일
전임자T. P. 오코너
후임자윈터턴 백작
귀족원 의원계급: 세습 귀족
재임 시작: 1945년 1월 1일
재임 종료: 1945년 3월 26일
후임자제2대 로이드 조지 오브 드와이퍼 백작
하원 의원선거구: 카나번 자치구
재임 시작: 1890년 4월 10일
재임 종료: 1945년 2월 13일
전임자에드먼드 스웨텐햄
후임자시본 데이비스
소속 정당자유당 (1890년–1916년; 1924년–1945년)
연립 자유당 (1916년–1922년)
국민 자유당 (1922년–1923년)
기타 정보
작위제1대 도와이퍼의 로이드 조지 백작
훈장메리트 훈장(OM), 추밀원 의원 (PC)

2. 초기 생애 및 배경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1863년 1월 17일 잉글랜드 맨체스터에서 웨일스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조지는 교사였고,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웨일스 리니스텀드위(Llanystumdwy) 출신이었다.[141] 어린 시절 아버지가 폐렴으로 사망하자,[142] 어머니와 함께 리니스텀드위로 이사하여 외삼촌 리처드 로이드의 집에서 자랐다.[143] 외삼촌은 구두장이면서 평신도 목사였고, 강력한 자유당 지지자였다. 그는 조카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데이비드는 외삼촌의 성을 따서 "로이드 조지"가 되었다.

로이드 조지는 현지 앵글리칸(Anglican) 학교인 리니스텀드위 국민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는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첫 언어로 웨일스어(Welsh language)를 사용하며 자랐다.[7] 어린 시절 빅토르 위고레 미제라블을 읽고 약자에 대한 공감을 키웠으며,[154] 지주에게 땅을 빼앗긴 소작농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지주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고 한다.[155]

15세였던 1878년 7월, 포스마독(Porthmadog)에 있는 브리즈, 존스 & 컨슨(Breeze, Jones & Cusson) 법률사무소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159] 188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크리키스(Criccieth)에서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166] 변호사로서 약자를 위한 변론을 많이 했고, 특히 지역 국교회가 오즈번-모건 매장법(Osborne-Morgan Burial Act)을 위반하여 토지 기증자(지주)와의 계약을 빌미로 비국교도 메소디스트식 매장을 거부한 사건에서 비국교도를 변호함으로써 웨일스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171]

1888년 1월 24일에는 크리키스(Criccieth)의 유지 리처드 오웬의 딸 마가렛 로이드 조지와 결혼했다.[172]

2. 1. 웨일스 민족주의의 영향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1863년 1월 17일 잉글랜드 맨체스터의 초얼턴온메드록(Chorlton-on-Medlock)에서 웨일스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141] 아버지 윌리엄 조지는 교사였고,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웨일스 리니스텀드위(Llanystumdwy) 출신이었다.[141]

어린 시절 아버지가 폐렴으로 사망하자,[142] 어머니와 함께 리니스텀드위로 이사하여 외삼촌 리처드 로이드의 집에서 자랐다.[143] 외삼촌은 구두장이면서 평신도 목사였고, 강력한 자유당 지지자였다. 그는 조카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데이비드는 외삼촌의 성을 따서 "로이드 조지"가 되었다.

로이드 조지는 현지 앵글리칸(Anglican) 학교인 리니스텀드위 국민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는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았다.[152] 그는 첫 언어로 웨일스어(Welsh language)를 사용하며 자랐다.[7]

외삼촌은 도덕적인 비국교도이자,[145] 웨일스 민족주의자였다.[146] 당시 웨일스는 소수의 대지주가 지배하는 농업 사회였는데, 이들 중 다수는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였고 보수당을 지지했다. 외삼촌은 이러한 지주들의 반감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유당 지지를 공개적으로 밝혔고, 그의 가게는 마을에서 자유당 선거 운동의 비공식 본부로 사용되기도 했다.[150]

로이드 조지는 어린 시절 빅토르 위고레 미제라블을 읽고 약자에 대한 공감을 키웠으며,[154] 지주에게 땅을 빼앗긴 소작농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지주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고 한다.[155]

2. 2. 법조인으로서의 경력

로이드 조지는 1878년 7월, 포스마독(Porthmadog)에 있는 브리즈, 존스 & 컨슨(Breeze, Jones & Cusson) 법률사무소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159] 사무소 소장인 브리즈 부부는 로이드 조지를 친아들처럼 귀여워했고, 로이드 조지는 그 호의에 보답하듯 일하면서 법률 서적을 탐독했다고 한다.[160] 188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크리키스(Criccieth)에서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1887년에는 그의 동생 윌리엄도 변호사 자격을 얻어 두 사람이 함께 사무소를 운영하게 되었다.[166]

1880년부터 자유당 운동원으로서 활동했고, 공부하는 틈틈이 농민 운동과 금주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62] 또한 지역 신문에 정치 논문을 계속 기고했으며, 1880년 11월에는 로버트 가스코인-세실, 제3대 솔즈베리 후작의 연설을 비판한 그의 논문이 처음으로 신문에 실렸다.[163]

독립 변호사가 된 후에도 웨일스 소작농들을 지원하여 카너보셔 농민 조합 결성에 기여했고, 이후에는 서기장을 역임했다. 또한 토마스 지의 십일조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다.[167][168] 더 나아가 중앙 정계의 자유당 신급진파 조셉 체임벌린의 영향을 받아 도시 노동 계급도 사회 개혁 정책에 의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169]

변호사로서 약자를 위한 변론을 많이 했고, 치안 판사에게 철저히 저항했다.[170] 특히 지역 국교회가 오즈번-모건 매장법(Osborne-Morgan Burial Act)을 위반하여 토지 기증자(지주)와의 계약을 빌미로 비국교도 메소디스트식 매장을 거부한 사건에서 비국교도를 변호함으로써 웨일스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171]

1888년 1월 24일에는 크리키스(Criccieth)의 유지 리처드 오웬의 딸 마가렛 로이드 조지와 결혼했다.[172]

3. 정치 경력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1880년대 후반 웨일스의 급진적인 정치 운동가로 명성을 얻었다.[173][174] 1889년에는 새로 설립된 카너본 주 의회의 참사 회원으로도 선출되었다.[175]

초선 의원이 된 이후, 로이드 조지는 지역구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그 이후 55년 동안 이 선거구에서 계속 당선될 수 있었다.[179] 언론의 극찬을 받았으며, 『』지는 "카나번의 신임 의원의 초고연설은 놀랍다. 그의 앞날은 주목할 만하다"라고 보도했다.[185]

1891년 십일조 교구세 법안과 1892년 4월의 목사 징계 법안에 당수 글래드스톤의 의향에 거슬러 반대했다. 로이드 조지가 이 법안들에 반대한 것은 국교회가 “정화”되어 버리면 웨일스에서의 국교회 부패를 호소하는 주장에 설득력이 없어지고, 웨일스의 종교적 독립이 늦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189][187]

1892년 영국 총선거에서 로이드 조지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190] 총선 결과 자유당이 근소하게 승리했고,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가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 가결로 글래드스톤이 네 번째로 총리가 되었다.[191][192] 로이드 조지는 글래드스톤에게 눈총을 받아 어떤 직책도 주어지지 않았고, 의회 내에서 고립되었으나,[193] 1893년에는 웨일스 교회를 국교회로부터 독립시키는 법안을 둘러싸고 글래드스톤 정권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했다.[194]

로이드 조지는 웨일스 교회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웨일스 각지에서 하여 여론을 환기했다. 1895년 애스퀴스 내무장관은 다시 웨일스를 국교회 관할 지역에서 제외하는 법안을 제출했다.[196] 로이드 조지는 이 법안 심의에서 “웨일스 국민이 부패한 국교회의 지배로 인해 입은 피해”를 지적하고, 전 보수당 정권을 비판하여 벌푸어와 논쟁을 벌였지만, 그를 논파했다.[197] 한편 법안의 “소극적인 태도”도 비판하고, 애스퀴스 내무장관에 대한 방해도 자주 했다.[198] 같은 해 6월에 로즈베리 백작 내각이 총사퇴했기 때문에 웨일스 교회 독립 법안도 무산되었다.[199]

솔즈베리 후작의 보수당·자유연합당 연립정권이 발족하고, 곧바로 영국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로이드 조지는 안정적으로 재선되었으나,[200] 전국적으로는 여당의 승리로 끝났다.[201] 1896년 6월, 로이드 조지는 여당이 제출한 농업 과세법에 대해 “지주를 우대하고 하층민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법안”이라고 비판하며 1주일 출석 정지 처분을 받을 정도로 격렬하게 반대 투쟁을 벌였고, 웨일스의 자유당 계열 신문으로부터 갈채를 받았다.[202]

같은 해 7월,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 당수 로즈베리 백작 주최 만찬회에서 “웨일스 자치안”을 발표했지만 반응이 좋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웨일스 문제만으로는 영국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 영국의 자유주의를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203]

에서 전사한 영국군의 시체를 버린 참호


보어인들의 민가를 불태우는 영국군의 초토화 작전


제3대 솔즈베리 후작 내각의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의 제국주의 정책을 둘러싸고 자유당은 자유 제국주의파와 소영국주의파로 분열되었다.[205] 제2차 보어 전쟁이 시작되면서 분열은 더욱 심각해졌다. 로이드 조지는 “친 보어파”라고 불리는 반전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206]

1899년 10월 29일, 로이드 조지는 하원 연설에서 “정부는 무익한 전쟁을 시작하여, 노령 연금에 사용되어야 할 재원도 소비했다"고 주장했다.[207] 이러한 반전 운동으로 그의 이름은 영국 전역에 널리 알려졌지만, 반전파는 소수파였다.[208] 1900년 초, 반전 운동이 일시적으로 고조되었지만,[209] 영국군의 반격과 체임벌린의 선동으로 반전파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로이드 조지는 4월 뱅거에서 반전 연설 중 전쟁 지지파에게 곤봉으로 맞아 중상을 입었다.[210] 5월 마피킹에서 영국군이 구출되자 반전 집회는 더 이상 열 수 없게 되었다.[211]

6월, 영국군이 프레토리아를 점령하자 보수당 정권은 9월에 해산 총선거를 실시했다.[212] 로이드 조지는 “정부가 체임벌린이 주주로 있는 회사에 우선적으로 해군 폭발물 주문을 냈다”고 비판했다.[213] 그러나 여당이 승리했고, 자유당 내 분열은 심화되었다.[214]

전쟁은 게릴라전으로 변하여 계속되었고, 로이드 조지 등 친 보어파는 영국군의 초토화 작전을 비판했다.[215] 전쟁 혐오 분위기가 고조되고, 강제 수용소에서 보어인들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한 비판도 높아졌다.[216][217] 1901년 12월, 로이드 조지가 버밍햄에서 연설회를 개최했을 때 전쟁 지지파 민중이 폭동을 일으켰고, 그는 경찰관으로 변장하여 위기를 모면했다.[218]

1902년 3월 휴전 협정, 5월 강화 조약이 체결되어 보어인이 영국 왕 에드워드 7세의 주권을 받아들이고 영국의 통치에 귀순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219]

3. 1. 하원 의원 당선 (1890년)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1888년 여름 카나본 선거구의 자유당 후보로 선출되었다.[173][174] 1890년 4월 카너본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보수당 후보이자 지주였던 휴 엘리스-내니와 경쟁하였다.[176]

선거 운동에서 로이드 조지는 솔즈베리 후작 내각의 아일랜드 담당 장관 아서 발푸어가 주도하는 아일랜드 탄압 정치를 비판하고, 자유당 당수 윌리엄 글래드스톤의 아일랜드 자치 정책에 찬성했다. 그는 웨일스도 종교의 자유를 위해 일어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웨일스의 토지 제도와 노동법의 불공정성을 비판했다. 또한 토지 양도, 토지세, 토지 임대 부담 경감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금주와 지방 자치 강화 정책도 제시했다.[177] 그는 "통나무 오두막에서 자란 사람의 새벽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것을 토리(보수당)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선언했다.[178]

당시 자유당은 분열 상태였고, 로이드 조지 자신도 선거구의 자유당 조직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아 힘든 선거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웨일스 민족주의의 고양에 힘입어 18표 차이라는 근소한 차이로 보수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179]

1890년 4월 17일 하원에 처음 입성했다.[180] 6월 13일 초고연설에서 로이드 조지는 솔즈베리 후작 내각이 추진하는 보충법을 "주류 판매업자를 옹호하는 법안"이라고 비판하고, 이 법안의 제출자인 보수당 의원 랜돌프 처칠 경과 자유연합당 의원 조지프 체임벌린을 규탄했다.[182] 대부분의 신인 의원들은 초고연설에서 무난한 연설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로이드 조지는 그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183] 특히 당시 시대의 총아였던 체임벌린을 비판한 것은 로이드 조지의 명성을 떨치는 데 충분했다.[184]

의원 초기에는 웨일스 출신 의원으로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웨일스 교회를 국교회로부터 독립시키자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지주들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금주 운동에도 참여했다.[6] 1899년에는 노령 연금에 관한 하원 특별위원회 위원이 되어 노령 연금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179]

3. 2. 전국적 명성 획득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 반대 운동을 주도하여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204] 그는 전쟁에 필요한 전비 유지를 위해 노령 연금 제도가 무산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204]

1902년에는 아서 밸푸어가 주도한 교육법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이 법안이 비국교도(非国教徒)의 권익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웨일스 민족주의자로서 비국교도의 권리 보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4. 자유당 내각 각료

1890년 카너번 보궐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하원의원에 당선된 로이드 조지는, 초기에는 웨일스 출신 의원으로 활동하며 웨일스 교회를 국교회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주장을 펼쳤다. 지주들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금주 운동에도 참여했다.[14][15] 1899년 노령 연금에 관한 하원 특별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같은 해 발발한 제2차 보어 전쟁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이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을 주도하여 유명세를 얻었으며, 1902년에는 밸푸어 교육법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1905년 12월, 헨리 캠벨-배너먼을 수상으로 하는 자유당 정권이 수립되자, 로이드 조지는 통상대신으로 입각했다.[227] 1908년 4월, 수상이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로 바뀌자 재무대신으로 자리를 옮겼다.[227]

4. 1. 통상대신 (1905-1908)

1905년 12월, 헨리 캠벨-배너먼 자유당 내각의 통상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06년 상선법, 1907년 회사법, 1908년 런던항법 등 산업 및 무역 관련 법안 제정을 주도했다. 특히, 철도 노조 파업 중재에 성공하여 전국적인 파업 위기를 해결했다.

4. 2. 재무장관 (1908-1915)

1908년 4월,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가 총리가 되면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227]

1908년 5월, 로이드 조지는 노동당이 요구하던 무상 노령 연금 제도 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당시 빈곤한 노인들은 구빈법에 의존해야 했고, 구빈원에 들어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 법안은 노인 생활 보장에 큰 혁신이었다. 보수당은 "국민 도덕성 저하"를 우려했지만, 로이드 조지는 "군인에게는 연금을 주면서 산업의 노병들은 빈곤 속에서 죽게 하는 것은 비인도적"이라고 반박했다.[237] 재원 문제에 대해서는 군사비 감축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주장했다.[238]

독일은 이미 기여제 노령 연금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로이드 조지는 소득 없는 여성과 빈곤한 노동자에게 불리하며, 친목회나 노동조합 보험 제도와 충돌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무상 연금 제도를 옹호했다.[239]

이 법안은 예산안 부속으로 제출되어 상원에서도 부결되기 어려웠다.[240] 1908년 7월, 1908년 노령 연금법이 통과되어[242][243] 1909년부터 70세 이상 저소득 고령자에게 연금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이 법은 '로이드 조지'라는 별명으로 오랫동안 친숙하게 불렸다.[244]

1909년 4월, 로이드 조지는 '인민 예산(People's Budget)'을 발표했다. 이 예산안은 사회 보장비와 독일 제국과의 군비 경쟁으로 늘어난 재정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소득세 누진세 강화, 상속세 증액, 토지세 등 부유층 증세를 포함했다. 보수파와 귀족들의 반발로 상원에서 부결되었지만, 1910년 1월 총선거와 의회법 법안 제출을 거쳐 1910년 4월에 통과되었다.

1911년, 로이드 조지는 1911년 국민 보험법 제정을 주도하여 영국에 건강 보험 제도와 실업 보험 제도를 도입했다.

1912년, 마르코니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지만, 정치적 위기를 극복했다.

5. 제1차 세계 대전과 전시 내각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에 대해 로이드 조지는 거의 모든 사람들처럼 놀랐다. 1914년 7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이후, 그는 하원에서 영국과 독일의 관계가 수년 만에 최고라고 말했다.[55] 그러나 8월 초, 벨기에가 독일군의 영토 통과 요구에 저항할 것이라는 소식에 그는 영국이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국의 개입을 지지하는 데 거의 모든 내각을 설득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55] 그는 내각과 자유당 내 평화주의적인 구성원들에게 작은 국가의 권리라는 원칙을 제시하여 그들이 전쟁을 지지하고 통합된 정치적·대중적 지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로이드 조지는 대전 첫해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 1914년 11월 예산은 세계 무역 감소로 인해 세수 감소를 허용해야 했다. 국채 발행으로 3억 2100만 파운드를 조달했다.[44] 1915년 5월, 그의 마지막 예산안은 주세 대폭 인상과 특정 지역에서의 주류 판매에 대한 국가 통제 계획을 포함했지만, 아일랜드 국민주의자와 보수당의 반대에 부딪혀 폐기되었다.[44]

5. 1. 군수장관 (1915-1916)

1915년 탄약 위기로 인해 군대가 포탄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이 대중 여론을 실망시키자, 무기 생산을 책임질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1915년 5월에 구성된 제1차 연립 내각에서 로이드 조지는 새로운 부서를 이끄는 무기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56] 이 직책에서 그는 큰 칭찬을 받았고, 이는 그의 정치적 승진의 기초가 되었다. 모든 역사가들은 그가 국민 사기를 높이고 더 많은 생산의 긴급한 필요성에 주목하게 했다는 데 동의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1915년부터 1916년까지 무기 생산량 증가는 그가 부임하기 전부터 이미 진행 중이었던 개혁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무기부는 전쟁청의 복잡한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노동 문제를 해결하며 공급 시스템을 합리화하고 생산량을 극적으로 증가시켰다. 1년 만에 영국에서 가장 큰 구매자, 판매자, 고용주가 되었다.[56]

1915년 로이드 조지


파리에서 열린 1916년 3월 27일-28일 연합국 회의에 참석한 로이드 조지, 에드워드 그레이, 허버트 키치너, 니콜라 파시치, 안토니오 살란드라, 알렉산더 이즈볼스키, 아리스티드 브리앙, 그리고 조제프 조프르


로이드 조지는 전쟁 진행 상황에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의 동맹국을 공격하여 "지지대를 없애려고" 했는데, 1915년 초부터 그는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그리스와 다른 발칸 국가들을 연합국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영국군을 발칸으로 파병할 것을 주장했다(결국 살로니카 원정으로 이루어졌지만, 로이드 조지가 원했던 규모는 아니었고, 산악 지대 때문에 그의 대규모 발칸 공세 제안은 비현실적이었다). 1916년에는 루마니아에 기관총을 보내려고 했다(이를 위한 충분한 양이 없었다). 이러한 제안은 영국군 참모총장인 로버트슨 장군과의 불화의 시기를 시작했는데, 로버트슨 장군은 "무례할 정도로 무뚝뚝했고", "로이드 조지의 군사적 의견에 대한 경멸을 거의 숨기지 않았으며", 로이드 조지는 "다른 소식을 들었다"고 응수하는 습관이 있었다.[55]

로이드 조지는 키치너(당시 전쟁장관)를 설득하여 웨일스 사단을 창설했고, 키치너의 사임 위협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 비국교파 목사를 인정하도록 했다.

1915년 말,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을 분열시킨 문제인 일반 징병을 강력히 지지했으며, 1916년 1월부터 여러 징병법의 통과를 도왔다. 1916년 봄 알프레드 밀너는 로이드 조지가 사임하여 연립 정부를 무너뜨리도록 설득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5. 2. 육군장관 (1916)

1916년 6월, 키치너 경이 러시아로 가던 중 HMS ''햄프셔''호가 침몰하여 사망하자, 로이드 조지가 후임 육군장관에 임명되었다.[44] 그러나 로버트슨 장군이 키치너를 거치지 않고 내각에 직접 보고할 수 있게 되면서, 로이드 조지는 전략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갖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 영국군 후방의 군용 철도를 담당할 에릭 게디스 경을 준장 명예 계급으로 임명하는 데는 성공했다.

로이드 조지는 1916년 9월 말, 기자 로이 W. 하워드에게 "싸움은 끝장을 볼 때까지, 완전한 승리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윌슨(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중재 제안을 거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44]

솜 공세가 제한적인 성과에 그치자 로이드 조지는 점점 좌절했다. 9월 서부 전선을 방문했을 때 헤이그 장군을 포슈(페르디낭 포슈)와 비교하며 비판했다. (영국의 사상자 비율은 더 많은 경험과 포병을 보유한 프랑스보다 더 높았다.) 그는 로버트슨을 러시아로 보내거나, 루마니아를 돕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살로니카로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로버트슨은 이에 반발하여 사임을 위협하기도 했다.

언론은 대체로 헤이그와 로버트슨의 전문적인 군사 지휘가 갈리폴리와 쿠트 같은 재앙을 초래한 민간인의 간섭보다 낫다고 옹호했다. 타임스 소유주 노스클리프 경은 로이드 조지의 사무실에 난입하여 "그에게 전해라. 그가 전략에 간섭해 왔다는 것을 내가 들었다고, 만약 그가 계속 그렇게 한다면 그를 파산시키겠다고"라고 말하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같은 날(10월 11일) 로이드 조지는 ''모닝 포스트'' 편집장 H. A. 귄으로부터 경고 편지를 받았다. 그는 애스퀴스에게 헤이그와 로버트슨에 대한 신뢰를 표명해야 했지만, 동시에 정보 유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로버트슨에게 서한을 보냈다. 11월, 로이드 조지는 장관들이 로버트슨 없이 회의를 열기 시작하자 전략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5. 3. 총리 (1916-1922)

1916년 12월, 로이드 조지는 보수당의 지지를 받아 총리직에 올랐다. 총리 외 5명으로 구성된 전쟁 내각에는 보수당원 커존 경, 보너 로, 밀너 경과 노동당 대표 아서 헨더슨이 포함되었다.[58] 로이드 조지는 전쟁 내각을 중심으로 강력한 전시 지도 체제를 구축했다.

로이드 조지는 총력전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식량성을 신설하여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고, 선박성을 신설하여 상선의 정부 통제를 강화했다.[365] 또한 독일 해군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대항하기 위해 상선을 선단으로 만들어 해군이 호위하도록 하는 호송 선단 방식을 채택했다.[367] 서부 전선의 교착 상태를 돌파하기 위해 참호 돌파 무기로서 전차 개발도 적극 지원했다.[368]

1918년 2월에는 보통 선거와 30세 이상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선거법 개정을 실시했다.[382]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정권을 장악한 레닌볼셰비키 정권이 1918년 2월 독단으로 독일과 강화하여 전쟁에서 이탈하자, 로이드 조지는 미국, 일본 등과 함께 반소(反蘇) 개입 전쟁을 시작했다.[372] 전후에는 개입 전쟁에 대한 관심을 잃었지만, 윈스턴 처칠 육군대신과 보수당의 강한 요구로 1919년 가을까지 계속했다.[377]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도 폴란드를 지원했지만, 폴란드 침공이 실패한 후인 1921년에는 세계 최초로 소비에트와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381]

6. 전후 처리와 외교 정책

1911년 의회법 통과 이후, 로이드 조지는 1911년 국민보험법 제정을 주도했다.[278] 이 법은 질병에 대비한 건강보험 제도와 건설 및 조선업계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실업보험 제도를 규정하고 있었다. 건강보험의 경우, 피보험자, 고용주, 국가가 각각 일정 비율을 부담하여 질병 발생 시 피보험자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로이드 조지는 "이 법으로 임금 노동자는 4펜스를 내고 9펜스를 받는다"고 홍보했지만, 노동자에게 주당 4펜스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281] 실업보험의 경우, 피보험자와 고용주가 주당 2와 1/2펜스를, 국가가 1과 1/3펜스를 부담했다. 이러한 사회 개혁은 복지 국가로 향하는 첫걸음이었지만, 그 내용은 매우 불충분했다.[285][286] 국민보험의 본격적인 정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이루어졌다.[286]

1911년 제국 회의에서 영국 제국 전역에 무선 중계소를 설치하여 제국 무선 통신망을 정비하는 것이 결의되었다.[287] 1912년 3월 7일, 마르코니 사는 영국 정부로부터 영국 제국 내 6개소에 무선 중계소를 건설하는 공사의 임시 주문을 받았다고 발표했다.[289] 이 계약과 관련하여 로이드 조지의 측근인 루퍼스 아이작스의 동생이 마르코니 사의 상무 이사였기 때문에, 각료들이 내부자 거래로 돈을 벌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마르코니 사건).[294][295] 로이드 조지는 1913년 하원의 마르코니 계약 특별 위원회에서 미국 마르코니 사의 주식을 구입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영국 정부와 미국 마르코니 사 사이에는 어떠한 계약이나 협상도 없었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301] 결국, 로이드 조지는 실각을 면했지만, 약자와 노동자의 편이라는 이미지는 실추되었다.[308]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영국은 1911년 해운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과 1912년 이후의 파업으로 혼란에 빠졌다.[310][311] 로이드 조지는 경영자들을 설득하여 파업을 진정시켰지만, 혁명 직전의 분위기마저 감돌았다.[313][314] 또한,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아일랜드 자치법을 둘러싸고 의회가 격렬하게 논쟁하는 가운데, 얼스터프로테스탄트와 남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이 각각 의용군을 결성하여 대치하면서 내전 직전의 상태에 놓였다.[315] 로이드 조지는 내전을 우려하여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양측 모두 거부했다.[317] 아일랜드 자치법안은 1914년 5월 26일 하원을 통과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보류되었다.[318][319]

로이드 조지는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정권을 장악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정권이 1918년 2월 독단으로 독일과 강화하여 전쟁에서 이탈하자 미국, 일본 등과 함께 반소(反소) 개입 전쟁을 시작했다.[431] 전후에는 개입 전쟁에 대한 관심을 잃었지만, 윈스턴 처칠 육군대신과 보수당의 강한 요구로 1919년 가을까지 계속했다. 1920년의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도 폴란드를 지원했지만, 폴란드 침공이 실패한 후인 1921년에는 세계 최초로 소비에트와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국내총생산은 1885년부터 1920년까지 3배로 성장했고, 특히 광업과 제조업은 6배라는 급성장을 이룩했다. 1914년까지 일본 해군의 모든 함선을 국내에서 건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해군력은 세계 3위 또는 4위로 평가받았다.[428]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구인들 사이에서 황화론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영국은 자국의 중국·인도 시장에 일본이 진출하는 것을 우려했고, 미국도 중국·필리핀 시장을 일본에 빼앗길 것을 우려했다.[430]

다이쇼 10년(1921년) 5월,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후의 쇼와 천황)이 영국을 방문했다. 로이드 조지는 에드워드 황태자를 주빈으로 한 만찬회(5월 13일)와 히로히토 친왕 환영 오찬(5월 15일)에 참석하여 히로히토 친왕과 환담했다. 로이드 조지는 “일영 양국의 친선 관계를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432]

그러나 황태자의 영국 방문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12월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 대표로 참석한 외무장관 벌푸어는 일영 동맹 대신 일영미불 4개국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 정부는 “일영 동맹 파기가 아니라 확대”라고 변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동맹 파기와 다름없었다.[433] 또한 영국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체결에 응하여 전함과 순양함 26척을 포함한 657척을 폐선하게 되었고, 영국의 해군력 절대적 우위가 무너졌다.[434]

1922년 8월부터 9월의 차낙 위기에서는 터키와의 개전도 마다하지 않는 강경한 자세를 고수하여 외교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재차 전쟁을 꺼리는 국내 여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로이드 조지의 일인 독재에 대해 오랫동안 불만을 품어 온 보수당 의원들의 이탈의 계기가 되었다.[91]

6. 1. 파리 강화 회의 (1919)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과의 강화 및 전후 처리를 위한 회의는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열렸으며, 스스로를 연합국이라고 칭하는 29개국이 참석했다.[395] 그러나 소국의 발언권은 미미했고,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5개국 대표 각 2명(일본을 제외하고는 수뇌와 외무상)으로 구성된 10인 위원회가 파리 강화회의의 최고 의결 기구가 되었다.[396] 3월 말에는 일본인과 외무대신을 제외한 4인 위원회(로이드 조지,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 미국 대통령 윌슨, 이탈리아 수상 오를란도)가 구성되어 강화회의를 주도하게 되었다.[397][398]

영국에서는 로이드 조지, 외무장관 아서 발푸어, 외무성 정무차관 로버트 세실 경, 재무성 관료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이 참석했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과 같은 대영제국 자치령은 영국과 별도로 대표를 파견했다. 자치령은 아니지만 인도도 대표를 파견했지만, 그 대표는 영국 본국의 인도 담당 장관과 영국에 순종적인 마하라자였기 때문에 영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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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영국의 아랍 정책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전이었으며, 터키에 대한 아랍인의 독립 운동에 협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터키가 독일 편에 서서 참전함에 따라, 영국은 후세인이 이끄는 하심 가문과 후세인-맥마흔 협정을 맺어 아랍 반란을 지원했다.[419]

이 비밀 협정은 하심 가문을 수장으로 하는 아랍 왕국의 건립을 인정했지만, 그 영토는 모호하게 되어 있었다. 하심 가문은 중동의 대부분이 포함된다고 해석했지만, 영국 측은 그 범위를 헤자즈 왕국으로 제한적으로 생각했다.[420] 게다가 하심 가문은 대전 중에 여러 차례 터키 측에 넘어갈 기미를 보이는 등, 영국은 하심 가문을 별로 믿지 않았고, 하심 가문과의 약속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421]

영국은 이 비밀 협정과 모순되는 협정이나 선언을 발표했다. 1916년에는 서부 전선에서 대터키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 대한 동의를 프랑스에게서 얻기 위해 프랑스와 사이क्स-피코 협정을 맺고, 시리아, 레바논, 트랜스요르단, 이라크를 영국과 프랑스로 분할하고 팔레스타인을 국제 관리하에 두기로 약속했다.[422] 또한 유대인에게 전비를 충당시키기 위해, 1917년에는 발푸어 선언을 발표하여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고향을 만들 것도 약속했다(삼중 협상).[423]

그러나 로이드 조지에게 이것들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로이드 조지가 그렸던 중동의 미래상은 소아시아에 그리스 세계, 팔레스타인에 유대 문명을 부활시키고, 그 양자와 대영 제국 반 식민지 이집트에 수에즈 운하와 "인도의 길"을 확보하면서 내륙부에 대영 제국 보호 아래 하심 가문 통치 아랍 왕국을 몇 개 건설하여 페르시아로부터의 석유 루트도 확보하는 것이었다.[424]

파리 강화 회의에서 연합국의 합의를 전제로, 1920년 8월 오스만 제국과 연합국 사이에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 위임 통치령,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은 영국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 그러나 새롭게 인정된 아랍 국가는 헤자즈 왕국뿐이었고, 이에 실망한 아랍인들은 이라크에서 반영 봉기를 시작했다.[425]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도 로이드 조지가 대영 제국 유대인 자치령을 최종 형태로 생각했던 것에 비해, 하임 바이츠만 등 시오니스트들은 독립된 유대인 국가를 상정했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했다.[426]

아랍인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1921년 5월 18일, 식민지 장관 처칠에게 카이로 회의를 주최시켜, 이라크와 요르단에 하심 가문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허락했다. 물론 둘 다 영국 보호 아래라는 조건이었다. 1922년에는 이집트에도 형식적인 독립을 허락했지만, 이쪽도 실질적으로는 영국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이 체제 아래에서 대영 제국의 중동에 대한 지배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인도의 길"은 완전히 안전이 보장되었고, 이라크와 페르시아 만 연안과 압바단의 석유는 모두 영국의 손에 들어갔다.[427]

6. 2. 아일랜드 문제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 4월,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부활절 봉기)가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지도자들은 즉결 군사 재판으로 처형되었다.[435] 이 사건을 계기로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격렬해졌고, 1918년 총선거에서는 아일랜드 의회당을 대신하여 급진적인 아일랜드 독립 정당인 신 페인당이 약진했다.[436][437]

신 페인당은 런던 의회 참여를 거부하고 더블린에 독자적인 국민 의회를 구성했다. 아일랜드 의용군의 무장 저항도 격화되었고, 곧 신 페인당의 정치적 저항과 합류했다.[436] 이에 대해 로이드 조지는 블랙 앤 탄즈를 편성하여 백색 테러로 강력하게 탄압했다.[438] 한편으로는 화해 정책도 취하여 1920년 12월에는 1차 세계 대전 발발로 무산되었던 1920년 아일랜드 통치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아일랜드와 영국의 결합 관계는 유지하면서 아일랜드 북부 6개 주와 그 외 지역에 각각 자치 의회를 두고, 남북 아일랜드 간의 협의 장으로 아일랜드 협의회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는 아일랜드 독립을 요구하는 가톨릭과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아일랜드 독립에 반대하는 프로테스탄트와 유니오니스트 모두에게 어느 정도 만족을 주려는 취지였다.[439]

조지 5세 국왕의 북아일랜드 방문으로 대립 관계가 일시적으로 완화되어 1921년 7월 휴전이 성립되었고, 10월부터 로이드 조지와 윈스턴 처칠 등 영국 정부 대표와 아서 그리피스마이클 콜린스 등 신 페인당 대표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다.[440] 이 협상의 결과, 얼스터 중 유니오니스트가 많은 6개 주에는 영국에 남을지 아일랜드에 합류할지 선택권을 남기면서, 그 외 지역의 아일랜드는 대영 제국 자치령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하는 것으로 타협을 이루었다(영국-아일랜드 조약).[441][442][443]

하지만 이 타협에는 보수당의 반발이 많았고, 보수당의 정권 이탈의 첫 징후가 나타났다. 보수당 의원 중 약 60명이 반란을 일으켜 이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다.[444]

6. 3. 기타 외교 정책

1921년, 로이드 조지는 영국-소비에트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90] 그러나 러시아가 차르 시대의 빚 상환을 거부하고, 영국의 보수당은 공산주의 위협을 경계했기 때문에 완전한 외교 관계를 맺는 데는 실패했다. 육군참모총장 헨리 윌슨은 로이드 조지가 "반역자이자 볼셰비키"가 되었다고 우려했다.[90]

같은 해,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 대표로 참석한 외무장관 발푸어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일영 동맹을 사실상 파기하고 일영미불 4개국 조약을 체결했다.[433] 영국 정부는 이를 "일영 동맹 파기가 아니라 확대"라고 변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동맹 파기와 다름없었다.[433]

1921년 5월,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 친왕(후의 쇼와 천황)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로이드 조지는 히로히토 친왕과 환담하며 "일영 양국의 친선 관계를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432] 5월 15일에는 히로히토 친왕 환영 오찬을 주최하고 함께 산책하며 환담했다.[432]

1922년, 차낙 위기가 발생했다.[91] 세브르 조약에 반발한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터키 국민군이 그리스 점령군을 격퇴하고, 중립지대 차나칼레에 주둔하는 영국군을 공격할 태세를 보였다.[452] 로이드 조지는 영국군에게 자리를 사수하라고 명령하고, 터키가 침략을 멈추지 않으면 지중해 함대를 파견하겠다고 선언했다.[454] 결국 케말은 휴전 협정에 응했고, 1년 후 로잔 조약이 체결되어 터키와의 국경이 확정되었다.[456] 이 사건은 외교적 승리였지만, 영국 국민들은 전쟁 직후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외교에 대해 비판했고, 이는 로이드 조지 내각의 붕괴로 이어졌다.

7. 총리직 사임 이후

1922년 10월, 차낙 사건을 계기로 보수당은 칼튼 클럽 회의에서 연립 정부 해체를 결의했고, 로이드 조지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96] 당시 보수당 의장이었던 스탠리 볼드윈은 로이드 조지를 "보수당을 와해시킬 역동적인 세력"이라고 비판하며 연립에 반대했다.[95]

총리직 사임 이후, 자유당노동당에 밀려 제3당으로 전락하는 위기를 맞았다. 이에 로이드 조지는 당내 통합과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7. 1. 자유당 재건 노력

1922년 10월, 보수당의 연립 이탈로 로이드 조지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461][463] 이후 자유당은 노동당에 밀려 제3당으로 전락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로이드 조지는 애스퀴스파와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466] 1923년 12월 총선에서는 양 파가 협력하여 선거를 치렀지만, 제3당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467][469]

1926년 말, 애스퀴스가 정계에서 은퇴하자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 당수가 되었다.[473] 그러나 구 애스퀴스파는 여전히 로이드 조지를 불신했고, 많은 자유당원이 당을 떠나면서 자유당이 다시 거대 정당이 되기는 어려워졌다.[474]

로이드 조지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브레인으로 삼아 1920년대 후반부터 '옐로우 북'과 '오렌지 북'을 발행하여 공공 사업을 통한 유효 수요 증가와 고용 창출을 주장했다.[101] 이는 케인스주의의 선구자적 주장이었지만, 당시에는 보수당이나 노동당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74]

7. 2.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 제안

케인스를 중심으로 한 로이드 조지는 1920년대 후반부터 공공 사업을 통한 유효 수요 증가와 고용 창출을 주장했다.[475] 1928년 2월에는 《영국 산업의 미래》(옐로우 북)를, 1929년 3월에는 《우리는 실업을 극복할 수 있다》(오렌지 북)를 출판하여, 정부의 적극적인 공공 사업과 유효 수요 창출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476]

로이드 조지는 도로, 교량, 주택 건설, 통신망 및 전력 기반 정비 등에서 공공 사업을 통해 55만 명의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비용은 증세 없이도 고용 증가에 따른 실업 수당 지급 감소, 군사비 축소, 경기 상승에 따른 세수 증가 등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477] 그러나 보수당과 노동당은 이러한 개념을 비판했고, 1929년 총선거에서는 양당 모두 자유당을 공격했다.[478]

1935년 1월, 로이드 조지는 미국의 뉴딜 정책을 본떠 "로이드 조지의 뉴딜"이라는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는 1929년 프로그램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케인스주의 경제 프로그램이었다. 램지 맥도널드는 로이드 조지에게 내각 앞에서 주장을 펼칠 기회를 주었고, 로이드 조지는 100페이지 분량의 각서를 제출하여 질의응답을 가졌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보수당 의원 3분의 2가 로이드 조지의 국가 정부 합류에 반대했다.[102]

7. 3. 말년

1931년 자유당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1930년대에는 나치 독일의 공공 사업 정책에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다.[493] 1936년 9월 뉘른베르크 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하여 아돌프 히틀러와 만났다. 그는 히틀러를 "현재 생존해 있는 가장 위대한 독일인"이라고 칭송하며 "독일인들은 우리와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102] 귀국 후 『데일리 익스프레스』에 "히틀러는 맨손으로 독일을 깊은 수렁에서 건져냈다", "그는 타고난 지도자다"라는 글을 기고했다.[495][496]

그러나 독일이 대외 팽창 노선을 강화하자 네빌 체임벌린의 유화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102][108]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0년 5월, 노르웨이 논쟁에서 하원 연설을 통해 체임벌린 내각에 대한 불신임에 영향을 주어 윈스턴 처칠이 집권하는 데 이바지했다.[497][498]

1944년 말, 드와이퍼의 로이드 조지 백작 작위를 받았다.[111] 1945년 3월 26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드위포르 강 옆 리니스텀드위에 묻혔다.[112]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묘, 래니스텀드위

8. 유산 및 평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20세기 초 영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유산은 복잡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학자들은 그의 복지 개혁과 제1차 세계 대전 승리를 이끈 노력을 칭찬하지만, "대통령식" 지도력, 전략적 실패, 여러 스캔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과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그의 유산은 비판받기도 한다.[114] 그는 시온주의자였지만,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표명하기도 했다.[114] 전후 시대에 그는 자유당의 비용으로 노동당의 지지를 키웠고, 이는 1916년 이후 애스퀴스 자유당과의 갈등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역사가 마틴 퍼그는 ''옥스퍼드 영국사 교본''에서 로이드 조지가 20세기 어떤 정치가보다 영국 공공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그는 복지 국가의 기초를 마련하고, 누진적 소득세 제도를 정부 재정의 중심에 두었으며, 수상의 역할을 확대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 남자"로 칭송받았으며, 1918년 자유당을 파괴하고, 산업 문제 처리와 급진주의 때문에 여러 집단에게 비난 또는 멸시를 받았다.[115]

조지 리델은 1908년부터 1922년까지 로이드 조지의 측근이자 재정 후원자였다. 1917년 여름, 리델은 로이드 조지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그의 에너지, 일할 능력, 회복력은 놀랍다. 그는 놀라운 기억력, 상상력,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 그는 책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전통이나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다. … 그는 가장 교활한 사람들 중 한 명이며, 그의 놀라운 매력적인 태도는 그에게 친구를 얻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반대자와 적들의 적대감을 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는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타고난 배우이다. … 그의 주요 결점은 다음과 같다. (1) 기존 제도, 조직 및 완고하고 둔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 부족 … (2) 기존 기계를 개선하려는 시도보다 거창한 계획을 좋아한다. (3) 큰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무시한다 … 그는 세부적인 사람이 아니다.

2007년, 역사가 존 셰퍼드는 ''히스토리 투데이''에서 윈스턴 처칠과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지난 세기 동안 가장 유명한 수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썼다.[116]

로이드 조지는 19세기 지주 귀족 지배 시대에서 20세기 대중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하는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그는 "최초로 평민 출신이 고위 관료의 자리에 오른 인물"로 불렸다.[504] 알프레드 조지 가디너는 1916년에 로이드 조지를 두고 "민주주의는 그에게서 그 목소리를 찾았고, 또 그가 마음에 새기는 한 민주주의는 그에게 충실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505]

로이드 조지는 윈스턴 처칠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자유당 정권에서 사회 개혁 정책을 주도했다. 처칠은 1차 대전 후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잃었지만, 로이드 조지는 생애에 걸쳐 관심을 가졌다.[506] 그러나 로이드 조지도 처칠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를 싫어했다.[507] 처칠은 로이드 조지에 대해 "말이나 사물의 외면을 꿰뚫어보는 독특하고 심오한 직관력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평가했다.[508]

로이드 조지는 전문 지식이 부족했지만, 전문가를 잘 활용하여 보완하는 데 능숙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로이드 조지는 무엇에도 뿌리가 없다. 그는 공허하고 내용이 없다"라고 평가했다.[510]

그는 전쟁을 싫어했지만, 대전 중인 1916년에는 "일단 전쟁이 되면, 성공할 가능성이 없더라도 굴하지 않고 해내야 한다"고 말했다.[511]

그는 웅변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의 연설은 재치 있고 친근했다.[512] 아돌프 히틀러는 『나의 투쟁 제2권』에서 그를 연설의 천재라고 평가했다.

로이드 조지에 대한 연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에서 총리에까지 오른 인물"로 미화되었다.[515]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편견에 찬 비판적인 저서가 급증했다.[516]

1960년대부터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정부 문서와 로이드 조지의 개인 문서 일부가 공개되면서 그를 더 깊이 연구할 수 있게 되었고, 기존의 악평이 편견이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궁정 음모를 꾸며 애스퀴스를 실각시켰다는 견해가 사실과 달랐다는 점이 밝혀졌다.[517] 또한 귀족 작위 매매 등 금전적 탐욕에 대해서도, 그렇게 모은 돈의 상당 부분을 자유당의 선거 자금이나 그의 정책 연구에 사용했고, 그의 사생활은 매우 검소했던 점을 들어 사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518]

그는 다면적인 정치가였기 때문에 통일된 이해가 어렵다. 역사가들마다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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