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메세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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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메세니아 전쟁은 기원전 464년 라코니아 지진을 틈타 메세니아인과 페리오이코이가 봉기하여 시작되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아테네 군의 대담함을 경계하여 돌려보냈다. 10년간의 농성 끝에 반란군은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스파르타와 강화했고, 아테네는 메세니아인들을 나우파크토스에 정착시켰다.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나우파크토스의 메세니아인들은 스파르타에 대항하여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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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메세니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분쟁 개요 | |
분쟁명 | 제3차 메세니아 전쟁 |
시기 | 기원전 464년 - 기원전 454년 |
장소 | 메세니아 |
원인 | 라코니아에서 발생한 지진 |
결과 | 메세니아인의 펠로폰네소스반도 퇴거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메세니아 |
교전국 2 | 스파르타 아테네 기타 |
지휘관 및 병력 | |
지휘관 1 | 아르키다모스 2세 아림네스토스 키몬 기타 |
지휘관 2 | 알려지지 않음 |
병력 1 | 알려지지 않음 |
병력 2 | 300명 이상 |
2. 배경
기원전 464년 라코니아 지역에 발생한 대규모 지진은 스파르타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이 혼란을 틈타, 스파르타의 지배하에 있던 메세니아의 헤일로타이를 중심으로 한 피지배 계층이 봉기하였다. 이들은 이토미 산을 거점으로 삼아 저항을 시작했으며, 이는 제3차 메세니아 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2. 1. 라코니아 대지진과 타소스의 반란
기원전 464년에 큰 지진이 라코니아를 강타하여 스파르타는 2,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많은 가옥이 무너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아테네의 공격을 받고 있던 타소스는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고, 스파르타는 원군 파병을 고려하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을 틈타 메세니아 인을 중심으로 한 피지배 계층인 헤일로타이와 페리오이코이 일부가 스파르타의 지배에 맞서 봉기하여 이토미 산에 자리를 잡고 저항을 시작했다. 이것이 제3차 메세니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스파르타는 이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공성전이 길어지자 결국 기원전 462년에 아테네에 원군을 요청했다. 키몬이 이끄는 아테네 군대가 도착했지만, 그들 역시 이토미 산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스파르타는 '아테네인들의 대담하고 혁신적인 성향'과 그들이 반란군 편에 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임무가 끝났다는 이유를 들어 동맹군 중 아테네 군대만 돌려보냈다. 이 일로 인해 친스파르타 성향의 정치인이었던 키몬은 아테네에서 정치적 위신에 큰 타격을 입었다.
한편, 헤로도토스는 이 전쟁 중에 스테뉴크레로스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했다. 이 전투에서 메세니아 군대는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르도니오스를 죽인 것으로 알려진 스파르타인 아임네스토스와 그가 이끌던 300명의 병력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6]
3. 전개
기원전 464년 라코니아 지역에 발생한 대규모 지진은 스파르타에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안겼다.[6] 이 혼란을 틈타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던 헤일로타이와 일부 페리오이코이, 특히 메세니아인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다. 이들은 이토미 산을 거점으로 삼고 스파르타에 맞서 저항을 시작했다.[6]
스파르타는 초기에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어려움을 겪었으며, 전쟁 중 스테뉴크레로스 전투와 같은 전투에서 메세니아 군에게 패배하기도 했다.[6] 이토미 산에서의 공성전이 장기화되자, 스파르타는 결국 기원전 462년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테네에 원군을 요청했다.[6]
키몬이 이끄는 아테네의 중장보병 부대가 파견되었으나, 아테네 군의 합류에도 불구하고 이토미 산 공략은 성공하지 못했다.[6]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스파르타는 아테네 군의 대담하고 혁신적인 모습에 불안감을 느끼고, 그들이 오히려 반란군과 결탁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동맹군 중 유일하게 아테네 군에게만 철수를 요구했다.[6] 이 사건은 아테네 내에서 친스파르타 정책을 펴던 키몬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6]
3. 1. 헤일로타이와 페리오이코이의 봉기
기원전 464년 라코니아 지역에 큰 지진이 발생하여 스파르타는 2,000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함께 많은 가옥이 무너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혼란은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던 헤일로타이와 페리오이코이에게 봉기의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메세니아 인들을 중심으로 한 이들 피지배층은 스파르타의 약화를 틈타 봉기하여 이토미 산에 거점을 마련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공격을 받은 타소스섬의 요청으로 원군 파병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내부의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웠다.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전쟁 기간 중 스테뉴크레로스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서 메세니아 군대는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르도니오스를 죽였던 스파르타인 아임네스토스와 그가 이끌던 300명의 병력을 전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6]
봉기 세력의 저항이 거세고 공성전이 길어지자, 스파르타는 결국 기원전 462년 아테네에 원군을 요청했다. 키몬이 이끄는 아테네 군대가 도착했지만, 이들 역시 이토미 산을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인들의 대담함과 혁신적인 행동' 및 잠재적인 배신을 우려하여, 표면적으로는 임무가 완료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동맹군 중 아테네 군대만 돌려보냈다고 기록했다. 이 사건으로 친스파르타 성향의 정치인이었던 키몬은 아테네 내에서 정치적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3. 2. 스파르타의 원군 요청과 아테네의 개입
기원전 464년 라코니아 지역에 큰 지진이 발생하여 스파르타는 2,000명 이상의 인명 손실과 가옥 붕괴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혼란을 틈타 메세니아 인을 중심으로 한 헤일로타이와 일부 페리오이코이가 스파르타의 지배에 맞서 봉기하여 이토미 산에 자리를 잡고 저항했다.스파르타는 이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토미 산에서의 공성전이 길어지자 결국 기원전 462년 아테네에 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아테네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키몬이 군대를 이끌고 스파르타를 지원하러 왔지만, 아테네 군 역시 이토미 산을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따르면, 스파르타는 아테네 군의 '대담함과 혁신적인 행동'을 보고 그들이 오히려 반란군 편에 서거나 다른 방식으로 스파르타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했다. 이러한 의심 때문에 스파르타는 표면적으로는 더 이상 도움이 필요 없다는 이유를 대며, 다른 동맹군은 그대로 둔 채 아테네 군에게만 철수를 요구했다. 이 사건은 친스파르타 정책을 추진하던 키몬에게 큰 정치적 타격을 주어 아테네 내에서의 그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3. 3. 스테뉴크레로스 전투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전쟁 동안 스테뉴크레로스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메세니아 군은 아임네스토스(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르도니오스를 죽인 스파르타인)를 물리쳤고, 휘하의 300명을 전멸시켰다.[6]4. 결과
10년간 이어진 전쟁 끝에 메세니아 반란군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떠나는 조건으로 스파르타와 강화를 맺었다. 이후 아테나이는 이들을 받아들여 나우파크토스에 정착시켰고, 이들은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맞서 싸우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4. 1. 반란군의 철수와 나우파크토스 정착
포위된 상태에서 10년 동안 농성했던 반란군은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스파르타와 강화를 맺었다. 이때 아테나이는 키몬을 굴욕적으로 대우한 스파르타에 대한 보복으로, 메세니아 인들을 받아들여 나우파크토스에 정착시켰다.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자 나우파크토스에 정착한 메세니아 인들은 스파르타에 맞서 싸우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 2.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미친 영향
10년간의 포위 공격 끝에, 반란을 일으켰던 메세니아 인들은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스파르타와 강화를 맺었다. 이때 아테나이는 과거 키몬을 모욕적으로 대한 스파르타의 처사에 대한 보복으로, 이들 메세니아 인들을 받아들여 나우파크토스에 정착시켰다. 이렇게 나우파크토스에 자리 잡은 메세니아 인들은 이후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맞서 싸우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참조
[1]
문헌
ディオドロス, XI. 63
[2]
문헌
トゥキュディデス, I. 101
[3]
문헌
トゥキュディデス, I. 102
[4]
문헌
ヘロドトス, XIX. 64
[5]
문헌
トゥキュディデス, I. 103
[6]
문헌
헤로도토스, IX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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