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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로스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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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델로스 동맹은 기원전 478년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가 주도하여 결성된 해상 동맹이다. 표면적으로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결성되었지만, 아테네의 해군력과 경제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동맹은 델로스 섬에 금고를 두고 운영되었으며, 회원국들은 군사력 또는 재정을 지원했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재정을 자국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 회원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점차 패권 국가로 변모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이후 아테네의 패권은 약화되었고, 결국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의 승리로 델로스 동맹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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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로스 동맹
개요
명칭델로스 동맹
별칭아테네 제국
유형군사 동맹
존속 기간기원전 478년 ~ 기원전 404년
창설기원전 478년
해체기원전 404년
지도 세력아테네
목적페르시아에 대한 방어 및 공격
위치에게해
언어고대 그리스어
역사
기원페르시아 전쟁 이후
결성기원전 478년, 델로스 섬에서 결성
쇠퇴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약화
해체기원전 404년, 아테네의 패배와 함께 해체
정치
맹주아테네
동맹 형태동맹국들은 자치권을 가졌으나 아테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음
의사 결정동맹 회의에서 결정, 아테네가 주도
재정동맹 기금은 델로스 섬에 보관, 이후 아테네로 이전
군사
군사력동맹국의 함선과 병력으로 구성, 아테네 해군이 주력
주요 전투에우리메돈 전투, 키프로스 전투 등
목표페르시아에 대한 공격 및 에게 해의 해상 통제
구성원
주요 구성원아테네
키오스
레Imnos
레스보스
사모스 등 에게 해의 여러 도시 국가
가입 조건페르시아에 대항하는 도시 국가들의 자발적 참여
유산
영향아테네의 황금 시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
의의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연합, 아테네의 해상 제국 건설

2. 배경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550년경 키루스 2세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 특히 이오니아를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는 이오니아를 통치하기 위해 각 도시에 참주를 세웠으나, 기원전 500년경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토고라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오니아 반란으로 이어졌다. 아테네에레트리아는 아리스토고라스를 지원하여 페르시아의 도시 사르디스를 불태웠지만,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복수하기 위해 그리스 침공을 계획했다. 그리스에 대한 1차 페르시아 침공에서 페르시아는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에게 해 제도를 점령하고 에레트리아를 파괴했지만,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에 패배했다.

다리우스 1세 사후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기원전 480년 그리스에 대한 2차 페르시아 침공을 감행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패배했지만,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했다. 이듬해 플라타이아이 전투와 미칼레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페르시아의 침공은 종식되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스파르타 장군 파우사니아스의 전횡에 반발하고, 페르시아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아테네를 중심으로 새로운 동맹을 결성하기로 했다. 기원전 478년에서 477년 겨울, 그리스 대표들은 델로스 섬에 모여 델로스 동맹을 정식으로 결성했다.[36]

2. 1. 이오니아 반란과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550년경 키루스 2세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이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 특히 이오니아를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이오니아를 통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각 도시에 참주를 후원하는 것으로 결정했다.[7] 기원전 500년경, 이오니아에서는 페르시아 종속 도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이러한 긴장은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토고라스의 행동으로 인해 공개적인 반란으로 터져 나왔다.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가 후원한 원정 실패 이후, 아리스토고라스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밀레투스를 민주주의로 선언했다.[9] 이는 도리스와 아이올리스로 확장되어 이오니아 반란을 시작하면서 이오니아 전역에서 유사한 혁명을 촉발했다.[10]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의 부엉이.


아테네에레트리아는 아리스토고라스의 요청으로 이 분쟁에 참여하여, 기원전 498년 페르시아 지역 수도인 사르디스를 점령하고 불태웠다.[11] 이후 이오니아 반란은 5년 동안 지속되었고,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었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징벌을 결심했다.[12] 이오니아 반란은 다리우스 제국의 안정을 위협했으며, 본토 그리스 국가들이 처리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위협할 것이었다. 다리우스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파괴하고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12]

이후 20년 동안, 그리스에 대한 두 번의 페르시아 침공이 있었다. 그리스에 대한 1차 페르시아 침공 동안,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에게 해 제도가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되었고, 에레트리아는 파괴되었다.[13] 그러나 이 침공은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승리로 끝났다.[14] 다리우스가 사망하고 전쟁의 책임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다.[15]

크세르크세스는 기원전 480년에 그리스에 대한 2차 페르시아 침공을 직접 이끌었다.[16] 그리스인들('동맹')은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패배했다.[17]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넘어간 후, 페르시아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배했다.[18] 기원전 479년, 동맹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 침공군을 격파하여 침공을 종식시켰다.[19]

동맹 함대는 미칼레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잔여 함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는 페르시아 침공의 종말과 그리스의 반격의 시작을 알린다.[21] 미칼레 이후,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페르시아는 그들을 막을 힘이 없었다.[22] 동맹 함대는 트라키아 헤르소네소스로 항해하여 세스토스를 점령했다.[23] 기원전 478년, 동맹군은 비잔티온을 점령했다. 그러나 스파르타 장군 파우사니아스의 행동은 많은 동맹국들을 소외시켰다.[24]

2. 2. 마라톤 전투와 페르시아의 1차 침공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에게 패배하면서 그리스에 대한 1차 페르시아 침공은 끝났다.[14] 이 침공으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에게 해 제도가 페르시아 제국에 포함되었고, 에레트리아는 파괴되었다.[13]

2. 3. 테르모필레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직접 대규모 군대와 해군을 이끌고 그리스에 대한 2차 페르시아 침공을 시작했다.[16] 이에 저항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동맹')은 테르모필레 전투 (육상)와 아르테미시움 해전 (해상)에서 동시에 패배했다.[17] 그 결과,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제외한 그리스 전역이 페르시아에 점령되었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동맹 해군을 완전히 격멸하고자 살라미스 해전을 벌였으나,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후퇴했다.[18]

2. 4. 플라타이아이 전투와 미칼레 해전

플라타이아이 전투(Μάχη τῶν Πλαταιῶνgrc)와 미칼레 해전(Ναυμαχία τῆς Μυκάληςgrc)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을 종식시켰다.[19] 전통에 따르면, 미칼레 해전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와 같은 날에 일어났다고 한다.[20] 이 전투들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21]

3. 델로스 동맹의 형성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재침략에 대비하고 해상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델로스 동맹을 결성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 이후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가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스파르타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36] 반면, 페르시아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아테네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동맹 결성의 중심이 되었다.

기원전 478년에서 기원전 477년 겨울, 그리스 도시 국가 대표들은 델로스 섬에 모여 델로스 동맹을 정식으로 결성했다.[36] 동맹의 공식적인 목표는 "왕의 영토를 약탈함으로써 그들이 겪은 잘못을 복수하는 것"이었다.[26] 회원국들은 무장 병력을 제공하거나 공동 재정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고, 대부분 세금을 선택했다.[26] 동맹 회원국들은 같은 친구와 적을 맹세했고, 동맹의 영속성을 상징하기 위해 쇠 덩어리를 바다에 던졌다.[27] 아테네 정치인 아리스티데스는 새로운 회원국의 세금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27]

아테네 공물 목록 조각, 기원전 425-424년


초기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대비하고 복수를 달성하기 위해 에게 해 연안 도시 국가들이 힘을 합쳐 해상 침략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

3. 1. 동맹 결성의 배경과 목적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승리했지만, 페르시아의 위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 이후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가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스파르타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36] 반면, 페르시아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아테네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동맹 결성의 중심이 되었다.[36]

기원전 478년에서 기원전 477년 겨울, 그리스 도시 국가 대표들은 델로스 섬에 모여 델로스 동맹을 정식으로 결성했다.[36]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동맹의 공식적인 목표는 "왕의 영토를 약탈함으로써 그들이 겪은 잘못을 복수하는 것"이었다.[26]

초기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대비하고, 복수를 추구하며, 전리품 분배를 조직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26] 회원국들은 군사력을 제공하거나 공동 재정에 세금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동맹에 기여했다.[26] 아테네의 정치가 아리스티데스는 새로운 회원국의 세금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27]

테미스토클레스, 키몬, 페리클레스 시대의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 함선에 대항하기 위해 아테네와 에게 해 연안 도시들의 해군력을 유지하는 군사 동맹이었다. 아테네는 피레아스 항구를 정비하고, 군함과 노잡이를 유지하며 해군력을 강화했다. 이를 통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했지만, 페르시아의 재침공 위협은 여전했다. 델로스 동맹은 이러한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에게 해 연안 도시 국가들이 힘을 합쳐 해상 침략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

3. 2. 아테네의 주도적 역할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하여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게 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주도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군 총지휘를 맡았던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는 평판이 좋지 않았고,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와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를 추방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그리스 여러 국가들은 스파르타에 반발하게 되었다.[36] 반면, 페르시아군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아테네에 대한 평가는 높아졌고, 이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동맹이 아테네를 중심으로 결성되는 결과로 이어졌다.[36]

기원전 478년에서 기원전 477년 겨울, 그리스 여러 국가의 대표들은 델로스 섬에 모여 델로스 동맹을 정식으로 결성하였다.[36]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동맹의 공식적인 목표는 "왕의 영토를 약탈함으로써 그들이 겪은 잘못을 복수하는 것"이었다.[26]

회원국들은 무장 병력을 제공하거나 공동 재정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 세금을 선택했다.[26] 아테네 정치인 아리스티데스는 새로운 회원국의 세금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27]

스파르타는 내부 문제와 헬로트 반란 등으로 인해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미칼레 이후, 스파르타 왕 레오튀키다스는 소아시아의 모든 그리스인들을 유럽으로 이주시키는 것을 제안했지만, 미칼레의 아테네 사령관 크산티포스는 이를 격렬히 거부했다.[25] 이오니아 도시들은 아테네 식민지였고, 아테네가 이오니아인들을 보호할 것이었다.[25] 이는 그리스 동맹의 지도력이 실질적으로 아테네에게 넘어가는 시점이었다.[25]

3. 3. 동맹의 구성과 운영 방식

델로스 동맹은 델로스 섬에 동맹의 금고를 두고, 각 회원국은 재정 또는 군사력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세금을 납부하는 쪽을 선택했다.[26] 회원국들은 동맹의 영속성을 상징하기 위해 쇠 덩어리를 바다에 던지는 맹세를 했다.[27]

아테네는 동맹의 재정과 군사력을 관리했다. 아테네의 정치가 아리스티데스는 새로운 회원국의 세금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27] 시간이 지나면서 아테네는 동맹 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강화했다. 기원전 454년, 아테네 장군 페리클레스는 동맹의 금고를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옮겼다.[28] 표면적인 이유는 페르시아로부터 금고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의 경쟁자들이 이를 아테네의 건축 프로젝트 자금 확보를 위한 조치로 여겼다고 기록했다.

아테네는 동맹 회원국들로부터 선박, 병력, 무기 대신 돈만 받는 것으로 변경했다. 아테네는 새로운 금고의 자금을 파르테논 신전 건설 등 동맹의 방어와 관련 없는 목적에도 사용했다.[28] 이로 인해 델로스 동맹은 점차 동맹에서 아테네 제국으로 변모해갔다.[28]

4. 델로스 동맹의 발전과 변모

델로스 동맹은 초기에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결성된 군사 동맹이었으나, 점차 아테네의 주도하에 에게 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는 제국으로 변모해갔다.

처음에는 델로스 섬에서 각 폴리스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공동 금고를 통해 자산을 관리했다. 회원들은 동맹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고, 대부분 금전적 기여를 했지만, 일부는 함선이나 군대를 제공하기도 했다.[28] 아테네는 민주주의 도시 국가들의 지원으로 투표 시스템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기원전 461년, 키몬도편 추방되고 에피알테스페리클레스 같은 민주주의자들이 영향력을 얻으면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무시하고 아르고스, 테살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메가라펠로폰네소스 동맹을 탈퇴하고 아테네와 동맹을 맺어 코린트 지협에 이중 성벽을 건설하여 아테네를 보호했다. 또한, 테미스토클레스의 권유로 긴 성벽을 건설하여 육지 공격에 대비했다.

기원전 454년,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동맹의 금고를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옮겼다.[28] 이는 페르시아로부터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플루타르코스는 페리클레스의 경쟁자들이 아테네의 건축 프로젝트 자금 확보를 위한 조치로 여겼다고 한다. 이후 아테네는 동맹 회원국들로부터 선박, 병력, 무기 대신 돈만 받도록 변경했다.

아테네의 새 금고는 파르테논 신전 건설 등 동맹의 방어와 관련 없는 곳에 사용되었다.[28] 이로써 델로스 동맹은 점차 군사 동맹에서 아테네 제국으로 변모해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당시 함선을 제공할 수 있는 국가는 키오스와 레스보스 뿐이었으며, 이들마저 지원 없이는 탈퇴가 불가능했다.

페리클레스는 ''클레루키아''라는 준 식민지를 설립하고, ''프로크세노이'', ''에피스코포이'', ''아르콘'', ''헬레노타미아이'' 등의 관직을 활용하여 동맹을 관리했다.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고,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이후, 아테네는 선동가들에 의해 중우정치로 흘러갔다. 이들은 장기적인 안목 없이 정책을 남발하며 국고를 낭비했고, 델로스 동맹에 악영향을 미쳤다.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 반란 진압과 멜로스 섬 공략전 이후, 반란을 일으킨 폴리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성인 남성을 처형하는 등 강압적인 모습을 보였다.

시켈리아 원정에서 아테네는 동맹 금고를 비워가며 파병을 계속했지만, 길리포스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군에게 대패했다. 인재가 고갈된 아테네는 민주제 자체가 기능하지 못하고 자가 중독을 일으켰다. 재정이 고갈되자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가맹 폴리스에만 세금을 부과하고, 아테네는 면세했다. 또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게 패배한 스트라테고스를 극형에 처하는 등 동맹 폴리스의 국고와 병력을 낭비했다.

결국 아이 고스포타미 해전에서 뤼산드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타에게 패배하면서 델로스 동맹은 사실상 괴멸했다. 공식적으로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고 델로스 동맹 해체를 인정하면서 막을 내렸다.

4. 1. 군사적 활동과 성과

델로스 동맹은 초기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며 에게 해의 해상 패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주도로 아테네와 피레우스 항구를 통합하고 군함을 200척까지 늘리는 등 해군력을 강화한 덕분이었다.[28]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를 물리쳤지만, 페르시아의 재침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기원전 477~449년 델로스 동맹의 전투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기원전 460년, 이집트가 페르시아에 반란을 일으키자 페리클레스는 250척의 배를 이끌고 이집트를 지원했으나, 결국 패배하고 많은 병력을 잃었다.[35] 기원전 451년에는 키몬이 이끄는 200척의 함대가 키프로스에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육상과 해상에서 승리했다. 이 전투는 페르시아와의 마지막 주요 전투였다. 칼리아스의 평화 조약 체결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아테네는 그리스 본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에게 해 연안과 섬의 작은 도시 국가들이 힘을 합쳐 페르시아의 해상 침략을 막기 위해 결성되었다. 각 폴리스는 총 생산량에 따라 공납을 내고, 비상시에는 아테네 해군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이를 통해 그리스 전체의 해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칼리아스의 평화로 페르시아와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에도 휴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는 델로스 동맹의 군사적 의의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페리클레스는 200척의 삼단 노선을 상선으로 활용하여 델로스 동맹을 군사 동맹에서 경제 동맹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이를 통해 델로스 동맹 가맹 국가들의 경제는 획기적으로 발전했고, 전후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사모스 섬의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델로스 동맹 내에서의 갈등도 존재했다. 페리클레스는 주모자 처벌 외에 폴리스의 독립을 유지하며 "델로스 동맹은 해운 폴리스의 운명 공동체"임을 강조했다.

4. 2. 경제적, 문화적 교류의 확대

델로스 동맹은 군사 동맹뿐만 아니라 경제 동맹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페리클레스는 200척의 삼단 노선을 상선으로 활용하여, 델로스 동맹 회원국 간의 무역을 활성화했다. 이는 에게해 연안 시장의 발전을 가져왔고, 각 폴리스는 아테네의 군함으로 상품을 운반하며 해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28]

델로스 동맹 가맹 국가들의 경제는 획기적으로 성장했으며, 전후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도시 국가들이 활발하게 교역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평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페르시아 역시 교역 상대국으로 참여하여, 그리스 세계와 페르시아의 상품들이 아테네에 모여들었다. 이로 인해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경제 중심지로 부상했다.[29]

경제 발전과 더불어 학문도 융성해져,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그리스 세계의 독립을 지키고, 페리클레스와 스파르타아르키다모스 2세 등의 노력으로 번영의 시대를 맞이한 이 시기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최성기로 평가받는다.

4. 3. 아테네의 패권 강화와 동맹의 변질

기원전 454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금고를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로 옮겼다. 표면적인 이유는 페르시아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플루타르코스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이 이를 아테네의 건축 프로젝트 자금 확보를 위한 횡령으로 간주했다고 기록했다. 아테네는 동맹 회원국들로부터 선박, 병력, 무기 대신 돈만 받도록 변경했다.[28]

아테네의 새 금고는 동맹의 방어와 무관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페리클레스는 동맹 자금으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파르테논 신전을 건설하는 등 방어와 관련 없는 지출을 했다.[28] 델로스 동맹은 점차 동맹에서 제국으로 변모했다.[28]

아테네는 동맹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가 동맹원들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공물 체납과 의무 불이행을 엄격하게 처벌했다고 기록했다. 아테네는 동맹원들이 선박 대신 돈으로 분담금을 내도록 강요했고, 이는 아테네 해군력 강화로 이어졌다. 반란을 일으킨 낙소스 섬과 타소스는 가혹하게 진압되었고, 함대와 투표권을 잃었다.[31][32] 타소스의 경우, 방어벽이 헐리고 토지, 해군 함선, 광산이 몰수되었다.[34]

아테네는 동맹 회원국들에 대한 사법적 권한도 확대했다.[29] 국가 간 분쟁을 아테네 법원에서 해결하고, 아테네 군대를 통해 결정을 집행했다.[29] 미틸레네와 멜로스처럼 동맹 탈퇴를 시도한 도시들은 무력으로 진압되었다.[28] 아테네는 동맹 회원국들을 "아테네가 지배하는 모든 도시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28]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50년에 ''클레루키아''라는 준 식민지를 설립하여 아테네의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프로크세노이'', ''에피스코포이'', ''아르콘'', ''헬레노타미아이'' 등의 관직을 활용하여 동맹을 관리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당시 함선을 제공할 수 있는 국가는 키오스와 레스보스뿐이었으며, 이들마저 지원 없이는 탈퇴가 불가능했다. 레스보스는 반란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키오스는 시라쿠사 원정 이후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이처럼 아테네는 동맹의 재정을 자국의 이익에 사용하고, 회원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제국으로 변질시켰다.

5. 델로스 동맹의 쇠퇴와 해체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과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 사망 이후, 아테네민주정 국가이자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으나, 실질적으로 아테네를 이끈 것은 선동가들이었다. 이들은 대중의 즉각적인 의견에 영합하는 중우정치를 펼치며 장기적인 안목 없이 정책을 남발했고, 이는 아테네의 국고 낭비와 델로스 동맹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일부 학자들이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해상 제국"이라고 비꼬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11]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 탈퇴를 내건 반란 진압과 중립을 지키던 멜로스 섬의 공략전 이후의 전후 처리는 이러한 변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반란 진압 후에도 해당 폴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고 주모자들만 처형했으나, 클레온과 니키아스가 스트라테고스였던 시기에는 성인 남성을 모두 처형하고 국가로서의 독립을 박탈, 아테네의 식민시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아테네가 강압적이고 패권적인 행동을 시작했음을 보여준다.[11]

클레온이 브라시다스에게 전사한 후 시라쿠사이로의 원정은 아테네 민주정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전황 악화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동맹 금고를 소진하며 파병을 계속했고, 결국 길리포스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군에게 대패했다. 제1차 원정군을 이끈 니키아스와 라마코스, 증원군을 이끈 에우리메돈과 데모스테네스를 포함한 총 4명의 스트라테고스가 전사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았다.[11]

이후 아테네는 과두정으로 잠시 이행했다가 민주정을 부활시켰지만, 인재 고갈 상태에서 민주정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자가 중독을 일으켰다.[11]

아테네는 재원 고갈로 델로스 동맹 가맹 폴리스에만 세금을 부과하고 아테네는 면세하는 불공정한 정책을 시행했다. 시라쿠사이 파병으로 인한 인재 부족에도 불구하고,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에게 패배한 스트라테고스를 시민 집회에서 극형에 처하는 등 델로스 동맹 폴리스의 국고와 병력을 소모시켰다. 아테네 해군 또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페르시아에 의해 삼단 노선 노잡이를 헤드헌팅당하며 약화되었다. 델로스 동맹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형해화되었다.[11]

결국 스파르타의 뤼산드로스가 아이 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네를 격파하고 델로스 동맹 폴리스 및 식민지에서 아테네 시민을 강제 퇴거시키면서 델로스 동맹은 사실상 붕괴했다. 공식적으로는 뤼산드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해군과 스파르타 왕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에 아테네가 포위되었고, 아테네는 스파르타군의 철수와 교환으로 델로스 동맹 해체를 공식 인정했다.[10]

5. 1.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갈등 심화

아테네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하여 아테네에 대항했다.[1] 아테네는 에게 해뿐만 아니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반대쪽에 위치한 이오니아 해에도 세력을 뻗쳤고, 이오니아 해를 상업 활동의 주요 무대로 삼아온 코린토스 등과 대립하게 되었다.[1]

아테네의 전제적 지배에 반발하여 델로스 동맹에서 이탈하는 폴리스가 나타나자 펠로폰네소스 동맹 측이 이를 지원했다.[1] 또한, 대립하는 폴리스 중 한쪽이 델로스 동맹에 가입하면 다른 쪽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하는 움직임도 보였다.[1]

5. 2.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과 전개

기원전 431년, 아테네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두 동맹 세력 간의 갈등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에게 해의 여러 폴리스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패권적 지배에 대한 반발로 델로스 동맹에서 이탈하는 폴리스들이 나타났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이러한 폴리스들을 지원했고, 양측의 대립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10]

전쟁 초기,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지도 아래 방어적인 전략을 취했다. 그러나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후, 아테네의 정치는 "선동가(데마고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장기적인 안목 없이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을 펼쳤고, 이는 아테네의 국력 약화와 델로스 동맹의 결속력 약화로 이어졌다.[11]

아테네는 반란을 일으킨 폴리스에 대해 가혹한 정책을 펼쳤다. 미틸레네 반란 진압 후에는 성인 남성 전체를 처형하려 했고, 중립을 지키던 멜로스 섬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팔았다. 이러한 강경책은 델로스 동맹 내 폴리스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9]

시라쿠사이 원정은 아테네 민주정의 문제점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였다. 전황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무리하게 병력을 파견했고, 결국 길리포스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군에게 대패했다. 이 원정으로 아테네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11]

아테네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델로스 동맹 폴리스에만 세금을 부과하고, 아테네 시민은 면세하는 불공정한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패배한 스트라테고스를 시민 집회에서 처형하는 등, 델로스 동맹 폴리스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델로스 동맹은 점차 형해화되었다.[11]

결국 아이 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스파르타의 뤼산드로스에게 패배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해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다. 이로써 델로스 동맹은 막을 내리고, 그리스 세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10]

5. 3. 동맹의 해체와 아테네의 몰락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고,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후, 민주정 국가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였지만, 아테네를 지배한 것은 "선동가(데마고그)"들이었다. 민주주의 정치 지도자들과 달리 여론의 찰나적인 의견을 즉각 정치에 반영하려는 "중우정치(데마고기아)"는 장기적인 시야를 무시한 정책을 연발하며 서서히 아테네의 국고를 낭비했다. 맹주인 아테네의 혼란은 델로스 동맹에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이는 일부 학자들이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해상 제국"이라고 비꼬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 탈퇴를 내건 반란 진압이나, 중립을 유지하던 멜로스 섬의 공략전 후의 전후 처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페리클레스 시대에는 반란을 일으킨 폴리스에 대해서도 반란 진압 후 국가로서의 독립을 인정하고, 처형도 주모자들에게만 국한시켰다. 그러나 클레온이나 니키아스가 스트라테고스 시대에는 성인 남성을 모두 처형하고, 국가로서의 독립을 없애고, 아테네의 식민시로까지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의도나 의미는 전혀 없었으며, 아테네가 강권적이고 패권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시기가 된다.[34]

클레온이 브라시다스에게 쓰러진 후 시라쿠사이로의 원정은 민주주의의 나쁜 면을 드러냈다. 전황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아테네는 동맹 금고를 비워가며 파병을 계속했고, 결국 길리포스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군에게 완전히 패배했다. 제1차 원정군을 이끈 니키아스와 라마코스, 증원군을 이끈 에우리메돈과 데모스테네스를 포함한 총 4명의 스트라테고스가 전사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다.

그 후 아테네는 한때 과두정으로 이행했다가 민주제를 부활시켰지만, 인재가 고갈된 상태에서 민주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자가 중독을 일으켰다.

재원이 고갈되자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가맹 폴리스에만 세금을 부과하고, 아테네 자신은 면세했다. 시라쿠사이 파병으로 인재가 고갈되었음에도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에게 패배한 스트라테고스를 시민 집회에서 극형에 처하는 등, 델로스 동맹 폴리스의 국고와 병사들을 낭비했다. 아테네 해군도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페르시아에 의해 삼단 노선의 노잡이를 헤드헌팅당하며 약화되었다. 군사적, 경제적으로 델로스 동맹은 형해화되었다.

마지막으로 스파르타의 뤼산드로스가 아이 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네를 격파하고, 델로스 동맹 폴리스 및 식민지에서 아테네 시민을 강제 퇴거시키면서 델로스 동맹은 사실상 괴멸했다. 공식적으로는 뤼산드로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해군과 스파르타 왕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에 아테네가 포위되었고, 아테네는 스파르타군의 철수와 교환으로 델로스 동맹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6. 델로스 동맹의 유산과 역사적 의의

델로스 동맹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의 역사에도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7. 한국에 대한 시사점

델로스 동맹의 역사적 경험은 한국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준다.

첫째, 강대국 사이에서 국가 안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델로스 동맹은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결성되었지만, 아테네의 패권주의로 인해 동맹국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한국은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에 있으므로, 주변국과의 관계를 신중하게 관리하고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 정책을 펼쳐야 한다.

둘째, 동맹을 통해 국력을 강화해야 한다. 델로스 동맹은 회원국들의 군사적, 경제적 자원을 결집하여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을 통해 국방력과 경제력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델로스 동맹은 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아테네는 동맹국들의 내정에 간섭하고 억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한국은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여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확산하고 인권을 보호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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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웹사이트 Delian League https://www.britanni[...] 202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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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The Hi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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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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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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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23] 서적 The Histories
[24]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25] 서적
[26]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27] 서적 Aristeides
[28] 서적 The Landmark Thucydides A Comprehensive Guide to the Peloponnesian War Free Press
[29] 웹사이트 Pseudo-Xenophon (Old Oligarch), Constitution of the Athenians, chapter 1, section 16 https://www.perseus.[...] 2021-12-04
[30]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31]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32] 서적
[33]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34] 서적 The Peloponnesian War
[35] 서적
[36] 서적 古代ギリシアの思想家たち——知の伝統と闘争 山川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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