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항공군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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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4항공군은 1943년 7월 일본 육군 항공대의 뉴기니 전역 지원을 위해 창설된 부대이다. 제8방면군, 제2방면군, 제14방면군으로 소속을 변경하며 필리핀 전역에 참전, 레이테 전투, 루손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1944년에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자살 공격을 감행했으며, 1945년 2월 해체되었다. 사령관으로는 데라모토 구마이치, 도미나가 쿄지가 있었으며, 필리핀 전역 중 도미나가 쿄지 사령관의 무단 철수로 논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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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항공군 (일본군) | |
---|---|
개요 | |
명칭 | 제4항공군 |
원어 명칭 | 第四航空軍 (다이욘 코쿠군) |
통칭 | 진 (真, 신) |
군사 정보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병과 | 항공병과 |
규모 | 항공군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뉴기니 전역 필리핀 전역 (1944년~1945년)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정보 없음) |
창설 및 해체 | |
창설일 | 1943년 7월 28일 |
해체일 | 1945년 2월 28일 |
위치 정보 | |
주둔지 | 라바울 - 메나도 - 필리핀 - 타이완 |
편제지 | (정보 없음) |
담당 지역 | (정보 없음) |
최종 위치 | 타이완 |
기타 정보 | |
통칭호 | 진 (真) |
애칭 | (정보 없음) |
표어 | (정보 없음) |
보충 담당 | (정보 없음) |
상급 부대 | (정보 없음) |
최종 상급 부대 | 제14방면군 |
2. 역사
1943년 7월 28일, 대본영의 대륙령 제818호에 따라 뉴기니 방면의 제6, 제7비행사단을 편성하여 창설되었다. 제8방면군 소속으로 육군을 지원하였고, 뉴기니 전역에서 일본군이 패배하자 후퇴하였다.
1944년 2월 제2방면군으로 소속이 변경되어 마나도로 이동하였다. 6월부터는 제2차 필리핀 전역을 위해 첩1호 작전에 따라 마닐라로 이동, 레이테 전투에 참가하였다. 말기에는 카미카제 공격을 하는 특별공격대를 운용하였다.
1945년 1월 1일, 제14방면군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루손 전투 도중 도미나가 교지 사령관 등 지휘부가 타이완섬으로 무단 이동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2월 13일에 제4항공군은 폐지되었다.
2. 1. 창설과 뉴기니 전역
1943년 7월 28일, 대본영의 대륙령 제818호 명령에 따라 뉴기니 방면의 제6, 제7비행사단을 편성하여 제4항공군이 창설되었다. 제8방면군 소속 부대로서 육군을 지원하였고, 일본군이 뉴기니 전역에서 패배하자 후퇴하였다.[1]1942년 8월, 과달카날 전투에서의 손실과 라바울에 주둔한 항공기의 상당한 손실로 인해, 일본 제국 해군은 육군에 솔로몬 제도와 뉴기니에서의 항공 지원을 위한 증원을 요청했다. 육군은 점령지 전역에 병력이 너무 얇게 분산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이 요청을 처음에는 거절했다. 9월 초 에드슨 고지 전투에서 가와구치 부대가 패배하면서 육군의 입장이 바뀌어, 포트 모레스비를 점령할 때까지 전투기 2개 비행대와 폭격기 2개 비행대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이 나왔다. 상황에 대한 추가적인 평가와 코코다 트랙 작전의 실패로 인해, 11월 18일 육군과 해군은 제6항공사단을 뉴기니 전선에 투입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전선이 안정되고 포트 모레스비를 점령할 때까지의 임시적인 조치였다.[1]
라바울에 처음 도착한 부대는 12월 18일 제11센타이의 나카지마 1식 전투기 "오스카" 60대였으며, 이후 뉴기니로 보내졌다. 그 뒤를 이어 버마에서 온 중폭격기 부대가 뉴기니에 배치되었다. 1943년 1월 4일까지 이 지역에는 육군 항공기 164대가 주둔했다. 이들은 주로 웨왁과 뉴기니의 다른 작은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비스마르크 해 해전에서의 손실은 연합군의 항공력 증가에 비추어볼 때 이 부대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격차를 메우기 위해 제14항공여단의 제68센타이와 제78센타이가 제6항공사단에 파견되어 4월 말에 도착했고, 제13센타이와 제24센타이는 5월 말에 도착했다. 제11센타이는 일본의 타이쇼로 이동했다.[1]
정보 보고서는 연합군이 뉴기니 고지대인 마운트 하겐과 베나 베나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이는 웨왁과 마당의 공군 기지에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제7항공사단이 6월 19일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웨왁으로 이동했다. 제7항공사단은 1월에 창설된 비교적 새로운 부대였으며, 이전된 부대는 제59센타이 (전투기), 제5센타이, 제7센타이 (중폭격기) 및 제61센타이 (중폭격기)였다. 이 이동의 결과로 제4항공군이라는 새로운 항공군이 창설되었으며, 그 사령부는 라바울에 위치하여 제6항공사단과 제7항공사단을 지휘했다.[1]
8월 초, 제4항공군의 작전 능력은 보유 항공기 200대 중 130대였다. 이는 서류상 정원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항공기 승무원의 질병과 대체 항공기의 부족이 전투 손실 외에 기여 요인이었다. 8월 12일, 항공군은 와우, 살라무아, 하겐, 베나 베나, 그리고 뉴기니의 다른 지역에 있는 적 항공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는 8월 17일부터 21일까지 웨왁과 다른 기지에 대한 보복 공습을 유발하여 제4항공기 100대를 파괴했다. 작전 능력은 이제 단 30대밖에 남지 않았고 적의 항공 작전을 방해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1]
9월까지 작전 능력은 60~70대로 증가했고, 호란디아의 비행장은 제4항공군의 분산 작전에 더 많은 깊이를 제공하기 위해 강화되었다. 10월, 제7항공사단이 동인도와 뉴기니로 재배치된 제2방면군으로 이관되었다. 제7항공사단 본부는 암본 섬으로 이전되었다. 제6항공사단은 이 시기에 웨왁에서 계속 작전을 수행했다.[1]
1944년 1월 사이도르에서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제4항공군은 약 100대의 작전 가능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침공 부대에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2월 초에는 단 50대의 작전 가능한 항공기만 남았다. 이러한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제2방면군의 제33, 45, 60, 75, 77 비행전대가 제4항공군에 파견되었다.[1]
2. 2. 필리핀 전역과 특공 작전
1944년 2월, 제4항공군은 제2방면군으로 예속 변경되어 마나도로 이동했다. 6월부터는 제2차 필리핀 전역을 위해 첩1호 작전에 따라 마닐라로 이동하여 레이테 전투에 참가했다.[6] 제2항공군의 제4비행사단은 5월 말에 제4항공군으로 전속되어 만주에서 필리핀으로 이동했으며, 마닐라에 주둔한 제4항공군 사령부도 마찬가지였다.[6]제4비행사단의 주력 부대는 필리핀 중부와 남부에 배치되어 해군 제5기지항공대와 협력하여 항공모함과 호송 선단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적이 상륙하면 병력 수송선과 집결지를 공격하는 데 집중할 예정이었다. 제2 및 제4비행사단은 레이테 만 해전에 참여했지만, 10월 28일까지 비행장이 파괴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6]
이러한 손실과 마닐라에 주둔했던 일본 제국 해군의 제1항공 함대의 선례를 따라 제4항공군은 특공대(特別攻撃隊)를 창설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특별 공격대"를 의미하며, 가미카제 공격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6]
1945년 1월 1일, 제14방면군으로 전속하여 루손 전투 도중에 타이완섬으로 옮겨갔다.[6]
2. 3. 무단 철수와 해체
1945년 1월, 루손 전투가 한창일 때 도미나가 교지 사령관을 비롯한 제4항공군 지휘부는 제14방면군의 허가 없이 타이완으로 무단 철수했다.[31] 이는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이 마닐라를 오픈 시티로 하기 위해 도미나가에게 철수를 요청했으나, 도미나가가 클라크 비행장을 버리고 산 속에 숨으라는 명령에 반발하며 마닐라 사수를 고집했기 때문이다.[9]제14방면군 참모장 무토 아키라 중장이 설득에 나섰지만, 도미나가는 "항공대가 산으로 들어가서 뭘 하겠다는 건가?"라며 불만을 토로했고, 무토는 "연료도 항공기도 없는 산 속에 항공사령부가 고착되어 있어도 의미가 없다"며 제4항공군을 대만으로 이동시켜 전력 재편성을 권하는 제안을 했다.[13] 그러나 도미나가는 대본영과 남방군에 사령관 사임을 두 번이나 신청했지만 거부당했고,[14] 마닐라 사수 의지를 더욱 굳혔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이끄는 연합군이 링가옌 만 상륙을 시작하자, 도미나가는 마닐라 옥쇄를 철회하고 에치아게로 철수를 결정했다.[23] 그러나 심신이 쇠약해진 도미나가를 대만으로 "시찰"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탈출시키기로 한 참모장 구마베 마사미 소장은 도미나가에게 허위 보고를 하여 대만으로의 철수에 동의하게 했다.[36]
1945년 1월 16일, 도미나가는 99식 습격기를 타고 대만으로 탈출했다.[54] 그러나 이는 무단 철수였고,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 대장은 도미나가를 질책했지만, 제4항공군 사령부를 필리핀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정식으로 철수를 허가했다.[74] 남겨진 제4항공군 병력도 대만으로 철수했지만, 많은 장병이 루손에 버려져 루손 전투에서 희생되었다.
제4항공군은 1945년 2월 13일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96] 도미나가는 대기 처분을 받았다가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98]
2. 4. 전후 평가
제4항공군의 무단 철수는 일본군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특히 특공대를 운용하던 지휘부가 먼저 철수했다는 점에서 비난 여론이 높았다.[86] 루손섬에 남겨진 지상 요원과 일부 특공대원들은 "적전 도주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목숨 아끼는 도미나가가, 대만으로 도망간 그 후에" 등의 말로 제4항공군 사령부를 조롱했다.[86] 이러한 비판은 도미나가 개인뿐만 아니라 제4항공군 사령부 전체를 향했으며, 탈출하지 못한 제2항공통신단 사령부 참모들은 제4항공군 막료들을 태운 수송기가 격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소하다"라고 중얼거릴 정도였다.[87]3. 지휘부
제4항공군의 지휘부는 사령관과 참모장으로 구성되었다.
사령관은 데라모토 쿠마이치 중장과 도미나가 교지 중장이 역임했다. 특히 도미나가 교지 중장은 제4항공군 사령부의 대만 무단 철수와 관련하여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제4항공군 사령부의 대만 철수는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100] 다카기 슌로 작가는 "궤계로 도망갔다", "뻔뻔함과 무책임"이라고 비판했고, 이토 게이이치 작가는 상급 군인들의 오명과 하급 장병들의 감투를 비교했으며, 이토 마사노리는 "무단 탈출"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강조했다. 심지어 "일본 육군 역사상 최저 최악의 장관", 전쟁 범죄자라는 혹평까지 나왔다.[101] 반면, 이쿠타 아쓰시는 도미나가의 대만 퇴각 판단은 전략적으로 옳았다고 옹호하며, 패전 시 비겁하다는 비난은 고급 군인의 숙명이라고 지적했고,[108] "만다대" 사사키는 도미나가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전상 명예로운 철수"라고 말했다.[110]
참모장은 아키야마 도요지 소장, 모리모토 군조 소장, 데라다 세이이치 소장, 구마베 마사미 소장이 차례로 역임했다.
3. 1. 사령관


데라모토 구마이치 중장: 1943년 7월 20일[2]
도미나가 교지 중장: 1944년 8월 30일 ~ 1945년 2월 24일[3]
데라모토 구마이치는 1910년 일본 제국 육군 보병에 입대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33년 제8비행연대를 지휘했으며, 만주국 주둔 제2항공사단 사령관으로 소장으로 진급했다. 제1항공군을 잠시 지휘한 후, 1943년 7월 제4항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
도미나가 교지는 1913년 5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주로 비전투 보직을 맡았다. 1939년 육군 소장, 1941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944년 7월 도조 내각 붕괴까지 행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4년 8월 30일 제4항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자, 쇼와 천황은 놀라움을 표하며 육군대신 스기야마에게 도미나가의 항공군 지식에 대해 질문했다.[4]
제4항공군 사령부의 대만 무단 철수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아끼기 위한 도주로 비난했고, 특히 도미나가 사령관에게 비난이 집중되었다.[100] "일본 육군 역사상 최악의 장관", 전쟁 범죄자라는 혹평까지 나왔다.[101]
다카기 슌로 작가는 도미나가를 "궤계로 도망갔다", "뻔뻔함과 무책임"이라고 비판하며, 이는 군부 전체의 문제라고 지적했다.[102] 이토 게이이치 작가 역시 제4항공군 사령부의 무단 철수를 비판하며, 상급 군인들의 오명과 하급 장병들의 감투를 비교했다.[103] 이토 마사노리는 도미나가의 "무단 탈출"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강조했다.[104] 제8비행사단 참모는 "세계 전사상 드문 겁약한 사실"이라고 비판했다.[105]
반면, 제4항공군 탑승원들은 사령부 탈출 후에도 도미나가에 대한 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후가쿠대 나시코다 미노루 조장은 도미나가 귀국 소식에 마이즈루에서 도쿄행 기차를 타고 하마마츠역에서 도미나가를 만나 "필리핀에서 신세 졌다"고 인사했고, 도미나가는 "그대도 수고했네"라고 답했다.[106] 그러나 지상 요원과 일부 탑승원들은 도미나가의 무단 철수에 배신감을 느꼈고,[64] 전후 전우회에서는 "도미나가를 죽여 버리자"는 과격한 발언도 나왔다.[107]
제14방면군 참모장 무토는 도미나가에게 대만 철수를 제안하며, "연료, 탄약 부족 상황에서 항공군 사령부 고착은 의미 없다"고 옹호했다.[108] 이쿠타 아쓰시는 도미나가의 대만 퇴각 판단은 전략적으로 옳았다고 옹호하며, 패전 시 비겁하다는 비난은 고급 군인의 숙명이라고 지적했다. 특공기 운용에 대한 도미나가의 심적 부담과 "결전" 의지 붕괴를 동정했다.[100]
야마오카 소하치는 도미나가의 병과 군 재건 초조함, 참모들의 강요에 의한 대만행을 언급하며 옹호했지만, 탈출 이후 활약이 없었던 점은 유감이라고 했다.[109] "만다대" 사사키는 도미나가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전상 명예로운 철수"라고 말했다.[110]
마이니치 신문 무라마쓰는 도미나가를 "섬세한 문화인적 신경의 소유자"로, 잇따른 특공대 출격에 따른 정신적 부담으로 병이 났다고 평가했다.[111] 무단 철수에 대해서는 도미나가의 마닐라 사수 결의와 참모들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언급하며, 당시 현지 기자들은 도미나가에게 동정적이었다고 했다.[41] 제4항공군 사령부에 대해서는 "열악한 인적 요소", "도미나가 중장은 로봇"이라고 평가했다.[66]
요미우리 신문 쓰지모토는 전후 도미나가에 대한 비판과 오명에 대해 "진상"의 애매함을 지적하며, 마루 잡지에 기고한 "도미나가 사령관 비도 탈출의 진상"에서 당시 도미나가를 상세히 기술했다.[112]
3. 2. 참모장
취임일 | 계급 | 성명 |
---|---|---|
1943년 7월 20일 | 소장 | 아키야마 도요지 |
1944년 4월 1일 | 소장 | 모리모토 군조 |
1944년 8월 30일 | 소장 | 데라다 세이이치 |
1944년 11월 25일 | 소장 | 구마베 마사미 |
4. 주요 부대
제4항공군의 주요 지휘관 및 참모진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비고 |
---|---|---|
사령관 | 아키야마 토요지 소장 | 1943년 7월 20일 - |
사령관 | 모리모토 군조 소장 | 1944년 4월 1일 - |
사령관 | 테라다 세이이치 소장 | 1944년 8월 30일 - |
사령관 | 쿠마베 마사미 소장 | 1944년 11월 25일 - 1945년 2월 20일 |
사령관 | 야마구치 쓰치오 소장 | 1944년 11월 25일 - 1945년 2월 12일 |
고급 참모 | 오사카 준지 대좌 | |
참모(후방) | 카네코 린카 중좌 | |
참모(정보) | 미즈타니 츠토무 중좌 | |
참모(후방) | 슈토 타다오 소좌 | |
참모(통신) | 오카모토 고 소좌 | |
참모(시설) | 타카기 사쿠노 소좌 | |
참모(편제) | 키누가사 하야오 소좌 | |
병기부장 | 코쿠보 카츠히로 대좌 | |
경리부장 | 이케우치 타츠오 주계대좌 | |
군의부장 | 시지미야 류조 군의소장 |
4. 1. 창설 초기 (1943년)
1943년 6월 라바울에서 창설되었으며, 1944년 3월까지 제8방면군의 지휘를 받았다.[1] 1943년 7월 중순부터 웨와크에 사령부를 두고 마당 및 기타 소규모 비행장을 추가 기지로 사용하였다.1943년 당시 제4항공군의 초기 부대 구성은 다음과 같다.
부대명 | 기종 | 기지 | 비고 |
---|---|---|---|
비행 제13전대 | Ki-45 | - | 1943년 5월 제1항공군에서 뉴기니의 제6비행사단으로 전속, 1943년 5월 31일 기준 20대 중 11대 운용 가능[5] |
비행 제24전대 | Ki-43 | 다구아 비행장 | - |
비행 제68전대 | Ki-61 | 웨와크 인근 보람 비행장 | - |
비행 제78전대 | Ki-61 | 웨와크 인근 보람 비행장 | - |
1943년 7월 7일부터 10월 30일까지 웨와크에 사령부를 주둔시켰으며, 추가 부대는 다음과 같다.
부대명 | 기종 | 기지 |
---|---|---|
비행 제5전대 | Ki-45, Ki-46 | 웨와크 |
비행 제7전대 | Ki-21 또는 Ki-49 | - |
비행 제59전대 | Ki-43 | 다구아 |
비행 제61전대 | Ki-21 또는 Ki-49 | - |
4. 2. 1944년
1944년 1월 사이도르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제4항공군은 약 100대의 작전 가능한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침공 부대에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2월 초에는 단 50대의 작전 가능한 항공기만 남았다.[1] 전력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제2방면군에서 제33, 45, 60, 75, 77 비행전대가 제4항공군에 파견되었다.[1]1944년 당시 제4항공군에 배속되었던 부대는 다음과 같다.
부대명 | 기종 | 기지 | 비고 |
---|---|---|---|
비행 제13전대 | 웨와크 | ||
비행 제24전대 | 웨와크 | ||
비행 제68전대 | 웨와크 | ||
비행 제78전대 | 웨와크 | ||
비행 제33전대 | Ki-43 | 제2방면군에서 파견[1] | |
비행 제45전대 | Ki-48 | 제2방면군에서 파견[1] | |
비행 제60전대 | Ki-21 | 제2방면군에서 파견[1] | |
비행 제75전대 | Ki-48 | 제2방면군에서 파견[1] | |
비행 제77전대 | Ki-43 | 제2방면군에서 파견[1] |
1944년 제4항공군의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
사령관 | 모리모토 군조 소장 |
사령관 | 테라다 세이이치 소장 |
사령관 | 쿠마베 마사미 소장 |
고급 참모 | 오사카 준지 대좌 |
참모 (후방) | 카네코 린카 중좌 |
참모 (정보) | 미즈타니 츠토무 중좌 |
참모 (후방) | 슈토 타다오 소좌 |
참모 (통신) | 오카모토 고 소좌 |
참모 (시설) | 타카기 사쿠노 소좌 |
참모 (편제) | 키누가사 하야오 소좌 |
병기부장 | 코쿠보 카츠히로 대좌 |
경리부장 | 이케우치 타츠오 주계대좌 |
군의부장 | 시지미야 류조 군의소장 |
5. 작전
제4항공군은 뉴기니 전역과 필리핀 전역에 참전하였다.[1]
1944년 3월 25일까지 총 300대의 항공기가 홀란디아에 집결했으나, 이 중 작전 가능한 항공기는 150대에 불과했다. 제4군 사령부도 이때 그곳으로 이동했다. 적의 공격이 반복되면서 웨왁의 적 항공기가 홀란디아를 공격하여 기습, 지상에 있던 15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제4항공군은 4월 15일 제8방면군에서 남방군 사령부로 전속되었다. 제4항공군 사령부는 술라웨시의 마나도로 이동했다. 이나다 마사즈미 소장은 4월 11일 홀란디아에 도착하여 제6항공사단을 인수했다. 4월 22일 적은 기지를 점령하고 남은 항공기를 파괴하여 제6항공사단을 사실상 전멸시켰다.[6]
6. 특공대
제4항공군은 함선에 대한 특공 공격 외에도 나카지마 L2D 수송기를 사용하여 대만 타카사고 의용군과 강습연대 3, 4(일명, 타카치호 공수부대)를 적 비행장에 투하했다.
레이테 섬에서 출격한 적기에 의한 오르모크 만 해전에서의 폭격기 및 전투기의 공격 효과가 미미하자, 도미나가 기요시 제4항공군 사령관은 하토리 타쿠시로 참모총장 작전부장과 협의 후, 공수 특공 작전을 통해 적 비행장을 무력화하려 했다. 도미나가는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에게 이 계획을 제안했고, 야마시타는 필리핀 방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도미나가의 작전을 승인했다.
1944년 11월 26일, 네 대의 수송기를 동원한 첫 번째 공격이 브라우엔 비행장을 목표로 실시되었지만, 한 대의 수송기가 발렌시아 비행장에 불시착하면서 실패했다. 나머지 세 대의 행방은 묘연했다.
1944년 12월 6일에 실시된 두 번째 작전인 ''작전 테(Operation TE)''는 규모가 더 컸으며, 총 450명의 공수 대원이 투입되었다. 바이유그 비행장에 204명, 바이유그 비행장에 72명, 삼파블로 비행장에 36명, 드래그 비행장에 104명, 타클로반 비행장에 44명이 참가했다. 계획은 공수부대가 제14방면군의 후속 지상 부대와 함께 비행장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에 상응하는 지상 작전은 ''작전 재패니즈(Operation Japanese)''로 명명되었다. 도미나가는 남은 병력을 "작전 테"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30대의 미쓰비시 Ki-21 전투기와 17대의 미쓰비시 Ki-21 중폭격기가 수송기를 호위했다.
12월 6일 "작전 테"가 실행되어 각 비행장에 공수부대가 투하되고 강제 착륙이 이루어졌다. 타클로반으로 향한 14대의 수송기 중 12대가 격추되었고 2대가 불시착했다.
총 26대의 수송기가 바이유그 및 산 파블로 비행장으로 향했다. 20대의 수송기는 생존했지만, 모두 강력한 대공포화에 시달렸다. 일본군은 적의 저항을 제압하고 두 비행장을 점령하여 비행장 장비, C-45 익스페디터 1대, L-5 센티넬 5대, 지상에 있던 기타 항공기 14대를 파괴했다. 비록 작전은 성공적이었지만, 도미나가는 파괴된 적 항공기가 너무 적다는 것에 실망했다.
- '''정화 부대'''|精華隊,|세이카-타이일본어 - 제4항공군 제30전투군에서 차출된 제1비행전대, 제11비행전대, 제31전대, 제71전대, 제72전대, 제73전대, 제200전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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