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오카 소하치
1. 개요
야마오카 소하치는 일본의 소설가로, 1934년 데뷔하여 역사 소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하여 《오다 노부나가》, 《태평양 전쟁》 등 다양한 작품을 집필했으며,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베스트셀러가 되며 국민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작품은 여러 차례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만년에는 보수 정치인 및 우익 인사들과 교류하며 정치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극우적 사관에 대한 비판도 받았다. 주요 수상 경력으로는 노마 문예상,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등이 있다.
| 이름 | 야마오카 소하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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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야마우치 쇼조 |
| 출생 | 1907년 1월 11일 |
| 출생지 | 일본 니가타현기타우오누마군고이데정(현: 우오누마시 사사리) |
| 사망 | 1978년 9월 30일 (71세) |
| 사망지 | 일본 도쿄도도시마구가미이케부쿠로 |
| 묘소 | 슌주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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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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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 | 일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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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 | 무선전신강습소 본과 전기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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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표 작품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53년 - 1967년) 『소설 메이지 천황』 (1963년 - 1968년) 『태평양 전쟁』 (1962년 - 1971년) 『봄의 언덕길』 (19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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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내역 | 「선데이 마이니치 대중문예」 입선 (1938년) 노마 문예 장려상 (1942년) 주니치 문화상 (1958년) 하세가와 신상 (1967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1968년) 자수포장 (1973년) 훈2등 서보장 (19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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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 야마오카 겐지 (양자) 야마오카 다쓰마루 (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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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회의 관계자 -
오선화
오선화는 대한민국 출신으로 일본으로 귀화한 평론가이자 작가, 대학교수로, 호스티스 경험을 바탕으로 작가 데뷔 후 한일 관계와 한국 사회,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저술 및 강연 활동을 했다. -
일본회의 관계자 -
아베 신조
아베 신조는 1993년 중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두 차례 일본 총리를 역임하며 아베노믹스를 추진하고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2022년 유세 중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
니가타현 출신 -
혼마 마사하루
혼마 마사하루는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필리핀 공략전을 지휘했으나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한 책임으로 전범으로 처형되었고, 그의 재판은 지휘자 책임 적용 및 맥아더의 복수심 작용 등의 논란이 있다. -
니가타현 출신 -
이상일 (영화 감독)
니가타현 출신 재일조선인 3세 영화 감독인 이상일은 일본영화학교에서 영화 제작을 공부하고 《69 sixty nine》으로 데뷔하여 《훌라 걸스》, 《악인》, 《분노》, 《유랑의 달》 등 사회 비판적 메시지와 인간 심리를 탐구하는 작품들을 통해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호평을 받으며 일본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07년 출생 -
발두어 폰 시라흐
발두어 폰 시라흐는 나치 독일 시대 히틀러 유겐트의 국가 지도자였던 독일 정치인으로, 나치즘에 심취하여 히틀러 유겐트를 합법적인 청소년 단체로 성장시키고 빈의 가우라이터 겸 제국총독으로 활동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반인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1907년 출생 -
미키 다케오
미키 다케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66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록히드 사건 조사와 정치 개혁을 시도했으나, 정치적 이상과 현실 간 괴리, 강직한 성격 등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2. 생애 및 경력
야마오카 소하치는 1907년 니가타현 기타우오누마군 고이데마치(현재의 우오누마시)에서 야마우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이시카와현 고마쓰시의 후지노 가에 들어갔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고등소학교를 중퇴하고 상경하여 하쿠분칸 인쇄소에서 문선공으로 일하며 체신성 연구소에서 공부했다. 1918년 강에서 수영하다 이마를 심하게 다쳐 후유증으로 혹이 남았다. 1924년부터는 인쇄 및 제본업을 시작했다.
1932년, 만리각에 입사하여 잡지 『갱』의 편집을 담당하며 『변태 긴자 데카메론』을 연재했다. 1933년 2월, 만리각 발행의 『대중 클럽』 편집 책임자였던 후지노 히데코와 결혼했다. 히데코는 이시카와현 노미군 아타카마치(현 고마쓰시) 출신의 외동딸이었기 때문에, 야마오카는 후지노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히데코는 야마오카 미치에라는 필명으로도 활동했다.
1934년, 소설 《약속》으로「선데이 매일 대중 문예」에 입선하며 등단했다. 이후 하세가와 신에게 입문하여 본격적인 소설 수업을 받았다.
(작가로서의 활동, 정치 활동 및 논란은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룬다.)
양자인 야마오카 겐지는 참의원 의원을 거쳐 민주당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2.1. 작가로서의 활동
야마오카 소하치는 1934년 「약속(約束)」으로「선데이 매일 대중 문예」에 입선하며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세가와 신의 신응회(新鷹会)에 입회하여 새로운 문학 창조를 목표로 했다. 1938년 「약속」으로 「선데이 매일 대중 문예」에 다시 입선했고, 하세가와 신의 신매회에 입회했다. 1939년 첫 저서 『가라유키 군가』를 출간했다.
1940년, 종군 작가를 지원하여 중지, 하이난 섬, 남지 등을 순회했다. 1941년 육군의 명령을 받아 다시 중국 대륙으로 건너갔다. 1942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종군 작가로 활동하며, 같은 해 『군신 스기모토 중좌』와 『해저 전기(海底戰記)』를 간행하여 노마 문예 장려상을 수상했다. 각 전선을 돌며 시국적인 소설을 썼다.
1943년 『어둔』의 연재를 잡지 『킹』에서 시작했다. 1944년 해군 보도부 카라키 중좌와의 대담 "사이판 이후, 결전의 각오를 말하다"를 발표했다.
1945년 "가미카제 특공대와 소년들"을 『비행 소년』에 기고했고, 아사히 신문에 "가미카제대의 선구, 아리마 중장의 유훈"을 기고했다. 같은 해 "가미카제대에 응하는 길"을 『바다의 일본』에 기고하고, "유황이 부는 섬 =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전"을 『주간 아사히』에 연재했다.
전후 1950년부터 1967년까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평화 지향적인 인물로 묘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한국어판 제목 '대망')를 집필하여 국민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50년 "홋카이도 신문" 석간 재개와 함께 연재를 시작했고, 1951년부터는 "주부니혼 신문", "고베 신문" 등에도 연재되었다. 1953년부터 단행본이 간행되어 "경영자의 바이블"로 불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67년 완결 후, 1968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1959년 실명 소설 『소설 기시 노부스케』를 출간했다. 1958년 주니치 문화상을 수상했고, 1963년 신응회 이사에 취임했다. 1966년 문단 장자 번호 1위가 되었다.
이후 《소설 메이지 천황(1963~1968)》, 《태평양전쟁(1962~1971)》 등 일본 민족의 특성을 찾는 3부작을 집필했다. 1978년 사사카와 료이치의 전기 소설 『파천황 인간 사사카와 료이치』를 간행했다.
2.2. 정치 활동 및 논란
야마오카 소하치는 만년에 보수 정치인 및 우익 인사들과 교류하며 정치 활동에 참여했다. 1963년 후쿠다 쓰네아리, 이치카와 후사에 등과 함께 마약 추방 국토 정화 연맹을 결성했다. 1974년 다니구치 마사하루 등과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하여 대표 위원을 맡았다.
1967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마쓰시타 마사토시를 "진정한 평화주의자"라고 평가하며 지지했다. 1968년 '메이지 유신 100년 기념식전'에서는 "동서 냉전 속에서 신들을 우러르며 나라를 둘로 나누지 않으려는 노력을 진지하게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연설했다. 1972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했다.
1976년 쇼와 천황 재위 50주년 기념식전에서는 봉축 위원회 회장을 맡아 대규모 퍼레이드를 주최했다. 1978년 설립된 '연호 법제화 실현 국민 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사사카와 료이치와는 30년 넘게 친분을 유지하며 그의 전기 소설을 집필, 그를 "평화주의적 애국가"라고 평가했다. 오랫동안 자위대 벗의 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야마오카 소하치의 정치적 행보는 진보 진영으로부터 비판받기도 했다. 특히, 그의 극우적 사관은 일본의 과거사를 미화하고 침략 전쟁을 정당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3. 주요 작품
야마오카 소하치는 역사 소설, 전기 소설, 현대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1934년 《약속》으로 '선데이 마이니치 대중 문예'에 입선하며 등단했다. 1942년에는 《해저전기》로 제2회 노마 문예상을 수상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평화주의적인 인물로 묘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1950년부터 1967년까지 장기간 연재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은 한국에서도 《대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나, 무단 번역 문제로 인해 법적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작가에게 제2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이후에도 《소설 메이지 천황》(1963~1968), 《태평양전쟁》(1962~1971) 등 일본 민족의 특성을 찾는 3부작을 집필했다.
그의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3.1. 대표작
* 도쿠가와 이에야스 (1953-1967) - 전 28권
* 오다 노부나가 (1955-1960) - 전 8권
* 태평양 전쟁 (1965-1971) - 전 9권
* 메이지 천황 (1968) - 전 3권
3.2. 기타 작품
* 《남자의 사랑》(1938)
* 《원수 야마모토 이소로쿠》(1944)
* 《사카모토 료마》(1956)
* 《미토 고몬》(1957)
* 《다카스기 신사쿠》(1966)
* 《요시다 쇼인》(1968)
* 《다테 마사무네》(1970-1973)
4. 수상 경력
* 1942년 - 노마 문예상 (《해저전기》)
* 1958년 - 주니치상
* 1967년 - 신 하세가와상
* 1968년 -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도쿠가와 이에야스》)
* 1973년 - 자수포장
* 1978년 - 훈2등 보관
5. 작품의 한국 출간 및 번역 논란
야마오카 소하치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여러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되었다.
5.1. 무단 번역 및 법적 분쟁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한국에서 《대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무단 번역 문제가 발생했다. 동서문화사는 이 소설을 무단 번역해 출간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며, 몇 달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식 계약사인 솔출판사로부터 기소되어 민사소송에서 패소했다.
6. 평가 및 영향
야마오카 소하치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의 작품은 일본 대중들에게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역사관은 일본 우익의 역사 인식을 반영하고 있어,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에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특히, 그의 작품들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미화한다는 점에서 역사 왜곡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평화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한 《대망》으로 국민 작가가 되었다. 이후 《소설 메이지 천황》, 《태평양전쟁》 등 일본 민족의 특성을 찾는 3부작을 집필했다.
말년에는 일본 수상과 기업 총수들의 자문에 응하며 보수계 정치인 및 문화인과 교류했다. 1963년에는 마약 추방 국토 정화 연맹을 결성했고, 1974년에는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했는데, 이는 현재의 일본 회의(日本会議)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