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시타 도모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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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다. 그는 1885년에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다. 2·26 사건 이후 군 주류에서 벗어났지만,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에서 제25군 사령관으로서 말레이 작전을 지휘하며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싱가포르 함락을 이끌었으나,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으로 마닐라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에 처형되었다. 그의 재판은 지휘 책임의 원칙, 즉 "야마시타 기준"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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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타 도모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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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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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야마시타 도모유키 (山下 奉文) |
별명 | 말레이의 호랑이 바탄의 야수 |
출생일 | 1885년 11월 8일 |
출생지 | 오토요, 고치현, 일본 제국 |
사망일 | 1946년 2월 23일 |
사망지 | 로스바뇨스, 라구나 주, 필리핀 |
사망 원인 | 교수형 |
묘지 | 다마 묘원, 후추, 도쿄, 일본 |
국적 | 일본 |
출신 학교 | 일본 육군사관학교 |
경력 | |
소속 | 대일본제국 육군 |
복무 기간 | 1905년 – 1945년 |
최종 계급 | [[파일:帝國陸軍の階級―襟章―大将.svg|35px]] 대장 |
주요 지휘 | 일본 제25군 제1방면군 제14방면군 |
주요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말레이 작전 싱가포르 전투 필리핀 전역 |
수상 | 금치훈장 욱일장 서보장 독일 독수리 훈장 |
관직 | |
직위 | 일본군 필리핀 군정 장관 |
임기 시작 | 1944년 9월 26일 |
임기 종료 | 1945년 9월 2일 |
군주 | 쇼와 천황 |
이전 | 구로다 시게노리 |
이후 | 직위 폐지 |
2. 생애
1885년 11월 8일, 고치현 카미군 교카손(현 카미시)에서 개업 의사였던 아버지 사키치와 어머니 유우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04] 2살 때 아버지의 고향인 나가오카군 오스기 마을(현 오토요정)로 이사했다. 형 모토요는 해군 군의관으로 최종 계급은 해군 군의 소장이었고, 남동생과 여동생 둘이 더 있는 5남매였다. 교카 심상 소학교, 니로우 고등 소학교, 카이난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스위스와 독일에서 유학했다. 귀국 후에는 육군성 군사 과장, 군사 조사 부장 등을 역임했다.
1936년 2·26 사건 당시 황도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으로서 반란 부대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사건으로 군복을 벗을 각오까지 했으나, 당시 육군대신이었던 가와시마 요시유키의 배려로 군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사건의 여파로 인해 한동안 일본 육군 내에서 요직에서 밀려나 조선 등 변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2. 1. 초기 군 경력
고치현 출신으로, 190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18기)를 920명 중 16등으로 졸업하고[6][7], 1906년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16년에는 육군대학교 (28기)를 수석으로 졸업하며[35] 은사의 군도를 하사받았다. 같은 해 나가야마 히사코와 결혼했다.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4년에는 중국 산둥에서 독일 제국군과 싸웠으며, 이후 독일 전문가로서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스위스 베른과 독일 베를린에서 부무관으로 근무했다. 귀국 후 1922년 소령으로 진급하여 육군성 군무국과 일본 육군 참모 본부, 참모학교 등에서 근무하며 육군 조직을 간소화하는 우가키 군축을 추진하려 했으나, 군내 파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7] 1925년 중령, 1929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주재 무관으로 근무했으며, 귀국 후 1930년에는 정예 부대인 근위사단의 보병 제3연대 연대장을 맡았다. 1932년 육군성 군사과장, 1934년 소장 진급 후 1935년 육군성 군사 조사부장을 역임했다.
야마시타는 장인 나가야마 모토히코 소장의 영향 등으로 황도파의 주요 인물로 주목받았다. 과거 보병 제3연대장 시절 부하였던 안도 테루조 등 2·26 사건 주모 장교들과 친분이 있었고, 그들을 아꼈다. 특히 안도에게는 사건 모의 단계에서 반란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1936년 2·26 사건 발생 당시, 야마시타는 반란 부대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사건에 연루된 장교들에 대한 관용을 호소하여 히로히토 천황의 불신을 샀다. 이로 인해 군복을 벗을 각오까지 했으나, 당시 육군대신 가와시마 요시유키의 배려로 군에 남는 대신 조선의 용산으로 좌천되어 보병 제40여단장으로 부임했다. 아카시 요지는 그의 글에서 야마시타가 조선 근무 시절 2.26 사건 당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선불교를 연구하며 성격이 다소 부드러워졌다고 주장했다.[7]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야마시타는 제40여단을 이끌고 참전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최전선에서 직접 부대를 지휘하는 용맹함을 보였다. 베이징 남쪽 황촌역 전투에서는 후속 부대를 기다리지 않고 소대 병력만 이끌고 돌격했으며, 탄환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말을 타고 병사들의 사격을 지도하기도 했다.[41] 이러한 용맹함으로 '보병포'(총알로는 당해낼 수 없다는 의미)라는 별명을 얻었다. 친구 사와다 시게루는 야마시타가 2·26 사건의 책임 때문에 스스로 죽을 곳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42]
그러나 개인적인 용맹함과 별개로, 부대 지휘는 신중했으며 부하들에 대한 체벌을 금지하는 등 당시 일본군의 악습에 비판적이었다. 수수밭이 많은 중국 전장에서 매복 공격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무리한 공격 대신 주변 수수밭을 제거하여 시야를 확보한 후 진격시켜 부대의 피해를 줄였다.[43] 또한 태자하 전투에서는 무리한 돌격 명령 대신 후퇴를 건의하여 제80연대의 전멸을 막기도 했다.[44]
1937년 11월 중장으로 진급한 후, 중국 주둔 혼성 여단장을 거쳐 1938년 7월 북지나 방면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중국 내 외국 세력(특히 영국)을 몰아내고 중국의 독립을 보장한 뒤 일본과 대등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톈진 조계 봉쇄를 주도했다. 그러나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일본 정부의 개입으로 봉쇄는 해제되었다.[45] 또한 중국 내 일본군의 약탈과 폭행을 엄단하여 위반자는 총살하겠다는 포고를 내리기도 했다.[44] 하지만 동시에 저항하는 중국인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처하여, 1939년 4월에는 항일 게릴라로 의심되는 인원을 재판 없이 '현지 처분' 또는 '엄중 처분'이라는 명목으로 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치안 숙정 요강"을 작성했다. 이는 이후 싱가포르 화교 숙청 사건 등 학살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있다.[46]
야마시타는 중일 전쟁 종식과 미국, 영국과의 관계 유지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39년 9월 제4사단장으로 임명되어 북중국에서 팔로군 등과 싸웠다. 1940년 7월에는 육군 항공 총감 겸 항공 본부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6개월간 독일 파견 항공 시찰단 단장으로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 등을 만났다.[8] 그는 공군력 강화, 육군 기계화, 통합 지휘 체계 구축, 공수부대 창설 등을 지속적으로 주장했으나, 육군대신 도조 히데키와의 갈등으로 그의 제안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7]
연도 | 주요 경력 및 직책 |
---|---|
1905년 |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18기) |
1906년 | 육군 보병 소위 임관, 보병 제11연대 부속 |
1908년 | 육군 보병 중위 진급 |
1916년 | 육군대학교 졸업 (28기, 수석), 육군 대위 진급 |
1919년 | 스위스 주재 무관보좌관 |
1921년 | 독일 주재 |
1922년 | 육군 보병 소령 진급, 육군성 군무국 과원 |
1925년 | 육군 보병 중좌 진급 |
1927년 |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 주재 무관 |
1929년 | 육군 보병 대좌 진급 |
1930년 | 보병 제3연대장 |
1932년 | 육군성 군사과장 |
1934년 | 육군 소장 진급 |
1935년 | 육군성 군사조사부장 |
1936년 | 보병 제40여단장 (조선 용산) |
1937년 | 중일 전쟁 참전, 육군 중장 진급 |
1938년 | 북지나 방면군 참모장 |
1939년 | 제4사단장 |
1940년 | 육군 항공 총감 겸 항공 본부장, 독일 파견 항공 시찰단장 |
1941년 | 군사 참의관, 관동 방위군 사령관, 제25군 사령관 |
2. 2.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육군 제25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말레이 작전을 지휘하였다. 이 작전에서의 성공으로 일본 언론은 그를 "말레이의 호랑이"라고 불렀다.그러나 싱가포르 점령 이후, 그의 통치 하에서 중국계 주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숙칭 대학살)[132]이 자행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싱가포르에서는 극심한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야마시타는 또한 점령 기간 동안 군표(일명 "바나나 노트")를 발행하고 복권을 발매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데 힘썼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 때문에 그가 싱가포르에 막대한 보물을 숨겼다는 소문이 돌아 사후에 보물찾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133]
말레이 작전의 성공으로 야마시타는 일본 내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당시 쇼와 천황은 2·26 사건 당시 야마시타의 행동을 문제 삼아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당시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가 황도파였던 야마시타를 견제하여 의도적으로 천황과의 만남을 막았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야마시타는 큰 전공에도 불구하고 점차 군부 내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2. 2. 1. 말레이 작전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본 육군 제25군 사령관으로서 말레이 작전을 지휘했다. 일본 언론은 그를 "말레이의 호랑이"라고 불렀다.1941년 11월 6일 제25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말라야에서의 승리는 상륙 작전의 성공과 충분한 공군 및 해군 지원 확보에 달려있다고 판단했다. 12월 8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기지에서 말라야 침공을 개시했다.


야마시타는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일본군 병력은 영국, 인도, 호주 연합군의 약 3분의 1 수준)을 극복하고 장기전으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맹렬한 돌격"을 통한 속전속결 전략을 채택했다. 이 전략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가능한 한 빨리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정복하여 장기전의 손실을 피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말레이 작전은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 함락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야마시타의 3만 명 병력은 8만 명의 영국, 인도, 호주군으로 구성된 연합국 병력을 포로로 잡았다. 이는 영국군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복이었다. 이 승리로 그는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이 작전과 이후 싱가포르 일본 점령 기간 동안 알렉산드라 병원 학살과 숙칭 대학살 등 연합군 포로 및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쟁 범죄가 자행되었다. 특히 싱가포르 점령 하에 자행된 숙칭 대학살은 중국계 게릴라 및 협력자로 간주된 이들을 대상으로 한 대량 학살로,[132] 전후 싱가포르의 극심한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야마시타의 책임 소재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가 학살을 막지 못했다는 주장과[9][10] 함께, 학살 명령 자체는 참모부 내 고위 장교들에게서 나왔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전후 재판에서 피고인 중 한 명인 오니시 사토루 소령은 '군대가 빠르게 진격하는 상황에서 후방의 평화 유지를 위해 반일 감정을 보이는 중국인을 최대한 학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라는 사령부의 구체적인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고 증언했다.[11] 야마시타의 부대는 중일 전쟁 당시 중국에서 학살을 통해 대중을 진압하는 것이 관례였던 경험이 있었다.[9][10] 일각에서는 야마시타가 1939년 북지나 방면군 참모장 시절 작성한 '치안 숙청 요강'이 이러한 학살의 배경이 되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 요강은 항일 게릴라로 간주된 자를 재판 없이 살해('현지 처분', '엄중 처분')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46]
야마시타는 알렉산드라 병원 학살 생존자들에게 사과했으며, 학살 이후 약탈을 자행한 일부 병사를 처형했다고 전해진다.[12] 아카시 요지에 따르면, 야마시타는 병사들에게 '약탈 금지, 강간 금지, 방화 금지'를 명령했으나[7] 이러한 명령은 대체로 무시되었으며, 그의 인도주의적인 포로 대우 방침 등은 다른 장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안 워드는 야마시타가 숙칭 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부하인 쓰지 마사노부의 작전 조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평가했다.[13]
점령 기간 동안 야마시타는 군표인 이른바 '바나나 노트'를 발행하고 복권을 발매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데 힘썼다. 이 때문에 사후 그가 싱가포르에 막대한 재산을 숨겼다는 소문이 돌면서 보물찾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133]
말레이 작전의 성공으로 야마시타는 일본 내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쇼와 천황은 그에게 알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는 2·26 사건 당시 야마시타가 천황을 내세워 반란을 정당화하려 했던 행동 때문이라는 설과, 통제파였던 도조 히데키 총리가 황도파였던 야마시타를 견제하여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2. 2. 2. 싱가포르 전투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본 육군 제25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야마시타는 말레이 작전을 지휘했다. 1941년 11월 6일 제25군 사령관이 된 그는 말라야에서의 성공이 상륙 작전과 충분한 공군 및 해군 지원에 달려있다고 판단했다. 12월 8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기지에서 말라야 침공을 개시했다. 당시 일본군은 영국군 병력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기에, 야마시타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장기전으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고자 "맹렬한 돌격"을 통한 속전속결을 강조했다.
말레이 작전은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 전투에서 일본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 전투에서 야마시타가 이끄는 3만 명의 병력은 8만 명에 달하는 영국, 인도, 호주 병력의 항복을 받아냈는데 이는 영국군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항복이었다. 이 승리로 야마시타는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일본 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싱가포르 점령 과정 및 이후 통치 기간 동안 전쟁 범죄가 자행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알렉산드라 병원 학살과 중국계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숙칭 대학살이 있다.[132] 이러한 학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싱가포르에서 강력한 반일 감정을 유발했다. 야마시타의 전쟁 범죄 책임 여부는 논란거리인데, 그가 학살을 직접 명령했는지 혹은 막지 못했는지에 대해 주장이 엇갈린다. 전후 증언에 따르면, 약 5만 명의 중국인을 처형하라는 명령은 야마시타의 참모진 내 고위 장교들로부터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 특히 야마시타의 부대는 중국 전선에서 학살을 통해 주민을 통제했던 경험이 있었다.[9][10] 전범 재판 피고인 중 한 명인 오니시 사토루 소령은 '군대가 빠르게 진격하는 상황에서 후방의 안정을 위해 반일 감정을 보이는 중국인을 최대한 학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령부의 구체적인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고 증언했다.[11]
한편, 야마시타는 알렉산드라 병원에서 학살당한 650명의 생존자들에게 사과했으며, 학살 이후 약탈을 저지른 일부 병사들을 처형했다고 전해진다.[12] 아카시 요지와 같은 일부 학자는 야마시타가 병사들에게 "약탈 금지, 강간 금지, 방화 금지"를 명령했으며, 위반 시 엄벌하겠다고 지시한 점을 들어[7], 학살이 그의 본의는 아니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야마시타의 경고는 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무자비한 폭력 행위가 다수 보고되었다. 아카시는 야마시타가 뛰어난 전술가이자 지도자였음에도, 그의 인도주의적 태도가 참모 본부나 전쟁성의 강경 노선과 충돌했으며, 특히 포로나 점령지 주민에 대한 관대한 처우는 다른 장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고 분석한다.
숙칭 대학살의 경우, 비난의 화살이 야마시타에게 집중되었지만, 현재는 그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부하들, 특히 쓰지 마사노부와 같은 참모들이 사건의 배후에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안 워드는 야마시타가 숙칭 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쓰지의 지휘 업무 조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은 있다고 지적했다.[13]
싱가포르 항복 협상 당시 야마시타가 영국군 사령관 아서 에른스트 퍼시벌에게 "예스냐 노냐"(イエスかノーか|이에스카 노-카일본어) 라고 다그치며 항복을 강요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야마시타 본인은 자신의 일기에서, 통역을 맡았던 히시카리 다카후미가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자 답답함에 "항복할 의사가 있는지 먼저 알려달라"는 취지로 말한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해명했다.[109] 그는 패배한 장수를 위협하는 것처럼 비춰진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했으며, 바로잡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항복 협상에 동석했던 정보 참모 스기타 이치지 역시 이 일화를 부정했다. 반면, 당시 협상 장면을 촬영한 카메라맨 이시이 고노스케는 야마시타가 실제로 퍼시벌을 강하게 몰아붙였으며, 전면 항복하지 않으면 야간 공격을 감행하겠다고 소리쳤다고 증언하여[110], 이 일화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2. 2. 3. 만주 부임
말레이 작전의 성공으로 야마시타는 일본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으나, 당시 쇼와 천황은 2·26 사건 당시 야마시타의 행동을 이유로 그에게 배알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62] 또한, 통제파였던 도조 히데키 총리 겸 육군대신이 황도파였던 야마시타를 견제하여 천황 배알을 막았다는 설도 있다.[62] 이는 야마시타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경계한 도조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결국 야마시타는 싱가포르 공략이라는 큰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군기를 이유로 도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다음 임무지인 만주국으로 직행하게 되었다.[62] 1942년 7월 17일, 야마시타는 싱가포르에서 멀리 떨어진 만주국으로 재배치되어 제1방면군 사령관 직을 맡게 되었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선에서 사실상 배제된 좌천성 인사였다.[14]
이러한 좌천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당시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었던 도조 히데키가 야마시타의 좌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14] 도조는 1942년 초 싱가포르 민간 지도자들에게 한 연설에서 야마시타가 현지 주민들을 "대일본제국의 시민"이라고 언급한 실언을 문제 삼았다. 이는 점령지 주민들에게 일본 시민의 권리나 특권을 공식적으로 부여하지 않았던 일본 정부의 방침과 어긋나는 발언이었기 때문이다.[14][62] 또한, 야마시타의 상관이었던 남방군 총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 원수가 야마시타의 높아진 평판과 싱가포르 내에서의 영향력을 질투하고 경계하여 도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설도 있다.[62]
만주로 부임한 야마시타는 1943년 2월에 대장으로 진급했다.[14] 일각에서는 그가 만주로 보내진 이유가 독일에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될 경우 소련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14]
2. 3. 필리핀 방어전
싱가포르 공략에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도조 히데키 총리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 만주로 좌천되어 한동안 주요 작전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1944년, 도조 내각이 무너진 후 새로운 일본 정부에 의해 제14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필리핀 방어전을 지휘하게 되었다.[134] 1944년 9월 26일, 야마시타는 중국에서의 사실상 유배 상태에서 벗어나 10월 10일부로 필리핀 방어를 책임지는 제14방면군 사령관직을 맡았다. 공교롭게도 미국군은 그로부터 열흘 뒤 레이테 섬에 상륙하며 필리핀 탈환전을 개시했다.1945년 1월 6일,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약 20만 명 규모의 미국 제6군 병력이 루손 섬의 링가옌 만에 상륙했다. 이에 맞서 야마시타는 약 26만 2천 명의 병력을 세 개의 방어 그룹으로 나누어 지휘했다. 가장 큰 부대인 '쇼부'(尚武) 그룹은 야마시타 직할의 15만 2천 명 병력으로 루손 북부를 방어했다. '켄부'(建武) 그룹은 츠카다 리키치 중장이 지휘하는 3만 명의 병력으로 바탄 반도와 서부 해안을 맡았다. 마지막으로 '심부'(振武) 그룹은 요코야마 시즈오 중장이 지휘하는 8만 명의 병력으로 마닐라와 루손 남부를 방어하도록 했다. 야마시타는 병력 재편을 시도했지만, 미군의 압박으로 인해 결국 마닐라를 포기하고 시에라 마드레 산맥과 코르디예라 센트랄 산맥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전 보장 임무를 맡은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력에게 마닐라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야마시타는 1941년 12월 마닐라를 점령하기 전 맥아더가 했던 것과는 달리, 마닐라를 개방 도시로 선언하지 않았다. 개방 도시 선언은 도시를 전투로부터 보호하고 민간인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였으나, 야마시타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15] 비록 야마시타는 대부분의 육군 병력을 북쪽으로 철수시켰지만, 그의 결정은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일본 제국 해군 소속의 이와부치 산지 소장은 1만 6천 명의 해군 병력과 3,750명의 육군 병력을 이끌고 마닐라에 남아 항만 시설 파괴 임무를 수행하려 했다. 이와부치는 철수하라는 야마시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마닐라 시가전을 강행했다.[16] 이로 인해 1945년 2월 4일부터 3월 3일까지 벌어진 마닐라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의 잔혹 행위와 격렬한 시가전으로 인해 10만 명이 넘는 필리핀 민간인이 학살당하는 마닐라 학살이 발생했다. 이는 야마시타가 마닐라를 개방 도시로 선언하지 않은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야마시타는 일본의 항복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이후에도 루손섬 북부 산악 지대인 키안간(이푸가오 주)에서 저항을 계속하며 지연 전술을 펼쳤다. 결국 1945년 9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일본이 공식 항복한 날, 야마시타는 미 육군 로버트 S. 베이글러 소장에게 항복했다.[17] 항복 당시 그의 휘하 병력은 계속된 전투와 보급 부족, 그리고 미군 및 필리핀 게릴라의 공격으로 인해 5만 명 미만으로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레이테섬과 루손섬에서의 연이은 패전 끝에 야마시타의 필리핀 방어전은 막을 내렸다.[134]
3. 군사 재판
1945년 9월, 필리핀의 바기오에서 항복한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처음에는 포로로 취급받았으나, 곧 전범으로 분류되어 마닐라에서 미국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134]
1945년 10월 29일부터 12월 7일까지 진행된 재판에서 야마시타는 싱가포르 점령 당시의 숙칭 대학살과 필리핀 전역에서의 마닐라 대학살 등 부하들이 저지른 수많은 전쟁 범죄에 대한 지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았다.[18] 비록 이 사건들이 각각 쓰지 마사노부, 이와부치 산지 등 부하 지휘관들의 독단적인 명령이나 지휘 계통을 벗어난 행위로 발생했다는 주장도 있었으나[21], 재판부는 총사령관으로서 부하들의 잔혹 행위를 막지 못한 책임을 물었다. 이는 부하의 범죄 행위에 대한 상급자의 책임을 묻는 중요한 법적 선례인 야마시타 기준을 남기게 되었다.[19][20]
야마시타 측 변호인단은 판결에 불복하여 필리핀 최고 재판소와 미 연방 최고 재판소에 항소했으나 모두 기각되었고[24], 결국 1946년 2월 23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는 군복을 입고 총살형을 받기를 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죄수복 차림으로 형이 집행되었다. 처형된 이후, 그는 다른 B, C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3. 1. 재판 과정
1945년 9월, 필리핀의 바기오에서 항복한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처음에는 포로로 취급받았으나, 곧 전범으로 분류되어 필리핀 마닐라에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134]1945년 10월 29일부터 12월 7일까지 마닐라에서 열린 미국 군사 재판소는 야마시타에게 마닐라 대학살을 비롯하여 필리핀 민간인과 전쟁 포로에 대한 수많은 잔혹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범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팔라완 학살(미국 전쟁 포로 139명 대상), 게릴라, 군인, 민간인에 대한 즉결 처형(필리핀 육군 장군 빈센테 림 포함), 바탕가스주에서의 민간인 25,000명 학살 등 수많은 잔혹 행위가 야마시타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특히 헌병대가 저지른 전쟁 포로와 민간 억류자에 대한 잔혹 행위와 관련하여, 야마시타가 부하의 즉결 처형 요청을 재판 없이 승인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8] 이 재판은 부하의 범죄 행위에 대한 지휘 책임을 어디까지 물을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선례를 남겼으며, 이는 야마시타 기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9][20]
야마시타의 변호인단은 항복 이전 필리핀 전역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통신 두절, 일본군 지휘 체계의 문제로 인해 야마시타가 부하들의 잔혹 행위를 알았더라도 통제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마닐라 대학살 등 많은 잔혹 행위가 야마시타의 직접적인 지휘 밖에 있던 일본 해군 부대(이와부치 산지 소장 지휘)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검찰 측은 야마시타의 직접적인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들을 제시하며 반박했으나, 일부 증언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전언 증거에 해당하거나 반박되기도 했다. 다만, 야마시타가 의심되는 게릴라에 대한 재판 절차를 생략하고 즉결 처형을 명령하거나 동의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도 제시되었다.[21]
미국 육군 대령 해리 E. 클라크 시니어가 이끈 변호인단은 "피고인은 어떤 행위나 부작위가 아닌, 단지 지휘관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 기소되었다"며, "어떤 미국 군인이 법을 위반할 때마다 점령군 지휘관이 범죄자가 된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하며 지휘 책임 원칙의 적용에 문제를 제기했다.[22] 야마시타 본인 역시 재판 과정에서 부하들의 범죄를 알지 못했으며, 알았다면 엄벌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 규모가 너무 커서 모든 병사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자신이 실제로는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것이라고 항변했다.[23]

그러나 법원은 야마시타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언도했다. 변호인단은 판결에 불복하여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항소했으나 기각되었고, 이후 필리핀 대법원과 미국 대법원에 사형 집행 금지를 위한 인신보호령을 청원했다. 하지만 미국 대법원은 6 대 2로 청원을 기각했으며,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역시 사면 요청을 거부했다.[24]
미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프랭크 머피 대법관과 W.B. 럿지 대법관은 반대 의견을 통해 재판 절차의 문제점(성급한 진행, 전언 증거 채택, 검찰의 전문성 부족 등)을 지적하며 재판의 공정성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럿지 대법관은 "야마시타 장군의 운명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이 걸려 있다... 법에 따라 정의를 집행해야 한다"며 적법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5][26] 야마시타가 필리핀의 모든 군사 부대에 대한 완전한 지휘권을 가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법정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27] 전직 전범 검사였던 앨런 A. 라이언은 훗날 맥아더 장군과 군사위원회, 미국 대법원의 결정으로 야마시타가 자신의 승인이나 인지 없이 부하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처형되었다고 주장하며, 대법원 소수 의견을 인용해 이 재판을 "정의의 오판이자 복수의 행사, 인권의 부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28]
야마시타는 군복을 입고 총살형을 당하길 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죄수복을 입은 채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유해는 다른 B, C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3. 2. 야마시타 기준
1945년 10월 29일부터 12월 7일까지, 마닐라에서 열린 미국 군사 재판소는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을 마닐라 대학살과 필리핀에서 민간인 및 전쟁 포로를 대상으로 한 수많은 잔혹 행위에 대한 전범 혐의로 재판했으며, 사형을 선고했다. 야마시타는 팔라완 학살(139명의 미국 전쟁 포로 대상), 게릴라, 군인, 민간인에 대한 즉결 처형(필리핀 육군 장군 빈센테 림 포함), 바탕가스주에서의 25,000명 민간인 학살 등 필리핀 민간인과 연합군 전쟁 포로에 대한 고문과 살해를 조직적으로 계획했다는 혐의를 받았다.[18] 또한, 그는 일본 육군의 비밀 군사 경찰인 헌병대를 완전히 지휘했으며, 헌병대는 전쟁 포로와 민간 억류자에게 수많은 전범 행위를 저질렀다. 헌병대 부하가 정식 재판 없이 처형을 요청했을 때, 야마시타는 포로 수가 너무 많아 재판을 제대로 진행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단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8]
이 재판은 전범에 대한 지휘 책임과 관련하여 중요한 선례를 남겼는데, 이는 야마시타 기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9][20] 야마시타에 대한 주요 혐의는 필리핀 주둔 일본군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변호 측은 잔혹 행위 자체는 인정했지만, 제2차 필리핀 전역의 혼란 속 통신 두절과 일본의 지휘 체계 문제로 야마시타가 이를 알았더라도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많은 잔혹 행위가 그의 지휘 밖에 있던 일본 해군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항변했다. 반면 검찰은 야마시타의 명령이 있었다는 증언(일부는 전언 증거)을 제시하며 반박했다. 예를 들어, 야마시타가 아르테미오 리카르테 장군에게 "필리핀 전체를 쓸어버리라... 섬의 모든 사람은 게릴라거나 게릴라의 적극적인 지지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이를 통역했다는 리카르테의 손자는 해당 발언을 통역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야마시타가 의심되는 게릴라에 대한 재판을 포기하고, 간단한 조사 후 군사 재판소 장교가 직접 처벌하도록 명령하거나 동의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도 제시되었다.[21]
당시 미국 육군 대령이었던 미국 변호사 해리 E. 클라크 시니어는 변호 측의 수석 변호인으로 활동했다. 클라크는 모두 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피고인은 무언가를 했거나, 무언가를 하지 못했다는 혐의가 아니라, 단지 어떤 존재였다는 혐의만을 받고 있습니다...미국 사법은 자국 군에 관해서는 그러한 원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어떤 미국 군인이 법을 위반할 때마다 점령군 지휘관이 범죄자가 된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범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22]"
야마시타는 부하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만약 알았더라면 그들을 엄하게 처벌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군대가 너무 커서 모든 부하들의 모든 행동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실제로 전쟁에서 졌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제 지휘는 맥아더나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의 지휘와 맞먹었습니다. 어떻게 제 병사들 중 일부가 부적절한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있었겠습니까? 제 위치에 있는 어떤 사람도 부하 지휘관의 모든 행동, 하물며 개별 병사들의 행동까지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혐의는 저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고 제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저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엄하게 처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누군가는 져야 합니다. 제가 실제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은 전쟁에서 졌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맥아더 장군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23]"

법원은 야마시타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클라크는 맥아더 장군에게 항소했고, 그는 이를 지지했다. 그 후 그는 필리핀 대법원과 미국 대법원에 항소했지만, 두 곳 모두 판결을 검토하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야마시타의 사면 청원을 거부하고 판결을 유지했다.[24]
미국 대법원 다수의견에 반대하는 의견으로, W.B. 럿지 대법관은 다음과 같이 썼다.
>"야마시타 장군의 운명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이 걸려 있습니다. 그가 사형을 요구하는 잔혹 행위에 대해 유죄라면 그에게 동정심을 가질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에 따라 정의를 집행할 수 있고, 또 집행해야 합니다. ... 국가가 대법원과 같은 위대한 헌법적 전통을 확고히 따르는 것은 너무 이르지도, 결코 이르지 않습니다. 이는 인간, 즉 시민, 외국인, 외국인 적 또는 적대적인 교전자의 재판과 처벌에서 법의 적절한 절차보다 무제한적인 권력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없습니다.[25]"
서두른 재판의 적법성은 당시, 프랭크 머피 대법관을 포함하여, 다양한 절차적 문제, 전언 증거의 포함, 그리고 검찰관의 일반적인 전문성 부족을 비판하면서 의문을 제기했다.[26] 야마시타가 필리핀의 모든 군사 부대에 대한 궁극적인 지휘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증거는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았다.[27]
전직 전범 검사 앨런 A. 라이언은 맥아더 장군과 다른 5명의 장군, 그리고 미국 대법원의 명령에 의해 야마시타가 그의 승인이나 심지어 사전 지식 없이 그의 병사들이 한 일에 대해 처형되었다고 주장했다. 대법원 소수 의견을 낸 두 대법관은 전체 재판을 정의의 오판, 복수의 행사, 인권의 부인이라고 불렀다.[28]
미국 연방 대법원의 1946년 야마시타 판결은 지휘 책임 또는 야마시타 기준이라고 불리는 선례를 확립했는데, 이는 지휘관이 자신의 부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명령하지 않았거나, 이를 묵인하지 않았거나, 심지어 알지 못했거나 막을 수단이 없었더라도 법에 따라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휘 책임 교리는 제네바 협약에 추가되었으며,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에서 열린 수십 건의 재판에 적용되었다. 이는 2002년에 설립된 국제 형사 재판소에 의해 채택되었다.[28]
야마시타는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가 원하던 군복 착용은 허용되지 않고 죄수복을 입은 채 형이 집행되었다. 처형된 이후, 그는 다른 B, C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4. 처형
마닐라 군사 재판에서 숙칭 대학살과 마닐라 대학살 등의 책임을 물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들은 부하들이 야마시타의 지시 없이 독단적으로 저질렀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88], 재판부는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했다.
사형 판결 후 미국 육군 법무 장교 중심의 변호인단은 필리핀 최고 재판소와 미 연방 최고 재판소에 사형 집행 금지를 청원했으나, 미국 최고 재판소는 6 대 2로 이를 기각했다. 야마시타는 군복을 입고 총살형으로 처형되기를 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교수형으로 결정되었다. 군복 착용마저 거부당한 채 죄수복을 입고 형이 집행되었다.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사면을 요청했으나, 트루먼은 개입을 거부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며, 맥아더는 사형 판결을 최종 확정했다.[29]
1946년 2월 23일, 야마시타는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약 48.28km 떨어진 로스 바뇨스 수용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30] 처형 당일 오전 5시경 잠에서 깬 야마시타는 미군 작업복 차림으로[102] 일본인 교화사의 말을 듣고 묵념한 뒤 담담하게 처형 절차를 따랐다. 교수대로 향하는 13계단을 오르기 전 맥주 한 잔을 청해 마셨고, "아이들은 일본식으로 키우도록 가족에게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할 말을 묻자, 그는 통역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닐라 대법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제 모든 능력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제가 한 일에 대해 신 앞에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들이 저에게 '당신은 일본군을 지휘할 능력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전범 재판은 당신들의 자비와 정의 아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미국인과 미국 군사 당국이 항상 관대하고 정당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마닐라 법원에서 조사를 받을 때, 저를 항상 보호해준 당신들의 선량한 장교들로부터 좋은 대우와 친절한 태도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위해 해준 일들을, 설령 제가 죽더라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제 사형 집행인을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그들을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클라크 대령, 펠드하우스 중령, 헨드릭스 중령, 가이 소령, 샌드버그 대위, 릴 대위, 마닐라 법원의 아르나드 대령에게 제 감사의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31]
다른 기록에 따르면, 마지막 유언은 "천황 폐하의 만수무강과 영원한 번영을 기원합니다"였다고도 한다. 야마시타는 자신을 변호해 준 미군 변호단에게 감사의 표시로 기념품과 소지품을 증정했다.
오전 3시 2분경, 야마시타는 도쿄를 향해 깊이 절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60세였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로스 바뇨스 수용소 근처 일본인 묘지에 묻혔다가, 이후 도쿄도 후추시의 다마 묘지로 이장되었다.
처형 며칠 후, 필리핀 제1 캠프 게시판에는 야마시타의 처형 장면을 담은 11장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형장의 전경
- 야마시타가 환자 수송차에서 하차하는 장면 (죄수복 차림)
- 계단 앞의 야마시타
- 13계단 중간의 야마시타
- 13계단의 제일 위의 야마시타
- 야마시타의 목에 밧줄이 걸린 상황
- 발판이 빠져나가 매달리는 모습
- 하반신이 검은 봉투에 싸여지는 모습
- 완전히 봉투에 넣고, 유해를 운반하는 모습
- 유해를 들것에 싣는 모습
- 들것 앞에서 일본인 승려가 독경하는 모습
1948년 12월 23일, 야마시타의 필리핀 참모장이었던 무토 아키라 역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32]
1959년, 야마시타는 처형된 다른 B, C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이는 일본 군국주의 미화 논란을 지속적으로 일으키고 있다. 1970년에는 처형 장소에 위령비가 세워졌으며, 현재는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다. 2016년 1월, 당시 천황과 황후가 필리핀 라구나주를 방문하여 전몰자 위령 행사를 가졌다.[103]
야마시타가 남긴 사세(辞世)는 다음과 같다.
잠시만 기다리게, 훈장을 남기고 간 벗이여, 뒤따라 하고 싶으니 나도 가겠노라.
차고 기울며 맑음과 흐림으로 변하더라도 영원히 맑고 깨끗하게 빛나는 저 하늘의 달(아내에게 보낸 글)
5. 유산
1946년 2월 22일 처형 직전, 야마시타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지휘 하에 있던 병사들의 죽음에 깊은 후회를 표하며, 일본 국민들에게 국가 재건과 희망찬 미래 설계를 촉구했다. 그는 강한 책임감과 도덕적 판단력 함양, 과학 교육 장려, 그리고 교육자로서 여성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며 일본 재건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제시했다.
야마시타는 모리타 쇼가쿠에게 남긴 유언에서 전쟁 중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책감과 함께 자유 존중 및 평화 추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일본에 대한 이상을 피력했다. 그는 "신일본 건설에는, 우리와 같은 과거의 유물에 지나지 않는 직업 군인 혹은 아첨하고 추종하는 무절조한 정치가, 침략 전쟁에 합리적인 기초를 부여하려 했던 어용 학자 등을 결코 참가시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며, 프로이센-덴마크 전쟁 후 덴마크가 군사력 대신 문화 국가 건설에 힘쓴 사례를 들며 일본 재건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특히 다음 네 가지 요소를 강조했다.
- 윤리적 판단에 기초한 개인의 의무 이행: 야마시타는 윤리관 부족이 일본이 국제적 신뢰를 잃은 근본 원인이라 지적하며, 자유 사회 속에서 개인이 도덕적 판단력을 길러 스스로 의무를 다하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책임감 있는 자세가 세계 평화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 과학 교육의 진흥: 그는 뛰어난 과학 기술이 전쟁에서 중요했음을 인정하면서도, 핵전쟁의 위험성을 경계하며 파괴가 아닌 평화적 목적, 즉 자원 개발과 인류 복지 향상을 위한 과학 발전을 강조했다.
- 여성의 교육: 일본 여성이 새로운 자유와 지위를 존중하고, 세계 여성들과 연대하여 평화의 대변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순종과 정절이라는 덕목에서 벗어나, 높은 교양을 갖추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새로운 일본 여성이 될 것을 촉구했다.
- 차세대 교육에 대한 어머니의 책임: 교육은 학교 입학 전, 수유 시기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어머니는 단순한 양육을 넘어 아이가 평화를 사랑하고 협조하며 인류에 기여하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깊은 애정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1959년(쇼와 34년), 야마시타는 처형된 다른 BC급 전범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1970년(쇼와 45년)에는 그가 처형된 필리핀 로스바뇨스 교외의 망고 숲에 사세를 새긴 위령비("장군 야마시타 도모유키 종언의 땅" 비)가 세워졌다. 이 비는 후에 채널 사쿠라 등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의 묘는 도쿄도 후추시의 다마 영원에 있으며, 사이타마현 사이타마시 니시구의 아오바엔에는 그를 모신 "아오바 신사"와 전쟁 기념관이 있다. 2016년 1월 29일, 필리핀을 방문한 당시 천황 아키히토와 황후 미치코 (현 상황·상황후)는 라구나주 로스바뇨스를 찾아 전몰자 위령을 했다.[103]
한편, 필리핀에는 야마시타가 종전 시 막대한 양의 군자금을 비밀리에 숨겼다는 이른바 '야마시타 골드' 전설이 남아 있으며, 이는 종종 보물 탐사 이야기나 M 자금과 같은 사기 사건의 소재가 되고 있다.
또한,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것으로 추정되는 군도(소좌 이상 육군 장교용 양식[111])가 고치현 호국 신사에 보관되어 있다.[111] 신사 측 자료에는 1955년경 "고제신 육군 대장 야마시타 도모유키 사용품"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자세한 정보가 부족하여 정보 제공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다.[111]
야마시타 유언의 전문은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추억: 30주년 기념에 즈음하여'(야마시타 구조, 1976.2) 등에 실려 있으며, 관련 링크는 다음과 같다. (야마시타 유언 전문 1, 야마시타 유언 전문 2 (아카이브))
6. 서훈
(패용 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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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용 허가)
(패용 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