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6독립보병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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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766독립보병연대는 1949년 4월 북한의 남침 계획에 따라 특수부대 양성을 위해 창설된 부대이다. 3,000명 규모의 정규 연대로 확대되어 조선인민군 육군 본부 직속으로 편제되었으며, 오진우가 연대장을 맡았다. 한국 전쟁 발발 직전 부산항 전투에서 병력 손실을 입고, 전쟁 초기 동해안을 따라 남진하며 대한민국 국군과 교전했으나, 1950년 8월 병력 감소로 인해 제12사단에 통합,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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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6독립보병연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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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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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제766독립보병련대 |
다른 이름 | 766부대 |
종류 | 경보병 |
역할 | 수륙양용작전 코만도 근접전투 직접 행동 전방 관측병 비정규전 산악전 기습 정찰 비정통적 전쟁 도시전 |
창설일 | 1949년 4월 |
해체일 | 1950년 8월 19일 |
소속 | [[파일:Flag of the Korean People's Army Ground Force (1993-2023).svg|20px]] 조선인민군 |
군종 | [[파일:Flag of the Korean People's Army Ground Force (1993-2023).svg|20px]] 조선인민군 육군 |
규모 | 연대 |
주둔지 | 회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오진우 대좌 |
2. 조직
제766독립보병연대는 창설 당시 다양한 규모의 소규모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단독 작전 수행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94][2] 이후 6개 대대, 3,000명 규모의 정규 연대로 확대되어 조선인민군 육군 본부 직속으로 편제되었다.[95][3] 오진우 상좌(이후 인민군 총참모장, 정치국 상무위원 역임)가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부대 해산 시까지 지휘했다.[96][22][69]
한국 전쟁 발발 직전, 부산항 전투에서 제3대대 병력 500여 명이 대한민국 해군과의 교전 중 수송선 침몰로 전사했다.[97][98][9][12][56][59] 이 손실로 인해 제3대대는 재편성되지 못했고,[92] 연대 전체 병력은 1,500명 이하로 감소하여 3개 대대 이상을 편성할 수 없게 되었다.[99][46]
3. 역사
3. 1. 창설 배경
한국 전쟁 발발 이전, 북한 지도부는 남침 계획의 일환으로 특공대와 특수부대를 창설하였다. 이 부대들은 전쟁 전이나 전쟁 중에 대한민국 군 부대에 대한 공격, 테러 작전, 파괴 공작, 그리고 반란을 유도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100][1][48] 제766독립보병연대(이하 제766연대)는 1949년 4월 함경북도 회령시에 위치한 제3군관학교에서 창설되었다.[94][2][49] 이 학교는 코만도 양성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곳으로, 제766연대는 경보병 특공대를 감독하기 위한 부대였다.[94][2]
창설 초기, 제766연대는 비정규전 및 수륙 양용 작전에 대한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100][1][48] 이 기간 동안 부대는 6개 대대, 3,000명 규모로 확대되었다.[95][3][50] 1950년 6월 전쟁이 시작되기 전, 제766연대는 훈련을 마치고 양양에서 전선으로 이동하여 조선인민군 제5사단을 지원하였다.[101][4][51] 당시 북한의 계획은 제766연대가 제549부대와 함께 정동진과 임원진 동부 해안에 수륙양용 상륙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102][5] 이 수륙양용 작전은 대한민국 육군의 후방 지역으로 가 조선인민군 제2군단이 북쪽에서 실행하는 정면 공격을 지원하는 형태였다.[102][52]
제766연대는 공격을 위해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3개 대대는 육지에서 제5사단의 선두지휘를 하였고, 2개 대대는 임원진 상륙을 지휘하였다.[106][10][57] 2,500여 명 규모의 이 그룹은 다시 집결해 북한 부대를 남쪽으로 이끌었다.[97][9][56] 그 사이에 3대 대대는 북한에 있는 766부대와 분리되어 부산으로 침투하는 임무를 위해 남쪽으로 파견됐다. 추가 지원으로 병력을 합쳐 600명 규모의 588부대를 창설하였고,[107][17][64] 이 588부대는 부산항을 급습하여 유엔군이 부산항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중요 시설을 파괴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108][11][58] 그러나 588부대를 실은 병력 수송선이 25일 오전 부산항 외곽에서 유엔 함정에 의해 발각되었고 침몰되면서 3대 대대가 파괴됐다.[98][12][59]
3. 2. 한국 전쟁 초기 활동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조선인민군 제5사단은 대한민국 국군 제10연대의 전방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109] 3시간 후, 제766부대의 2개 대대는 모터보트와 돛단배를 이용해 임원진리에 상륙하여 병력을 상륙시키고 남한 주민을 소집하여 보급물자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후 두 대대는 갈라지면서 한 대대는 태백산맥으로, 나머지 대대는 삼척시 쪽으로 북진하였다.[110] 이때 전방에서 집중 공격을 받고 후방의 공격을 의식한 한국의 제8사단은 긴급히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상급 지휘관들은 한국군이 38선 전체에 걸쳐 집중 공격을 받고 있으며, 예비 증원이 없다고 사단장에게 알렸기 때문에 거부됐다.[110]
8사단의 최남단 연대였던 제21연대가 수륙양용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21연대의 1대 대대는 북평에서 옥계 지역으로 이동하여 현지 경찰과 민병대와 연계해 766부대의 전방에 매복하였고, 북진을 막아내었다.[111] 하지만 766부대의 대대 중 최소 한 대대 이상이 밤재에 집결하여 8사단의 주요 보급로 중 하나를 차단하였다.[112] 한국군은 북한군과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해 민간 민병대를 소집하였지만, 그렇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107] 궁지에 몰리게 된 8사단은 7월 27일 압도적인 공격과 통신 장애로 인해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113] 이때 한국 제6사단의 퇴각으로 한국 동쪽의 전체가 북쪽에 넘어가게 되었다.[113] 766부대는 초기 공격에서 교두보의 구축과 교신을 교란하는 것을 성공하였다.[114]
3. 3. 동해안 진격 및 저항
한국군이 퇴각하는 가운데 제766부대와 제549부대, 제5사단은 큰 저항 없이 동해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했다.[115][116][68][72] 모든 전선에서 북한군은 한국군을 격파하고 남쪽으로 밀어냈다.[109][13][60] 제766부대는 한국 동부의 험준한 산악 지대를 통과하며 내륙 깊숙이 침투, 대구와 부산 사이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일월산, 영양, 청송으로 이동했다.[117][20][96]
제3보병사단은 울진에 제23연대를 투입하여 북한군 3개 부대를 저지하려 했다. 한국군은 일련의 지연작전을 펼쳤고, 북한군은 산악지대에 분산되어 힘을 쓰지 못했다. 한국군은 7월 15일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했다.[119][23][70] 7월 10일 제766부대는 제5사단에서 분리되어 울진에서 북한 민간인 선발대를 만났고, 7월 13일 영덕 북쪽 40km 지점인 평해리에 도착했다.[118][96][24][71][72]
이후 제766부대와 제5사단은 증가하는 한국군 병력과 유엔의 항공 지원으로 진격 속도가 늦춰졌다. 7월 24일까지 청송-안동 지역에서 진격하여 포항으로 접근했으며, 측면에는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이 있었다.[120][26][73] UN의 공중 및 해군 폭격으로 북한군의 보급이 어려워지자, 한국 민간인을 징집하여 물자를 운반하게 하였다.[121][27][74]
7월 17일, 제5사단은 큰 저항 없이 영덕에 진입하여 한국군 제3사단을 포위했다. 제5사단과 766부대는 7,500여 명으로 제3사단의 6,469명을 상대했다.[122][123][28][38][75][84] 제766부대는 제3사단을 포위하는 제5사단을 지원했다.[124][29][76] 제3사단은 북한군을 최대한 지연시킨 뒤 해상으로 철수했다.[125][30][77]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북한군의 포위망은 허술했다.[126][31][78]
7월 28일, 제766부대는 진보로 이동했으나, 미 해군 함포 사격과 한국 경찰, 민병대의 저항으로 철수했다.[127][31][32][78][79] 수도 사단은 제766부대의 추가 침투를 막았고,[128][33][80] 한국군과 경찰은 제766부대를 상대로 반격 작전을 시작했다.[129][130][34][35][81]
8월 5일, 북한군 12사단은 기계 지역에서 수도사단을 격퇴하고 보현산 지역에 침투한 766부대와 연결, 포항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131][36][82] 제766부대는 제5사단과 협력하여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선인민군은 동시 공세를 계획했고, 제766부대와 제5사단은 포위를 통해 UN군을 부산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맡았다.[124][132][29][76][37][83] 북한 지휘부는 제766부대가 UN군에게 최대한 보이지 않게 움직이도록 계획했다.[123][38][84]
그러나 북한 물류는 한계에 다다랐고, 8월 초 북한 부대는 노획한 UN 무기에 의존하며 자체적으로 장비를 갖추었다.[133][134][135][42][88][39][85][86][40]
3. 4. 부산 교두보 전투와 해체
8월 5일, 조선인민군 제766독립보병연대는 제12사단과 함께 포항 공격을 준비했다. 제766연대는 제5사단과 협력하여 유엔군을 포위하고 부산으로 밀어내는 측면 공격을 맡았다.[124][132] 그러나 북한군의 물류 보급은 한계에 다다랐고, 제766연대는 한 달 이상의 진격으로 지쳐 있었다.[133][134] 이들은 유엔군의 보급선을 습격하고 소규모 파괴 공격을 통해 자체적으로 장비를 갖추었다.[135]
8월 11일 새벽, 제766연대 소속 300명 규모의[136] 1개 대대가 포항에 진입했으나,[133] 유엔군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포항은 산을 거쳐 경상북도 평야로 들어가는 몇 안 되는 노선 중 한 곳이었고, 유엔군이 대구에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육로와 항로가 이어져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138] 포항 함락 소식을 들은 미 제8군 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즉시 해공 폭격 명령을 내렸다.[137] 또한 북한군의 추가 진격을 막기 위해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에 마을 주변 지역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137]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연대의 전진부대를 후퇴시키도록 하는 포격이 마을에 발포되었다.[136] 제766연대가 모이면서 마을 주변 야산에서 전투가 벌어졌고,[133] 제5사단과 합류하면서 밤이 되어서야 포항에 들어가게 되었다.[136]
이후, 압도적인 병력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국군의 대규모 병력인 태스크포스 포항이 투입되어 제766연대 및 제5사단과 교전했다.[139] 대한민국 국군은 동쪽으로 안강리 쪽으로 공격해 북한군 제12사단을 전면 후퇴시켰다. 8월 17일, 포위 위협에 시달린 제766연대와 제5사단은 전면 후퇴 명령을 받았다.[99] 이때 제766연대는 원래 인원의 절반인 1,5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99]
결국 제766연대는 남은 병력이 제12사단에 통합되면서 1950년 8월 19일 해체되었다.[99][140]
4. 평가 및 비판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5. 관련 인물
6. 같이 보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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