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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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중앙일보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여운형이 사장으로 취임하며 중앙일보에서 제호를 변경하여 창간된 일간지이다. 1924년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를 모태로 하며, 이후 중외일보를 거쳐 조선중앙일보로 이름을 변경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함께 자진 휴간에 들어갔고, 1937년 경영난으로 폐간되었다.
3·1 운동 후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신문, 잡지 발행을 허용했다. 1922년 9월 3일 최남선과 진학문이 시사잡지 동명을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받아 창간하였다. 타블로이드판 20페이지의 주간잡지로, 사장은 최남선, 편집 겸 발행인은 진학문이었다. 1923년 6월 3일 시사잡지 동명이 통권 41호를 발간하고 중단되었으며, 1923년 7월 17일 일간지 발행허가를 받았다. 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이 일간지 '''시대일보'''를 창간했으나, 1926년 8월 중순 경영난으로 휴간하였다.
[1]
뉴스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9-01-12
2. 역사
2. 1. 시대일보 (1924년)
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의 주도로 '시대일보'가 창간되었다. 사장 최남선, 전무이사는 서상호(徐相灝), 편집국장은 진학문, 정치부장은 안재홍(安在鴻), 사회부장은 염상섭(廉想燮) 등이었다.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했고, 크기는 대형판 4면으로 1행은 14자, 1단은 124행, 1면은 12단으로 꾸몄다.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첫 번째 사명으로 삼았고, 당시 발행되던 신문들과는 달리 1면에 정치기사가 아닌 사회기사를 실었다는점이 특징이다. 또 1면 머리에 '오늘 일 내일 일'이라는 시평 칼럼을 두고 논설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엉석바지'라는 미국 만화를 특약, 6단폭의 6컷으로 연재했다. 초기의 발행부수가 2만 부에 이르러 당시 〈조선일보〉·〈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창간 2년 이후 재정상황이 어려워지자, 1926년 9월 18일 이상협이 〈시대일보〉의 판권을 넘겨받아 〈중외일보 (中外日報)〉라는 이름으로 새 신문을 창간했다.
2. 2. 중외일보
1926년 1월 1일에 시대일보의 판권을 인수한 이상협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시대일보에서 중외일보로 제호를 고쳐 창간하였다. 중외일보는 1920년대 후반 언론계의 유력한 신문이었다.
2. 3. 중앙일보
2. 4. 조선중앙일보
1933년 2월 16일 여운형이 중앙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1933년 3월 7일부터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쳤다.[1] 이 무렵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함께 '''조선의 3대 일간지'''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사옥을 증축하고 소속 잡지로 《중앙》, 어린이 잡지 《소년중앙》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1937년 11월, 신문사는 결국 폐간되었는데, 몽양 여운형 기념사업회, 한겨레, 민족문제연구소 등 진보 성향 단체에서는 일장기 말소사건은 조선중앙일보가 원조이며,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에 선처를 구하며 복간을 했지만, 조선중앙일보는 조선 총독부의 친일 성향 사장 제안을 거부하고 폐간을 선택해 민족정신은 조선중앙일보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36년 8월 13일자 동아일보의 지방판 기사가 발굴되면서 조선중앙일보의 원조설은 논파되었다.[1]
채백 부산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을 통해 조선중앙일보가 가장 먼저 손기정의 우승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널리 알려졌지만 동아일보도 조선중앙일보와 같은 날 이 사진을 보도했다고 말한다. "8월13일자 동아일보 조간 지방판에 조선중앙일보(서울판)가 게재한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실었는데 서울판이 당일 새벽에 인쇄하던 반면 지방판 조간은 그 전날 인쇄하던 관행에 비춰, 손기정의 우승 사진은 동아일보가 먼저였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1]
조선총독부 극비문서, 삼천리 1938년 1월1일 신년호에서는 조선중앙일보의 폐간관련 실상에 대해 기록하고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1]
이길용 기자가 작성한 회고가 발굴이 되기도 했는데, 회고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2]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의 송진우 사장, 김준연 주필, 설의식 편집국장 등이 사임하였다. 그리고 사회부의 현진건 부장과 이길용, 장용서, 조사부의 이상범 화백, 사진부의 신낙균, 백운선, 서영호 그리고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월간 신동아에 전재한 책임으로 최승만 잡지부장 등 8명의 사원이 구속되어 40여 일의 고초를 겪은 끝에 ①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 하지 않을 것 ② 시말서를 쓸 것 ③ 다른 사건이 있을 때에는 가중 처벌을 각오할 것 등의 서약서에 서명하고 풀려났다.[1]
3. 관련된 연혁
1926년 9월 19일 이상협이 '''중외일보'''라는 제호로 새 신문의 발행허가를 받았다. 1931년 6월 19일 중외일보가 지령 제 1,492호로 종간하였다. 1931년 11월 27일 김찬성이 중앙일보의 이름으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발행허가를 받아 지령 제1,493호로 속간하였으며, 사장은 노정일, 편집국장은 강매였다.
1933년 2월 16일 여운형이 중앙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였고, 1933년 3월 7일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쳤다. 1936년 8월 13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의 일장기 사진을 지웠다. 8월 25일,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여운형은 자진 휴간에 들어갔다. 1937년 11월 5일 경영의 내부분열로 폐간되었다.
참조
[2]
뉴스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소사건’ 주역 이길용기자 회고록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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