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학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진학문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언론인, 기업인으로 활동했으며, 친일 행적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1907년 일본 유학 후 기자, 언론사 간부,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 등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한국무역진흥공사 부사장,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만주국 시절 재만 동포를 위한 활동을 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진학문
기본 정보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대한민국 대법원
한자 표기大法院
로마자 표기Daebeobwon
영어 명칭Supreme Court of Korea
위치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법원 정보
관할대한민국
설치 근거대한민국 헌법 제101조, 법원조직법
구성대법원장
대법관
재판연구관
사법연수원
법원공무원
대법원장조희대
주요 기능사법부의 최고 법원
하급 법원의 판결에 대한 상고심 재판
법률의 해석 및 적용에 관한 최종 판단
역사
설립1948년 9월 13일
이전1995년 6월 종로구에서 서초구로 이전
조직
구성대법원장
대법관 (13명)
재판연구관
기타 정보
웹사이트대법원 공식 웹사이트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기업인 - 서형원
    서형원은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거쳐 과천시의회 의원 및 의장을 역임하고 녹색당 풀뿌리정치지원단장으로 활동한 환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 대한민국의 기업인 - 문재인
  •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이원수 (작가)
    이원수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1926년 동시 〈고향의 봄〉으로 등단하여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고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아동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나, 친일 작품으로 논란이 있다.
  •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 송영 (극작가)
    송영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극작가로, 카프 계열 연극인으로 등단하여 노동 운동 풍자 작품을 발표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 월북하여 북조선연극동맹 위원장을 지냈으며, 김일성 항일 무장 투쟁을 형상화한 희곡으로 알려졌으나 한설야 숙청 시기에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것으로 보아 복권된 것으로 추정된다.

2. 생애

1907년 10대 초반에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 보통과(1908년), 와세다 대학(1913년), 도쿄 외국어학교(1916년) 등에서 수학했다. 최남선과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교류했다. 귀국 후 《경성일보》, 《아사히 신문》 경성지국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1920년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조선총독부와 자금주 김성수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동아일보에서 초대 정경부장, 학예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동아일보 퇴사 후 러시아 여행을 떠났으나, 도쿄,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에는 가지 않고 귀국했다. 이 여행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및 이시영 등 블라디보스토크의 독립 운동가들을 정탐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귀국 후 최남선과 주간지 《동명》을 창간, 주간을 맡았고 1924년 3월 31일부터 같은 해 6월까지 일간지 《시대일보》로 개편, 발행했다. 1925년 1월 호치신문사(報知新聞社) 경성지국 통신부장을 지냈고, 1927년부터 1928년 4월까지 브라질에 체류했다.

1930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 회원, 같은 해 12월 27일 경성상공협회 상무이사를 역임했다.

해방 후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2년 한국무역진흥공사 부사장, 1955년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 등을 역임했지만 일본에 계속 체류하였다.

1957년경 귀국, 동아일보에 칼럼을 기고하며 한국무역진흥회사 부사장(1952년),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1955년), 전경련 부회장(1963년) 등을 역임하며 재계에서 활동했다. 1960년대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 서울시 자문위원회 건설위원장, 이민공사 사장, 한일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81세로 사망하기 직전 자필 광고를 작성하여 부음과 함께 동아일보에 실었다.

2.1. 생애 초반

10대 초반이던 1907년부터 일본에 유학하여 게이오 의숙 보통과(1908년), 와세다 대학(1913년), 도쿄 외국어학교(1916년) 등에서 두루 수학했다. 최남선과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교류한 사이였다. 귀국 후 《경성일보》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었고, 《아사히 신문》 경성지국에서도 근무했다.

2.2. 귀국과 언론 활동

1920년동아일보》 창간 당시 조선총독부와 자금주 김성수 사이를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창간된 동아일보에서 초대 정경부장, 학예부장, 논설위원을 맡았다.

동아일보 창간 후 6개월 만에 퇴사하여 러시아를 목적지로 한 여행을 떠났는데, 도쿄와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러시아에는 가지 않고 돌아왔다. 이때의 여행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이시영 등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고 있던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정탐 목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귀국 후에는 최남선과 함께 주간지 《동명》을 창간해 주간을 맡았고, 1924년 3월 31일부터 같은 해 6월까지 일간지 《시대일보》로 개편, 발행하였다. 1925년 1월 일본 신문사 호치신문사(報知新聞社) 경성지국 통신부장을 역임했고, 1927년부터 1928년 4월까지 브라질에 체류하기도 했다.

1930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 회원을 역임했으며, 같은 해 12월 27일 경성상공협회 상무이사로 선임되었다.

2.3. 해방 이후

해방 후 그는 한동안 두문불출하다가 처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2년 한국무역진흥공사 부사장, 1955년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 등을 역임했지만 그는 계속 일본에 체류하였다.

2.4. 사망

1957년경에 완전히 귀국한 후, 동아일보에 칼럼을 기고하는 한편으로 기업 활동에 종사하여 한국무역진흥회사 부사장(1952년), 한국무역협회 일본지부장(1955년), 전경련 부회장(1963년) 등을 역임하며 재계의 대표급으로 활동했다. 1960년대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상임부회장, 서울시 자문위원회 건설위원장, 이민공사 사장, 한일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81세로 사망하기 직전 자필로 광고를 작성하여 부음과 동시에 올렸는데, 이 광고가 동아일보에 실린 일화가 유명하다.

3. 평가

진학문은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어 '친일언론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으로 재직하며 재만 동포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준 대변자였다는 상반된 평가도 존재한다. 언론인 김을한(金乙漢, 1905~1992)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3.1. 긍정적 평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진학문은 총독부 출입기자 시절 알게 된 총독부 고위 관리의 권유로 1936년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내무행정 책임자)이 되었다. 이 일로 '친일언론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100만 명에 이르는 재만(在滿) 동포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준 대변자이기도 했다.

언론인 김을한(金乙漢, 1905~1992)은 만주 시절 진학문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조선인이 개간한 황무지를 일인(日人)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주는 등 그는 그 시대 재만 동포들의 크나큰 희망이었고 마음의 지주였다." (김을한, 《인물론 – 진학문》, 신문평론 1976년 8월호)

3.2. 부정적 평가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총독부 출입기자 시절 알았던 총독부 고위 관리의 권유로 1936년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내무행정 책임자)이 되었고, 이 일로 '친일언론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