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온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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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온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경조승을 지내다 관직을 버리고 기근 때 곡식을 나눠준 일화가 있다. 헌제가 장안으로 천도할 때 시중이 되었고, 강남정후에 봉해진 후 사공, 사도, 녹상서사를 역임했다. 이각과 곽사의 다툼 속에서 이각에게 간언하다 죽을 뻔했으며, 조조의 아들 조비를 추천했다가 면직된 후 72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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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온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조온 |
| 원어명 | 趙溫 |
| 출생 | 137년 |
| 사망 | 208년 |
| 국가 | 후한 |
| 직책 | 관료 |
2. 생애
처음에 경조승(京兆丞)을 지냈는데, 탄식하며 말하였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웅비하여야 하거늘, 어찌하여 암컷처럼 수그리고 있는단 말인가!"
그러고는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훗날 대기근이 들었을 때, 집안의 곡식을 굶주린 자들에게 나누어 주니 목숨을 건진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헌제가 장안으로 천도할 때 시중(侍中)이 되었고, 어가가 장안에 도착한 후 강남정후(江南亭侯)에 봉해졌다. 이후 양표를 대신하여 사공에 임명되었다가 면직되었고, 얼마 후 사도로 복직되었으며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이때 이각과 곽사가 반목하여 서로 다투었는데, 이각이 궁궐을 노략질하고 헌제는 북쪽 성채로 거둥하여 내외로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이각은 평소 조온을 의심하였는데, 조온이 이각에게 글을 써 행실을 꾸짖으니 이각은 크게 노하여 조온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각의 종제 이응(李應)이 여러 날에 걸쳐 이를 만류하니,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건안 13년(208), 조온은 사공 조조의 아들 조비를 벽소하여 연(掾)으로 삼았다. 조조는 크게 노하여 이를 상주하였고 결국 조온은 면직되었다. 이 해에 죽으니, 향년 72세였다. 사도는 이후 공석이 되었다가, 6월에 사공 · 태위와 함께 폐지되었다.
2. 1. 관직 생활
처음에 경조승(京兆丞)을 지냈으나, "대장부라면 마땅히 웅비하여야 하거늘, 어찌하여 암컷처럼 수그리고 있는단 말인가!"라고 탄식하며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훗날 대기근이 들었을 때, 집안의 곡식을 굶주린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만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휼하였다.헌제가 장안으로 천도할 때 시중(侍中)이 되었고, 어가가 장안에 도착한 후 강남정후(江南亭侯)에 봉해졌다. 이후 양표를 대신하여 사공에 임명되었다가 면직되었고, 얼마 후 사도로 복직되었으며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이때 이각과 곽사가 반목하여 서로 다투었는데, 이각이 궁궐을 노략질하고 헌제는 북쪽 성채로 거둥하여 내외로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이각은 평소 조온을 의심하였는데, 조온이 이각에게 글을 써 행실을 꾸짖으니 이각은 크게 노하여 조온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각의 종제 이응(李應)이 여러 날에 걸쳐 이를 만류하니,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건안 13년(208), 조온은 사공 조조의 아들 조비를 벽소하여 연(掾)으로 삼았다. 조조는 크게 노하여 이를 상주하였고 결국 조온은 면직되었다. 이 해에 죽으니, 향년 72세였다. 사도는 이후 공석이 되었다가, 6월에 사공 · 태위와 함께 폐지되었다.
2. 2. 이각, 곽사와의 관계
조온은 이각과 곽사가 반목하여 서로 다툴 때, 이각이 궁궐을 노략질하고 헌제를 북쪽 성채로 옮겨 내외 연락이 끊기게 하였다. 이각은 평소 조온을 의심하였는데, 조온이 이각에게 글을 써 행실을 꾸짖으니 이각은 크게 노하여 조온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각의 종제 이응(李應)이 여러 날에 걸쳐 이를 만류하여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2. 3. 조조와의 갈등
조온은 처음에 경조승을 지냈으나, "대장부라면 마땅히 웅비하여야 하거늘, 어찌하여 암컷처럼 수그리고 있는단 말인가!"라고 탄식하며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훗날 대기근이 들었을 때 집안의 곡식을 굶주린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만여 명의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헌제가 장안으로 천도할 때 시중이 되었고, 어가가 장안에 도착한 후 강남정후에 봉해졌다. 이후 양표를 대신하여 사공에 임명되었다가 면직되었고, 얼마 후 사도로 복직되었으며 녹상서사가 되었다.
이때 이각과 곽사가 반목하여 서로 다투었는데, 이각이 궁궐을 노략질하고 헌제는 북쪽 성채로 거둥하여 내외로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이각은 평소 조온을 의심하였는데, 조온이 이각에게 글을 써 행실을 꾸짖으니 이각은 크게 노하여 조온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각의 종제 이응이 여러 날에 걸쳐 이를 만류하니,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건안 13년(208년), 조온은 사공 조조의 아들 조비를 벽소하여 연으로 삼았다. 조조는 크게 노하여 이를 상주하였고 결국 조온은 면직되었다. 이 해에 죽으니, 향년 72세였다. 사도는 이후 공석이 되었다가, 6월에 사공 · 태위와 함께 폐지되었다.
3. 일화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자 집안의 양식을 털어 굶주린 자들에게 베풀었으며, 그로 인해 살아난 사람이 만여 명이나 되었다.[1]
4. 가계

조온의 가계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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