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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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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는 후한서에 반초의 부하인 감영이 도달한 국가로 기록된 곳이다.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일설에는 카라케네 왕국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사기에는 조지가 서해에 임해 덥고 습하며, 밭을 갈아 벼를 심고, 큰 새와 항아리만한 알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감영은 로마 제국과의 직접적인 교역을 위해 서쪽으로 갔으나, 파르티아인의 방해로 인해 로마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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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서역)
개요
위치대진국 동남쪽
건국 시기기원전 2세기 ~ 기원전 1세기
멸망 시기1세기 ~ 3세기
주요 활동 지역시리아, 인도, 중국
정치
정치 체제왕정
교류
관련 국가대진국
안식국
월지국
후한
동진
역사적 기록
최초 언급후한서
기타
관련 인물간영

2. 역사

조지국은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 등장하는 서역의 국가이다. 후한서에는 후한의 장수 반초의 부하인 감영이 도달한 국가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위치는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튀르키예 안타키아) 또는 카라케네 왕국 등으로 추정된다.[1]사기》 대완전에는 조지국이 서해에 임하며 덥고 습한 기후를 가졌고, 벼농사를 지으며 큰 새가 산다고 묘사되어 있다. 또한 안식(파르티아) 사람들의 말을 빌려 약수서왕모가 있다는 전승을 소개하기도 했다.[2]

시간이 흘러 《구당서돌궐전에는 620년(무덕 3년) 조지국이 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후한서나 《사기》의 시대와 수백 년의 차이가 있어, 과연 동일한 '조지국'을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감영의 조지국 방문은 로마 제국과의 직접적인 교역로 개설 시도와 관련이 있으며, 당시 파르티아 왕국이 중개 무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를 방해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2. 1. 문헌 기록

후한서에는 반초의 부하인 감영이 도달한 국가로 언급된다. 이 조지국은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튀르키예안타키아)에 위치했던 국가로 여겨지나[1], 일설에는 카라케네 왕국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사기》 대완전에는 조지국에 대해 "조지는 서해에 임해 덥고 습하다. 밭을 갈아 벼를 심는다. 큰 새가 있고, 그 알은 항아리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안식(파르티아) 사람들의 말을 빌려 그곳에 약수가 흐르고 서왕모가 있다고 전했다.[2]

한편, 《구당서》 권194하 돌궐전에는 "무덕 3년(620년), 사신을 보내 조지 거란을 공물로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조지가 620년 전후에 존재했던 이민족 왕조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앞선 기록들과는 수백 년의 시간 차이가 있어, 이 문헌들이 동일한 대상을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당시 중국산 견직물은 오리엔트 지역을 지배하던 파르티아 왕국이나 로마 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감영은 로마 제국과 직접 교역을 목표로 서쪽으로 향했으나, 시리아에 이르렀을 때 중개 무역의 이익을 지키려던 파르티아인 안내인으로부터 로마가 아직 멀다는 말을 듣고 결국 발길을 돌렸다고 전해진다.

2. 2. 파르티아와의 관계

후한서에 따르면 반초의 부하 감영서역 탐사를 위해 서쪽으로 향하던 중 '조지국'이라는 곳에 도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조지국은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튀르키예 안타키아) 또는 카라케네 왕국 등으로 추정된다.[1] 당시 중국산 견직물은 오리엔트 지역을 지배하던 파르티아 왕국과 로마 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감영은 로마 제국과 직접 교역을 목표로 서진했던 것으로 보이나, 조지국(또는 그 인근)에 도착했을 때 파르티아의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파르티아는 중국과 로마 사이의 중개 무역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었다. 감영을 안내하던 파르티아인은 이러한 이익이 사라질 것을 우려하여 감영에게 로마까지의 거리가 매우 멀다고 속여 결국 감영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귀환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파르티아가 동서 교역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무역을 통제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2. 3. 감영의 서역 원정

후한 시대의 서역도호 반초는 부하 감영을 서쪽으로 파견하여 당시 로마 제국과의 직접적인 교역로를 열고자 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생산된 견직물은 오리엔트 지역을 지배하던 파르티아 왕국이나 로마 제국 등지에서 매우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감영은 서쪽으로 나아가 조지국(條枝國)에 도착하였다. 이 조지국은 현재의 시리아 지역, 구체적으로는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튀르키예안타키아)에 위치했던 국가로 여겨진다.[1]

그러나 감영의 여정은 파르티아 왕국의 방해로 인해 중단되었다. 당시 파르티아는 중국과 로마 사이의 무역을 중개하며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었는데, 감영의 임무가 성공하여 후한로마 제국 간의 직접 교역로가 열릴 경우 이러한 중개 무역의 이익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감영의 길을 안내하던 파르티아인들은 그에게 "로마는 아직도 매우 멀리 있다"는 거짓 정보를 알려주며 로마로 가는 것을 단념시켰다. 결국 감영은 파르티아인들의 정보 조작과 방해 공작으로 인해 로마에 도달하지 못하고 후한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동서 간의 직접적인 교류 확대를 막으려는 파르티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3. 지리 및 문화

사기 〈대완전〉에 따르면 조지는 서해에 인접하며, 기후는 덥고 습하다.[2] 주민들은 밭을 갈아 를 재배하며[2], 이곳에는 큰 새(타조로 추정)가 서식하는데 그 알은 항아리만큼 크다고 묘사되어 있다.[2] 또한 안식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조지에는 약수가 흐르고 서왕모가 있다고도 한다.[2]

참조

[1] 간행물 大秦與大漢的交往及條支國考據 : 從史料看古代中國與羅馬的關係 https://crrs.org/w/w[...] C.R.R.S. Canada (Culture Regeneration Research Society) 2016-01
[2] 서적 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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