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힐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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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힐은 1750년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태어난 목회자이다.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리스어 교수를 역임했으며,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에서 온건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는 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칼뱅주의 정통주의를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힐은 1819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알렉산더 힐 역시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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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힐 (목회자) | |
|---|---|
| 기본 정보 | |
![]() | |
| 출생 | 1750년 |
| 사망 | 1819년 1월 19일 |
| 국적 | 스코틀랜드 |
| 직업 | 목사 신학 교수 |
| 교육 | |
| 모교 |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에든버러 대학교 |
| 경력 | |
| 1780년 | 스트라스미글 교구 목사 |
| 1787년 |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성 메리 칼리지 신학 교수 |
| 1788년 | 세인트 앤드루스 교회 수석 목사 |
| 1791년 | 스코틀랜드 교회 사무총장 |
| 종교 | |
| 종교 | 장로교 |
| 가족 | |
| 부모 | 존 힐과 크리스티나 로버트슨 |
| 배우자 | 마가렛 스콧 제니 홈 |
| 자녀 | 존 힐 (변호사) 크리스티나 힐 조지 힐 제인 힐 찰스 힐 로버트 힐 데이비드 힐 (의사) 윌리엄 힐 (목사) |
| 저서 | |
| 주요 저서 | 신학 강요 스코틀랜드 교회 헌법에 대한 관찰 |
| 기타 | |
| 영향 | 윌리엄 로버트슨 (역사가) |
2. 생애
조지 힐(George Hilleng, 1750년 5월 27일 ~ 1819년 11월 19일)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목사이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교수 및 총장을 역임한 인물이다.[1] 그는 세인트앤드루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며, 11세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14세에 M.A. 학위를 받았다.[1]
1772년 모교의 그리스어 공동 교수로 임명되었고, 이후 신학 공부를 병행하며 1778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1] 1780년부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인트앤드루스 제2교구 목사로 봉직했으며, 동시에 교수직을 유지했다.[1] 그는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아 1787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788년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의 세인트 메리 칼리지 신학 교수, 1791년에는 같은 칼리지의 총장으로 임명되었다.[1] 1808년에는 세인트앤드루스 내에서 더 수입이 많은 제1교구 목사로 자리를 옮겼다.[1]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온건파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고, 윌리엄 로버트슨 사후에는 그 지도자 자리를 계승했다.[1] 그는 교회의 독립성을 옹호하면서도 현실적인 타협을 모색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1789년에는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의장을 역임하는 등 교회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
1782년 해리엇 스코트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나, 자녀들의 죽음을 겪는 등 개인적인 아픔도 있었다.[1] 그는 에든버러 왕립학회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1]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1807년 이후로는 총회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1819년 11월 19일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사망하여 세인트앤드루스 대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1] 그의 아들 알렉산더 힐 역시 목사가 되어 1845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의장을 지냈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조지 힐은 1750년 5월 27일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 존 힐 목사는 세인트앤드루스의 목사 중 한 명이었다. 조지 힐은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인 진 맥코믹의 장남이었으며, 아버지의 첫 결혼에서 얻은 이복 형제자매로는 존 힐 등이 있었다.[1] 그의 누이 자넷 힐은 훗날 조지 쿡 목사의 어머니가 되었다.[1]힐의 가족은 세인트앤드루스의 다른 학자 및 성직자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1] 조지 힐은 어린 시절부터 지역 귀족들과 함께 교육받고 교류했는데, 이들 중에는 나중에 대법관이 된 토마스 어스킨, 초대 어스킨 남작과 킨눌 백작도 포함되어 있었다.[1] 이들은 당시 스코틀랜드의 실질적인 통치자이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의 총장이었던 헨리 던다스, 초대 멜빌 자작이 운영하는 왕실 후원 네트워크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1]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는 자체적으로 광범위한 후원 권한과 성직 임명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다.[1]
조지 힐은 세인트앤드루스 그래머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1세의 나이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 입학했다.[1] 그는 뛰어난 기억력과 수학적 재능을 보였다.[1] 본래 신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2학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어려운 상황에 처한 대가족이 남겨졌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4세에 M.A. 학위를 취득했다.[1] 이후 런던과 펨브로크셔에서 의원이었던 프라이스 캠벨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잠시 일했다.[1]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젊은 제자와 함께 에든버러 대학교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할 기회를 얻었다.[1] 에든버러에 머무는 동안 그는 매년 봄에 열리는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에 꾸준히 참석했으며,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간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며 매우 즐거웠다"고 언급했다.[1] 그는 에든버러에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했으나, 특히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저속한 매너와 대화에 혐오감을 느꼈다.[1]
1772년 5월 21일, 22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조지 힐은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로 돌아와 그리스어 공동 교수로 임명되었다.[1] 하지만 나이 많은 전임자가 여전히 봉급을 독점하여 조지에게는 개인적인 수업료만 남았다.[1] 그는 격주로 강의를 진행하고 그 사이에는 학생들의 과제를 검토했다.[1] 그의 강의 노트를 보면, 그의 수업은 단순한 그리스어 교육을 넘어 역사, 지리, 문학, 드라마, 철학 등을 아우르는 문화 연구 과정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1] 이는 당시 그의 학생들 중 상당수가 그리스 문자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적절한 방식이었다.[1] 그는 또한 학생들을 위해 "춤 모임"을 열거나 다른 교수들을 초대하여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등 교내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1]
2. 2. 목회 활동
1775년 5월 3일, 그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 해딩턴의 노회로부터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후 곧바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튜리데프 총장을 도와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의 세인트 레너드 칼리지 교구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설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시력이 좋지 않아 설교문을 읽을 수 없었음에도 뛰어난 기억력으로 설교문 전체를 암기하여 전달했기 때문이다. 1775년, 아버지의 제자였던 해딩턴 백작으로부터 콜드스트림의 교회직을 제안받았지만, 세인트 앤드루스에서의 직무를 계속하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 1778년에는 해딩턴 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1779년에는 윌리엄 로버트슨 총장으로부터 에든버러의 직책을 제안받았으나, 고향 근처에서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정중히 거절했다.같은 해(1779년) 앤드루스 대학교의 머리슨 총장이 사망하면서 공석이 생기자, 조지 힐은 그리스어 교수직을 유지하면서 세인트 앤드루스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두 개의 직책을 동시에 맡는 것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불만이 총회에 제기되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780년 6월 22일, 조지 힐은 그의 아버지가 맡았던 세인트 앤드루스 제2교구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1787년 5월 7일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788년 1월 2일에는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의 세인트 메리 칼리지의 신학 교수가 되었다. 1799년, 그의 삼촌인 맥코믹 박사의 후임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세인트 레너드의 직책 때문에 수입이 적은 제2교구 목사직을 포기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거절했다. 대신 그는 추가 수입이 있는 로열 채플의 수석 사제가 되었다. 3년 후인 1791년 7월 27일, 그는 제2교구 목사직을 유지하면서 세인트 메리 칼리지의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808년에는 기존 목회자의 사망으로 인해 세인트 앤드루스 내에서 더 수입이 많은 제1교구로 자리를 옮겼다.
2. 3.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활동
그는 그리스어 교수로 임명되어 장로로 안수받았으며, 이후 매년 대학교 또는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의 대표로서 총회에 참석했다. 목사이자 학자로서 그의 입지가 커짐에 따라 총회 내에서의 영향력도 함께 증대되었다. 그는 뛰어난 언변과 인맥 관리 능력을 갖추었으며, 특히 화합을 이끌어내는 접근 방식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또한 총회의 역사, 법률, 절차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회의 운영에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당시 스코틀랜드 교회 내에는 윌리엄 로버트슨 총장이 이끄는 온건파가 주요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온건파는 스스로를 계몽된 칼뱅주의자이자 장로교 신자로 여겼으며, 후원권 문제 등 여러 사안에서 정부와 타협할 의사가 있었지만, 교회의 영적인 독립성에 대해서는 확고한 입장을 지켰다. 조지 힐은 이 온건파의 일원이었고, 로버트슨이 사망한 후에는 그 지도자 자리를 이어받았다.
힐은 매우 신실한 칼뱅주의자이자 장로교 신자였으나, 교리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인 견해를 갖지는 않았다. 그는 목사의 급여를 부담하는 토지 소유자(상속인)가 목사 임명에 어느 정도 권한을 갖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의 독립성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1782년, 법무관이 국왕에게 보내는 연설 내용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판단하여 이의를 제기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교회의 중립성을 강조했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어떤 특정 정당이나 정부 내각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그 학식 있는 신사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권력자들에게도 이 말을 전해도 좋다.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 동안, 정부가 교구 목사들에게 자발적인 군자금 모금을 독려하도록 하는 계획을 추진하자, 힐은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이러한 요구가 교회의 정치적 독립성을 침해하고 성직자의 평화로운 소명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많은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기부할 의향은 있지만, 설교단에서 모금을 장려하라는 명령을 따르느니 차라리 성직자의 옷을 벗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평소 영국에 대한 애국심이 강했던 그의 모습과는 다소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 섬이 마지막 시대까지 규제된 자유, 합리적인 종교, 그리고 공공의 미덕이 자리 잡는 훌륭한 곳이 되기를 바란다"고 표현했으며, 온건파(비판자들에 따르면 정부와 고질적으로 타협하는 세력)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칙을 지켰다. 결국 이 계획은 철회되었다.
이처럼 그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효과적이고 대체로 화합을 이끌어내는 인물이었다. 1789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의장을 맡았을 때, 새로운 총회 서기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이례적으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한때 힐은 질서 유지를 위해 총회를 정회시켜야 했다. 그러나 논쟁이 마무리된 후, 총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통해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 존경받는 총회의 이전 모든 회기 동안 매우 민감하고 드문 상황 속에서 보여준 의장의 가장 공정하고, 위엄 있으며, 유능한 행동에 대해 의회는 감사를 표한다.
그는 1807년까지 총회에 꾸준히 참석했으나, 그해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에든버러로 가는 여정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말년의 활동 중 하나로, 존 레슬리 교수가 쓴 ''열에 관한 에세이''에 대해 강하게 반대한 사례가 있다. 힐은 이 책이 데이비드 흄의 회의적인 철학적 견해를 지나치게 반영하여 "종교를 파괴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총회가 레슬리 교수를 비난할 것을 요청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논쟁을 지켜보기 위해 모였으나, 결국 총회는 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만을 기각했다.[1]
2. 4. 정치적 견해
윌리엄 로버트슨 총장이 이끌던 소위 온건파의 일원이었으며, 로버트슨 사후에는 그 지도자 자리를 계승했다.[1] 온건파는 스스로를 계몽된 칼뱅주의자이자 장로교 신자라고 여겼으며, 후원권 문제 등 여러 사안에서 정부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교회의 영적 독립성에 관해서는 타협하지 않았다.[1] 조지 힐 역시 진실한 칼뱅주의자이자 장로교 신자로서, 목사의 급여를 지불하는 토지 소유자(상속인)가 목사 임명에 어느 정도 권리를 갖는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교회의 독립성은 강력하게 수호했다.[1] 1782년, 법무관이 국왕에게 보내는 연설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그의 견해 때문에 그를 위협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힐은 다음과 같이 응수하며 교회의 독립성을 강조했다.[1]: 스코틀랜드 교회는 어떤 당이나 어떤 내각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그 학식 있는 신사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권력자들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전할 수도 있다.[1]
프랑스 혁명 전쟁 시기에는 교구 목사들에게 자발적인 징수(전쟁 자금 모금)를 지지하도록 촉구하는 정부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는 교회의 정치적 독립성을 침해하고 성직자의 평화로운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1] 이러한 입장은 많은 반대와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설교단에서 그것을 장려하라는 명령을 따르느니 차라리 옷을 벗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1] 이는 영국 애국자로 알려진 그의 명성을 고려할 때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결국 정부 계획은 철회되었다.[1] 그는 영국 헌법을 "규제된 자유, 합리적인 종교 및 공공의 미덕의 훌륭한 자리"라고 평가하며 지지했다.[1]
스스로를 대부분의 장로교인처럼 휘그로 여겼으며, 이는 민주주의자가 아님을 의미했다.[1] 영국 헌법이 역사상 자유를 가장 잘 보호한다고 믿었다.[1] 미국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는 영국 정부가 좀 더 유화적인 태도를 보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식민지 주민들이 정당하고 은혜로운 국왕에게 반역했다고 보았다.[1] 1768년 존 윌크스가 국회의원으로 미들섹스에서 선출될 당시의 혼란을 목격하고 경악했으며, 일반 대중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을 굳혔다.[1] 프랑스 혁명 전쟁의 어려운 시기에는 대중 불안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져, 1798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가 발표한 "스코틀랜드 국민에게 보내는 경고와 훈계"(대중 불안 반대)를 강력히 지지했다.[1] 또한 가톨릭 해방령에 반대했는데,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외세인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며, 당시 교황을 "프랑스 권력"의 도구로 간주했기 때문이다.[1]
2. 5. 개인적인 삶
조지 힐은 1750년 5월 27일 세인트앤드루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힐 목사는 세인트앤드루스의 목사 중 한 명이었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인 진 맥코믹이었다. 이복형으로는 고전학자 존 힐이 있었고, 누이 자넷 힐은 훗날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의장이 되는 조지 쿡 목사의 어머니였다. 그의 가족은 세인트앤드루스의 다른 학문 및 성직자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지 힐은 어린 시절 지역 귀족들과 함께 교육받고 교류했는데, 여기에는 훗날 대법관이 된 토마스 어스킨, 초대 어스킨 남작과 킨눌 백작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헨리 던다스, 초대 멜빌 자작이 운영하는 왕실 후원 네트워크에서 영향력이 컸다.힐은 세인트앤드루스 그래머 스쿨을 거쳐 11세에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뛰어난 기억력과 수학적 재능을 보였다. 신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2학년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족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그럼에도 14세에 M.A.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런던과 펨브로크셔에서 의원 프라이스 캠벨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잠시 일했으며, 제자와 함께 에든버러 대학교로 가서 신학 공부를 이어갔다. 에든버러에서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했으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태도와 대화 방식에는 혐오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1782년, 힐은 에든버러 상인이자 치안 판사였던 알렉산더 스코트의 딸 해리엇 스코트와 결혼했다. 해리엇의 초상화는 헨리 레이번이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부는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불행을 겪기도 했다. 1800년 장남이 자메이카에서 사망했고, 1803년에는 차남 조지와 딸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다른 아들 중 한 명은 동인도 회사에서 복무 중 사망했고, 또 다른 아들은 같은 회사에서 중요한 지위에 올랐다. 아들 알렉산더 힐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었고, 1845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의장을 역임했다. 딸 중 한 명은 동료 학자인 쿡 박사(조지 쿡 목사의 형제)와 결혼했다.
| 관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존 힐 | 세인트앤드루스 목사 |
| 어머니 | 진 맥코믹 | 존 힐의 두 번째 부인 |
| 이복형 | 존 힐 | 고전학자, FRSE (1747–1805) |
| 누이 | 자넷 힐 | 조지 쿡 목사 (FRSE)의 어머니 |
| 누이 | 앤 힐 | 매튜 머레이 목사 (FRSE)와 결혼, 휴 머레이의 어머니 |
| 배우자 | 해리엇 스코트 | (1782년 결혼) 알렉산더 스코트의 딸 |
| 아들 | (이름 미상) | 장남, 1800년 자메이카에서 사망 |
| 아들 | 조지 | 차남, 1803년 흑사병으로 사망 |
| 딸 | (이름 미상) | 1803년 흑사병으로 사망 |
| 아들 | (이름 미상) | 동인도 회사 복무 중 사망 |
| 아들 | (이름 미상) | 동인도 회사에서 중요한 지위 역임 |
| 아들 | 알렉산더 힐 | 목사, 1845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의장 |
| 딸 | (이름 미상) | 쿡 박사(조지 쿡 목사의 형제)와 결혼 |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칼뱅주의 정통주의의 철학적 면을 발전시킨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였다.[4]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 칼뱅주의 정통주의의 철학적 면을 발전시킨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였다.[4]
[1]
간행물
The Scots Magazine
힐은 자상하고 유머 감각이 있으면서도 진지한 성격으로, 가족에게 헌신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전기를 쓴 조지 쿡(힐의 조카이자 사위의 형제)에 따르면, 그는 목회 활동에서 교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후원 제도를 이용하여 자신과 아들의 이익을 챙겼다는 익명의 비난(앤드루 M. 톰슨 작성)은 근거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는 종교적, 정치적 견해 차이가 인간관계를 해치도록 두지 않았으며, 종교 논쟁을 일상 대화의 주제로 삼는 것을 꺼렸다. 성직자 자녀와 미망인을 위한 기구, 세인트앤드루스 성서 협회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에든버러 왕립학회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다.
1807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참석 후 돌아오는 길에 심한 병을 앓았는데, 발작으로 추정된다. 이후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1816년경에는 가벼운 뇌졸중을 겪으며 언어 및 운동 장애가 나타났다. 교구 업무 대부분은 조수가 맡았지만, 그는 여전히 설교하기를 즐겼다. 1819년 교회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설교단으로 가다가 넘어져 설교 도중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이후 병상에 누워 지내게 되었다. 그는 임종 직전까지 신앙심을 잃지 않았으나, 생애 가장 많은 봉급을 받은 해에 가장 적은 일을 하게 되었다며 씁쓸함을 표하기도 했다.
조지 힐은 1819년 11월 19일에 사망했으며, 세인트앤드루스 대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은 세인트 룰스 타워 바로 서쪽에 위치하며, 여러 신학자와 교수들이 묻힌 곳이다.[1][2][3]
3. 사상과 신학
4. 저서
연도 제목 비고 1787 성경 탐구의 이점. 스코틀랜드 기독교 지식 전파 협회 앞에서 설교한 설교문; 에든버러 하이 처치에서 열린 연례 회의에서. 에든버러에서 출판 1792 대영 제국의 현재 행복. 세인트앤드루스 및 에든버러 하이 처치에서 설교한 설교문. 1793 현재 전쟁이 영국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교훈.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설교한 설교문. 1796 신학 강의 요약 1796 설교문 1796 제임스 길레스피 박사의 설교문 조지 힐 박사 편집, 저자 원고에서 출판
5. 평가
참조
[2]
웹사이트
Account Suspended
https://www.royalsoc[...]
2020-02-23
[3]
서적
Biographical Index of Former Fellows of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1783–2002
https://www.royalsoc[...]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2017-10-20
[4]
논문
Jonathan Edwards and the Absence of Free Choice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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