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후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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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후 번은 모리 히데모토가 다스린 일본 에도 시대의 번으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나가토국에 영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조슈 번의 가신이었으나 독립된 다이묘로 인정받았으며, 바쿠마쓰 시대에는 도쿠가와 막부의 직접 통제를 거부하고 보신 전쟁에서 조슈 번과 함께 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 도요우라 번으로 개칭되었다가 야마구치 현에 통합되었고, 마지막 다이묘 모리 모토토시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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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스에번은 모리 가문이 다스리던 1만 석 규모의 번으로, 조후 번에서 분번되었으나 번주 문제로 두 차례 단절과 재흥을 반복했으며, 번정 개혁 시도와 조슈 정벌 참여 등의 역사를 지녔다.
조후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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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고유 명칭 | 조후 번 (長府藩) |
다른 명칭 | 나가토 조후 번 (長門長府藩), 나가토 후추 번 (長門府中藩) |
![]() | |
위치 | 야마구치현 |
통치 | |
정치 체제 | 번 |
역사 | |
성립 | 1600년 |
소멸 | 폐번치현 |
주요 사건 | 폐번치현 |
지리 | |
위치 | 나가토국 |
현재 | 야마구치현 |
성 | 구시자키 성 |
좌표 | 33°59′21.5″N 130°59′38″E |
정보 | |
시대 | 에도 시대 |
번주 | 모리 씨 |
석고 | 50,000석 |
2. 역사
모리 히데모토는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이자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였다. 1592년 임진왜란 참전을 위해 데루모토는 후계자가 없어 히데모토를 양자로 들였다. 모토나리는 데루모토에게 친아들이 생기면 히데모토와 친아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겠다는 조건으로 입양을 허락했고, 이후 모리 히데나리가 태어나면서 이 조건은 현실이 되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히데나리를 데루모토의 후계자로 인정했고, 히데모토는 나가토국, 아키국 사이키군, 스오국 요시키군에 걸쳐 17만 곡의 영지를 받았다. 히데요시는 히데모토를 조슈 번의 가신으로 삼았지만, 동시에 독립된 다이묘로 인정했다.[6]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의 영지는 112만 곡에서 29만 8천 곡으로 줄어들었고,[7] 거점은 나가토국으로 옮겨졌다. 깃카와 씨는 동쪽 방어를 위해 이와쿠니 번을 맡았고, 히데모토는 서쪽 방어를 위해 나가토국 도요우라군(현재의 시모노세키시 일부)에 새로운 영지를 받았다. 이후 조슈 번은 막부의 허가를 받아 36만 9천 석으로 변경되었다.[8]
1653년, 조후 번의 3대 다이묘 모리 쓰나모토는 숙부 모리 모토토모에게 1만 석을 나누어 주어 기요스에 번을 세웠다. 기요스에 번은 조슈 번의 또 다른 부속 번이 되었다. 역대 조후 번주 중 모리 요시모토와 교케이(시게나리)는 조슈 번의 번주를 겸하기도 했다.
막말에는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를 직할령으로 삼으려 하자 조후 번과 대립하기도 했지만, 곧 화해하고 다른 조슈 번의 지번들과 함께 보신 전쟁에서 활약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조후 번은 잠시(1869-1871) 도요우라 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도요우라 현을 거쳐 야마구치현에 통합되었다.
조후 번의 마지막 번주 모리 모토토시는 화족 작위 중 자작 작위를 받았다. 메이지 천황의 숙부 나카야마 다다미쓰가 조후 번에 망명했을 때 암살당했기 때문에 메이지 천황이 조후 모리 가문에게 백작 작위를 주는 것을 꺼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화족 작위는 화족 제도 발효 당시의 영지 크기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5만 석이었던 조후 번은 자작 작위를 받는 것이 제도상 맞았다.
2. 1. 번의 성립
모리 히데모토는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로, 1592년 모리 데루모토가 공식적인 후계자 없이 임진왜란에 참전할 것을 우려하여 데루모토에게 입양되었다. 모리 모토나리는 데루모토가 이후 친자를 얻을 경우, 자신의 영지를 히데모토와 친자에게 나누어 준다는 조건으로 입양에 동의했다. 실제로 모리 히데나리가 태어나면서 이 조건이 현실화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 히데나리를 데루모토의 후계자로 인정했다. 이듬해 히데모토는 나가토국, 아키국의 사이키군, 스오국의 요시키군에 걸쳐 총 17만 곡의 영지를 받았다. 히데요시는 그를 조슈 번의 가신으로 두었지만, 독립된 다이묘로 공식 인정했는데, 이때가 조후 번의 시작이었다.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의 영지는 112만 곡에서 29만 8천 곡으로 줄어들었고,[7] 거점을 나가토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깃카와 씨는 동쪽 방어를 위해 이와쿠니 번을 맡았고, 모리 히데모토는 서쪽 방어를 위해 나가토의 도요우라군(현재의 시모노세키 일부)에 새로운 영지를 받았다. 후에 조슈 번은 막부의 양해를 얻어 36만 9천 석으로 고쳐졌다.[8] 1653년, 조후 번의 3대 다이묘 모리 쓰나모토는 그의 삼촌 모리 모토토모에게 1만 곡을 할당하여 기요스에 번을 만들었고, 이는 조슈 번의 또 다른 부속 번이 되었다.
역대 번주 중 3대 쓰나모토의 아들인 모리 요시모토와 8대 번주인 교케이 (시게나리)는 종가의 조슈 번주를 이었다.
바쿠마쓰 시대에 조후 번은 처음에는 점점 더 불안정하고 과격해지는 조슈 번으로부터 분리되어 도쿠가와 막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조후 번은 보신 전쟁에서 조슈 번 및 다른 조슈 부속 번과 함께 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이 번은 잠시(1869-1871) '도요우라 번'으로 개칭된 후 "도요우라 현"이 되었고, 이후 야마구치 현에 통합되었다.
2. 2. 에도 시대
모리 히데모토는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로, 1592년 모리 데루모토가 공식적인 후계자 없이 임진왜란에 참전할 것을 우려하여 데루모토에게 입양되었다. 모리 모토나리는 데루모토가 이후 친자를 얻을 경우, 자신의 영지를 히데모토와 친자에게 나누어 준다는 조건으로 입양에 동의했다. 실제로 모리 히데나리가 태어나면서 이 조건이 현실화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 히데나리를 데루모토의 후계자로 인정했다. 이듬해 히데모토는 나가토국, 아키국의 사이키군, 스오국의 요시키군에 걸쳐 총 17만 곡의 영지를 받았다. 히데요시는 그를 조슈 번의 가신으로 두었지만, 독립된 다이묘로 공식 인정했다.[6]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의 영지는 112만 곡에서 29만 8천 곡으로 줄어들었고, 거점을 나가토국으로 옮기게 되었다.[7] 깃카와 씨는 동쪽 방어를 위해 이와쿠니 번을 맡았고, 모리 히데모토는 서쪽 방어를 위해 나가토 국 도요우라 군(현재의 시모노세키시 일부)에 새로운 영지를 받았다. 후에 조슈 번은 막부의 양해를 얻어 36만 9천 석으로 고쳐졌다.[8] 조후 번은 3대 다이묘 모리 쓰나모토 아래에서 1653년 그의 삼촌 모리 모토토모에게 1만 석을 할당하여 기요스에 번을 형성, 조슈 번의 또 다른 부속 번이 되었다.
역대 번주 중에서는 3대 쓰나모토의 아들인 모리 요시모토와, 8대 번주인 교케이(시게나리)가 종가의 조슈 번주를 잇고 있다.
막말에는 종가의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를 직할령으로 하려 했기 때문에 대립했지만, 후에 화해하여 다른 조슈 지번과 함께 보신 전쟁에서 싸웠다.
2. 3. 막말과 메이지 유신
1598년 9월 1일(게이초 3년 8월 1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 히데나리를 모리 데루모토의 후계자로 승인했고, 사실상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모리 히데모토는 데루모토에게서 영지를 분할받아 다이묘가 되었다.[6] 이듬해 6월, 히데모토는 나가토국과 아키국 사에키 군, 스오국요시키 군을 합쳐 17만 석을 받아, 숙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처럼 모리 가신이자 독립 다이묘가 되었다. 이때가 조후 번의 시작이다.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의 영지는 112만 석[6]에서 29만 8천 석[7]으로 크게 줄었고, 거점을 나가토국으로 옮겼다. 데루모토는 동쪽 방어를 위해 이와쿠니에 깃카와 히로이에를, 서쪽 방어를 위해 나가토 국 도요우라 군(현재의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에 히데모토에게 영지를 주었다. 훗날 조슈 번은 막부의 양해를 얻어 36만 9천 석으로 고쳤다.[8] 조후 번은 3대 번주 모리 쓰나모토 때 숙부 모리 모토토모에게 1만 석을 분할하여 기요스에 번을 세웠다.
역대 번주 중 3대 쓰나모토의 아들 모리 요시모토와 8대 번주 교케이(시게나리)는 본가 조슈 번주를 이었다.
막말 시기, 조후 번은 본가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를 직할령으로 삼으려 해 대립했다. 그러나 곧 화해하여 다른 조슈 지번과 함께 보신 전쟁에서 활약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조후 번은 유신 공적에도 불구하고 자작 작위에 그쳤다. 메이지 천황의 숙부 나카야마 다다미쓰가 조후 번에 망명했을 때 암살되었기 때문에 메이지 천황이 조후 모리 가문의 백작 서작을 꺼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화족 작위가 화족 제도 발효 시 소령의 실고에 따라 정해졌고, 5만 석의 조후 번도 그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3. 역대 번주
# | 이름 | 재임 기간 | 고쿠다카(석) |
---|---|---|---|
1 | 모리 히데모토 (毛利秀元|모리 히데모토일본어) | 1600년 ~ 1650년 | 60,000 → 50,000 → 38,000 → 47,000 → 50,000 |
2 | 모리 미쓰히로 (毛利光広|모리 미쓰히로일본어) | 1650년 ~ 1653년 | 60,000 |
3 | 모리 쓰나모토 (毛利綱元|모리 쓰나모토일본어) | 1653년 ~ 1709년 | 50,000 |
4 | 모리 모토토모 (毛利元朝|모리 모토토모일본어) | 1709년 ~ 1713년 | 50,000 |
5 | 모리 모토노리 (毛利元矩|모리 모토노리일본어) | 1713년 ~ 1718년 | 38,000 |
6 | 모리 마사히로 (毛利匡広|모리 마사히로일본어) | 1718년 ~ 1729년 | 47,000 |
7 | 모리 모로타카 (毛利師就|모리 모로타카일본어) | 1729년 ~ 1735년 | 47,000 |
8 | 모리 마사타카 (毛利匡敬|모리 마사타카일본어) | 1735년 ~ 1751년 | 47,000 |
9 | 모리 마사미쓰 (毛利匡満|모리 마사미쓰일본어) | 1751년 ~ 1769년 | 47,000 |
10 | 모리 마사요시 (毛利匡芳|모리 마사요시일본어) | 1769년 ~ 1792년 | 50,000 |
11 | 모리 모토요시 (毛利元義|모리 모토요시일본어) | 1792년 ~ 1841년 | 50,000 |
12 | 모리 모토유키 (毛利元運|모리 모토유키일본어) | 1841년 ~ 1852년 | 50,000 |
13 | 모리 모토치카 (毛利元周|모리 모토치카일본어) | 1852년 ~ 1868년 | 50,000 |
14 | 모리 모토토시 (毛利元敏|모리 모토토시일본어) | 1868년 ~ 1871년 | 50,000 |
번주는 모리 가문이다. 모리 모토나리의 넷째 아들 호이다 모토키요의 아들이자,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가 된 모리 히데모토가 번조이다.
히데모토는 1592년 임진왜란 참전을 위해 히로시마성에 들어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직접 데루모토의 양자가 되는 것을 승인받았다. 단, 훗날 분쟁을 피하기 위해 "테루모토에게 아들이 태어날 경우에는 분가할 것"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그 후, 데루모토에게 적남 히데나리가 태어났고, 1598년 도요토미 정권은 히데나리를 모리 가문의 후계자로 승인했다. 사실상 폐적되는 히데모토에게는 데루모토로부터 영지를 분할받아 다이묘가 되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듬해 6월, 히데모토는 나가토국 1개 국과 아키국 사에키 군, 스오국요시키 군을 합해 17만 석을 받아, 모리 가신이면서 동시에 도요토미 다이묘로서의 신분이 인정받게 되었다. 이때가 조후 번의 시작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데루모토가 아키 외 8개국 112만 석[6]에서 스오·나가토 2개국 29만 8천 석[7]으로 감봉되었을 때, 데루모토는 동쪽 방어를 위해 이와쿠니에 깃카와 히로이에를 두고, 서쪽 방어를 위해 나가토 국 도요우라 군 (현재의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에 히데모토의 영지를 두었다. 후에 조슈 번은 막부의 양해를 얻어 36만 9천 석으로 고쳐졌다.[8] 조후 번은 쓰나모토 때 숙부인 모리 모토토모에게 1만 석을 분할해 주고, 지번인 기요스에 번을 세웠다.
역대 번주 중에서는 3대 쓰나모토의 아들인 모리 요시모토와, 8대 번주인 교케이 (시게나리)가 본가인 조슈 번주를 이었다.
막말에는 본가인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를 직할령으로 하려 했기 때문에 대립했지만, 후에 화해하여 다른 조슈 지번과 함께 보신 전쟁에서 싸웠다. 그러나, 유신 후에 화족 작위를 받았을 때에는 유신의 공적에 따르지 않고 자작에 그쳤다. 이 일에 관해서는 메이지 천황의 숙부인 나카야마 다다미쓰가 조후 번에 망명했을 때 암살된 것으로 인해, 메이지 천황이 조후 모리 가문의 백작 작위 수여를 꺼렸다고 전해진다. (실제로는, 화족의 작위는 화족 제도 발효 시의 소령의 실고에 따라 정해진 것으로, 실고 1만 석 이상 5만 석 이하는 자작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5만 석의 조후 번도 그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도요우라 번, 도요우라 현을 거쳐 야마구치현에 편입되어 폐번되었다.
4. 지번
모리 히데모토는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로, 1592년 모리 데루모토가 임진왜란에 참전할 때 후계자 문제로 데루모토에게 입양되었다. 모토나리는 데루모토에게 친자가 생기면 영지를 히데모토와 친자에게 나누어 준다는 조건으로 입양을 허락했다. 모리 히데나리가 태어나면서 이 조건이 현실화되었고,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히데나리를 데루모토의 후계자로 인정했다. 히데모토는 나가토국, 아키국 사이키군, 스오국 키시키군에 걸쳐 17만 곡의 영지를 받았다. 히데요시는 히데모토를 조슈 번의 가신으로 두면서도 독립된 다이묘로 인정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의 영지는 크게 줄었고, 거점을 나가토국으로 옮겼다. 깃카와 씨는 동쪽 방어를 위해 이와쿠니 번을, 모리 히데모토는 서쪽 방어를 위해 나가토국 도요우라군(현재의 시모노세키 일부)에 새로운 영지를 받았다. 이 번의 고쿠다카는 명목상 6만 곡이었으나, 1653년 3대 다이묘 모리 쓰나모토가 삼촌 모리 모토토모에게 1만 곡을 할당하여 기요스에 번을 만들었다. 모리 쓰나모토의 아들 모리 요시모토와 8대 다이묘 모리 마사타케는 후사 없이 조슈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1718년, 번은 3만 8천 곡으로 축소되었지만, 1720년과 1783년에 각각 4만 7천 곡, 5만 곡으로 증가했다.
바쿠마쓰 시대에 조후 번은 도쿠가와 막부의 직접 통제를 받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보신 전쟁에서 조슈 번 및 다른 조슈 부속 번과 함께 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 번은 잠시(1869-1871) 豊浦藩|도요우라 번일본어으로 개칭된 후 "도요우라 현"이 되었다가 야마구치현에 통합되었다.
조후의 마지막 다이묘 모리 모토토시는 화족 자작 작위를 받았다. 메이지 천황이 나카야마 타다미쓰의 일로 인해 백작 작위 수여를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화족 작위 지침에 따르면 1만 곡에서 5만 곡 사이의 고쿠다카를 가진 전 다이묘는 자작이 되어야 했으므로 근거가 없다.
조후번의 지번은 다음과 같다:
5. 영지
1600년 6만 석으로 시작하였으나, 1653년 기요스에번이 분리되면서 5만 석으로 줄었다. 1718년에는 3만 8천 석으로 줄었다가, 1720년 4만 7천 석, 1783년에는 5만 석으로 다시 늘어났다.[6]
모리 히데모토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의 영지가 줄어들면서 나가토국 도요우라군(현재의 시모노세키시 일부)에 새로운 영지를 받았다. 조후 번의 고쿠다카는 처음에는 6만 석이었으나, 1653년 기요스에 번이 분리되면서 5만 석으로 감소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고쿠다카의 변화를 겪다가 메이지 유신 당시에는 5만 석이었다.
바쿠마쓰 시대에는 조슈번과 대립하기도 했지만, 보신 전쟁에서는 조슈 번과 함께 싸웠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도요우라 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야마구치현에 통합되었다.
조후 번의 영지는 대부분 반과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불연속적인 영토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나가토국의 아사군 36개 마을과 도요우라군 130개 마을을 포함했다.
6. 주요 가신
노기 마레스케는 러일전쟁에서 활약한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조후 번의 하급 무사 출신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노기 마레스케가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선봉장이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본다.
7. 번저
에도 번저는 아사히 히가시쿠보에 상저택, 시로카네 하야도조에 하저택이 있었고, 교토 번저는 산조도리 시모타치우리 아부라코지에, 오사카 번저는 나카노시마에 있었다. 에도 상저택의 터는 현재 롯폰기 힐즈(모리 정원)가 되었다.[1]
참조
[1]
서적
江戸三百藩大全 全藩藩主変遷表付
Kosaido Publishing
2015
[2]
서적
藩と城下町の事典―国別
Tokyodo Printing
2004
[3]
서적
Historical and Geographic Dictionary of Japan
Tuttle (reprint) 1972
[4]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1987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1987
[6]
문서
毛利家文書
大日本古文書 家わけ文書第8 毛利家文書之三
1591-03-13
[7]
문서
慶長5年の検地による石高
[8]
문서
慶長18年([[1613年]])、検地では53万9千石余を打ち出したが、山代地方(現[[岩国市]][[錦町 (山口県)|錦町]]・[[本郷村 (山口県)|本郷町]])では[[山代慶長一揆|一揆]]も起きていることや、[[広島藩]]主[[福島正則]]49万8000石とのつりあいなどを考慮して、幕府は、検地石高の7割である36万9千石を表高として公認した
[9]
문서
長府藩預義士一件
[10]
서적
名門水野家の復活 御曹司と婿養子が紡いだ100年
[11]
문서
長府毛利十四代記
下関市立長府博物館
[12]
문서
高林寺「清末藩は宗藩の長州藩の体制に組み込まれ、同一行動をとった」旨の案内板の説明あり
[13]
웹사이트
豊功神社のご案内
https://chofukankou.[...]
202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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