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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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토국은 옛 일본의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야마구치현 서부에 해당한다. 7세기 아나토 국과 아부 국을 합쳐 설치되었으며, 7세기 후반에 나가토 국으로 개칭되었다. 고대에는 한반도와 마주보는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외교와 방위의 요충지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야마구치현에 통합되었으나, 일부 조약에서 별도로 언급되는 등 특정 목적을 위해 존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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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토국 | |
---|---|
개요 | |
![]() | |
별칭 | 조슈 (Chōshū) |
행정 구역 | |
소속 | 산요도 |
영역 | 야마구치현 서쪽 절반 |
등급 | 중국 |
거리 | 원국 |
군 | 5군 40향 |
국부 |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 |
국분사 |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
국분니사 | (추정)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
이치노미야 | 스미요시 신사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
지리 | |
위치 | 현재의 야마구치현 서부 |
2. 연혁
나가토 국은 7세기에 아나토 고쿠조(国造, 율령제 도입 전 야마토 정권의 지방관)와 아부 고쿠조(阿武国造)의 영역을 합쳐 설치되었으며, 7세기 후반에 나가토 국으로 개칭되었다. 고대 수도는 시모노세키였지만, 에도 시대에는 조슈 번의 거점이 하기였다. 나가토는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로 모리 씨가 지배했다.
1871년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봉건 영지가 폐지되고 현이 설치되면서 스오국과 합쳐져 야마구치현이 되었다.[2] 나가토국은 1894년 일본과 미국, 영국 간의 조약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되는 등 일부 목적으로 존속했다.[2]
메이지 유신 이후 권력을 잡은 과두 정치는 조슈 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고인 등이 주도했다. 요시다 쇼인, 다카스기 신사쿠, 쿠사카 겐즈이 등도 유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일본 전함 ''나가토''는 이 국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 1. 명칭의 유래
나가토는 옛날에는 아나토(穴門)라고 불렸으며 아나토(穴戸)라고 쓰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다이카 6년 아나토의 고쿠시(国司)가 흰 꿩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덴지 4년 나가토 국이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사이에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나토라는 말은 간몬 해협을 가리키며, 일본 신화에도 「아나토가미(穴戸神)」라는 이름이 보인다.[2]2. 2. 고대
나가토는 옛날에는 아나토(穴門)라고 불렸으며, '아나토(穴戸)'라고 쓰기도 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다이카 6년(650년) 아나토의 고쿠시(国司)가 흰 꿩을 바쳤다고 한다. 덴지 4년(665년) '나가토 국'이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사이에 이름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아나토'라는 말은 해협(시모노세키 해협)을 가리키며, 일본 신화에도 '아나토가미(穴戸神)'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7세기에 아나토 고쿠조(国造, 율령제 도입 전 야마토 정권의 지방관)의 영역과 아부 고쿠조(阿武国造)의 영역을 합쳐 아나토 국이 설치되었다. 7세기 후반에 나가토 국으로 개칭되었다.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마주 보고 있어, 고대에는 북부 규슈와 함께 외교·방위상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다.
665년(덴지 천황 3년)에는 지쿠시 국의 오노 성과 키이 성과 더불어 나가토 국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성이 축조되었다.
이 시대의 주요 유적은 다음과 같다.
- 궤기 요지 (헤키(日置) 정 峠 산) - 고분 시대 후기부터 나라 시대
- 가마 나카무라 유적 - 야요이 시대 유적. 철재(てっさい)가 발굴됨
- 센자키 반도의 스쿠모(糘)즈카 고분군 - 마구, 무기, 호등(아부미) 4개
- 니시노키 횡혈묘
- 모리가스와(森ケ岨) 횡혈묘
- 무카츠쿠(向津具) 반도의 타마야시키 산림·유야(油谷) - 대륙에서 전래된 자루 달린 가는 칼
- 혼유야 고분 - 호등 1개
- 유멘 유적 - 야요이 시대 고지성 집락 유적. 1979년 발굴 조사
- 미야노 바바 유적 (기타나가토) - 히미코 시대 촌락 유적
- 니시쿠다 유적 - 고(つつみ)형 기대 2개
- 도이노하마 유적 (시모노세키시 호쿠호쿠 정) - 야요이 인골 대량 출토. "영웅"(돌 화살촉 11개, 상어 이빨 화살촉 2개가 꽂혀 있음)과 "갈매기를 안은 여자" 등
- 아야라기(綾羅木) 향 유적 - 아야라기 강 주변
- 닌바야마 고분 - 고분 시대 전기
- 시모노세키 교외 구릉 - 상자식 석관, 내행화문경(나이코카몬쿄), 관옥(쿠다타마), 덮개 활 모자(가이큐보), 1968년 발굴
2. 3. 중세
818년(고닌 9년) 3월 7일에 국사가 폐지되어 '''주전사'''로 개칭되어, 나가토의 행정・화폐 주조를 담당했다. 그 후 836년(쇼와 3년) 4월에 세이호 문사에게 나가토 수호 임관의 기록이 있어, 그 무렵에는 국사가 부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전소의 소재지는 시모노세키시 초후 오사카・안요지에 비정되고 있다.겐지와 헤이시가 권력 투쟁을 벌였던 시대 말기, 헤이시의 지행국이었던 중에서 코토 씨, 도요다 씨 양 씨족이 세력을 넓혔고, 1185년(겐랴쿠 2년)에는 단노우라 전투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276년 (건지 2년), 가마쿠라 막부가 원나라의 일본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나가토 탄다이가 설치되었다.
2. 4. 근세
1276년(건지 2년), 가마쿠라 막부가 원나라의 일본 침공에 대처하기 위해 나가토 탄다이를 설치하였다.스오국 야마구치를 본거지로 하는 오우치 씨가 슈고직이 되어 슈고다이로서 와시즈 씨나 나이토 씨가 맡았다. 이 오우치 씨는 규슈 중 부젠국, 지쿠젠국까지를 세력권으로 했지만, 후에 아키국의 모리 씨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하기에 번청을 둔 장주번의 소령이었다. 간에이 연간에는 바칸이 기타마에부네의 기항지로서 번영했고, 막말에는 메이지 유신의 거점이 되었다.
2. 5. 근대
1871년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봉건 영지가 폐지되고 현이 설치되면서 나가토국과 스오국이 합쳐져 야마구치현이 되었다.[2] 동시에 나가토국은 일부 목적을 위해 계속 존재했는데, 예를 들어 1894년 일본과 미국, 영국 간의 조약에서 나가토국이 명시적으로 인정되었다.[2]일본사에서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권력을 잡은 과두 정치는 조슈 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고인 등이 있어 강력한 대표성을 가졌다. 유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다른 출신 인물로는 요시다 쇼인, 다카스기 신사쿠, 쿠사카 겐즈이 등이 있다.
3. 주요 시설
스미요시 신사는 나가토의 주요 신사(''이치노미야'')였다.[3]
3. 1. 국부(国府)
도요우라군에 있었다. 현재의 시모노세키시 조후 미야노우치 마을의 이미노미야 신사 부근으로 추정되지만,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1]조후(나가토 국부)라고 불리기 전에는 아나토의 도요우라 궁(고지키, 일본서기에 기재)이라고 불렸다.[1]
3. 2. 국분사(国分寺) 및 국분니사(国分尼寺)
나가토 국분사 터는 시모노세키시 난부정에 있다.[3]
3. 3. 신사(神社)
스미요시 신사는 나가토국의 주요 신사(''이치노미야'')였다.[3]『엔기시키 신명장』에는 대사 3좌 1사·소사 2좌 2사의 총 5좌 3사가 기재되어 있다. 대사 1사는 묘진대사이다. 자세한 내용은 나가토국의 식내사 일람을 참조.
군 | 신사명 | 비고 |
---|---|---|
도요우라군 | 스미요시니마스 아라미타마 신사 3좌 (현 스미요시 신사) | 묘진대사 |
도요우라군 | 이마미야 신사 | |
도요우라군 | 모리야 신사 |
- 소샤: 이마미야 신사 경외 섭사·수궁사(시모노세키시 조후 소샤정) 경내에 있다.
- 이치노미야: '''스미요시 신사'''
- 니노미야: 이마미야 신사
- 산노미야: 류오 신사 (우바야 신사, 시모노세키시 오자 기미시모)
4. 영역
메이지 유신 직전의 나가토국 영역은 시모노세키시, 하기시, 나가토시, 미네시, 산요오노다시, 아부군, 야마구치시의 일부(구 아토정), 우베시의 대부분(아스토피아·이마무라키타·이마무라미나미·가메우라 3초메·가메우라 4초메·도코나미·니시키하·히가시키하 제외)에 해당한다.
4. 1. 군(郡)
아부군(阿武郡) - 1896년 4월 1일 미시마군(見島郡)을 흡수[1]厚狭郡|아사군일본어 - 해체[1]
美祢郡|미네군일본어 - 해체[1]
미시마군(見島郡) - 1896년 4월 1일 아부군(阿武郡)에 합병[1]
大津郡|오쓰군일본어 - 해체[1]
豊浦郡|도요우라군일본어 - 해체[1]
4. 2. 에도 시대의 번(藩)
에도 시대에 나가토국은 모리 씨가 지배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은 하기에 번청을 둔 조슈 번(하기 번, 모리 번)을 다스렸으며, 그 소령은 369000석이었다.[2] 간에이 연간에는 바칸이 기타마에부네의 기항지로 번영했고, 막말에는 메이지 유신의 거점이 되었다.조슈 번 외에도 다음과 같은 번이 존재했다.
번 이름 | 석고 변화 |
---|---|
조후 번(조슈 번 지번) | 6만 석 → 5만 석 → 3만 8천 석 → 4만 7천 석 → 5만 석 |
기요스에 번(조후 번 지번) | 1만 석 |
5. 주요 전투
- 1185년: 단노우라 전투, 겐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미나모토노 노리요리) x 헤이케 (타이라노 무네모리, 타이라노 토모모리)
- 1551년: 다이네이지의 변, 스에 (스에 하루카타, 나이토 오키모리, 스기 시게노리) x 오우치 (오우치 요시타카, 레이제이 타카토요)
- 1555년 - 1557년: 보초 경략, 모리 (모리 모토나리, 모리 타카모토, 키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x 오우치 (오우치 요시나가, 나이토 타카요, 스기 타카야스, 야마자키 오키모리)
- 1864년: 시모노세키 전쟁, 영·프·네·미 연합군 x 조슈 번
- 1864년 - 1866년: 조슈 정벌, 조슈 번 x 에도 막부
6. 인물
메이지 유신 이후 권력을 잡은 과두 정치 세력에는 조슈 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기도 고인 등이 있었다.[2] 이들은 메이지 유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 외에도 요시다 쇼인,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등이 이 지역 출신이다.
6. 1. 국사(国司)
- 미와노 타카이치마로: 다이호 2년(702년) 임관
- 츠키모토 나테마로: 엔랴쿠 18년(799년) 임관[1]
- 후지와라노 토요히코: 코닌 6년(815년) 임관[2]
- 키요미네노 몬츠구: 조와 3년(836년) 임관[3]
- 후지와라노 무네요시: 조와 4년(837년) 임관
- 히로무네 왕: 조와 8년(841년) 임관
- 타카하시 키요노: 조와 12년(845년) 임관
- 키노 마오카: 카쇼 2년(849년) 임관
- 사네사다 왕: 닌쥬 3년(853년) 임관
- 젠세노 토요미즈: 텐안 3년(857년) 임관
- 타치바나노 타카나리: 텐안 3년(857년) 임관
- 키노 하루츠네: 조간 3년(861년) 임관
- 후지와라노 야스네: 조간 9년(867년) 임관
- 키노 마오카: 조간 11년(869년)
- 소노 타케기무라: 간교 3년(879년) 이임
- 타치바나노 시젠: 간교 6년(882년) 임관
- 스가와라노 무네오카: 닌나 4년(888년) 임관
- 후지와라노 타메츠네
- 이주인 타다쿠니
- 이토 모리마사
- 시키부 미츠나가
- 오가사와라 나리스케
- 카사마 토키토모
- 무라이 사다카츠
6. 2. 수호(守護)
나가토국의 슈고는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에도 시대에 걸쳐 다양한 가문이 맡았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는 사사키 다카쓰나, 사사키 사다쓰나, 호조 무네요리, 호조 도키무라 등이 슈고를 역임했다.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아토 무사네, 오우치 히로요[1], 오우치 모리미[2], 오우치 마사히로[3], 모리 다카모토 등이 슈고였다.
에도 시대에는 조슈 번의 모리 히데나리, 모리 요시나리, 모리 모토노리를 비롯하여, 휴가 타카나베 번의 아키즈키 타네나가, 아키즈키 타네하루 등 여러 가문의 번주들이 슈고를 겸임했다. 이외에도 안도 노부마사, 이시카와 야스미치, 이타쿠라 시게사토 등 여러 인물들이 슈고를 맡았다.
6. 2. 1. 가마쿠라 막부
6. 2. 2. 무로마치 막부
- 1334년 ~ 1348년: 아토 무사네
- 1358년 ~ 1374년: 오우치 히로요[1]
- 1401년 ~ 1431년: 오우치 모리미[2]
- 1465년 ~ 1495년: 오우치 마사히로[3]
- 1562년 ~ 1563년: 모리 다카모토
6. 3.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오우치 씨는 1358년부터 1551년까지 나가토 국의 슈고 다이묘 가문이었다. 이 가문에는 오오우치 히로요, 오오우치 요시히로, 오오우치 모리미, 오오우치 모치요, 오오우치 노리히로, 오오우치 마사히로, 오오우치 요시오키, 오오우치 요시타카 등이 속한다. 이들은 슈고다이(守護代)로 스에 히로나가, 나이토 모리사다, 와시즈 모리노리, 나이토 아리사다, 모리요, 히로노리, 히로하루, 오키모리 등을 두었다.[1]스에 씨는 오우치 가문의 슈고다이를 맡았던 가문이다. 스에 히로나가는 1358년부터 1401년까지 오우치 가문의 슈고다이를 역임했다.[1]
모리 씨는 1562년부터 1563년까지 나가토 국의 슈고 다이묘 가문이었다. 모리 타카모토가 이 가문에 속한다.[1]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2]
간행물
A digest of international law as embodied in diplomatic discussions, treaties and other international agreements
https://books.google[...]
US Department of State
1906
[3]
웹사이트
Nationwide List of Ichinomiya
http://eos.kokugakui[...]
201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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