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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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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슈 번은 센고쿠 시대 모리 모토나리의 후손들이 세운 일본의 번으로, 현재의 야마구치현에 위치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영토가 축소되었으나, 반 도쿠가와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메이지 유신의 주요 세력이었다. 조슈 번은 무라타 세이푸, 요시다 쇼인, 다카스기 신사쿠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 덴포 개혁과 서양식 군제 개혁을 통해 번의 재정을 강화하고 근대화를 추진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사쓰마 번과 연합하여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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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번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정식 명칭야마구치 번 (1862–1871) / 조슈 번 (1600–1862)
일반 명칭조슈 번
소속
국가일본
위치나가토
오늘날야마구치현
수도하기성 (1600–1862) / 야마구치성 (1862–1871)
존속 기간1600년 – 1871년
시대에도 시대
문장모리 가문의 가몬
모리 가문의 문장
조슈 번의 깃발
정치
역대 번주모리 데루모토 (초대) / 모리 모토노리 (마지막)
역사
시작1600년
종료폐번치현 (1871년)
관련 정보
주요 인물모리 데루모토 / 모리 모토노리
주요 전투보신 전쟁
특징국주 격
외양 다이묘
별칭하기 번 / 주방 야마구치 번
관련 정치 세력조슈 벌 / 번벌 정치
로마자 표기Chōshū-han / Hagi-han / Yamaguchi-han

2. 역사

센고쿠 시대 모리 모토나리의 후손들이 조슈 번을 세웠다. 모토나리는 주고쿠 지방 대부분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사망 후 그의 손자 모리 데루모토다이묘가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맹을 맺었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이시다 미쓰나리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충돌했을 때, 데루모토는 도요토미 가문 편이었지만 명확히 편을 들지 않았다. 깃카와 히로이에는 이에야스와 협상해 모리 군 15,000명을 불참시켰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15,600명을 이끌고 이에야스에게 붙었다. 데루모토는 오사카 성을 무혈 양도했다.

이러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모리 씨는 아키에서 나가토(조슈)로 이전되었고, 영토는 120만 석에서 36만 9천 석으로 급감했다. 이는 큰 배신으로 여겨져 조슈는 반 도쿠가와 활동의 온상이 되었다. 매년 설날 회의에서 가신들은 다이묘에게 막부 타도 시기를 물었고, 다이묘는 "아직 아니다. 막부는 아직 너무 강하다"라고 답했다.

이 꿈은 약 260년 후, 조슈 번이 사쓰마 번과 동조하여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면서 실현되었다.

1869년(메이지 2년) 11월, 상비군 편성에 관한 불만으로 야마구치 번에서 반란(탈대소동)이 일어났지만, 기도 다카요시가 진압하였다.[18]

메이지 3년 9월 10일, 부번현삼치제에 의해 "번"이 정식 호칭이 되었고, 야마구치 번은 야마구치에 번청을 두어 "야마구치 번"으로 불렸다.[3]

메이지 4년 6월, 야마구치 번은 도쿠야마 번과 합병하고, 같은 해 7월 14일 폐번치현으로 야마구치 번은 폐지되어 야마구치현이 되었다.[19] 모리 가 당주 모토토쿠는 번지사 면관 후 도쿄로 이주하여 공작에 서임되고 제15 국립은행 총재와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였다.[20]

2. 1.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센고쿠 시대모리 모토나리의 후손들이 조슈 번을 세웠다. 모토나리는 주코쿠 지방 대부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모토나리 사후, 그의 손자 모리 데루모토다이묘가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전략적 동맹을 맺었다.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이시다 미쓰나리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충돌했다. 모리 데루모토는 도요토미 가문의 동맹이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명확하게 도요토미 편에 서지 않았다.

모리 데루모토와 관련된 여러 요인들 때문에 도요토미 군은 전투에서 패했다.

  • 그의 사촌 깃카와 히로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밀리에 거래를 맺어 전투 중 1만 5천 명의 모리 군이 활동하지 못하게 했다.[5]
  • 그의 양자 사촌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와 그의 1만 5,600명의 병사들은 이시다를 배신하고 도쿠가와 측에 합류했다.[5]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보장을 받은 테루모토는 싸움 없이 오사카성을 포기했다.[5]


이러한 활동 부진에도 불구하고, 모리 씨는 아키 국에서 나가토 국(조슈)으로 이전되었고, 영토는 120만 석에서 36만 9천 석으로 급감했다.[5]

모리 모토나리


모리 가문은 가마쿠라 막부의 중신이었던 오에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인 모리 스에미츠를 시조로 한다. 전국 시대에 모리 모토나리가 등장하면서, 오우치 씨 영지의 대부분과 아마고 씨의 영지를 병합하여, 최전성기에는 주고쿠도 10개 국과 규슈 북부 일부를 영토로 하는 최대급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모토나리의 손자인 모리 데루모토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고, 1591년 3월, 아키, 스오, 나가토, 비젠 반국, 비고, 호키 반국, 이즈모, 이와미, 오키의 112만 석(실제로는 200만 석 초과)을 안도받았다.[5] 또한 거점을 요시다구루야마성에서 히로시마성으로 옮긴다.[5]

테루모토는 히데요시 말기에 오대로 중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 측에 가담하여 서군의 총대장으로 오사카성 서쪽 마루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촌 동생인 깃카와 히로이에의 배신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모리 가의 영지 안전을 약속받았다.[5]

하지만 서군 패배 후, 이에야스는 테루모토가 서군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서한을 압수하여 영지 안도 약속을 파기하고 모리 가를 감봉 처분했다. 테루모토는 은퇴하고, 그의 아들 모리 히데나리에게 스오, 나가토 2개 국 29만 8480석을 주었다(방쵸 감봉).[8]

2. 2. 에도 시대

一文字に三つ星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모리 모토나리의 후손이 조슈 번을 통치했다. 모토나리는 주고쿠 지방 전체에 세력을 확장해 120만 석의 영토를 차지했다. 그의 사후 손자 모리 데루모토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맹을 맺었으나,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로 이어졌다. 데루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밀 거래를 한 사촌 깃카와 히로이에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 그리고 오사카 성을 넘겨준 일로 인해 영토가 아키에서 나가토로 이전되고 120만 석에서 36만 9천 석으로 크게 줄었다.

이 사건은 모리 가문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졌고, 조슈는 반 도쿠가와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매년 설날 회의에서 가신들은 다이묘에게 막부 타도 시기를 물었고, 다이묘는 "아직 아니다. 막부는 아직 너무 강하다"라고 답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조슈 번은 사쓰마 번과 협력하여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1865년, 조슈 번은 나가사키의 글로버 상회를 통해 사쓰마 번 명의로 군함 유니온 호(ja)를 구입했다. 이들은 보신 전쟁에서 막부군과 싸웠고, 1867년부터 1869년까지 조슈 번의 군대는 일본 제국 육군의 기반이 되었다. 이 동맹으로 조슈와 사쓰마 출신들은 메이지 시대다이쇼 시대에 걸쳐 정치,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모리 씨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 후 산요도·산인도 8개국에서 안키(히로시마)를 중심으로 방장(防長) 2개국으로 영토가 축소되었다. 이후 250년 이상 하기의 하기 성에 번청을 두어 장주번(長州藩)이라 불렸으며, 야마구치의 야마구치 성으로 옮긴 후에도 장주번으로 불렸다.

하기 시대를 '''하기 번'''(萩藩), 야마구치 시대를 '''야마구치 번'''(山口藩)이라고도 한다. 메이지 초기부터 4년까지 부번현삼치제 하에서는 야마구치 번이라고 칭했다.[3] 또한, 모리 번(毛利藩)이라고도 불린다.

막말에는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과 함께 토막 운동의 중심이 되어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요시다 쇼인, 다카스기 신사쿠 등이 중심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메이지 정부기도 다카요시, 오무라 마스지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4]

히데나리가 형식상 초대 번주였으나, 어렸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리 휘모리와 중신들이 번정을 총괄했다. 새로운 성터 후보지로 방부, 야마구치, 하기가 상주되었으나, 막부는 하기에 성을 쌓도록 명령했다. 하기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일본해에 면한 낙후된 땅이었다.

게이초 12년 영토가 4분의 1로 줄어든 모리 씨는 새로운 검지를 실시하여 게이초 15년 53만 석을 산출했다. 그러나 막부는 모리 가문의 석고가 50만 석을 넘는 것에 놀라, 여러 이유를 들어 36만 9411석 3두 1승 5합을 표고(表高)로 공인했다.

이후 이 표고는 메이지 유신까지 변하지 않았지만, 신전 개발 등으로 실고(裏高)는 증가했다. 간에이 2년에는 본번과 지번을 합쳐 66만 석, 조쿄 3년에는 본번 영토만 63만 석, 호레키 11년에는 본번 영토만 약 71만 석을 검출했다. 막말기에는 내검고(內檢高)가 100만 석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도 시대 중기, 제7대 번주 모리 시게나리는 번 채무 처리와 신전 개발 등 경제 정책(보력 개혁)을 실시했다.

제11대 번주 모리 나리모토 시대인 분세이 8년에는 호적 제도가 창설되어 메이지 정부에 계승되었다. 분세이 12년에는 산물 회소를 설치하고 유통 통제를 실시했으나, 농민 반대로 덴포 3년 대규모 일기가 발생했다.[9] 번정 개혁이 실시되었고, 이는 메이지 유신 수행의 계기가 되었다.

덴포 8년 4월 27일, 모리 요시치카가 제13대 번주에 취임하고 무라타 세이후를 등용하여 덴포의 개혁을 실시했다. 재정 재건과 함께 시모노세키 항에 교역을 활성화시키는 공영 공익 기업국을 설치하여 번은 큰 재력을 얻었다.

산업 혁명을 달성한 서양 열강이 일본 근해에 세력을 뻗치자, 조슈 번은 양학을 적극 수용하고 서양 의학을 가르치는 의학소 등을 설립했다. 페리 내항 후에는 슈호 마사노스케가 등용되어 서양식 군제 개혁(안세이 개혁, 안세이 군제 개혁)이 실시되었다.

막말이 되자 조슈 번은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요시다 쇼인쇼카손주쿠를 중심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에바라 잇세이 등 많은 인물들이 쇼카손주쿠에서 수학했다.

분큐 3년 4월(旧暦), 야마구치에 새로운 번청을 건설하고 "야마구치 세이지도(山口政事堂)"라 칭했다. 게이친은 하기 성에서 야마구치로 이동하여 막부에 정식으로 신청서를 제출, 야마구치 번이 성립했다(야마구치 이전). 같은 해,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 번은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시모노세키 전쟁도』(부분) 후지시마 조쿄 필, 시모노세키시립 장후박물관 소장


같은 해, 조슈 번은 5월 10일(旧暦)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는 열강 군함에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4개국 연합 함대는 조슈 번에 무력 행사를 감행, 겐지 원년 8월(旧暦)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했다. 조슈 번은 열강의 압도적인 화력에 항복하고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양이론의 불가능함이 인식되고, 막부 타도를 목표하는 번론이 강해졌다.[10]

다카스기 신사쿠분큐 3년 6월(旧暦) 신분에 관계없이 참가할 수 있는 군대 기병대를 창설했다.[11]

겐지 원년, 이케다야 사건금문의 변으로 타격을 받은 조슈 번에 막부는 제1차 조슈 정벌군을 보냈다. 조슈 번에서는 막부 공순파(속론파)가 실권을 장악하고 주전파는 숙청되었으며, 번주 부자는 긴신하고 막부에 항복했다. 야마구치 성을 일부 파괴하고 하기 성으로 물러났으며, 번주 부자는 도쿠가와 가문의 이름을 박탈당하고 개명했다.

게이오 원년, 다카스기 신사쿠기병대 등 조슈 번 제대의 힘을 얻어 거병, 속론파를 무찔렀다(고산사 거병). 이후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정의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번론은 무비 공순으로 전환되었다. 무라타 구라로쿠(오무라 마스지로)가 등용되어 군제 개혁을 실시, 총기와 함선 등 장비를 서양식으로 갖추고 막부에 대비했다.[12]

같은 해, 사카모토 료마의 중개로 영국 군함 유니온 호를 사쓰마 번 명의로 구입했고,[13] 사쓰마 번과의 관계가 개선되어 게이오 2년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고마쓰 기요카도 등과 사쵸 동맹을 체결, 막부 타도 기운이 높아졌다.[14] 5월(旧暦)에는 야마구치 번이 다시 성립한다.

같은 해 6월(旧暦), 막부는 제2차 조슈 정벌을 강행했으나, 다카스기 신사쿠오무라 마스지로의 군략으로 조슈 번은 막부군을 격파하고 승리했다(제2차 막장 전쟁). 7월(旧暦) 이에모치 사망으로 막부군은 철수, 막부의 위신은 약해지고 대정봉환, 왕정복고로 이어졌다.[14]

2. 3. 메이지 시대 초기

1865년, 조슈 번은 나가사키에 설립된 자딘 매더슨의 대리점인 글로버 상회로부터 사쓰마 번 명의로 유니온 호(ja)라는 군함을 구입했다.[15] 이들은 보신 전쟁에서 오에쓰 열번동맹, 아이즈, 에조 공화국을 포함한 구 쇼군의 군대와 싸웠다. 1867년부터 1869년까지 조슈 번 군대는 일본 제국 육군의 기초가 되었다. 이 동맹 덕분에 조슈와 사쓰마 출신들은 메이지 시대다이쇼 시대까지 정치적,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도바 후시미 전투(도바·후시미 전투). 왼쪽은 구마모토 번 등의 막부군, 오른쪽은 조슈 번 등의 신정부군


보신 전쟁(보신 전쟁)에서의 조슈 번의 깃발
[15]

게이오 3년(1867년) 10월(음력), 막부의 권위가 추락하는 가운데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실시하고 에도 막부는 붕괴하였다.

대정봉환을 받아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왕정복고의 대호령(大号令)이 발포되어 신정부가 발족되었다. 사쓰마 번의 오쿠보 도시미치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참여(후에 참의)로 참가하여 신정부의 중추 인물이 되었다(다카스기 신사쿠는 대정봉환 직전에 사망). 기도는 오가조의 맹서의 기초를 맡았고, 봉건 영주 제도의 개혁 필요성을 오쿠보에게 진언하여 1869년 판적봉환으로 이어졌다. 1871년 폐번치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16]

보신 전쟁에서는 번사 오무라 마스지로가 우에노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17] 아이즈 전투와 그 전후 처리에 의해 아이즈 번(아이즈와카마쓰 시)과 조슈 번(하기 시) 사이에 복잡한 감정이 남아 있다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조슈 번군은 북월 전투에서 진군이 늦었기 때문에 아이즈 전투에서는 전투를 하지 않았고, 점령 통치를 지휘하는 입장에도 있지 않았다.

1869년(메이지 2년) 11월(음력), 상비군 편성에 관한 불만으로 야마구치 번 여러 부대에 의한 반란(탈대소동)이 일어나 한때 야마구치 번청이 포위되었지만, 기도 다카요시가 상비군을 지휘하여 진압하였다.[18]

3. 역대 번주

長州藩일본어의 역대 번주는 다음과 같다.

대수이름재위 기간
0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일본어1600년 ~ 1623년
1모리 히데나리|毛利秀就일본어1623년 ~ 1651년
2모리 쓰나히로|毛利綱広일본어1651년 ~ 1682년
3모리 요시나리|毛利吉就일본어1682년 ~ 1694년
4모리 요시히로|毛利吉広일본어1694년 ~ 1707년
5모리 요시모토|毛利吉元일본어1707년 ~ 1731년
6모리 무네히로|毛利宗広일본어1731년 ~ 1751년
7모리 시게타카|毛利重就일본어1751년 ~ 1782년
8모리 하루치카|毛利治親일본어1782년 ~ 1791년
9모리 나리후사|毛利斉房일본어1791년 ~ 1809년
10모리 나리히로|毛利斉熙일본어1809년 ~ 1824년
11모리 나리모토|毛利斉元일본어1824년 ~ 1836년
12모리 나리토|毛利斉広일본어1836년
13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일본어1837년 ~ 1869년
14모리 모토노리|毛利元徳일본어1869년



모리 모토나리의 후손들은 동해에 인접한 하기에 근거를 두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영지가 크게 줄어들었다.[2] 이들은 에도 막부 말기에 사쓰마 번과 연합하여 막부를 타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 경제

게이초(慶長) 12년(1607년) 모리 씨는 영토가 4분의 1로 줄어든 것에 대응하여 새로운 토지 조사(검지)를 실시, 게이초 15년(1610년) 53만 석의 수확량을 산출했다. 그러나 막부의 혼다 마사노부는 모리 가문이 50만 석의 신분에 맞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수확량의 7할인 36만 9411석 3두 1승 5합을 공식적인 수치(표고)로 인정했다.[9] 이 수치는 메이지 유신까지 유지되었으나, 새로운 경작지 개발 등으로 실제 수확량(실고)은 증가했다. 1625년의 두 번째 검지에서는 본번과 지번을 합쳐 66만 석, 1686년 본번 영토만의 검지에서는 63만 석, 1761년에는 본번 영토 검지에서만 약 71만 석이 산출되었다. 막부 말기에는 실제 수확량이 100만 석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120만 곡에서 36만 9천 곡으로 감소한 결과, 조슈 번은 큰 재정 적자를 겪었지만, 막부 통제 지역을 제외하고는 일본에서 7번째로 큰 번이었다.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번은 가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엄격한 정책을 시행했다.


  • 모든 가신들의 영지 대폭 축소
  • 토지 대신 쌀로 봉록을 받는 가신 증가
  • 일부 가신 해고 및 농업 종사 장려


높은 세금으로 인해 농민들은 산속에 비밀 농장을 경작했다. 번은 새로운 토지 조사를 통해 숨겨진 농장들을 발견하여 세금을 부과하고, 무역에 대한 엄격한 정책을 시행했다.

또한, 종이, 쌀, 소금, 밀랍 등 수익성이 높은 "사백(四白)" 무역을 번이 통제하는 법률을 통과시켜 무역 이윤과 세수의 상당 부분을 번 재정으로 확보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번 재정을 강화하고 다이묘의 영토 통제력을 높였으나, 농민과 사무라이의 반발을 사 잦은 반란을 야기했다.

에도 시대 중기, 제7대 번주 모리 시게나리는 번 채무 처리와 신전 개발 등의 경제 정책(보력 개혁)을 실시했다.

제11대 번주 모리 나리모토 시대인 1825년에는 조슈 번에서 호적 제도가 창설되었다. 1829년에는 산물 회소를 설치하고 촌역인에게 특권을 부여하여 유통을 통제했으나, 번 전매제 강화는 농민들의 반대를 불러일으켜 1831년 대규모 봉기가 발생했다.[9]

1836년 모리 요시치카가 제13대 번주에 취임하자, 무라타 세이푸를 등용하여 덴포의 개혁을 실시했다. 검약으로 재정을 재건하고, 시모노세키 항에 “시모노세키 물산 총회소”를 설치하여 교역을 활성화함으로써 번은 큰 재력을 확보했다.

모리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 감봉과 검지에 따른 과세 인상으로 초기에는 7할의 고율 세금을 부과했다. 이로 인해 "야마시로 일기"와 같은 봉기가 일어나고 "도망 농민"[32]이 속출했다.[33] 막부와의 협상을 거쳐 36만 9천 석의 정액이 확정된 이후에는 "5할 5할"로 안정되었다.

조슈 번의 부채는 1837년 153만 냥(은으로는 10만 5천 관)에 달했다. 1843년 무라타 세이푸를 번정 개혁 책임자로 임명하고, 무사 봉록을 절반으로 줄이고, 상인에 대한 부채를 저리 또는 무이자로 장기간 분할 상환하는 정책("37년 할부 완제 방식")을 시행했다. 또한 "보육방"이라는 별도 회계 제도를 마련하여 재정 개혁을 추진, 1868년에는 부채가 91만 냥(은으로는 6만 관)으로 감소했다.[34]

시모노세키 통과 선박에 통행세(운상은)를 징수하는 "월하방" 제도를 설치하고, 시라이시 마사이치로 등을 상인 출신 무사로 발탁하여 담당하게 했다. 또한 밀랍, 한지, 소금 등을 전매하는 "삼백 정책"도 시행했다.[35]

5. 정치

모리씨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토가 축소되면서 조슈번이 성립되었다. 이후 250년 이상 아부군 하기하기성에 번청을 두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조슈번(長州藩)이라고 불렸으며, 번청을 요시후쿠군 야마구치의 야마구치성(야마구치 정사당)으로 옮긴 이후에도 여전히 조슈번이라고 불렸다.

에도 시대 중기에는 제7대 번주 毛利重就(모리 시게나리)가 번의 채무 처리와 신전 개발 등의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제11대 번주 毛利斉元(모리 나리모토) 시대에는 호적 제도가 창설되었고, 이는 메이지 정부에 계승되어 전국적인 호적 제도로 이어졌다. 또한 산물 회소를 설치하고 유통 통제를 실시했으나, 이는 농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대규모 일기가 발생하기도 했다.[9]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번정 개혁이 실시되었고, 이는 메이지 유신 수행의 계기가 되었다.

1836년 4월 27일, 毛利慶親(모리 요시치카)가 제13대 번주에 취임하면서 村田清風(무라타 세이푸)를 등용하여 덴포의 개혁을 실시했다. 검약으로 재정을 재건하고, 시모노세키 항에 교역을 활성화시키는 공영 기업국을 설치하여 번은 큰 재력을 얻었다.

산업혁명을 달성한 서양 열강이 일본 근해에 세력을 뻗치자, 조슈번은 국제 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하여 양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페리 내항 후에는 周布政之助(슈부 마사노스케)가 등용되어 서양의 근대적 군제를 본뜬 군제 개혁이 실시되었다.

막말에는 요시다 쇼인쇼카손주쿠를 중심으로 존왕양이 사상을 가진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막말에서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약했다.

1863년 4월(旧暦), 야마구치에 새로운 번청을 건설하고 "야마구치 세이지도(山口政事堂)"라고 칭했다. 게이친(慶親)은 하기성(萩城)에서 야마구치로 이동하여 막부에 정식으로 신청서를 제출했고, 야마구치번(山口藩)이 성립했다. 같은 해, 8월 18일의 정변으로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같은 해,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는 열강 군함에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4개국 연합 함대는 조슈번에 무력 행사를 감행했고, 1864년 8월(旧暦)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했다. 조슈번은 항복하고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양이론(攘夷論)의 불가능함이 인식되었고, 막부 타도를 목표로 하는 번론(藩論)이 강해졌다.[10]

다카스기 신사쿠1863년 6월(旧暦) 신분에 관계없이 참가할 수 있는 군대인 기병대를 창설했다.[11]

1864년, 이케다야 사건, 금문의 변으로 타격을 받은 조슈번에 대해 막부는 제1차 조슈 정벌군을 보냈다. 조슈번은 막부에 항복했고, 번주 부자는 각각 도쿠가와가(徳川家)로부터 받은 이름을 박탈당했다.

1865년, 다카스기 신사쿠기병대 등과 함께 거병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번론(藩論)은 무비 공순(武備恭順)으로 전환되었다. 무라타 구로베(오무라 마스지로)가 등용되어 군제 개혁이 실시되었고, 막부의 재정에 대비했다.[12]

같은 해, 사카모토 료마의 중개로 영국 군함을 사쓰마번 명의로 구입했고,[13] 1866년에는 사쓰마번과 사쵸 동맹을 체결하여 막부 타도의 기운이 높아졌다.[14]

같은 해 6월(旧暦), 막부는 제2차 조슈 정벌을 강행했지만, 조슈번은 막부군을 격파하고 제2차 막장 전쟁에서 승리했다. 막부의 위신은 약해지고, 대정봉환, 왕정복고로 이어졌다.[14]

1867년 10월(음력), 도쿠가와 케이키대정봉환을 실시하고 에도 막부는 붕괴하였다.

신정부에는 사쓰마 번의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참여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기도는 오가조의 맹서의 기초를 맡았고, 판적봉환폐번치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16]

보신 전쟁에서는 번사 오무라 마스지로가 우에노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17]

1869년 11월(음력), 탈대소동이 일어났지만, 기도 다카요시가 진압하였다.[18]

1870년 9월 10일(음력), 부번현 삼치제(府藩県三治制)에 의해 "번(藩)"이 정식 호칭이 되었고, 야마구치 번은 "야마구치 번"을 정식 명칭으로 하게 되었다.[3]

1871년 6월(음력), 야마구치 번은 도쿠야마 번과 합병하고 같은 해 7월 14일(음력) 폐번치현으로 야마구치 현(山口県)이 되었다.[19] 모리 가(毛利家) 당주 모토토쿠(元徳)는 공작(公爵)에 서임되어 제15 국립은행 총재와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였다.[20]

6. 사상과 문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모리씨는 영지가 축소되어 조슈번이 성립되었다. 이후 250년 이상 하기하기성을 두었기 때문에 장주번(長州藩)이라고 불렸으며, 야마구치의 야마구치성으로 옮긴 이후에도 장주번이라고 불렸다. 하기 시대를 '''하기번'''(萩藩), 야마구치 시대를 '''야마구치번'''(山口藩)이라고도 한다.

막말에는 사쓰마번과 함께 토막 운동의 중심이 되어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요시다 쇼인, 타카스기 신사쿠 등이 중심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키도 다카요시, 오무라 마스지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인재를 메이지 정부에 배출했다.[4]

에도 시대 중기에는 제7대 번주 毛利重就(모리 시게나리)가 번 채무 처리와 신전 개발 등의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제11대 번주 毛利斉元(모리 나리모토) 시대에는 호적 제도가 창설되었고, 이는 메이지 정부에 계승되어 전국적인 호적 제도로 이어졌다. 덴포 3년(1831년)에는 영내에서 대규모 일기가 발생하기도 했으나,[9] 번정 개혁을 통해 메이지 유신 수행의 길을 걷게 되었다.

덴포의 개혁을 통해 재정 재건을 도모하고, 시모노세키 항에 교역을 활성화시키는 공영 기업국을 설치하여 큰 재력을 얻었다. 또한, 서양 학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양 의학을 가르치는 의학소 등을 설립했다. 페리 내항 후에는 서양의 근대적 군제를 본뜬 군제 개혁이 실시되었다.

막말에는 요시다 쇼인쇼카손주쿠에서 많은 번사들이 존왕양이를 이념적 축으로 한 병학과 사학을 배웠다. 문하생으로는 타카스기 신사쿠, 쿠사카 겐스이,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막말에서 메이지 시대에 활약한 인재들이 있었다.

1863년에는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는 열강의 군함에 포격을 가했으나,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패배하고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이론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번 내부에 퍼졌고, 막부 타도를 목표하는 번론이 강해졌다.[10] 타카스기 신사쿠는 신분에 관계없이 참가할 수 있는 군대인 기병대를 창설했다.[11]

1864년 금문의 변으로 타격을 받은 조슈번은 막부로부터 제1차 조슈 정벌을 받았으나, 타카스기 신사쿠가 고잔지 거병을 일으켜 정의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무비 공순으로 전환했다. 오무라 마스지로의 주도로 군제 개혁이 실시되었고, 사카모토 료마의 중개로 사쓰마번과의 관계가 개선되어 사쓰마삿초 동맹을 체결했다.[14]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 막부군을 격파하고 승리하면서 막부의 위신은 약해지고, 대정봉환, 왕정복고로 이어졌다.[14]


  • 조슈번에서는 막부 타도가 국시라는 소문이 있었다. 새해 하례식에서 가로가 번주에게 막부 타도 기회를 묻고, 번주가 시기상조라고 답하는 관례가 있었다는 속설이 있으나,[21][22] 2000년 당시 모리 가 당주는 이를 부정했다.[23]
  • 히로사키 번 중신이었던 야마가 소스이에게 요시다 쇼인 등 많은 조슈 번사가 사사했고,[24] 타카스기 신사쿠, 쿠사카 겐스이, 기도 다카요시 등 쇼인 문하생들은 메이린칸, 쇼카손쥬쿠에서 야마가류를 습득했다.[25]
  • 조슈번은 고사이 상황·레이겐 천황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던 기라 요시아츠에게 동정적이었으며, 지번인 초후 번이 아카호 낭시를 엄하게 다룬 것을 용인했다.[27]
  • 조슈번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작품을 다수 구입했고, 지금도 하기에 많이 남아 있다.[29] 호쿠사이는 겐로쿠 아코 사건에서 죽임을 당한 고바야시 헤이하치로의 증손이었다.[30]
  • 메이린칸1718년 모리 요시모토에 의해 하기에 개설되었다. 야마구치에 번청이 옮겨졌을 때는 분관이 생겨 병립하게 되었다. 하기 메이린칸은 구내에 하기 시립 메이린 소학교가 건설되었고, 터와 유구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7. 주요 인물


  • 요시다 쇼인 (1830–1859): 많은 개혁가들의 교육자이자 스승.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통해 메이지 유신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의 제자들은 막부 타도와 메이지 유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4]
  • 다카스기 신사쿠 (1839–1867): 메이지 유신에 크게 기여했으며,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군대인 기병대(奇兵隊)를 창설했다.[11]
  • 키지마 마타베이 (1817–1864): 검객으로, 금문사변에 참여했다.
  • 쿠니시 시나노 (1842–1864): 금문사변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할복했다.
  • 기도 다카요시 (기도 고인, 1833–1877): 바쿠마쓰 시대의 개혁가이자 유신삼걸 중 한 명. 사쓰마 번과의 사쵸 동맹 체결을 주도하여 막부 타도 운동을 이끌었으며, 메이지 신정부 수립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4]

참조

[1] 서적 Handbook to Life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2005
[2] 웹사이트 家系リスト/毛利氏 Genealogy http://reichsarchiv.[...]
[3] 서적 日本歴史地名体系 山口県の地名 平凡社
[4] 웹사이트 萩城:幕末時は多くの志士を生み討幕への起爆剤となった長州藩萩城(指月城) https://web.archive.[...] 2014-08-05
[5] 문서 越後国佐橋荘は、嫡男の毛利基親が相続した。
[6] 문서 毛利貞親・親衡は越後の毛利領を拠点に南朝に味方し活動。
[7] 문서 吉田郡山城の築城者といわれる時親が曾孫の元春を後見した。
[8] 문서 慶長5年の検地による石高。慶長10年(1605年)の毛利家御前帳にも同様の石高が記載。
[9] 서적 歴史と旅 新・藩史事典 秋田書店 1993
[10] 웹사이트 四国艦隊下関砲撃事件 https://kotobank.jp/[...]
[11] 웹사이트 奇兵隊 https://kotobank.jp/[...]
[12] 웹사이트 長州征伐 https://kotobank.jp/[...]
[13] 뉴스 長州藩主が龍馬に短刀? 「吉光」が坂本本家筋に伝承 https://www.kochinew[...] 高知新聞 2017-11-25
[14] 웹사이트 薩長同盟 https://kotobank.jp/[...]
[15] 서적 日本の軍装 2006
[16] 웹사이트 木戸孝允 https://kotobank.jp/[...]
[17] 웹사이트 上野戦争 https://kotobank.jp/[...]
[18] 웹사이트 脱隊騒動 https://kotobank.jp/[...]
[19] 웹사이트 長州藩 https://kotobank.jp/[...]
[20] 웹사이트 毛利元徳 https://kotobank.jp/[...]
[21] 문서 原文ママ。『幕末史の研究』の記述においては、この儀式の後に「年賀の儀式に移る」とされている
[22] 서적 幕末史の研究 雄山閣 1927
[23] 잡지 関ヶ原四〇〇年の恩讐を越えて 文藝春秋 2000-10
[24] 웹사이트 吉田松陰関係資料 > 山鹿素水詩文 https://adeac.jp/yam[...] 山口県立山口図書館 2021-07-14
[25] 서적 山鹿素行兵法学の史的研究
[26] 문서 義央は霊元天皇の御代の延宝4年(1676年)の年頭祝儀の上使の際には、後西上皇から直筆の「うつし植て 軒端の松の 千とせをも おなしこころの 友とち吉良む」という和歌を下賜されている。
[27] 문서 それ以外では、長州藩は長府藩の行動にしばしば内政干渉し(長府藩が朱印状を公儀から直接貰う事、提出する藩の絵図を萩本家と色分けする事など)揉め事も発生している。
[28] 서적 萩藩諸家系譜 山口県文書館
[29] 서적 名所江戸百景、東海道名所一覧、富嶽三十六景 山口県立萩美術館
[30] 서적 葛飾北斎伝 すみだ北斎美術館
[31] 서적 長府毛利十四代記 下関市立長府博物館
[32] 문서 自領の農民が逃亡して他領の農民となること。豊前には「周防町」「長門町」の地名が残る。
[33] 문서 細川氏は不仲の黒田領との国境の警備は厳重にしたが、海峡を隔てた毛利との国境は手薄であった。同様に黒田氏も細川領への領民逃散に備え、筑前東端の国境に六端城を置いている。
[34] 서적 幕末期萩藩財政史研究 山口大学
[35] 문서 おいでませ山口ブランド館 山口県広報広聴課
[36] 서적 毛利家文書「江戸桜田上屋敷指図(寛政8年)」
[37] 간행물 国宝 上杉家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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