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다 모토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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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이다 모토키요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모리 모토나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575년 호이다 모토스케의 양자가 되어 호이다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모리 가문의 동부 방면을 지키는 중진으로 활약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하여 모리 가문의 총대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활약했다. 1597년 사쿠라오 성에서 4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자손은 조슈번의 지번인 조후번과 기요스에번의 번주로 존속했다.

호이다 모토키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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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다 모토키요 초상화 (라이후쿠지 소장)
원어 이름穂井田 元清
가몬Ichimonjimitsuboshi.png
가몬 설명일문자삼성 (나가토별)
시대센고쿠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출생덴분 20년 (1551년)
사망게이초 2년 7월 9일 (1597년 8월 21일)
개명모리 모토키요 (毛利元清) → 호이다 (穂田) 모토키요 → 모리 모토키요
별명쇼유지로 (少輔四郎)
약칭호지, 호지타
시호도운지덴 쇼잔조카이젠조몬 (洞雲寺殿笑山常快禅定門)
묘소도운지 (히로시마현 하쓰카이치시 사카타)
씨족모리 씨 (毛利氏, 본성은 오에 씨大江氏) → 호이다 씨 (穂井田氏) → 모리 씨
아버지모리 모토나리 (毛利元就)
어머니노미노오카타 (乃美大方, 노미 히로히라의 딸?)
배우자정실: 쇼케이묘주 (무라카미 미치야스의 딸)
측실에이초인 (사바 에쓰라의 딸)
관직
관위이요노카미(伊予守), 지부노다이유(治部大輔), 종5위하, 에치젠노카미(越前守), 종4위, 지주(侍従)
주군모리 데루모토
자녀
자녀미야즈루마루, 세쓰테이묘세이 (호소카와 모토미치의 아내), 히데모토, 미야키치마루, 덴유이지테이 (구마가이 나오사다의 아내), 세이와준초 (아소누마 모토사토의 아내, 모리 모토시게의 아내), 규가쿠테이쇼 (시시도 히로마사의 아내)
기타
특이 사항니노미야 나리토키와 이노우에 가쓰토시를 모리 모토나리의 서출로 보는 설이 있으며, 이에 따르면 두 사람은 모토키요의 이복형이 된다.
형제 자매
형제 자매여자, 모리 다카모토, 고류쓰보네 (시시도 다카이에 정실),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호린슌코 (우에하라 모토마사의 아내), 모토키요, 모리 모토아키, 이즈하 모토토모, 아마노 모토마사, 스에쓰구 모토야스,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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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551년(덴분 20년), 아키국센고쿠 다이묘였던 모리 모토나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모토나리의 계실인 노미 오가타이다.

1566년(에이로쿠 9년) 8월 6일, 모리 씨 당주이자 조카인 모리 데루모토에게 관례를 치르고, "모토(元)" 자 헨키(偏諱)를 받아 "모리 쇼스케 시로 모토키요(毛利少輔四郎元清)"라 불렀다.

1568년, 모리 씨의 이요 출병 이후 무라카미 수군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의 무라카미 미치야스의 딸 쇼케이 묘주와 결혼했다. 같은 해, 우키타 나오이에가 모리 가문을 배반하여 빗추국마쓰야마성과 사루카케성을 함락시키자, 모토키요는 모리 모토나리의 명을 받아 미무라 모토치카와 함께 사루카케 성을 탈환하고, 마쓰야마 성에서 빗추의 호족 쇼 일족(庄氏)을 추방했다.

1569년, 모리 가문이 규슈 북부 제패를 둘러싸고 오토모 가문과 대립하게 되자, 다치바나성 전투, 모지성 전투, 다타라하마 전투에 참전하였다.

1572년, 아키국 사쿠라오성을 받아 평생 거성으로 삼았다.

1575년, 빗추 사루카케 성주 호이다 모토스케(穂井田元資)의 양자가 되어 호이다(穂井田) 가문을 상속받고, 모리 가문의 동부 방면을 지키는 중진이 되었다.

1577년, 오다 노부나가의 주고쿠 정벌이 시작되자, 고지마 전투에서 우키타 나오이에의 군세를 격퇴했다.

1578년, 고즈키 성 전투에서 동생 아마노 모토마사와 함께 선봉에 서서 큰 공을 세웠다.

1582년(덴쇼 10년), 빗추국 가모 성에서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세와 전투를 벌였으며, 같은 해 다카마쓰 성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은 하시바 군과 강화했다.

1585년(덴쇼 13년), 시코쿠 정벌에 출진했다. 같은 해, 차남 모리 히데모토모리 데루모토의 양자가 되면서, 모토키요도 모리 성으로 돌아갔다.

1587년(덴쇼 15년), 규슈 정벌에 출진했다.

1589년(덴쇼 17년), 동생 니노미야 나리토키와 함께 아키국 히로시마성 축성 및 조카마치 건설의 후신부교(普請奉行, 토목 공사 책임 관리)를 맡았다.

1591년(덴쇼 19년), 데루모토로부터 12,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1592년(분로쿠 원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중인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하여 모리 가문의 총대장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토키요에게 호랑이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고, 모토키요는 호랑이 두 마리를 산 채로 잡아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이 호랑이는 교토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고요제이 천황도 구경했다.

1597년, 형 다카카게가 죽은 지 약 한 달 뒤, 아키국 사쿠라오성에서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2.1. 유년기 및 관례

덴분일본어 20년(1551년), 아키국센고쿠 다이묘였던 모리 모토나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모토나리의 계실인 노미 오가타이다.

에이로쿠 9년(1566년) 8월 6일, 모리 씨 당주이자 조카인 모리 데루모토에게 관례를 치르고, "모토(元)" 자 헨키(偏諱)를 받아 "모리 쇼스케 시로 모토키요(毛利少輔四郎元清)"라 불렀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모리 씨의 이요 출병 이후 무라카미 수군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구루시마 무라카미 씨의 무라카미 미치야스의 딸 쇼케이 묘주와 결혼했다.

2.2. 가문의 중추적 역할

1568년, 우키타 나오이에가 모리 가문을 배반하여 빗추국마쓰야마성과 사루카케성을 함락시켰다. 모토키요는 모리 모토나리의 명을 받아 미무라 모토치카와 함께 사루카케 성을 탈환하고, 마쓰야마 성에서 빗추의 호족 쇼 일족(庄氏)을 추방했다.

1569년, 모리 가문이 규슈 북부 제패를 둘러싸고 오토모 가문과 대립하게 되자, 모토키요는 다치바나성 전투, 모지성 전투, 다타라하마 전투에 참전하였다.

1572년, 아키국 사쿠라오성을 받아 평생 거성으로 삼았다.

2.3. 호이다 가문 상속

1575년, 빗추 사루카케 성주 호이다 모토스케(穂井田元資)의 양자가 되어 호이다(穂井田) 가문을 상속받고, 모리 가문의 동부 방면을 지키는 중진이 되었다. 1577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주고쿠 정벌(中国征伐)이 시작되자, 고지마 전투(児島の戦い)에서 우키타 나오이에의 군세를 격퇴했다. 1578년, 고즈키 성 전투(上月城の戦い)에서 동생 아마노 모토마사(天野元政)와 함께 선봉에 서서 큰 공을 세웠다.

2.4. 도요토미 정권

1582년(덴쇼 10년), 빗추국 가모 성에서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세와 전투를 벌였다. 같은 해, 다카마쓰 성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은 하시바 군과 강화했다.

1585년(덴쇼 13년), 시코쿠 정벌에 출진했다. 같은 해, 차남 모리 히데모토모리 데루모토의 양자가 되면서, 모토키요도 모리 성으로 돌아갔다.

1587년(덴쇼 15년), 규슈 정벌에 출진했다.

1589년(덴쇼 17년), 동생 니노미야 나리토키와 함께 아키국 히로시마성 축성 및 조카마치 건설의 후신부교(普請奉行, 토목 공사 책임 관리)를 맡았다.

1591년(덴쇼 19년), 데루모토로부터 12,000석의 영지를 받았다.

2.5. 임진왜란 참전

1592년 (분로쿠 원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이다 모토키요는 병중인 모리 데루모토를 대신하여 모리 가문의 총대장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토키요에게 호랑이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고, 모토키요는 호랑이 두 마리를 산 채로 잡아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이 호랑이는 교토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고요제이 천황도 구경했다.

2.6. 사망

1597년, 형 다카카게가 죽은 지 약 한 달 뒤, 아키국 사쿠라오성에서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3. 인물

모토키요는 생모인 노미노오카타를 극진히 모셨으며, 동생들을 잘 챙기는 온후한 성품이었다고 전해진다. 다카모토, 모토하루, 다카카게 세 형의 활약에 가려졌지만, 모토나리의 측실 소생 형제들 중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무장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다카카게와 사이가 좋았으며, 많은 전투에서 다카카게의 군세에 속해 활약했다. 산시 교훈장에서 모토나리는 모토키요를 포함한 측실 소생 자식들을 "벌레 같은 아이들"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들이 성장하여 유능한 인재가 되면 불쌍히 여겨 먼 곳에라도 두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는 모토나리가 정실 소생 자식들과 측실 소생 자식들을 명확히 구분하면서도, 모토키요 등의 잠재력을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4. 일화

모토키요는 형인 다카카게를 매우 신뢰하여, 동생 모토마사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카카게 님께 상담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다카카게와 누가 먼저 세상을 떠날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얼마 후 다카카게가 사망하고 한 달 뒤 모토키요도 세상을 떠났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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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키요는 온화한 성품으로, 생모 노미 오가타의 노후를 항상 걱정하고 자신의 동생들을 배려하였다. 또한, 측실에서 태어난 형제들 중에서도 특히 재능이 뛰어난 무장이라고 불렸다. 산요 방면 동부의 최중요 거점인 사루카케 성을 수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복 형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관계가 깊었고, 많은 전투에서 다카카게의 군세에 속해 싸웠다.

1596년 7월 13일 자시(오전 12시경)에 야마시로국후시미 부근에서 게이초 후시미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모토키요는 데루모토와 함께 교토에 있었다. 다음 날인 윤 7월 14일에 다나모리 모토유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쓰쿠시마 신사의 지진 피해를 묻는 동시에, 지진은 계속되고 있지만 후시미 성과 저택은 파손되지 않았으니 안심하라고 전하고 있다. 실제로는 지진으로 인해 많은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아직 피해 상황 정보가 부족했거나, 쓸데없이 불안감을 조성하지 않으려는 모토키요의 배려로 여겨지고 있다.

1594년 분로쿠의 역으로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히데모토가 귀국할 때, 모토키요는 히데요시로부터 부산에 주둔하라는 명령과 함께 호랑이를 보내라는 요청을 받았다. 모토키요는 호랑이 두 마리를 생포하여 히데요시에게 보냈고, 히데요시는 기뻐하며 교토로 올려 고요제이 천황도 구경했다고 한다.

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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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출생 - 사망비고
아버지모리 모토나리1497년 - 1571년
어머니노미 오가타? - 1601년모리 모토나리의 계실(측실).
정실쇼케이 묘주? - 1590년구루시마 무라카미씨 당주 무라카미 미치야스의 딸. 1590년 6월 8일 사쿠라오성에서 사망. 법명은 "묘주지 쇼케이 묘주". 묘소는 도운지.
측실에이초인1571년 - 1664년사바 에렌의 딸. 모토키요 사후 구로다 나가마사 가신인 구리야마 토시아스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지만, 구로다 소동 이후에는 히데모토를 의지하여 조후로 이주.
장남모리 미야쓰루마루1573년 - 1584년적남으로 태어났으나 요절.
차남모리 히데모토1579년 - 1650년조후번 초대 번주.
삼남모리 미야요시마루? - 1589년차형인 히데모토가 모리 데루모토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모토키요의 후계자가 되었으나 요절.
장녀세츠테이 묘세이1578년 - 1604년조후번가로가 되는 조후 호소카와가 당주 호소카와 모토미치의 정실. 1604년 6월 27일 사망. 법명은 "텐슈인 세츠테이 묘세이".
차녀텐유 이테이? - 1662년구마가이 나오사다의 처. 1596년 5월 2일 남편보다 먼저 사망,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데루모토로부터 30석을 받았다. 1662년 8월 17일 사망. 법명은 "코후쿠인 텐유 이테이". 조후의 쇼잔지에 묻혔고, 후에 소렌지로 개장.
삼녀쇼와 준초? - 1649년처음에는 아소누마 모토사토에게 시집갔고, 모토사토 사망 후에는 요시카 모리가의 모리 모토시게에게 시집. 1649년 7월 29일 사망. 법명은 "지토쿠인 쇼와 준초".
사녀큐가쿠 테이쇼? - 1621년시시도 히로마사의 처. 1621년 9월 27일 사망. 법명은 "큐가쿠 테이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