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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어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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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메이어는 1467년경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역사가이다. 파리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유명론과 경험론에 영향을 받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학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종교 개혁 사상에 영향을 미쳤으며, 인권 사상의 선구자로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를 옹호했다. 주요 저서로는 《스코틀랜드인의 행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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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어 (철학자)
기본 정보
존 메이어
존 메이어
출생1949년 3월 4일
출생지서튼 콜드필드
사망2018년 6월 9일 (69세)
사망지글래스고
국적영국
직업철학자, 정치 이론가
분야정치 철학, 사회 철학
모교옥스퍼드 대학교
학위철학 박사
지도교수제럴드 코헨
사상 및 경력
주요 관심사정의
평등
사회 정의
마르크스주의
영향카를 마르크스
G. A. 코헨
로널드 드워킨
존 롤스
소속글래스고 대학교 (정치 이론 교수)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정치 이론 방문 교수)
주요 저서"Left Behind: Social Justice and Social Inclusion" (2007)
"After Virtue: A Study in Moral Theory" (2007)
"Asylum Seekers and the Logic of Deterrence" (2016)
"Rescuing Justice and Equality" (2008)
"Taxing Luck" (2002)
"Egalitarianism and the Damage of Hierarchy" (2018)

2. 생애

존 메이어는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신학자, 역사가이자 교육자였다.

1467년경 노스 베릭 근처 이스트 로디언의 글레혼에서 태어났다.[1] 해딩턴 문법 학교에서 초기 교육을 받은 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1493년 파리 대학교에 입학했다.[1] 콜레주 생트바르브에서 공부하며 1495년 문학사, 1496년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존 부리단의 유명론경험론에 영향을 받았다.[1]

1493년부터 파리 대학교에서 콜레주 드 몽테귀와 소르본에서 가르쳤고,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506년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518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이 되었고, 1523년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예술대학 학장,[1] 1533년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세인트 살바토르 칼리지 학장을 역임했으며, 1550년 사망할 때까지 학장직을 유지했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467년경 노스 베릭 근처 이스트 로디언의 글레혼에서 태어났다.[1] 초기 교육은 스코틀랜드 이스트 로디언의 해딩턴에 있는 문법 학교에서 받았다. 메이어는 해딩턴을 "나의 학문이 시작된 도시이며, 그 친절한 품 안에서 나는 문법의 가장 달콤한 젖으로 초보자로서 양육되었다"고 회상한다.[1]

1490년 로버트 코크번 (외교관)의 영향으로 파리 대학교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1]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Gods House"(훗날 크라이스트 칼리지가 됨)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493년 파리 대학교에 입학했다.[1] 콜레주 생트-바르브에서 공부했으며, 1495년에 문학사, 1496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1] 존 부리단의 유명론경험론적 접근 방식에 큰 영향을 받았다.[1]

2. 2. 파리 대학교에서의 활동

1493년, 당시 유럽 최고의 대학교였던 프랑스의 파리 대학교에 입학했다.[1] 콜레주 생트바르브에서 공부했고, 1495년에 문학사 학위, 1496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에는 다양한 사상이 있었지만, 존 부리단의 유명론경험론적 접근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496년에 콜레주 드 몽테귀에서 인문학 석사('섭정')가 되었고, 얀 스탄동크 아래에서 신학 연구를 시작했다. 에라스무스, 라블레 등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과 교류했다.

1497년 겨울, 심각한 질병을 앓은 후 꿈, 편두통, 산통 및 "과도한 졸음"에 시달렸다. 1499년 나바르 칼리지로 옮겼다. 1501년 신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1505년에는 그의 논리적 저술이 처음으로 수집되어 출판되었다. 1506년 신학을 가르칠 자격을 얻었고, 같은 해 11월 11일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콜레주 드 몽테귀와 소르본에서 가르쳤으며, 많은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2. 3. 스코틀랜드 귀국과 교육 활동

1518년 존 메이어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글래스고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이 직책에는 대성당 참사회원, 대리 사제, Dunlop의 재무관 직책도 포함되었다. 1523년에는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로 옮겨 예술대학 학장이 되었다.[1] 1533년에는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의 세인트 살바토르 칼리지 학장이 되었고, 1550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1]

메이어는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에서 존 녹스, 조지 뷰캐넌 등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의 주요 인물들을 가르쳤다. 존 녹스는 메이어에 대해 "그의 저서는 당시 종교 문제에 대한 신탁으로 여겨졌다"라고 평했다.[1] 조지 뷰캐넌은 메이어의 이름(Major)이 그의 가장 중요한 유일한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1]

3. 사상과 영향

존 메이어는 유명론적 관점에서 다양한 질문에 접근했는데, 이는 중세 시대부터 시작되어 스코틀랜드 및 기타 유럽 경험론자들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철학적 담론의 한 형태였다.[1] 그는 신의 본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개인적인 믿음과 복종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인문주의적 접근 방식으로 성경과 고전 작가의 원어 텍스트로 돌아가는 것을 추구했다.[1] 또한 교황이 아닌 교회 전체에 권위가 있으며, 왕국에서의 권위는 왕이 아닌 백성에게 있다고 주장했다.[1]

알렉산더 브로디에 따르면, 메이어가 유명론 전통에 미친 영향은 토마스 리드가 시작한 18세기와 19세기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에까지 이르렀다.[1]

메이어의 저서 《스코틀랜드인의 행적》(De Gestis Scotorum, 파리, 1521)은 신화와 전설을 제거하고 증거에 기반한 역사를 쓰려는 시도였다. 그는 연대기 작가 윈턴의 앤드루의 뒤를 이었지만, 앤드루가 스코트어로 글을 쓴 것과는 달리 유럽 독자들을 위해 라틴어로 저술했다. 메이어가 이용할 수 있는 문서 증거는 제한적이었지만, 그의 학문적인 접근 방식은 제자 헥토르 보이스, 존 레슬리를 포함한 후대 스코틀랜드 역사가들에게 수용되고 개선되었다.

3. 1. 유명론과 인문주의의 결합

존 메이어는 유명론적 관점에서 광범위한 질문에 접근했는데, 이는 중세 시대부터 시작되어 스코틀랜드 및 기타 유럽 경험론자들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철학적 담론의 한 형태였다.[1] 그는 절대적으로 제약받지 않는 신의 본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개인적인 믿음과 복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 그의 인문주의적 접근 방식은 성경과 고전 작가의 원어 텍스트로 회귀하는 것이었다.[1] 그는 권위가 교황이 아닌 교회 전체에 있으며, 왕국에서의 권위는 왕이 아닌 백성에게 있다고 주장했다.[1] 이러한 주장은 1320년 아브로스 선언에서 스코틀랜드 왕관의 잉글랜드로부터의 독립을 교황에게 확인하는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1]

알렉산더 브로디에 따르면, 메이어가 유명론 전통에 미친 영향은 토마스 리드가 시작한 18세기와 19세기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에까지 이르렀다.[1]

3. 2. 인권 사상의 선구자

존 메이어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를 옹호하며, 인간의 자유와 재산권은 침해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1512년 부르고스 논쟁에서 프라이 안톤 몬테시노에 의해 인용되며, 근대 인권법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2] 휴 토마스가 "''제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논쟁''"이라고 부르는 이 논쟁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자유로운 인간으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자유와 재산 등 모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았다.[2] 비록 이 선언은 여러 제약 조건이 있었고, 스페인 군주국이 이를 완전히 시행하지는 못했지만, 인권법의 중요한 기원으로 평가받는다.[2]

특히, 왕국의 권위는 왕이 아닌 백성에게 있다는 그의 주장은 이후 스코틀랜드의 정치, 종교 개혁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1320년 아브로스 선언에서 스코틀랜드 왕권의 독립성을 교황에게 확인한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3. 3. 종교 개혁에 미친 영향

존 메이어는 성경과 고전 작가의 원어 텍스트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교황보다는 교회 전체에 권위가 있다고 강조했다.[1] 또한 왕국에서의 권위는 왕이 아닌 백성에게 있으며, 백성은 잘못된 왕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1] 이러한 주장은 1320년 아브로스 선언에서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옹호한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1]

그의 사상은 장 칼뱅, 이냐시오 데 로욜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1] 특히 살라망카 대학교의 도밍고 데 산 후안은 메이어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존경받는 스승"이라고 칭송했다.[1]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를 포함한 살라망카 학파의 철학자들은 메이어의 사상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1]

존 녹스는 메이어의 제자였으며, 메이어의 저서를 종교 문제에 대한 신탁으로 여겼다고 언급했다.[1] 녹스는 메이어의 가르침, 즉 하나님의 완전한 자유, 성경의 중요성, 세속 권위에 대한 회의론을 바탕으로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이끌었다.[1] 하지만 메이어 자신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남았는데, 이는 그의 영향력이 가려지는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1]

3. 4. 역사 연구

그의 저서 《스코틀랜드인의 행적》(De Gestis Scotorum, 파리, 1521)은 부분적으로는 고국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려는 애국적인 시도였지만, 신화와 전설을 제거하고 증거에 기반한 역사를 쓰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선임자였던 연대기 작가 윈턴의 앤드루의 뒤를 잇는 것이었지만, 앤드루가 스코틀랜드 귀족 후원자들을 위해 스코트어로 글을 쓴 것과는 달리 그는 유럽 독자들을 위해 라틴어로 저술했다. 메이저가 이용할 수 있는 문서 증거는 제한적이었지만, 그의 학문적인 접근 방식은 그의 제자 헥토르 보이스, 존 레슬리를 포함한 후대 스코틀랜드 역사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개선되었다.

4. 주요 저서

출판 연도제목비고
1516년논리학 강의[2]
1517년–18둔스 스코투스의 파리 보고서공동 편집
1519년룸바르두스의 명제집 주석
1521년대 브리튼 역사
1526년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 및 윤리학 저술 주석
1528년논리 문제집
1528년사복음서 주석
(미상)교황 및 공의회의 권위에 대한 논쟁
(미상)아리스토텔레스니코마코스 윤리학 주석마지막 저서


참조

[1] 학술
[2] 논문 El primer planteamiento teologico-politico-juridico sobre la conquista de América: John M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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