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도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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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종자도총은 1543년 일본 다네가시마 섬에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들이 전래한 아르카부스 화승총에서 유래한 일본의 화승총이다. 다네가시마 영주가 포르투갈인에게 화승총을 선물받아 복제하면서 10년 만에 3천 정 이상이 생산되었다. 센고쿠 시대에 도입되어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으며,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은 대규모의 종자도총 부대를 투입하여 초반에 우위를 점했다. 에도 시대에는 쇄국 정책으로 인해 사용 빈도가 줄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식 무기가 도입되면서 쇠퇴했다. 종자도총은 발사 장치, 총열 및 부속품, 화문 및 개머리판 등으로 구성되며, 초기에는 조잡했으나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화력과 연사력을 향상시켰다. 현대에는 복원되어 재현되거나 표적 사격에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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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도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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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명칭 | |
명칭 | 종자도총 |
일본어 명칭 | 種子島 (다네가시마) |
일본어 명칭 (한자) | 火縄銃 (히나와주) |
영어 명칭 | Tanegashima matchlock |
포르투갈어 명칭 | Tanegashima arcabuz |
기본 정보 | |
유형 | 화승총 |
사용 국가 | 일본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
개발 국가 | 포르투갈 (도입 및 모방 생산) |
개발 시기 | 1543년경 (일본 도입) |
사용 시기 | 16세기 중반 ~ 19세기 |
역사 | |
유래 | 포르투갈 상인들이 종자도에 표착하면서 일본에 전해짐 |
초기 일본 생산 | 1543년 종자도에서 최초 생산 시작, 이후 오다 노부나가 등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 |
전술적 영향 | 일본 전국 시대에서 전술 변화에 큰 영향 미침 |
쇠퇴 | 막말 시기 이후 서양식 소총으로 대체 |
구조 및 특징 | |
작동 방식 | 화승식 |
구경 | 다양함 |
사정거리 | 짧음 (정확도 낮음) |
장전 방식 | 전장식 |
재료 | 철, 목재 |
특징 | 우천시 사용 어려움 장전 시간 소요 숙련된 사수 필요 대량 생산이 쉬움 대량 운용에 적합 |
기타 | |
관련 문화 | 무사 계급을 비롯한 아시가루 병사들이 사용 일본도와 함께 일본 전통 무기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 일본 문화에서 중요한 상징 중 하나 일본의 군사력 강화에 큰 역할 |
관련 서적 | Tanegashima: the arrival of Europe in Japan Giving up the gun: Japan's reversion to the sword, 1543-1879 |
사용 계층 | 아시가루 |
관련 무기 | 활 (유미) |
2. 역사적 배경
종자도총은 인도의 고아 주에서 만들어진 아르카부스 화승총이 그 원형인 것으로 보인다.[40] ‘종자도총’이라는 이름은 1543년 총을 전래해준 포르투갈인 선원들이 탄 정크가 표류한 일본의 섬, 다네가섬에서 유래했다.
센고쿠 시대(1467년 ~ 1603년) 일본은 전국적인 내전에 휩싸였고, 봉건 영주들은 주도권을 다투었다.[43] 화승총은 이런 시기에 도입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널리 사용되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549년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군대를 무장시키기 위해 500정의 종자도총을 주문했지만, 당시에는 화기의 이점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1. 전래와 초기 발전
1543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탄 정크가 일본 다네가섬에 표류하면서 종자도총이 전래되었다.[40] ‘종자도총’이라는 이름은 이 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尭)는 포르투갈인들로부터 화승총 두 정을 구입하고, 일본의 도검 장인들에게 복제를 명했다.[41]도검 장인들은 총의 거의 모든 부품들을 문제없이 만들었으나, “총신에 나선형 구멍을 뚫어 나사를 고정시키는” 기술이 당시 일본에 없었기 때문에 완성하지는 못했다.[41] 그러나 이듬해 포르투갈 대장장이가 합류하면서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41] 전래된 지 10년 만에 3천 정 이상의 종자도총이 생산될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42]
종자도총 전래 이전에도 원의 침입 때 "철포(てつはう)"라 불리는 화약 무기가 사용된 기록이 있으나,[29] 이는 현대의 총과는 다른 폭발물이었다.
2. 2. 센고쿠 시대의 활용
센고쿠 시대(1467년 ~ 1603년) 일본은 전국적인 내전에 휩싸였고, 봉건 영주들은 주도권을 다투었다.[43] 화승총은 이 시기 중반에 도입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널리 사용되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549년,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군대를 위해 500정의 종자도총을 주문했는데, 이때는 화기의 이점이 아직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였다.[44]일본인들은 종자도총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각종 기술을 개발했다. 발사 속도가 느린 화승총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연속 사격술을 개발해 빗발치듯 탄환을 쏟아부었다.[46] 또한 구경이 더 큰 총을 개발해 살상력을 높였다. 비가 올 때도 총을 쏠 수 있도록 칠기로 보호 상자를 만들었으며,[47] 끈으로 각도를 고정시켜 밤에도 정밀하게 사격할 수 있는 체계도 갖추었다.[48]

1563년, 이즈모국의 아마고 가문이 적군인 킷카와 가문의 33명에게 종자도총을 이용해 부상을 입혀 승리를 거두었다.[49] 1567년, 다케다 신겐은 “이제부터 총포가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며 종자도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50] 오다 노부나가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3,000명의 종자도총 부대를 활용, 일제사격 전술로 다케다 군의 기병대를 격파하며 일본 전술 교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51] 누마지리 전투(1584)에서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는 호조 씨(北条氏)를 상대로 8600정이 넘는 화승총을 사용했다.[20]
2. 3. 임진왜란과 조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할 때 종자도총을 대량으로 사용했다. 일본군 전체 병력의 4분의 1이 조총수였다.[52] 일본군은 종자도총의 화력을 앞세워 부산성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18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등 초반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53]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종자도총의 해상 한계를 간파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조선의 관리 류성룡은 종자도총의 위력을 언급하며, 활과 화살로는 대적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12]
2. 4. 에도 시대의 변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에도 막부를 수립하고 평화로운 에도 시대(1603년 ~ 1868년)가 시작되면서, 종자도총의 군사적 중요성은 감소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일본은 쇄국 정책을 펼쳤지만, 종자도총의 생산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에도 시대 말기까지 200명 이상의 총기 제작자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다.[54] 종자도총은 주로 사무라이들의 사냥이나 사격 연습에 사용되었으며, 농촌에서는 동물을 쫓는 농기구처럼 활용되기도 했다.[55]2. 5. 메이지 유신과 쇠퇴
1854년 페리 제독의 내항으로 일본은 재무장 시대를 맞이했다.[25] 1800년대에 종자도총은 이미 구식 무기가 되었고, 여러 사무라이 파벌들은 미니에 소총, 후장식 소총, 연발 소총 등 발전된 화기를 획득했다.[25]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사무라이 시대는 종식되었고, 일본은 현대식 무기와 군복을 갖춘 징병제 군대를 채택했다.[25] 일부 총기 제작자들은 마치락식 종자도총을 머스킷총의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타격식 기폭 장치로 교체하기도 했다. 종자도총을 포함한 일본 사무라이의 갑옷과 전통 무기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은 1877년 세이난 전쟁 때였는데, 이때 메이지 정부의 일본 제국 육군이 최후의 사무라이들과 현대화에 대한 저항을 종식시켰다.[25]3. 종자도총의 각 부위
종자도총은 여러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품은 고유한 기능을 수행한다.
용어 | 설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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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가네(引鉄|인철일본어) | 방아쇠 | ||||||||
가라쿠리(機関|기관일본어) | 발사 장치 | ||||||||
요징가네(用心金|용심금일본어) | 방아쇠울 | ||||||||
뵤우({{lang|ja|鋲|} | })
용어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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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가네(引鉄|인철일본어) | 방아쇠 |
가라쿠리(機関|기관일본어) | 발사 장치 |
요징가네(用心金|용심금일본어) | 방아쇠울 |
뵤우({{lang|ja|鋲|}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