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고쿠 신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주고쿠 신문은 1892년 창간된 일본의 지역 신문으로, 히로시마를 중심으로 발행된다. 1945년 원자 폭탄 투하로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원폭 관련 보도와 지역 사회 기여를 통해 성장했다. 신문 협회상 다수 수상, 석간 휴간 및 대체지 발행, 월정액 구독료 인상 등의 변화를 겪었다. 츄피 클럽 운영, 지역 뉴스 프로그램 제공 등 사회 공헌 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히로시마현 - 제13여단 (육상자위대)
제13여단은 육상자위대 중부방면대 소속으로 히로시마현 가이타정에 사령부를 두고 제13경비지구를 방위하며, 1959년 사단으로 창설되었다가 1999년 여단으로 축소, 2024년 지역 배치 여단으로 개편되었고 현재 여러 부대로 구성되어 있다. - 1892년 창간 - 후쿠시마 민보
후쿠시마 민보는 1892년 창간된 후쿠시마현의 지역 신문으로, 정당 기관지에서 독립적인 언론으로 거듭난 후 디지털 전환을 거쳐 발전했으며, 동일본대지진 당시 신속한 보도로 일본신문협회상을 수상하는 등 지역 사회에 대한 책임감 있는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 1892년 창간 - 볼티모어 아프로-아메리칸
1892년 창간된 볼티모어 아프로-아메리칸은 존 H. 머피 시니어에 의해 인수된 후 흑인 사회의 단결과 인종 차별에 맞서 싸우며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신문으로 성장했고, 시민권 운동 시기 NAACP와 협력하며 현재까지 머피 가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 1892년 설립 - 셀틱 파크
셀틱 파크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위치한 셀틱 FC의 홈구장으로, 1888년 최초 건설 이후 1892년 재건되었으며, 1990년대 전 좌석 경기장으로 전환되고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 1892년 설립 - 라 리가 필리피나
라 리가 필리피나는 호세 리잘이 필리핀인들의 단결과 민족 의식 고취를 목표로 1892년에 창립한 조직으로, 상호 원조, 교육, 경제 발전을 장려하며 스페인 식민 통치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리살의 추방으로 와해되었고, 이후 카티푸난 창설로 이어져 필리핀 독립 투쟁의 기반이 되었다.
주고쿠 신문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일반 정보 | |
![]() | |
![]() | |
![]() | |
유형 | 일간 신문 |
창간 | 1892년 5월 5일 |
소유주 | 주식회사 주고쿠 신문사 |
본사 | 히로시마 |
웹사이트 | 주고쿠 신문 공식 웹사이트 |
상세 정보 | |
명칭 | 주고쿠 신문 (中国新聞) |
종류 | 일간지 |
크기 | 브로드시트 |
발행사 | 주고쿠 신문사 |
본사 위치 |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나카구 도바시초 7-1 |
대표 | 대표이사 사장 오카하타 테츠야 (岡畠鉄也) |
창간일 | 1892년(메이지 25년) 5월 5일 |
가격 | '(조간) 160엔, (SELECT) 70엔' |
월 구독료 | '(조간+SELECT 세트) 4,840엔, (조간만) 3,900엔' |
언어 | 일본어 |
발행 부수 | 487,981부 (2024년 2월 15일 기준) |
회사명 | 주식회사 주고쿠 신문사 |
영문 회사명 | The Chugoku Shimbun Co., Ltd. |
우편 번호 | 〒730-8677 |
사업 내용 | 일간지 발행 |
자본금 | 3억 엔 |
매출액 | 189억 엔 (2022년 12월 기준) |
종업원 수 | 400명 (2024년 1월 기준) |
2. 역사
1892년 5월 5일 히로시마에서 편집인 야마모토 사부로가 '데일리 주고쿠'를 창간했다. 1908년 6월 21일 지령 5000호를 기점으로 신문 이름을 "주고쿠 신문"으로 변경했는데, 이는 "중국 신문"을 의미한다. 지리적으로 히로시마는 일본 열도의 중앙 근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6일 원자 폭탄 투하로 인해 건물과 장비가 파괴되고, 직원 114명이 사망했다.[14] 다른 신문사들의 도움을 받아 8월 9일에 발행을 재개했다.
'''주고쿠 신문의 연혁'''
연도 | 사건 |
---|---|
1892년 | 5월 5일 일간 "주고쿠" 창간 |
1908년 | 6월 21일 지령 5000호를 기점으로 제자를 "주고쿠 신문"으로 개명 |
1941년 | 9월 1일 산하의 구레 신문이 게이비 닛닛 신문을 통합 |
1945년 | 8월 6일 원자 폭탄 투하로 본사 피해, 사원 114명 희생.[14] 아사히 신문사에 대행 인쇄 의뢰, 2일간 휴간 후 같은 달 9일부터 재발행 |
1948년 | 주고쿠 신문이 구레 신문을 통합 |
1959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에서 연재 기획 "세토 내해" 수상 |
1965년 | 폭력 추방 캠페인으로 기쿠치 칸 상 수상,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에서 연재 기획 "히로시마 20년" 등 일련의 원폭 보도 수상 |
1982년 | 1월 1일 지면 문자 확대(1단 15자에서 13자로) |
1985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에서 "히로시마 40년" 보도 수상, 제2 사회면 연재 "호노보노"가 "작은 친절 운동" 특별상 수상 |
1986년 | 10월 15일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시베리아 억류") 및 경영·업무 부문("지역 정보 네트워크") 더블 수상 |
1987년 | 신문 협회상 경영·업무 부문("히로시마 플라워 페스티벌의 창조와 전개") 수상 |
1990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연재 기획 "세계의 히바쿠샤") 수상 |
1991년 | 5월 7일 지면 문자 확대(1단 13자에서 12자로) |
1992년 | 1월 1일 창간 100주년 기념 "新" 자형 변경, 10월 15일 신문 협회상 경영·업무 부문("지역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활용~정보 신시대의 판매소 경영") 수상 |
1995년 | 타시로 아키라 기자의 인터뷰 시리즈 "핵 시대 어제·오늘·내일"로 본·우에다 기념 국제 기자상 수상,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히로시마 50년" 보도) 수상 |
1996년 | 4월 1일 홈페이지 개설 |
1999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만남 시마나미") 수상 |
2001년 | 1월 4일 지면 문자 확대(1단 12자에서 11자로), 5월 1일 "주고쿠 신문 빈고"와 "주고쿠 신문 야마구치" 본사판 창간, 3향토지 체제 이행 |
2002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끊어라 폭주의 연쇄-다녀왔어가 듣고 싶어서") 수상, 지방지 최다 수상 기록 갱신(총 11회) |
2003년 | 5월 1일 신 인쇄 공장 후쿠야마 제작 센터(프레스 빈고, 2005년 11월부터 "후쿠야마 츄피 파크") 본격 가동, 3본사 독자 지면 제작 시작 |
2008년 | 3월 24일 지면 문자 확대(1단 11자에서 10자로) |
2009년 | 신문 협회상 경영·업무 부문("꿈의 볼 파크 탄생 서포트-지역과 함께 걷는 종합 미디어 기업의 실천-") 수상 |
2011년 | 10월 1일 지면 문자 확대(면적비 약 12% 확대) |
2015년 | 4월 30일 석간 휴간[7], 5월 1일 석간 대체 주고쿠 신문 SELECT 창간[7] |
2022년 | 신문 협회상에 아베 요시히코의 사진 연재 "오타가와 은혜와 삶" 선정 |
2023년 | 8월 1일 월정액 구독료 인상[15] |
2. 1. 창간과 발전
1892년 5월 5일 히로시마에서 편집인 야마모토 사부로가 '데일리 주고쿠'를 창간했다.[3][4][5] 1908년에는 신문 이름을 "주고쿠 신문"(The Chugoku Shimbun)으로 변경했는데, 이는 "중국 신문"을 의미한다. 지리적으로 히로시마는 일본 열도의 중앙 근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1945년 8월 6일 원자 폭탄 투하로 인해 건물과 장비가 파괴되고, 직원 113명이 사망했다.[14] 다른 신문사들의 도움을 받아 8월 9일에 발행을 재개했다.[3][4][5]
주고쿠 신문은 히로시마현을 중심으로 주고쿠 지방의 야마구치현, 오카야마현, 시마네현에서 발행·판매되고 있다. 돗토리현에서는 시마네판을 일부 지역에서 판매하고 있으며, 시코쿠 지방의 에히메현 게이요 제도에서도 판매된다. 전자판도 발행하여 발행 지역 외에서도 구독 가능하다. 히로시마현의 현 신문이자 주고쿠 지방에서 구독자가 가장 많고, 발행 부수도 지방 신문 중 최대 규모여서 블록지로 취급되기도 한다.[3][4][5] 인구가 더 많은 북부 규슈의 블록지인 니시니혼 신문보다 발행 부수가 많다.
마쓰다 관련 보도가 많고, 원폭(핵무기) 및 평화 관련 기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핵무기·평화 관련 보도로는 1965년, 1985년, 1986년, 1990년, 1995년에 신문 협회상을 수상했고, 1995년에는 본·우에다 기념 국제 기자상을 수상했다. 반 폭주족 논조나 폭력단 추방 캠페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프로 야구), 산프레체 히로시마(일본 프로 축구 리그) 등 지역 프로 스포츠팀 관련 기사도 많다.
2005년 11월에는 하쓰카이치시 오노에 24개 면 풀 컬러 인쇄가 가능한 윤전기를 갖춘 주고쿠 신문 히로시마 제작 센터(통칭 "츄피 파크")를 완공했다. 히로시마시 외 후쿠야마시, 슈난시의 3본사 체제로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2012년 11월 1일부터 도쿄도 주오구 긴자의 히로시마 브랜드 숍 "tau(타우)"에서도 주고쿠 신문과 데일리 스포츠 히로시마판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6]
2015년 4월 30일을 기해 91년간 이어져 온 석간을 휴간했다.[7] 이는 복수의 도도부현에 걸쳐있는 지방 신문, 즉 블록지 레벨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8] 같은 해 5월 1일에는 "두 번째 조간"으로 『'''주고쿠 신문 SELECT'''』를 창간했다.[9] 조간과 같은 사이즈의 풀 컬러 16면 구성으로,[1] 일부 석간 연재도 이어받았다. 원칙적으로 화요일부터 일요일 발행하며,[9] 2016년 5월부터 편의점 등에서 1부 판매를 시작했다.[1]
주고쿠 신문사 판매국 조사에 따르면 최근 발행 부수는 2017년 61만 2,272부, 2019년 58만 3,208부, 2020년 55만 4,596부, 2023년 8월 15일 50만 3,804부,[10] 2023년 10월 15일 49만 8,369부,[11] 2023년 12월 15일 49만 4,260부,[12] 2024년 2월 15일 현재 48만 7,981부[13]로 추이하고 있다.
'''주고쿠 신문의 연혁'''
연도 | 사건 |
---|---|
1892년 | 5월 5일 일간 "주고쿠" 창간 |
1908년 | 6월 21일 지령 5000호를 기점으로 제자를 "주고쿠 신문"으로 개명 |
1941년 | 9월 1일 산하의 구레 신문이 게이비 닛닛 신문을 통합 |
1945년 | 8월 6일 원자 폭탄 투하로 본사 피해, 사원 114명 희생.[14] 아사히 신문사에 대행 인쇄 의뢰, 2일간 휴간 후 같은 달 9일부터 재발행 |
1948년 | 주고쿠 신문이 구레 신문을 통합 |
1959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에서 연재 기획 "세토 내해" 수상 |
1965년 | 폭력 추방 캠페인으로 기쿠치 칸 상 수상,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에서 연재 기획 "히로시마 20년" 등 일련의 원폭 보도 수상 |
1982년 | 1월 1일 지면 문자 확대(1단 15자에서 13자로) |
1985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에서 "히로시마 40년" 보도 수상, 제2 사회면 연재 "호노보노"가 "작은 친절 운동" 특별상 수상 |
1986년 | 10월 15일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시베리아 억류") 및 경영·업무 부문("지역 정보 네트워크") 더블 수상 |
1987년 | 신문 협회상 경영·업무 부문("히로시마 플라워 페스티벌의 창조와 전개") 수상 |
1990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연재 기획 "세계의 히바쿠샤") 수상 |
1991년 | 5월 7일 지면 문자 확대(1단 13자에서 12자로) |
1992년 | 1월 1일 창간 100주년 기념 "新" 자형 변경, 10월 15일 신문 협회상 경영·업무 부문("지역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활용~정보 신시대의 판매소 경영") 수상 |
1995년 | 타시로 아키라 기자의 인터뷰 시리즈 "핵 시대 어제·오늘·내일"로 본·우에다 기념 국제 기자상 수상,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히로시마 50년" 보도) 수상 |
1996년 | 4월 1일 홈페이지 개설 |
1999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만남 시마나미") 수상 |
2001년 | 1월 4일 지면 문자 확대(1단 12자에서 11자로), 5월 1일 "주고쿠 신문 빈고"와 "주고쿠 신문 야마구치" 본사판 창간, 3향토지 체제 이행 |
2002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끊어라 폭주의 연쇄-다녀왔어가 듣고 싶어서") 수상, 지방지 최다 수상 기록 갱신(총 11회) |
2003년 | 5월 1일 신 인쇄 공장 후쿠야마 제작 센터(프레스 빈고, 2005년 11월부터 "후쿠야마 츄피 파크") 본격 가동, 3본사 독자 지면 제작 시작 |
2008년 | 3월 24일 지면 문자 확대(1단 11자에서 10자로) |
2009년 | 신문 협회상 경영·업무 부문("꿈의 볼 파크 탄생 서포트-지역과 함께 걷는 종합 미디어 기업의 실천-") 수상 |
2011년 | 10월 1일 지면 문자 확대(면적비 약 12% 확대) |
2015년 | 4월 30일 석간 휴간[7], 5월 1일 석간 대체 주고쿠 신문 SELECT 창간[7] |
2022년 | 신문 협회상에 아베 요시히코의 사진 연재 "오타가와 은혜와 삶" 선정 |
2023년 | 8월 1일 월정액 구독료 인상[15] |
2. 2. 원폭 피해와 극복
1945년 8월 6일 원자 폭탄 투하로 본사가 피해를 입었으며, 직원 114명이 희생되었다[14]. 아사히 신문사에 대행 인쇄를 의뢰하여 2일간 휴간하고 9일부터 재발행했다.1965년에는 폭력 추방 캠페인으로 기쿠치 칸 상을 수상했고,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에서 연재 기획 "히로시마 20년" 등 일련의 원폭 보도가 수상했다. 1985년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에서 "히로시마 40년" 보도가 수상했다. 1990년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에서 연재 기획 "세계의 히바쿠샤"가 수상했다. 1995년 타시로 아키라 기자의 인터뷰 시리즈 "핵 시대 어제·오늘·내일"로 본·우에다 기념 국제 기자상을 수상했고,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에서 "히로시마 50년" 보도(특집 "검증 히로시마", 연재 "핵과 인간", 인터뷰 시리즈 "핵 시대 어제·오늘·내일" 등)가 수상했다.
2. 3. 전후 발전과 수상 경력
주고쿠 신문은 다양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주요 수상 내역은 다음과 같다.연도 | 상 종류 | 수상 내용 |
---|---|---|
1959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 | 연재 기획 "세토 내해"[14] |
1965년 | 기쿠치 칸 상 | 폭력 추방 캠페인[14] |
1965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 | 연재 기획 "히로시마 20년" 등 일련의 원폭 보도[14] |
1985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 | "히로시마 40년" 보도[14] |
1985년 | "작은 친절 운동" 특별상 | 제2 사회면 연재 "호노보노"[14] |
1986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 | 연재 기획 "시베리아 억류"[14] |
1986년 | 신문 협회상 경영·업무 부문 | "지역 정보 네트워크"[14] |
1987년 | 신문 협회상 경영·업무 부문 | "히로시마 플라워 페스티벌의 창조와 전개"[14] |
1990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 | 연재 기획 "세계의 히바쿠샤"[14] |
1992년 | 신문 협회상 경영·업무 부문 | "지역 데이터베이스의 구축과 활용~정보 신시대의 판매소 경영"[14] |
1995년 | 본·우에다 기념 국제 기자상 | 타시로 아키라 기자의 인터뷰 시리즈 "핵 시대 어제·오늘·내일"[14] |
1995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 | "히로시마 50년" 보도 (특집 "검증 히로시마", 연재 "핵과 인간", 인터뷰 시리즈 "핵 시대 어제·오늘·내일" 등)[14] |
1999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 | "만남 시마나미"[14] |
2002년 |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 | "끊어라 폭주의 연쇄-다녀왔어가 듣고 싶어서" (총 11번째 수상, 지방지 최다 수상 기록 갱신)[14] |
2009년 | 신문 협회상 경영·업무 부문 | "꿈의 볼 파크 탄생 서포트-지역과 함께 걷는 종합 미디어 기업의 실천-"[14] |
2022년 | 신문 협회상 | 아베 요시히코의 사진 연재 "오타가와 은혜와 삶"[14] |
특히 핵무기·평화 관련 보도로는 1965년, 1985년, 1986년, 1990년, 1995년에 신문 협회상을 수상했고, 1995년에는 본·우에다 기념 국제 기자상을 수상했다.
2. 4. 최근 동향
최근 발행 부수는 주고쿠 신문사 판매국 조사에 따르면, 2017년 61만 2,272부, 2019년 58만 3,208부, 2020년 55만 4,596부, 2023년 8월 15일에는 50만 3,804부[10], 2023년 10월 15일에는 49만 8,369부[11], 2023년 12월 15일에는 49만 4,260부[12], 2024년 2월 15일 현재는 48만 7,981부[13]로 변화하고 있다.3. 특징
1892년 5월 5일 창간된 주고쿠 신문은 최대 40페이지까지 인쇄 가능하다. 히로시마현을 중심으로 야마구치현, 오카야마현, 시마네현 등 주고쿠 지방에서 발행·판매된다. 돗토리현에서는 시마네판을 일부 판매하며, 에히메현의 게이요 제도에서도 판매된다. 전자판도 발행하여 발행 지역 외에서도 구독할 수 있다. 히로시마현의 현 신문이자 주고쿠 지방에서 구독자가 많고 발행 부수도 지방 신문 중 최대 규모여서 블록지로 취급되기도 한다.[3][4][5]
지방의 시선으로 쓰인 기사가 많으며, 특히 마쓰다 관련 보도가 많다. 원폭(핵무기) 및 평화 관련 기사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반 폭주족 논조나 폭력단 추방 캠페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프로 야구), 산프레체 히로시마(일본 프로 축구 리그) 등 지역 프로 스포츠팀 관련 기사도 충실하다.
2005년 하쓰카이치시 오노에 24개 면 풀 컬러 인쇄가 가능한 윤전기를 갖춘 주고쿠 신문 히로시마 제작 센터("츄피 파크")가 완성되었다. 히로시마시 외 후쿠야마시, 슈난시의 3본사 체제로 신문을 발행한다. 2012년부터 도쿄도 주오구 긴자의 히로시마 브랜드 숍 "tau(타우)"에서도 주고쿠 신문과 데일리 스포츠 히로시마판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6]
2015년 4월 30일을 기점으로 91년간 이어져 온 석간을 휴간했다.[7] 블록지 레벨에서 석간을 휴간한 것은 주고쿠 신문이 처음이다.[8] 2015년 5월 1일에는 "두 번째 조간"으로 『'''주고쿠 신문 SELECT'''』를 창간했다.[9] 조간과 같은 사이즈의 풀 컬러 16면 구성으로,[1] 일부 석간 연재도 이어받았다. 2016년부터 편의점 등에서 1부 판매를 시작했다.[1]
주고쿠 신문사 판매국 조사에 따르면 최근 발행 부수는 다음과 같이 추이하고 있다.
연도 | 부수 |
---|---|
2017년 | 612,272부 |
2019년 | 583,208부 |
2020년 | 554,596부 |
2023년 8월 15일 | 503,804부[10] |
2023년 10월 15일 | 498,369부[11] |
2023년 12월 15일 | 494,260부[12] |
2024년 2월 15일 | 487,981부[13] |
3. 1. 제휴 관계
4. 논란
주고쿠 신문은 신문 협회상 편집 부문에서 "히로시마 40년" 보도로 수상하였다.(1985년)
4. 1. 'BC급 전범' 연재 문제
주고쿠 신문은 1985년 신문 협회상의 편집 부문에서 "히로시마 40년" 보도로 수상하였다.5. 사회 공헌 활동
주고쿠 신문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해설란에 프로그램명, 방송 시간과 함께 계열 방송국을 히로시마, 야마구치, 산인, 오카야마·가가와 순서로 싣고 있다. 후지 TV 계열의 경우, TSS 다음에는 야마구치현에 해당 계열 방송국이 없기 때문에 야마구치현 서부 등에서 직접 수신이 가능한 TV 니시닛폰을 싣고 있다.
- TBS 계열 - RCC, TV 야마구치, BSS, RSK
- 니혼 TV 계열 - 히로시마 TV, 야마구치, 니혼카이, TVQ 규슈
- TV 아사히 계열 - 홈 TV, 야마구치 아사히, 세토우치
- 후지 TV 계열 - TSS, TV 니시닛폰, 산인 중앙, OHK
주고쿠 신문은 '히로시마현 10대가 만드는 평화 신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18] 공모를 통해 선발된 10대 주니어 라이터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주제로 취재하고 글을 작성한다.[18]
6. 한국과의 관계
中國新聞중국어은 한국과 관련된 기사를 다루면서, 특히 독도 문제와 역사 문제에 대해 한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보도를 하고 있다.
7. 참조
1990년 8월 15일부터 지면에 연재되었던 「BC급 전범」(오다 시게호 해설위원이 단독으로 취재, 집필)에 대해, 1991년 3월 『말라야의 일본군』을 간행한 다카시마 노부요시・하야시 히로시가 연명으로 편집국장에게 항의했다. 연재 기사 중 『말라야의 일본군』 인용 방식이 부당하고, 다수의 사실 오인·왜곡 및 편견이 있으며, 역사를 날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19]. 이에 신문사는 「전대미문(하타 이쿠히코)」의 사과 기사를 게재했다[20].
주고쿠 신문은 1991년 6월, 역사관이나 견해 차이 외에 저자의 의도와 다른 인용 실수·사실 오인이 있었고, 독자들로부터도 유사한 지적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미 확인된 부분은 정정했으며, 인용에 개찬(改竄)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향후 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답변했다[21][22]. 같은 해 10월, 사내 점검 결과 1,150곳의 이동(異同)이 있었고, 전사(轉寫) 실수 등의 사실관계 오류, 저자의 의도와 다른 인용이나 해석 오류, 일방적인 기술, 추측에 의한 묘사가 있었으며, 집필자에게 자의적인 판단이나 단정이 있었음에도 사내 검토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23][24]. 주고쿠 신문은 오다가 의도적인 개찬은 부인했기에 1,150곳의 『이동 일람』은 방대한 양이 되었지만, 정기 구독 계약을 맺고 있는 도서관 등에 배포하고 대외적으로는 종료했다.
그러나 하타 이쿠히코는 월간지 『정론』 1992년 8월호에 논고를 발표, 오다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주고쿠 신문 내 조사에서 이동으로 취급된 1,150곳은 「구(舊) 가나」를 「신(新) 가나」로 정정한 것, 루비를 새로 붙인 것, 인용 문헌의 잘못을 올바르게 고친 것, 교열부 누락까지 포함되었다고 지적했다. 조사원이 기계적으로 대조한 1,150곳이라는 숫자에 「시로토(전문가가 아닌 사람)」인 편집부 간부가 다카시마 등에게 전면 항복해 버렸다는 하타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다[20]. 다만, 문제 당시 마이니치 신문 기사에 따르면 주고쿠 신문은 인용 규칙 이탈, 일방적인 기술, 사실 혼동 등 9개 항목으로 분류하고, 오다의 설명을 덧붙이면서 「개찬 의혹을 갖게 되어도 어쩔 수 없다」, 「명백한 사실 오인」 등의 표현으로 저자의 의도와 다른 인용 및 내용 개변을 인정했다고 한다. 이는 사건의 사과 및 재발 방지책과 함께 신문 지면 1페이지 반에 걸쳐 주고쿠 신문에 게재되었다[25].
하타는 다카시마·하야시의 항의 내용에 대해서도 오다 기자의 연재는 (하야시가 원저에서) 쓰지 않은 것을 마치 쓴 것처럼 하고 있다[26]는 등 트집 잡기나 억지 수준이며, 다카시마·하야시의 『말라야의 일본군』에도, 싱가포르 경비대는 소난 경비대(원문에서는 싱가포르→소난이라는 표현)이다, 전면화라고 하고 있지만 전면 전쟁화라고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등의 예까지 포함하여 실례를 제시하며 유사한 표기 문제가 있고, 오히려 밀도는 그들 쪽이 높다고 옹호했다[20].덧붙여, 주고쿠 신문사의 점검 보고서에는 「집필자는 개찬을 강력히 부인했지만, (생략) 전사 미스의 오류 외에, 일부에 저자의 의도에 반하는 인용, 내용의 개변 등 문제가 있는 기술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하타는 하고 있지만, 하타는 이것을 주고쿠 신문도 「미묘한 표현이면서도 고의 또는 악의의 개찬은 부정」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다』상권 문고본 P.438).일본어 다카시마·하야시 측은 오다의 집필 내용에는 본질에 관련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정론』 1992년 9월호부터 11월호에 쌍방의 반론, 재반론 등이 게재되었다. 오다 자신은 『제군!』 1992년 9월호에 사건 논고를 게재했다. 한편, 오다의 다른 연재 『시베리아 억류』에 대해서도 다카시마는 오다가 불분명하다고 느낀 부분을 검증했지만, 「의도적인 개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인정했다[25].
이 연재 「BC급 전범」은 단행본화할 예정으로 고단샤와 계약되어 있었지만, 이 문제로 발행이 보류되었다[20]. 대신, 주고쿠 신문사는 1993년에 취재반 취재에 의한 저서 『아시아에서 아시아 공생의 길』을 출판했다.
참조
[1]
ニュース
セレクトの一部売り 広島県内で来月から 価格は60円(税込み)
中国新聞
2016-04-28
[2]
ニュース
24年2月期部数
新聞情報
2024-02-20
[3]
웹사이트
ブロック紙(goo辞書)
https://dictionary.g[...]
[4]
웹사이트
ブロック紙サイトリンク
http://www.sinbunkou[...]
2009-02
[5]
웹사이트
ブロック紙一覧エントリー一覧
http://newspaper.dig[...]
[6]
웹사이트
おっ!なんと ブランドショップTAUでその日の中国新聞が買える!
http://hiroken.gr.jp[...]
2012-10-30
[7]
뉴스
中国新聞、4月末で夕刊休刊 新媒体を発行へ
https://web.archive.[...]
朝日新聞
2015-02-13
[8]
뉴스
“ブロック紙”で初 中国新聞が夕刊休刊へ
https://news.ntv.co.[...]
日テレニュース24
2015-02-12
[9]
웹사이트
中国新聞 SELECT 5月1日(金)創刊
http://www.chugoku-n[...]
[10]
웹사이트
中国新聞groupマーケティング・ソリューション│メディア│中国新聞朝刊
https://marketing-so[...]
2023-10-19
[11]
웹사이트
発行部数|中国新聞広告のご案内
https://www.ad-chugo[...]
2023-11-12
[12]
웹사이트
発行部数|中国新聞広告のご案内
https://www.ad-chugo[...]
2023-12-22
[13]
웹사이트
発行部数|中国新聞広告のご案内
https://www.ad-chugo[...]
2024-02-20
[14]
서적
日本メディア史年表
吉川弘文館
2018-01-01
[15]
웹사이트
中国新聞、8月1日から値上げ 月決め3900円に
https://nordot.app/1[...]
2023-07-06
[16]
간행물
週刊東洋経済
2010-02-20
[17]
웹사이트
朝刊電子版3月1日創刊
http://www.chugoku-n[...]
[18]
웹사이트
創刊のことば
http://www.chugoku-n[...]
[19]
학술지
[20]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上 (文庫版)
文藝春秋
1999-12-10
[21]
뉴스
研究者抗議、中国新聞に反論掲載 マレーシア住民虐殺の記事
朝日新聞
1991-06-05
[22]
뉴스
中国新聞
1991-06-05
[23]
뉴스
引用文献改ざん疑惑 「一部に問題」とおわび
読売新聞
1991-10-16
[24]
뉴스
「戦犯」連載記事の総点検結果を掲載 中国新聞
朝日新聞
1991-10-16
[25]
뉴스
中国新聞 元解説委員の連載記事で改ざん認め、調査を特集
毎日新聞
1991-10-16
[26]
서적
華僑虐殺
すずさわ書店
1992-05-30
[27]
웹사이트
草創期の広島の新聞
http://www.pref.hiro[...]
広島県立文書館
[28]
뉴스
「あなたとは違うんです」は「候補者辞退」 新語・流行語大賞
https://www.itmedia.[...]
ITmedia NEWS
2008-12-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