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질지골도후선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질지골도후선우는 기원전 1세기에 활동한 흉노의 선우이다. 허려권거선우 사후 악연구제선우가 즉위하자 좌록리왕이 되었고, 이후 호한야선우와 대립하며 흉노를 분열시켰다. 그는 윤진선우를 죽이고 호한야선우를 공격하여 흉노를 일시적으로 통일했으나, 호한야선우가 전한에 투항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확장하며 강거와 동맹을 맺었으나,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36년 사망 - 위현성
    위현성은 전한 후기의 관료이자 유학자로, 부양후 위현의 아들이며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하내태수, 위위, 태상 등을 거쳐 승상에 이르렀고 회양헌왕 유흠을 보도, 황제릉 제도 정비에 힘썼다.
  • 흉노의 선우 - 호한야선우
    호한야선우는 흉노의 선우로서, 흉노 분열기에 한나라에 귀순하여 지원을 받아 흉노를 통일하고 한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통해 흉노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 흉노의 선우 - 어부라
    어부라는 후한 말 남흉노의 선우로, 흉노족 내분으로 낙양에 망명하여 용병으로 활동하다 195년 사망했으며, 그의 손자 유연은 한조를 건국했다.
  • 전사한 군주 -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1405년에 태어나 1449년 황제가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위협 속에서 동서 교회의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함께 최후를 맞이하며 동로마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다.
  • 전사한 군주 -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는 잉글랜드 요크 왕가 마지막 왕으로, 장미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조카들을 런던탑에 가두고 왕위에 올랐다가 보즈워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하며 요크 왕가의 몰락을 초래했고, 셰익스피어 희곡 등에서 악인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질지골도후선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질지골도후선우
원래 이름郅支骨都侯單于
흉노의 영역 및 영향력 (대략)
작위탱리고도선우
재위기원전 56년 - 기원전 36년
왕조흉노
가문연제씨
아버지허려권거선우
사망지카자흐스탄 탈라스강 유역 질지성
관직
작위2우록리왕
재위2??-??
작위3좌현왕
개인 정보
호도오사
배우자아무개(구우리수의 어머니), 강거 왕의 딸
자녀우대장 구우리수
친인척동생 호한야선우
기타 정보
중국어 병음Luándī Hūtúwúsī
중국어 간체郅支
중국어 병음Zhìzhī
웨이드-자일스Chih4-chih1

2. 생애

기원전 60년 아버지 허려권거선우가 죽자 악연구제선우가 즉위하여, 질지골도후선우(이하 질지선우)는 민간으로 숨었고 동생 계후산(호한야선우)은 장인에게 도주했다.[5] 기원전 58년 악연구제선우의 폭정에 반발한 흉노인들이 계후산을 호한야선우로 옹립하자, 질지선우는 좌록리왕이 되었다.[5]

기원전 56년 호한야선우가 흉노를 재통일했으나, 도기선우 등 여러 선우가 난립했다. 이때 질지선우는 스스로 질지골도후선우라 칭하며 자립해 흉노 동쪽을 차지했다.[5]

기원전 54년 질지선우는 서쪽의 윤진선우를 죽이고 그 세력을 흡수했다. 여세를 몰아 호한야선우를 공격, 선우정(흉노의 수도)을 점령하고 흉노를 일시 통일했다.[5] 호한야선우전한에 투항하자, 질지선우는 기원전 53년 아들을 전한에 인질로 보냈다. 기원전 51년 호한야선우가 전한에 조공하자, 질지선우도 사신을 보냈다.

기원전 49년 질지선우는 서쪽으로 이동, 이리목선우를 죽이고 군사 5만여 명을 흡수했다. 오손오취도에게 사신을 보냈으나, 오취도가 전한 편에 서서 사신을 죽이고 공격해오자 격파했다. 이후 오걸, 견곤(키르기스스탄), 정령을 굴복시키고 세력을 확장, 견곤에 도읍을 정했다.

기원전 48년 질지선우는 전한에 아들을 돌려보내라 요구하며, 전한 황제를 모시는 아들 구우리수를 돌려보내면 귀순하겠다고 제안했다.[5] 전한 신하들은 사신 곡길의 안전을 우려했으나, 곡길은 흉노와의 관계를 중시, 구우리수를 흉노에 호송했다. 하지만 질지선우는 곡길을 죽였다.

이후 질지선우는 오손과 충돌하던 강거와 동맹을 맺고 강거 왕의 딸과 결혼했다. 강거의 힘을 빌려 오손을 공격, 오손의 서울 적곡성까지 진격하여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질지선우는 교만해져 강거 왕이 예를 다하지 않는다고 하여 강거 왕의 딸과 귀인, 백성 수백 명을 죽이고, 도뢰수에 시신을 버렸다.[6] 그리고 백성을 징발해 성을 지어 2년 후에 완성했다. 주변의 합소·대완 등 여러 나라에 조공을 요구했다.

서역도호 기도위 감연수와 부기도위 진탕은 서흉노 정벌을 계획, 서역 도시 국가들과 황제 원제의 명령을 사칭하여 4만 명을 모아 서흉노 정벌에 나섰다.[1]

감연수와 진탕은 강거 부왕 포전을 격파하고, 강거 귀족 도묵을 전한 편으로 끌어들였다. 선우성 근처에서 질지선우의 상황을 파악한 후,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질지선우는 직접 누각에 올라가고 연지들과 부인들은 성을 포위한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았으나, 질지선우는 코에 화살을 맞고 부인들도 많이 죽었다. 밤이 지나면서 나무 성이 뚫려 토성으로 물러났다. 강거 병사 만여 기가 야습했으나 흉노 군이 불리했다. 날이 밝자, 사방에서 불이 일어났고, 강거 군은 달아났다. 한나라 군은 토성까지 진입, 질지선우와 남녀 백여 명은 대내(大內)로 몰렸고, 한나라는 거기에 불을 지르고 병사들이 앞다투어 들어갔다. 질지선우는 부상을 입고 전사했고, 두훈에게 목이 잘렸다.[1]

2. 1. 흉노 분열과 자립

기원전 60년, 아버지 허려권거선우가 죽자 악연구제선우가 즉위하면서 질지골도후선우(이하 질지선우)는 민간으로 숨었고, 동생 계후산(호한야선우)은 장인에게 도주했다.[5] 기원전 58년, 흉노족들이 악연구제선우의 폭정에 반발하여 동생 계후산을 호한야선우로 옹립하자, 질지선우는 좌록리왕이 되었다.[5]

기원전 56년, 호한야선우가 흉노를 재통일했으나, 도기선우, 거리선우, 호걸선우, 오자선우 등 여러 선우가 난립했다. 이 혼란기에 질지선우는 스스로 질지골도후선우라 칭하며 자립해 흉노 동쪽 지역을 차지했다.[5]

2. 2. 흉노 통일과 서진(西進)

郅支骨都侯單于|질지골도후선우중국어기원전 54년 서쪽의 윤진선우를 공격하여 죽이고 그 세력을 흡수했다. 여세를 몰아 호한야선우를 공격하여 선우정(흉노의 수도)을 점령하고 흉노를 일시적으로 통일했다.[5] 호한야선우전한에 투항하여 세력을 보존하자, 질지선우는 기원전 53년 아들을 전한에 보내 황제를 모시게 했다. 기원전 51년 호한야선우가 전한에 조공하자, 질지선우도 사신을 보내 전한에 예물을 바쳤다.

기원전 49년 질지선우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리목선우를 죽이고 그의 군사 5만여 명을 흡수했다. 오손의 소곤미 오취도에게 사신을 보냈으나, 오취도가 전한 편에 서서 사신을 죽이고 공격해오자 격파했다. 이후 북쪽의 오걸, 서쪽의 견곤(키르기스스탄), 북쪽의 정령을 굴복시키고 세력을 확장했다. 견곤에 도읍을 정하고 소그디아나까지 세력을 확장했다는 기록도 있다.

2. 3. 전한과의 관계 악화와 강거와의 동맹

기원전 48년, 질지선우는 전한에 아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며, 전한 황제를 모시는 아들 구우리수를 돌려보내면 귀순하겠다고 제안했다.[5] 전한의 신하들은 사신 곡길의 안전을 우려했으나, 곡길은 흉노와의 관계를 중시하여 구우리수를 흉노에 호송했다. 하지만 질지선우는 곡길을 죽였다.

이후 질지선우는 오손과 충돌하고 있던 강거와 동맹을 맺고 강거 왕의 딸과 결혼했다. 자신도 딸을 강거 왕에게 주었다. 강거의 힘을 빌려 오손을 공격하고, 오손의 서울 적곡성까지 진격하여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이로 인해 오손 서쪽 변경 수천 리에 걸쳐 사람이 살지 않았다. 질지선우는 스스로 대국이라 여기고 교만해져 강거 왕이 예를 다하지 않는다고 하여 강거 왕의 딸과 귀인, 백성 수백 명을 죽이고, 일부의 지체를 해체해 도뢰수에 던졌다.[6] 그리고 그 백성을 징발해 성을 지어 2년 후에 완성했다. 주변의 합소·대완 등 여러 나라를 꾸짖어 서흉노에 매년 조공을 바치게 했다.

2. 4. 최후

서역도호 기도위 감연수와 부기도위 진탕전한에서 멀리 떨어진 서흉노가 세력을 확장하면 오손에 이르고 한나라에도 해가 될 것이라 판단하여 서흉노 정벌을 계획했다. 이들은 서역 도시 국가들의 병력을 모으고, 황제 원제의 명령을 사칭하여 한족 병사와 이민족 병사 4만 명을 모아 서흉노 정벌에 나섰다.[1]

감연수와 진탕은 먼저 오손을 핍박하는 강거 부왕 포전을 격파하고, 강거 동쪽 경계로 가서 강거 귀족 도묵을 은밀히 만나 전한 편으로 끌어들였다. 선우성 60여 리 밖에서 다른 귀족 패색과 그 아들 개모를 잡아 길잡이로 삼았는데, 개모는 도묵의 외삼촌으로 모두 질지선우를 미워하여 질지선우의 상황을 알렸다. 다음날, 이들은 선우성 30리까지 진격해 영채를 세우고 서로 사자를 주고받았다. 또 다음날, 이들이 질지성이 있는 도뢰수 근처까지 오니, 선우성과의 거리는 3리였다.[1]

선우성에는 오색 군기를 내걸고, 백여 기병은 성 밖을 왕래하게 하며, 백여 보병은 성문을 끼고 어린진을 폈다. 그리고 백여 기로 한나라 진영에 싸움을 걸었으나, 한나라가 응하지 않고 화살만 당기니 백여 기는 성 안으로 들어갔다. 감연수와 진탕 군은 마침내 성을 포위했고, 성 안에 만든 누각에서 화살을 쏘는 병사들은 한나라의 응사에 모두 누각 아래로 달아났다. 이 성은 본성은 토성이었고 바깥에 이중 나무 성이 있어서 그 나무 성 위에서 화살을 쏘아 한군을 죽였으나, 한군은 나무 성에 불을 질러 무력화했다. 밤이 되자 수백 기를 내보내 공격했으나 화살 공격을 받고 죽었다.[1]

질지선우는 처음에 한나라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아나려 했으나, 강거가 한나라와 내통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고, 또 오손 등 주변 나라들이 한나라와 연합해서 오기 때문에 달아날 곳이 없다고 판단하여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한나라 군은 멀리서 왔으므로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질지선우는 직접 누각에 올라가고 연지들과 부인들은 성을 포위한 군사들에게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질지선우는 코에 화살을 맞고, 부인들도 많이 죽었다. 결국 누각에서 내려와 직접 말을 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밤이 지나면서 나무 성이 뚫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토성으로 물러났다. 마침 강거 병사 만여 기가 와서 10여 곳으로 나누어 포위군을 역포위하고 야습했으나 오히려 흉노 군이 불리했다. 날이 밝자, 사방에서 불이 일어났고, 강거 군은 달아났다. 한나라 군은 마침내 토성까지 진입했다. 선우와 남녀 백여 명은 대내(大內)로 몰렸고, 한나라는 거기에 불을 지르고 병사들이 앞다투어 들어갔다. 질지선우는 부상을 입고 전사했고, 한나라의 군후가승(軍候假丞) 두훈에게 목이 잘렸다. 연지·태자·명왕 이하 1,518명이 목이 잘렸고, 145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천여 명이 항복했다.[1]

3. 가계

관계이름
아버지허려권거선우
동생호한야선우 계후산
아들구우리수


참조

[1] 서적 Schuessler 2014
[2] 서적 Ancient Mysteries: Discover the latest intriguiging, Scientifically sound explanations to Age-old puzzles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3]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4] 문서
[5] 문서
[6]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