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쩐 예종 (10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쩐 예종은 쩐 왕조의 제10대 황제로, 명종의 아들이자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즉위 전에는 공선왕으로 봉해졌으며, 1372년 형인 예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그는 참파와의 전쟁을 강행했으나 도반 전투에서 참패하여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쩐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337년 출생 - 신의왕후
    신의왕후는 안변 한씨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이자 정종과 태종의 생모이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사망하여 왕비로 책봉되지는 못했으나 사후 왕후로 추존되어 왕태후로 격상되는 등 칭호에 대한 논란을 겪기도 했다.
  • 1337년 출생 - 정몽주
    정몽주는 고려 말 성리학을 보급하고 이성계와 함께 왜구 및 여진족을 토벌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 건국을 반대하다 이방원에게 암살당한 고려의 문신이다.
  • 1377년 사망 - 에드워드 3세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조의 왕으로, 쿠데타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친정 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백년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으나 말년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 의회 발전과 국가 정체성 강화가 이루어졌다.
  • 1377년 사망 - 지윤
    지윤은 고려 말 무녀 출신 어머니를 두었음에도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판숭경부사에 이르렀으나, 권신 이인임의 심복으로 활동하며 친명파를 탄압하고 권력을 남용했다는 비판과 함께 북원과 심왕의 위협에 맞서기도 했으며, 이인임 제거 실패 후 처형, 조선 개국 후 왕실 외척이 되었지만 반역자로 기록되었다.
  • 쩐 왕조의 황제 - 쩐 유종
    쩐 유종은 쩐 왕조의 제7대 황제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초기에는 섭정을 받았으나 친정 이후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고 후사 없이 사망하여 왕조 계승에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쩐 왕조의 황제 - 쩐 예종 (9대)
    쩐 예종은 쩐 왕조의 제9대 황제로, 양일례를 폐위시키고 즉위하여 쩐 왕조 질서 회복을 시도했으나, 잦은 외침과 신하들의 배반, 호꾸이리의 득세로 쇠퇴를 가속화시키고 태상황으로 실권을 장악하며 쩐 왕조 멸망의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쩐 예종 (10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쩐 주에 tông (Trần Duệ Tông)
한자陳睿宗 (진 예종)
풀네임쩐 낀 (Trần Kính/陳曔)
통치 정보
칭호황제
왕조쩐 왕조
재위 기간1373년 – 1377년
연호롱카인(隆慶, 1373–1377)
쩐 낀 (Trần Kính/陳曔), 쩐 녓 도안 (Trần Nhật Đoan/陳日煓)
묘호주에 tông (Duệ Tông/睿宗)
시호계천응운인명흠효황제 (Kế Thiên Ứng Vận Nhân Minh Khâm Hiếu Hoàng Đế/繼天應運仁明欽孝皇帝)
능묘희릉
즉위1372년 12월 4일
퇴위1377년 6월 19일
생애
출생일1337년 6월 30일
출생지탕롱, 대월
사망일1377년 3월 4일 (향년 39세)
사망지비자야, 참파
가족 관계
아버지쩐 민종
어머니돈자황태비
배우자가자황후 여씨
자녀쩐 현
기타
종교불교
재위명계천응운인명흠녕황제 (Kế Thiên Ứng Vận Nhân Minh Khâm Ninh Hoàng Đế/繼天應運仁明欽寕皇帝)

2. 생애

쩐 예종은 명종의 11번째 아들로, 어머니는 돈자황태비(Đôn Từ Hoàng Thái Phi) 여씨(Lê Thị)이다. 헌종, 유종, 예종의 동생이다. 즉위 전 작위는 '''공선왕'''(恭宣王)이었다.[1]

1370년 형인 예종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고, 1371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372년 형 예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여, 1373년부터 1377년까지 롱카인(Long Khánh, 隆慶) 연호를 사용했다.

1373년 3월, 황장자 쩐비(Trần Vĩ/진위/陳煒)를 창무대왕(Chương Vũ Đại Vương/彰武大王)으로 봉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요절하였다.

즉위 후 국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374년 과거 제도를 시행하고 군대와 행정 시스템을 재조직했다. 호 뀌 리를 군사 고문, 쩐 응우옌 단을 북부 국경 통제관으로 임명했다.

1376년 참파를 정벌하기 위해 12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친정했으나, 1377년 도반 전투에서 대패하여 전사했다.

2. 1. 즉위 전

쩐 예종은 명종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돈자황태비(Đôn Từ Hoàng Thái Phi) 여씨(Lê Thị)이다. 즉위 전 작위는 '''공선왕'''(恭宣王)이었다.[1]

1370년 11월, 형인 예종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다.[2]

1371년 4월, 황태자(皇太子)로 책봉되었다.

2. 2. 즉위 후

1372년 11월 9일(12월 4일), 형인 예종(藝宗)의 양위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였다. 1373년부터 1377년까지 연호를 롱카인(Long Khánh, 隆慶)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다. 즉위 후, 유종과 즈엉 녓 레의 통치 기간 동안 혼란스러웠던 국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4] 1374년 2월에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고 군대와 행정 시스템을 재조직했다.[4] 또한, 황실에서 호 뀌 리를 군사 고문으로 임명하고,[5] 쩐 응우옌 단을 북부 국경 통제관으로 임명하는 등[11] 인재 등용에도 힘썼다.

2. 3. 참파와의 전쟁과 최후

1376년 정월, 쩐 예종은 신하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숙적 참파를 정벌하기 위해 12만 명의 군사를 일으켜 친정하였다.[1] 그러나 참파군에게 대패하였고, 1377년 5월 13일(6월 19일) 도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6][7] 향년 41세(만 세)였다.

대월사기전서에 따르면, 쩐 예종은 즈엉 녓 레를 몰아내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오만하고 고집스러운 통치자였다.[1] 그는 참파 군대의 힘에 대한 관리들의 조언을 무시했고, 즉위 직후 체 봉 응아의 군대에 맞서 남쪽 국경에서 군사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3]

쩐 예종은 1373년 12월 대월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참파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10] 체 봉 응아가 대월에 조공을 거부한 것도 참파 군사 작전을 강화한 요인이었다. 이후 역사서에 따르면, 참파 왕은 금 15개 쟁반을 대월에 보냈지만, 남부 국경 담당 관리인 도 뜨 빈이 금을 사적으로 보관하고 황실에 참파로부터 조공이 없었다고 보고했다.[5]

1376년 12월, 예종은 12,000명의 베트남 군대를 직접 지휘하여 참파의 수도 비자야로 진격했고, 호 뀌 리는 작전의 병참을 맡았으며 도 뜨 빈은 후방을 지휘했다. 음력 1377년 1월 23일, 예종의 군대는 참파의 수도 도반 근처 티 나이에 도착했다. 체 봉 응아는 도반에서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략으로 항복하는 척하는 작은 관리를 내세워 예종으로 하여금 참파 군대가 빈 수도에서 도망쳤다고 믿게 만들었다. 다음 날, 예종은 체 봉 응아가 준비한 매복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그 결과, 쩐 군대는 도반 전투에서 크게 패했고, 황제는 다른 많은 고위 관리, 장군 및 군대의 70%와 함께 전사했다.[6][7] 반대로 호 뀌 리와 도 뜨 빈은 황제를 구출하려 하지 않고 전투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살아남았다.[8] 이후 도 뜨 빈은 응에 똥의 명령에 따라 일반 병사로 강등되었고, 호 뀌 리는 어떤 혐의도 받지 않았다.[8][9]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부친명종 황제 쩐마인(陳奣/진앵)
모친돈자황태비(敦慈皇太妃) 여씨(黎氏)
황후
가자황후(嘉慈皇后) 여씨(黎氏) (? ~ 1381년)[10]
후궁
신비(宸妃) 응우옌빗쩌우(阮碧珠/완벽주) (1356년 ~ 1377년) - 제승부인(制勝夫人)으로도 불림.
공비(恭妃) 쩐응옥호아(陳玉和/진옥화)
쩐리우의 딸[11]
황자
창무대왕(彰武大王) 쩐비(陳煒/진위) (1360년 ~ 1374년) - 가자황후 소생.[10]
건덕대왕(建德大王) 쩐히엔(陳晛/진현) - 가자황후 소생. 제11대 황제 영덕왕(靈德王).
쩐응우옌디에우(陳元曜/진원요) (? ~ 1390년)
창정왕(彰靖王) 쩐응우옌히(陳元翬/진원휘)
황녀
휘진공주(輝眞公主) - 공비 진씨 소생.


4. 평가

쩐 예종은 유능한 군주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급하고 독단적인 성격으로 인해 실패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특히, 참파와의 전쟁에서의 패배는 그의 가장 큰 실책으로 꼽힌다.[1][3]

예종은 즉위 직후 제바응아의 군대에 맞서 남쪽 국경에서 군사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373년 12월, 대월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참파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10] 그는 참파 군대의 힘에 대한 관리들의 조언을 무시했다.[1]

한편, 예종은 유종과 양일례의 통치 기간 동안 혼란 이후 국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몇 가지 활동을 했다. 예를 들어 1374년 2월에 과거 제도를 시행하거나 군대 및 행정 시스템을 재조직했다.[4]

롱카인 4년(1376년), 예종은 조정 신하의 간언을 무시하고 참파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 12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했으나 대패하여 진중에서 사망했다.[6][7] 1376년 12월, 예종은 12,000명의 베트남 군대를 직접 지휘하여 참파의 수도 비자야로 진격했다.[6] 음력 1377년 1월 23일, 예종의 군대는 참파의 수도 도반 근처 티 나이에 도착했다. 도반 전투에서 예종은 제바응아가 준비한 매복에 걸려 크게 패했고, 황제는 다른 많은 고위 관리, 장군 및 군대의 70%와 함께 전사했다.[6][7]

그의 죽음 이후 쩐 왕조는 급격히 쇠퇴하였으며, 결국 호계리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쩐 예종의 사례는 지도자의 자질과 판단력이 국가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해석될 수 있다.

5. 연호

연호원년2년3년4년5년
서력1373년1374년1375년1376년1377년
간지계축갑인을묘병진정사
롱카인원년2년3년4년5년


6. 묘호, 시호, 능호

묘호는 예종(Duệ Tông/睿宗)이며, 능호는 희릉(Huy Lăng/熙陵)이다. 재위 시 존호는 계천응운인명흠효황제(Kế Thiên Ứng Vận Nhân Minh Khâm Hiếu Hoàng Đế/繼天應運仁明欽孝皇帝)이다.

참조

[1] Harvnb
[2] Harvnb
[3] Harvnb
[4] Harvnb
[5] Harvnb
[6] 서적 The Champa Kingdom White Lotus Co., Ltd.
[7] Harvnb
[8] Harvnb
[9] Harvnb
[10] Harvnb
[11] Harvnb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