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루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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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루아족은 현재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지역에 거주했던 원주민으로, 스페인 식민주의자들과의 접촉 이전에는 리오 데 라 플라타 지역에서 독자적인 삶을 영위했다. 스페인 정복에 저항하며, 1831년 살시푸에데스 학살로 민족 집단으로서 멸망했다. 이후 차루아족의 후손들은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으며,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과 같은 여러 단체에서 그들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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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루아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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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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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 지역 |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
인구 | 우루과이: 159,319명 (2011년) 아르헨티나: 14,649명 (2010년) 브라질: 42명 (2014년) |
언어 | 샤루아어군 |
종교 | 애니미즘 |
관련 민족 | 차나족 과라니족 |
역사 | |
근원 | 아메리카 원주민 |
유럽인과의 접촉 | 16세기 초 |
샤루아 학살 | 1831년 |
현대 부활 | 21세기 초 |
문화 | |
전통적인 생활 방식 | 수렵, 채집, 어로 |
사회 조직 | 부족 중심 |
종교적 신념 | 자연 숭배, 조상 숭배 |
현재의 문화적 노력 | 전통 문화 복원, 언어 보존 |
2. 역사
스페인 식민주의자들과 접촉하기 전 차루아족의 삶은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차루아족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가 스페인인들과의 접촉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차루아족은 소의 착취에 직면하여 삶의 방식을 크게 변화시키고 기아를 유발하여 소와 양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대에 점점 더 사유화되었다. '말론'(습격)은 길을 막는 원주민은 누구든 자유롭게 쏴 죽인 정착민들에 의해 저항받았다. 차루아족은 여름에는 해안으로 이동하여 조개, 과일, 뿌리를 잡고 모았고, 겨울에는 볼라스(짧은 밧줄로 연결된 돌을 던져 먹이를 잡는 도구)와 활과 화살로 사슴, 레아, 작은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내륙으로 이동했다.
이후 차루아족은 점차 주권을 박탈당했고, 새로운 국가는 전체 영토에 대한 관할권을 확정했다.
1985년 우루과이의 시민 군사 독재가 종식된 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차루아족의 조상을 긍정하고 옹호하고 있다. 1989년 8월, 차루아족 후손 협회(ADENCH)가 우루과이의 원주민에 대한 지식과 존재를 구하고,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설립되었다.[11] 2005년에는 또 다른 단체인 차루아족 의회(CONACHA)가 결성되었는데, 이곳에서 여러 가족들이 은밀한 생활에서 벗어나 공개적으로 스스로를 차루아족이라고 인정했다.[12]
우루과이 역사 초기에 인지적 삭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차루아족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차루아족과 관련된 유일하게 남아있는 문서는 스페인 탐험가, 고고학자, 인류학자들이 남긴 것이다. 현재 그들의 구전 역사, 현대적 민족 형성, 활동에 대한 새로운 문헌들이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생존한 차루아족의 후손이 약 16만 명에서 30만 명 사이인 것으로 추정된다.[13] 2001년 아르헨티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엔트레 리오스 주에 676명의 차루아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2007년 11월 9일, 포르투알레그레의 시의회는 차루아족을 현존하는 브라질 원주민으로 인정하는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포르투알레그레 시의회 인권 위원회와 브라질 국회 인권 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행사 중 브라질 상원의원 파울루 파임과 세르지우 잠비아시는 "172년 동안 지속된 투쟁에서 그들의 정복과 노력"에 대해 원주민들에게 축하를 전했다.[14] 히우그란지두술에서 가장 유명한 차루아족 추장이자 차루아족 최초의 여성 추장인 카시케-헤랄 아쿠압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페람불란테스''(브라질, 2009)는 지안카를라 브루네토와 카린 에머리히가 제작했다.[15] 알데이아 폴리도로의 카시케인 아쿠압은 브라질리아로 가서 당시 브라질 대통령 룰라에게 그녀의 민족을 국립 원주민 재단에서 인정해 달라는 문서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쿠압은 대통령의 경호원을 따돌리고 대통령에게 접근했다. 이 인정은 2007년 9월에 이루어졌다.[16] 2008년까지 포르투알레그레 시는 알데이아 폴리도로 (9-ha) 지역에 시립 원주민 영토 지위를 부여했다.[16]
우루과이인들은 외국 군대와의 경쟁이나 전투 상황에서 스스로를 "차루아"라고 부른다. 압도적인 역경에 직면하여 우루과이인들이 용기를 보여주는 상황에서, 확실한 패배에 직면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을 "가라 차루아"(차루아족 끈기)라는 표현으로 사용한다. 스페인 정복 직전 현재 우루과이 지역에는 5,000명 정도의 원주민밖에 없었지만, 차루아족은 과라니족과 함께 그중 주요 민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루아족의 긍지 높은 투쟁심은 우루과이인에게도 긍지이며, 가라 차루아(garra Charrúa, 차루아의 발톱)라는 말은 차루아족의 불굴의 투쟁심을 나타내며, 현재는 축구 경기 등, 절대 질 수 없을 때 우루과이인의 혼과 같은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비슷한 의미로 상그레 차루아(sangre Charrúa, 차루아의 피, 자신들에게 차루아족의 피가 흐르는 것을 자랑함)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로스 차루아스라고 불린다.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의 럭비팀에도 차루아라는 이름을 붙인 팀이 있다.
2. 1. 스페인과의 초기 접촉
라 플라타 강에 처음 온 스페인 항해자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는 초기에 차루아족에게 우호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차루아족에게 복종을 강요했다. 4년 후 솔리스는 다시 이 지역을 찾았으나 차루아족에게 살해당했다.[7]차루아족은 유럽인을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 1536년에 건설된 부엔 아이레(부에노스아이레스) 시를 격렬하게 공격했고, 1541년에 이 도시는 버려졌다. 이로 인해 차루아족은 라 플라타 지역에서 유럽인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
2. 2. 유럽인의 침략과 저항
스페인의 탐험가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Juan Díaz de Solís)는 1515년 리오 데 라 플라타(Río de la Plata)를 항해하던 중 차루아족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는 차루아족이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7] 이후 유럽 정착민들이 도착하자, 차루아족은 차나족(Chana)과 함께 영토 침략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라 플라타 강에 온 최초의 스페인 항해자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는 처음에는 차루아족에게 우호적으로 환영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차루아족에게 복종을 강요했다. 4년 후 다시 이 지역에 간 솔리스는 차루아족에게 살해당했다.유럽인을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긴 차루아족은 1536년에 건설된 부엔 아이레(부에노스아이레스) 시를 격렬하게 공격했고, 이 도시는 1541년에 버려졌다. 이렇게 차루아족은 라 플라타 지역에서 유럽인의 최대 위협이 되었다.
솔리스와의 접촉으로 유럽인과의 오랜 싸움이 시작되었다. 차루아족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중에서도 드물게 투쟁심을 가지고 철저하게 싸웠으며, 종종 쳐들어온 스페인 정복자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세력이 쇠퇴하여 1800년경에는 현재의 우루과이 북부 지역으로 밀려났다.
스페인인과 함께 말이 전해지자 차루아족은 승마를 익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졌다.
2. 3. 우루과이 독립 전쟁과 살시푸에데스 학살
1800년대 초 남아메리카 해방 전쟁 시기에 차루아족은 호세 아르티가스의 투파마로스 군에 합류하여 스페인군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맞서 싸웠다.[13] 그러나 브라질에서 침공한 포르투갈 군으로 인해 아르티가스가 실각하고, 우루과이가 독립한 후 초대 대통령이 된 프루투오소 리베라는 차루아족을 위협으로 간주했다.[13]리베라는 초기에 차루아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백인의 지배력이 커지고 영토 확장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적대 행위로 이어졌다.[13] 1831년, 리베라의 조카 베르나베 리베라가 이끈 살시푸에데스( "할 수 있으면 도망가라"는 뜻) 작전으로 인해 차루아족은 멸족되었다.[6] 그는 "엘 파소 델 사우세 델 케구아이", "엘 살시푸에데스", "라 쿠에바 델 티그레"로 알려진 통로 등 세 곳에서 세 차례 공격을 하는 ''살시푸에데스 작전''을 조직했다.[6] 전설에 따르면 첫 번째 공격은 배신이었다. 리베라는 부족 지도자들을 알고 있었고, 나중에 "살시푸에데스"로 명명된 강가에 있는 자신의 병영으로 그들을 불렀다. 그는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며 자신과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차루아족이 술에 취해 경계심을 늦춘 후 우루과이 군인들이 그들을 공격했다. 그 후 두 차례의 공격은 탈출했거나 현장에 없었던 차루아족을 제거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살시푸에데스에서 차루아족 생존자 4명이 체포되었다. 몬테비데오 동방 학교 이사회는 거의 멸종된 종족이 프랑스 과학자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8] 이들은 의사 세나쿠아 세나케, 전사 바이마카-피루 시라, 그리고 젊은 부부 라우레아노 타쿠아베 마르티네스와 마리아 미카엘라 가이유누사였다. 이들 4명은 1833년 파리로 이송되어 대중에게 전시되었다. 전시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시라와 가이유누사 사이에서 태어나 타쿠아베에게 입양된 아기를 포함하여 모두 곧 프랑스에서 사망했다.[9][10] 아이는 차루아족에 의해 마리아 모니카 미카엘라 이구알다드 리베르타드로 명명되었지만, 프랑스인에 의해 캐롤린 타코우아베로 기록되었다.[9][10] 기념 조각상 ''로스 울티모스 차루아스(최후의 차루아족)''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세워졌다.
3. 사회
4. 문화
식인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17]
스페인 정복 직전, 현재의 우루과이 지역에는 과라니족과 함께 주요 민족이었던 차루아족을 포함하여 5,000명 정도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라 플라타 강에 온 최초의 스페인 항해자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는 처음에는 차루아족에게 우호적으로 환영받았지만, 이후 차루아족에게 복종을 강요했다. 4년 후 다시 이 지역을 찾은 솔리스는 차루아족에게 살해당했다.[17] 유럽인을 신뢰할 수 없다고 여긴 차루아족은 1536년에 건설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격렬하게 공격했고, 1541년에는 도시가 버려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차루아족은 라 플라타 지역에서 유럽인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17]
솔리스와의 접촉은 유럽인과의 오랜 싸움을 불러왔다. 차루아족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중에서도 드물게 투쟁심이 강했고, 스페인 정복자들을 격파하기도 했지만, 점차 세력이 약해져 1800년경에는 현재의 우루과이 북부까지 밀려나게 되었다.[17]
1800년대 초 반다 오리엔탈에서 남아메리카 해방 전쟁이 시작되자, 차루아족은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의 군대에 합류하여 스페인군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온 독립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침공한 포르투갈 군에 의해 아르티가스가 실각하고,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 이후 우루과이가 독립하면서 초대 대통령이 된 프루크투오소 리베라는 차루아족을 위협으로 간주했다. 1831년, 리베라의 조카 베르나르베 리베라에게 속아 살시푸에데스 강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차루아족은 1,000명 정도로 줄어들었고, 민족 집단으로서 멸망하게 되었다. 살아남은 차루아족 4명은 프랑스에 팔려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17]
차루아족의 투쟁심은 우루과이인에게 긍지로 여겨지며, '가라 차루아(garra Charrúa, 차루아의 발톱)'는 차루아족의 불굴의 정신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축구 경기 등 중요한 순간에 우루과이인의 정신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상그레 차루아(sangre Charrúa, 차루아의 피)'라는 표현도 차루아족의 혈통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의미로 사용된다.[17]
4. 1. 유산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에는 차루아족의 후손이 약 16만 명에서 30만 명 정도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13] 우루과이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용기를 보여줄 때 "''가라 차루아''"(차루아족 끈기)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차루아족과 관련된 유산은 다음과 같다.
- 말도나도주의 피리아폴리스에는 차루아족 묘지가 있다.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로스 차루아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포르투알레그레의 지역 럭비팀 역시 차루아족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차루아는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주의 지방 자치 단체이다.[17]
- "차루아"는 브라질 군대에서 병력 수송에 사용되는 군용 탱크의 이름이기도 하다.
- ''타바레''는 1888년에 출판된 후안 소리야 데 산 마르틴의 서사시로, 차루아족 남자가 스페인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 키클리과의 일종인 ''오스트롤레비아스 차루아''는 그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포시토스와 코르돈 지역의 몬테비데오 거리 이름은 "차루아"이다.
- 브라질 육군의 제2 기계화 기병 여단은 "브리가다 차루아" (차루아 여단)라고 불린다.
- 몬테비데오에는 '마지막 차루아' 동상이 세워져 있다. 1831년 살시푸에데스 강 전투에서 살아남은 차루아족 4명은 프랑스에 팔려 구경거리가 되었으나, 2002년 그들의 유골이 169년 만에 우루과이로 반환되었다.
1985년 우루과이의 시민 군사 독재가 종식된 후, 차루아족의 조상을 긍정하고 옹호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89년 차루아족 후손 협회(ADENCH)[11], 2005년 차루아족 의회(CONACHA)[12]가 결성되었다.
2007년 11월 9일, 포르투알레그레 시의회는 차루아족을 현존하는 브라질 원주민으로 인정하는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14] 2008년까지 포르투알레그레 시는 알데이아 폴리도로 (9-ha) 지역에 시립 원주민 영토 지위를 부여했다.[16]
5. 현대의 차루아족
우루과이의 시민 군사 독재가 끝난 1989년 8월, 차루아족 후손 협회(ADENCH)가 설립되어 우루과이 원주민에 대한 지식과 그 존재를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11] 2005년에는 여러 가족들이 스스로를 차루아족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차루아족 의회(CONACHA)가 결성되었다.[12]
2007년 11월 9일, 포르투알레그레 시의회는 차루아족을 현존하는 브라질 원주민으로 인정하는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브라질 상원의원 파울루 파임은 원주민들의 정복과 노력에 대해 축하를 전했다.[14] 2008년까지 포르투알레그레 시는 알데이아 폴리도로 (9ha) 지역에 시립 원주민 영토 지위를 부여했다.[16]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다.
- 말도나도주 피리아폴리스에는 차루아족 묘지가 있다.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로스 차루아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포르투알레그레의 지역 럭비팀 이름도 이 민족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차루아는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주의 지방 자치 단체이다.[17]
- "차루아"는 브라질 군대에서 병력 수송에 사용되는 군용 탱크의 이름이다.
- 몬테비데오 포시토스와 코르돈 지역의 거리 이름은 "차루아"이다.
- 브라질 육군의 제2 기계화 기병 여단은 "브리가다 차루아" (차루아 여단)라고 불린다.
- 후안 소리야 데 산 마르틴이 1888년에 출판한 서사시 ''타바레''는 차루아족 남자가 스페인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 키클리과의 일종인 ''오스트롤레비아스 차루아''는 그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5. 1. 차루아족 단체
우루과이의 시민 군사 독재가 종식된 후인 1989년 8월, 차루아족 후손 협회(ADENCH)가 설립되어[11] 우루과이 원주민에 대한 지식과 그 존재를 구하고, 보존하며,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2005년에는 차루아족 의회(CONACHA)가 결성되었는데[12], 이곳에서 여러 가족들이 스스로를 차루아족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2007년 11월 9일, 포르투알레그레의 시의회는 차루아족을 현존하는 브라질 원주민으로 인정하는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브라질 상원의원 파울루 파임은 원주민들의 정복과 노력에 대해 축하를 전했다.[14] 2008년까지 포르투알레그레 시는 알데이아 폴리도로 (9-ha) 지역에 시립 원주민 영토 지위를 부여했다.[16]
5. 2. 브라질에서의 인정
2007년 11월 9일, 포르투알레그레 시의회(Câmara dos Vereadores)는 차루아족을 브라질 원주민으로 인정하는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포르투알레그레 시의회 인권 위원회와 브라질 국회 인권 위원회가 공동 주최했다. 행사 중 브라질 상원의원 파울루 파임과 세르지우 잠비아시는 "172년 동안 지속된 투쟁에서 그들의 정복과 노력"에 대해 원주민들에게 축하를 전했다.[14] 히우그란지두술에서 가장 유명한 차루아족 추장이자 차루아족 최초의 여성 추장인 카시케-헤랄 아쿠압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페람불란테스''(브라질, 2009)는 지안카를라 브루네토와 카린 에머리히가 제작했다.[15] 알데이아 폴리도로의 카시케인 아쿠압은 브라질리아로 가서 당시 브라질 대통령 룰라에게 그녀의 민족을 국립 원주민 재단에서 인정해 달라는 문서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쿠압은 대통령 경호원을 따돌리고 대통령에게 접근했다. 이 인정은 2007년 9월에 이루어졌다.[16] 2008년까지 포르투알레그레 시는 알데이아 폴리도로 (9ha) 지역에 시립 원주민 영토 지위를 부여했다.[16]5. 3. 기타
- 말도나도주 피리아폴리스에는 차루아족 묘지가 있다.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로스 차루아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포르투알레그레의 지역 럭비팀 이름도 이 민족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차루아는 브라질 히우그란지두술주의 지방 자치 단체이다.[17]
- "차루아"는 브라질 군대에서 병력 수송에 사용되는 군용 탱크의 이름이다.
- ''타바레''는 후안 소리야 데 산 마르틴이 1888년에 출판한 서사시로, 차루아족 남자가 스페인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 키클리과의 일종인 ''오스트롤레비아스 차루아''는 그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몬테비데오 포시토스와 코르돈 지역의 거리 이름은 "차루아"이다.
- 브라질 육군의 제2 기계화 기병 여단은 "브리가다 차루아" (차루아 여단)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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