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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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가승은 본래 가정을 가진 승려를 의미하며,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 전쟁 이후까지 함경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집단이다. 여진족의 후예라는 설이 유력하며, 독특한 풍습과 언어를 유지해왔다. 일제강점기에는 강제 이주를 겪었으며, 한국 전쟁 이후 남한으로 이주하여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재가승에 대한 연구는 주로 민속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졌으며, 언어와 풍습을 통해 여진족과의 관련성을 밝히려는 노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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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일제강점기)는 일제강점기 한반도 북동부에 위치한 도로, 동해, 간도, 함경남도와 접경하고 관모봉을 최고봉으로 하며 대륙성 기후와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진 일본의 병참기지로서, 청진시, 나진시, 김책시를 중심으로 발전했고 함경선, 혜산선 등의 철도망이 건설되었으며 인구는 조선인, 일본인, 기타 민족으로 구성되어 1925년부터 1944년까지 증가했다. - 함경북도의 역사 - 1810년 부령 지진
재가승 | |
---|---|
기본 정보 | |
이름 | 재가승 |
로마자 표기 | Jaegaseung |
한자 표기 | 在家僧 |
의미 | 집에 사는 승려 |
민족 정보 | |
총 가구 수 (1957년) | 1,031 가구 |
거주 지역 | 량강도 함경북도 라선시 |
언어 | 육진 방언 |
종교 | 불교 |
민족 계통 | 동아시아인 |
기원 발상지 | 두만강 |
관련 민족 | 만주족 시버족 한민족 기타 퉁구스족 |
역사적 맥락 | |
설명 | 16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한반도 최북단 지역에서 발견된 특이한 형태의 불교 공동체 |
특징 | 일반인과 유사한 생활을 하면서 불교 수행 |
황지 (黃紙) | 재가승을 나타내는 용어 |
2. 어원
재가승(在家僧)은 본래 가정을 가진 승려라는 뜻이다. 송나라 사람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취부'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이마니시 류일본어)는 〈在家僧に關すゐ調査一斑|재가승에 관한 조사일반일본어〉에서 '취처'라는 용어를 사용해 모두 배우자를 가졌다는 뜻으로 기술하였다. 재가승을 지칭하던 용어로는 우바새승, 대처승이 있다. 우바새승은 우바새와 승려를 뜻하는 접사 '승'의 파생어이며, 우바새(優婆塞)는 팔리어 우바사카(𑀉𑀧𑀲𑀓|우바사카pi, उपासक|우바사카pi)를 소리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재가승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고구려 때부터 살던 여진족이라는 설과 고려의 여진 정복 이후 원주민들을 모아 살게 하던 부락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재가승 집단이 개별적인 민족이라는 관점은 20세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3. 역사
일제강점기에는 지리적 한계가 해소되면서 일반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시작했다.
3. 1. 조선시대
조선 초 세종이 두만강 유역을 정복하고 한국인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족 일부가 조선 사회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조선의 지배를 받으며 한국인과 결혼하고 농경 생활을 하기도 했다. 조선 중앙 정부와 경제적, 군사적 관계를 맺었지만, 두만강 건너편의 여진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2]
16세기 후반, 토지 문제로 여진족과 조선인 정착민 간 갈등이 잦아졌다. 1583년 니탕개의 반란과 1592년 임진왜란으로 함경도 지역에서 조선의 행정력이 약화되며 갈등이 심화되었다.[2]
1590년경부터 누르하치 등 독립적인 여진족 추장들이 조선 영토 내 여진족을 두고 경쟁했다. 1607년 누르하치는 부잔타이를 물리치고 1609년까지 북부 함경도 여진족 대부분을 두만강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1635년 만주족 정체성을 채택하고 중국을 정복, 청나라를 건국했다.[2]
누르하치는 조선 내 여진족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일부는 조선 당국의 지원으로 잔류했다. 재가승은 이처럼 조선에 남아 동화된 여진족 공동체의 후손으로 추정된다.[2]
4. 풍습 및 생활상
재가승들은 주로 산간에 은둔하며 화전농업을 통해 귀리를 생산하는 농업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생산한 귀리를 이용하여 다른 세금이 면제되는 대신 초신과 귀리로 만든 황지(黃紙)를 생산하여 바쳤다.[7]
장례 풍습은 본래 화장이었으나, 이후 현지 풍습을 받아들여 매장으로 바뀌었다. 마을에는 승려가 없었지만, 주민들은 불교를 바탕으로 생활하였으며, 불교에 능통한 사람을 촌장으로 뽑았다. 이들은 불교를 바탕으로 생활하여 규율이 엄격한 풍속을 유지하였고, 저속하거나 야한 풍속은 멀리하였다. 마을에는 엄격한 규율이 있어 방장을 뽑아 행정 업무를, 도방장을 뽑아 군사 관련 업무를 맡겼다.
재가승들은 연중 2번 올리는 산치성(부군치성)과 연중 4번 올리는 산제 등 이질적인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결혼의 경우 외지인이 재가승과 혼인하려면 그들 마을에 와서 살아야 했다. 또한 제사를 지낼 때 붉은 옷을 입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이들은 차츰 한민족에 동화되어 갔다.
1935년 조사에 따르면 재가승의 인구는 약 4천 명 정도였으며, 함경북도 회령군 창두면 종암동과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월파동에 가장 많이 분포했다. 이들이 사는 마을은 '재가승마을' 혹은 '중골'이라 불렸으며, 이들은 모두 하천인으로 대우받았다.
재가승 마을에는 대산귀(大山鬼)라는 독특한 풍습이 있었다. 마을에 병자가 생겼을 때 하천 근처에 높은 다락을 세우고 장대를 세운 후, '신명'이라고 쓰인 긴 천을 매달고 밤새도록 굿을 하는 풍습이었다.
재가승의 집은 큰 방 하나와 집 주변의 울타리로 구성되었으며, 무속 신앙의 영향으로 집 주변에 나무를 심지 않았다.[3]
재가승 여성들은 공공장소에서도 가슴을 드러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다른 한국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재가승과 관련된 민속어휘와 만주어의 대응은 다음과 같다.
표현 | 의미 | 만주어 | 만주어 발음 | 만주어 뜻 |
---|---|---|---|---|
쓸 | 갈래, 편 | ᠰᡳᠯᠪᠠ | silba | 성이 같은 사람 |
도레기 | 가죽신발 | ᡨᡠᡵᡝ | ture | 가죽신발 |
5. 언어
재가승은 한국어의 하위 방언인 동북 방언(육진 방언)을 사용했다. 언어학자 곽충구는 재가승이 함경북도 주민들과 같은 생활 공간을 공유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부터 소통에 있어 특이점을 서술한 문헌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동북 방언을 사용했다고 보았다.[8]
1930년대에도 재가승의 방언과 다른 육진 한국어 화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으며, 지역 행정 관리와 재가승 마을 간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드물지 않게 발생했다.[1]
함경북도 재가승 공동체에서 독점적으로 사용된 어휘로는 미성숙하거나 상식이 부족한 사람을 나타내는 '양소래없다'와 '덕새없다'가 있다. 그 외에도 '무새'(무슨 이유로), '영에'(떡용 콩가루), '나마리'(식용 식물, 나물) 등이 있다.[1]
재가승 사이에서 유일하게 저속한 언어로 여겨진 것은 '범이야'('호랑이다')라는 구절이었는데, 이는 과거 이 지역에 흔했던 호랑이에 대한 공동체의 두려움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1]
황철산은 재가승의 민속어휘와 만주어의 대응을 통해 재가승이 여진족을 기원으로 하는 민족이라는 점을 제시하고자 했다.[13] 다음은 황철산이 제시한 민속어휘와 만주어의 대응 관계이다.
표현 | 의미 | 만주어 | 만주어 발음 | 만주어 뜻 |
---|---|---|---|---|
쓸 | 갈래, 편 | ᠰᡳᠯᠪᠠ | silba | 성이 같은 사람 |
도레기 | 가죽신발 | ᡨᡠᡵᡝ | ture | 가죽신발 |
6. 기록 및 연구
재가승에 대한 기록은 조선 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나타나지만, 대부분 흥미 위주의 단편적인 서술이 많았다. 대한민국 내 불교학계에서는 재가승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9]
송나라 사람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재가승을 '취부(娶婦)'라 칭하며, 이들이 배우자를 가졌다는 점을 언급했다.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在家僧に關すゐ調査一斑|재가승에 관한 조사일반일본어〉에서 '취처(娶妻)'라는 용어를 사용해 같은 의미를 나타냈다. 재가승은 '우바새승', '대처승'이라고도 불렸는데, 우바새승은 팔리어 우바사카(𑀉𑀧𑀲𑀓pi, उपासकpi)를 음역한 우바새에 승려를 뜻하는 접사 '승'이 붙은 파생어이다.
이수창은 서긍이 둔전병을 재가승과 혼동하였다고 지적하면서, 그 근거로 재가승들이 군대에 가면 각자 양식을 마련해 가기 때문에 나라의 경비를 소모하지 않고 전쟁할 수 있다는 서술을 들었다. 이는 재가승이 아니라 둔전병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11]
이재욱은 재가승만고에서 서긍이 말한 형기의 잔여 기간이 남은 도역인이라는 설은 오래되었고 당시의 정치적 특수성을 고려하면 참고할 만하다고 보았다. 그는 재가승에 대한 학설을 노예설, 승려설, 번호설로 분류하고 서긍의 기록을 노예설로 보았다. 다만, 민속에서 재가화상이라는 멸칭을 사용하는데, 서긍이 이를 재가화상이라는 특수 계층으로 언급한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지적했다.[12]
함경도 북부 산악 지역은 전통적으로 퉁구스어족 여진족이 거주하던 곳이다. 15세기 중반, 세종은 두만강까지 이르는 지역을 정복하고 한국인 식민지를 건설했다. 16세기 무렵, 한국의 지배를 받는 여진족은 한국인과 결혼하여 점차 농경 사회가 되었고, 한국 중앙 정부와 경제적, 군사적으로 연결되었다. 동시에 두만강 건너편의 독립적인 여진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6세기 후반, 토지를 둘러싼 원주민 여진족과 한국인 정착민 간의 갈등이 빈번해졌다. 1583년 여진족 추장 니탕개의 반란으로 한국 정부의 지역 통제가 훼손되었고, 임진왜란(1592-1598)으로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를 정복하면서 한국 행정부가 붕괴되고 여진족과 한국인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590년경부터 누르하치와 부잔타이 같은 독립적인 여진족 추장들은 한국 영토 내의 여진족을 대상으로 헤게모니 경쟁을 벌였다. 1607년 부잔타이를 물리친 누르하치는 1607-1609년 사이 북부 함경도 여진족 대부분을 두만강 북쪽의 새 왕국으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1635년 만주족 정체성을 채택하고 중국을 정복하여 청나라를 건설했다. 누르하치와 후계자들은 1644년까지 한국 내 여진족의 강제 "송환"을 요구했지만, 일부는 추방을 피해 한국 당국의 지원을 받아 한국에 남았다.
재가승은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사회에 동화된 여진족 공동체의 후손이라는 데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2]
6. 1. 주요 연구자
조선 왕조 시기부터 일제강점기 시기에 걸쳐 재가승에 대한 언급은 있었으나, 대부분 흥미 위주의 단편적인 서술이 많았다. 대한민국 내 불교학계에서는 재가승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다.[9]일제강점기에는 이재욱의 동아일보 르포인 〈재가승만고〉, 이마니시 료의 〈在家僧に關すゐ調査一斑|재가승에 관한 조사일반일본어〉, 함경북도 사회과 보고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가 있다.
재가승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북한의 민속학자 황철산이 쓴 두 편의 논문이 시작이다.[13] 황철산은 재가승이 여진족을 기원으로 하는 민족이라는 점을 피력하고자 했다. 다음은 황철산이 제시한 민속어휘와 만주어의 대응 관계이다.
표현 | 의미 | 만주어 | 만주어 발음 | 만주어 뜻 |
---|---|---|---|---|
쓸 | 갈래, 편 | ᠰᡳᠯᠪᠠ | silba | 성이 같은 사람 |
도레기 | 가죽신발 | ᡨᡠᡵᡝ | ture | 가죽신발 |
언어학자 곽충구는 재가승들이 동북 방언을 사용했다고 보았다. 만약 이들이 육진 방언을 사용했다면 함경북도 주민들과 같은 생활 공간을 공유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부터 소통에 있어 특이점을 서술한 문헌과 같은 흔적이 발견되어야 했으나, 이러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8]
6. 2. 주요 쟁점
재가승의 기원과 정체성은 주요 쟁점 중 하나이다. 재가승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누르하치 등의 여진족 추장들이 두만강 이북으로 이주시키지 못하고 함경도 북부 지역에 남아 한국 사회에 동화된 여진족 공동체의 후손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한다.[2]하지만, 재가승을 여진족의 후예로 볼 것인지, 아니면 고려 유민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15세기 중반, 세종은 두만강까지 이르는 지역을 정복하고 한국인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여진족들이 한국의 지배를 받아 한국인과 결혼하고 농경 사회로 변화하였다.[2] 이들은 한국 중앙 정부와 경제적, 군사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두만강 건너편의 독립적인 여진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2]
16세기 후반, 토지를 둘러싼 원주민 여진족과 한국인 정착민 간의 갈등이 빈번해졌고, 니탕개의 난(1583년)과 임진왜란(1592-1598)을 거치면서 한국 행정부가 붕괴되고 여진족과 한국인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2] 이러한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한국 영토 내의 여진족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려 했으나, 일부 여진족은 한국에 남아 재가승이 되었다.[2]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재가승의 민족성을 인정할 것인지, 재가승 문화를 독자적인 문화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한국 문화의 일부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참조
[1]
뉴스
Dong-A ilbo
http://newslibrary.n[...]
Dong-A ilbo
1936-01-01
[2]
논문
'The Mystery of the Century:' Lay Buddhist Monk Villages (Chaegasŭngch'on) Near Korea's Northernmost Border, 1600s–1960
http://s-space.snu.a[...]
2016-04-24
[3]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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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4]
백과사전
Encyclopedia of Korean Folk Culture
https://folkency.nfm[...]
[5]
방송
Dong-A Broadcasting System (DBS)
http://dbs.donga.com[...]
Dong-A Broadcasting System (D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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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The Mystery of the Century:' Lay Buddhist Monk Villages (Chaegasŭngch'on) Near Korea's Northernmost Border, 1600s–1960
http://s-space.snu.a[...]
2016-04-24
[7]
뉴스
他洞人(타동인)과는婚姻(혼인)도안코 絕對的排他主義(절대적배타주의) 在家僧部落...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36-01-01
[8]
서적
2015
[9]
서적
2022
[10]
서적
2022
[11]
서적
2022
[12]
서적
1935
[13]
서적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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