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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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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주성 전투는 1219년 몽골 제국의 고려 침략 당시 평안북도 철주성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원정이 지휘한 고려군은 몽골군에 맞서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철주성은 함락되었고 이원정과 이희적은 항복하지 않고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함신진은 몽골군에 항복하기 직전 요나라에 투항하여 배신 행위를 했고, 이는 고려-거란 전쟁에 영향을 미쳤다. 철주성 전투는 몽골의 침략에 맞선 고려인들의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으며, 이원정 등의 충절은 후세에 길이 기억되어야 할 가치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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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2년 고려 고종 때 승려 김윤후가 이끈 고려군이 처인성에서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몽골군을 격퇴하고 고려-몽골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든 전투가 처인성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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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고려-몽골 전쟁은 1231년 몽골 제국이 고려를 침략하여 시작되었으며, 몽골의 침략과 고려의 항전 끝에 1259년 고려가 굴복하면서 한반도가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철주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철주성 전투
鐵州城戰鬪
전체제1차 고려-몽골 전쟁
날짜고려 고종(高宗) 18년 8월 29일(1231년 9월 26일)
장소오늘날의 북한 평안북도 철산군
결과고려의 패배
교전 세력
교전국 2몽골 제국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이원정(李元禎)
이치적(李希勣)
지휘관 2살리타이
병력 규모
병력 1불명
병력 2불명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불명
사상자 2불명

2. 전개

1231년 몽골 사신 저고여압록강변에서 피살된 사건을 빌미로, 고종 18년(1231년) 7월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고려를 침공하였다.[2] 몽골군은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의주)을 먼저 공격했으나, 함신진은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이후 몽골군은 남하하여 8월 중순경 철주성에 이르렀다.

당시 고려 변경에서는 우가하나 동진국 군대가 몽골군으로 위장하고 약탈하는 경우가 있어, 실제 몽골군의 대규모 침공인지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3] 몽골군은 철주성 아래에서 포로로 잡은 서창낭장 문대에게 항복을 권유하라고 시켰으나, 문대는 오히려 "가짜 몽골군이니 항복하지 말라"고 외치다 살해되었다.[4]

철주방어사 이원정은 문대의 외침과 성민들의 항전 의지에 힘입어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전투는 15일간 지속되었으나[5]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지면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다. 결국 이원정은 처자를 포함한 부녀자와 아이들을 창고에 모아 불을 지르고 자신도 불길에 뛰어들어 자결했으며, 판관 이희적과 남은 병사들도 뒤따라 목숨을 끊었다.[4] 철주성은 함락되었고, 성 안은 몽골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철주를 점령한 몽골군은 9월, 다음 목표인 귀주성으로 진격하였다(귀주성 전투).

2. 1. 몽골의 침공

몽골 사신 저고여압록강 어귀에서 피살된 사건의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으로, 고려 고종 18년(1231년) 7월 원수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였다. 살리타이 군대는 압록강을 건넌 후 함신진(의주)을 거쳐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살리타이 본대는 압록강 하구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며 정주, 인주, 용주를 거쳐 선주, 곽주를 함락시켰다.

첫 목표였던 함신진은 부사 전한이 방수장군 조숙창과 상의하여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몽골군은 조숙창을 앞세워 삭주, 선덕진 등에도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2]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는 몽골군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에 위치한 철주에서는 8월 중순경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고려는 우가하나 동진 군대가 변경을 약탈할 때 몽골인처럼 꾸미고 오는 경우가 있어, 실제로 몽골군이 쳐들어온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3] 이에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진짜 몽골군이 왔다. 빨리 항복하라"고 외치게 했다. 철주성 아래에 도착한 몽골군은 포로로 잡은 서창낭장 문대를 시켜 같은 말을 외치게 하였으나, 문대는 성 앞에서 "가짜 몽골 병사들이니 항복하지 말라"고 외쳤다. 몽골군이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다시 외치게 했지만 문대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살해당했다.[4]

철주방어사 이원정이 지키는 철주성은 항복하지 않고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전투는 15일간 이어졌으나[5] 성 안의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이원정은 자신의 처자를 포함한 성 안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창고에 모아 불을 지르게 한 뒤 자신도 불길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판관 이희적 역시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4]

결국 철주는 몽골군에게 함락되었고 성 안은 도륙당했다. 몽골군은 이어 9월에 귀주성을 공격하였다.

한편, 몽골에 항복했던 함신진에서는 이후 고려 조정에 사자를 보내, 배를 보내주면 몽골인 소미생 등을 죽이고 성 사람들과 함께 개경으로 가겠다는 뜻을 전했다. 조정에서 김영시 등 30명을 보내 배를 준비시켰고, 함신진의 몽골인들은 고려군에게 살해되었으나 소미생은 미리 알고 도망쳤다. 함신진 부사 전한은 관리와 백성들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신도로 들어가 지키다가, 나중에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강화도로 오던 중 바다에 빠져 사망했다.[4]

2. 2. 철주성 전투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을 빌미로, 고려 고종 18년(1231년) 7월 원수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였다. 몽골군은 압록강을 건넌 뒤 함신진(咸新鎭, 의주)을 거쳐 남하했는데, 철주는 이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위치한 중요한 성이었다.[2] 철주성 전투는 8월 중순에 시작되었다.

당시 고려군은 이전 우가하나 동진국 군대가 몽골군으로 위장하여 변경을 약탈했던 경험 때문에, 실제로 몽골 대군이 쳐들어왔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3]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진짜 몽골군이 왔다. 마땅히 빨리 나와 항복하라."라고 외치게 하였다. 철주성 아래에 도착한 몽골군은 앞서 포로로 잡은 서창낭장(瑞昌郞將) 문대(文大)에게 성을 향해 항복을 외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문대는 성 앞에서 "가짜 몽골병이 왔으니 항복하지 말라!"고 외쳤다. 몽골군이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다시 외치게 했지만, 문대는 끝까지 같은 말을 반복하다 결국 몽골군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충절은 몽골의 침략에 맞선 고려인의 기개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4]

철주방어사 이원정(李元禎)은 문대의 외침 등에 힘입어 항복을 거부하고 성을 지켰다. 몽골군은 즉시 철주성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했고, 치열한 전투가 보름 동안 이어졌다.[5] 그러나 오랜 전투 끝에 성 안의 식량이 모두 떨어져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자, 이원정은 자신의 처자를 포함한 성 안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창고에 모아 불을 지른 뒤 자신도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판관 이희적(李希勣) 역시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의 비장한 최후는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고려의 강한 저항 정신을 상징한다.[4]

결국 철주성은 함락되었고, 몽골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철주를 점령한 몽골군은 9월, 다음 목표인 귀주성을 공격하였다(귀주성 전투).

3. 쌍충사(雙忠祠)

철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방어사 이원정과 판관 이희적을 기리기 위해 평안북도 철산군에 세워진 사당이다. 쌍절묘(雙節廟)라고도 불렸으며, 선조 5년(1572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6] 사당의 건립 배경과 예조의 예우, 관련 인물들의 시 등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쌍충사의 건립 배경

평안북도 철산군에는 철주성 전투 당시 몽골군과 싸우다 힘이 다하자 자결한 방어사 이원정과 판관 이희적 두 사람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다. 이 사당은 쌍절묘(雙節廟)라고도 불렸으며, 철산 남쪽 30리에 위치한 옛 토성 안에 있었다. 선조 5년(1572년)에 세워졌다고 알려졌다.[6]

순찰사 윤의중(尹毅仲)이 순시 도중 철산을 방문했을 때 장녕관(長寧館)에서 묵게 되었다. 어느 날 밤, 그의 꿈에 갑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자신들의 혼령을 위로할 곳을 세워 달라고 부탁하였다. 꿈에서 깬 윤의중은 이를 기이하게 여겨 철산의 노인들에게 물어보았고, 마침내 이원정과 이희적 두 사람의 사연과 그들을 기리는 사당이 존재함을 확인하였다. 당시 사당은 길 옆에 방치되어 거의 다 쓰러져가는 상태였다. 윤의중은 곧 조정에 이 사실을 알리고 사당을 서림으로 옮겨 새로 세우도록 하였다.[7] 이것이 쌍충사이다.

조선의 예조에서는 쌍충사에 모시는 위패를 각각 '철주수이공지위(鐵州守李公之位)'와 '철주판관이공지위(鐵州判官李公之位)'로 쓰도록 정하였다. 제사는 매년 봄과 가을의 중간 달(음력 2월, 8월) 상정일(上丁日)이나 상무일(上戊日)에 문선왕(文宣王)과 사직의 제사를 지낸 뒤, 돌아오는 상경일(上庚日)에 쌍충사에서 올리도록 하였다.[8]

오산 차천로(車天輅)[9]와 청음 김상헌(金尙憲)[10] 같은 문인들도 쌍충사에 대한 시를 남겨 두 사람의 충절을 기렸다.

3. 2. 쌍충사에 대한 예우

철주성 전투가 벌어졌던 평안북도 철산군에는 전투 당시 몽골군과 싸우다 힘이 다하자 자결한 방어사 이원정과 판관 이희적 두 사람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다. 쌍절묘(雙節廟)라고도 불린 이 사당은 철산 남쪽 30리에 위치한 옛 토성 안에 있었으며, 융경 임신년 즉 조선 선조 5년(1572년)에 세워졌다고 알려졌다.[6] 순찰사 윤의중(尹毅仲)이 순시 도중 철산을 방문했을 때 장녕관(長寧館)에서 묵다가 꿈에 갑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혼령을 위로할 곳을 세워 달라고 부탁하였다. 꿈에서 깬 윤의중이 철산의 노인들에게 물어 이원정과 이희적 두 사람의 사연과 그들의 사당을 확인하였다. 당시 사당은 길 옆에 거의 다 쓰러져가는 상태였으며, 윤의중은 곧 조정에 이를 알리고 사당을 서림에 옮겨 세우도록 하였다.[7]

조선의 예조에서는 쌍충사에 모시는 위패는 '철주수이공지위(鐵州守李公之位)'와 '철주판관이공지위(鐵州判官李公之位)'로 쓰도록 정했다. 제사는 봄과 가을의 중간 달(음력 2월, 8월) 상정일(上丁日)이나 상무일(上戊日)에 문선왕(文宣王)과 사직의 제사를 지낸 뒤 돌아오는 상경일(上庚日)에 지내도록 하였다.[8]

오산 차천로(車天輅, 1556년 ~ 1615년)[9]와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년 ~ 1652년)[10] 같은 문인들이 쌍충사에 대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3. 3. 차천로와 김상헌의 시

철주성 전투가 벌어졌던 평안북도 철산군에는 전투 당시 몽골군과 싸우다 힘이 다하자 자결한 방어사 이원정과 판관 이희적 두 사람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다. 쌍절묘(雙節廟)라고도 불린 이 사당은 철산 남쪽 30리에 위치한 옛 토성 안에 있었으며, 융경 임신년 즉 조선 선조 5년(1572년)에 세워졌다고 알려졌다.[6] 순찰사 윤의중(尹毅仲)이 순시 도중에 철산을 방문했을 때 장녕관(長寧館)에서 묵다가 꿈에 갑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혼령을 위로할 곳을 세워 달라고 윤의중에게 부탁하였으며, 꿈에서 깬 윤의중이 철산의 노인들에게 물어보아 이원정과 이희적 두 사람의 사연과 그들의 사당을 확인하였다. 사당은 당시 길 옆에 거의 다 쓰러져가는 상태로 있었으며, 윤의중은 곧 조정에 이를 알리고 사당을 서림에 옮겨 세우게 하였다.[7]

조선의 예조에서는 쌍충사에 모시는 위패는 철주수이공지위(鐵州守李公之位)와 철주판관이공지위(鐵州判官李公之位)로 쓰고, 봄·가을 중월(仲月) 상정일(上丁日)·상무일(上戊日)에 문선왕(文宣王) · 사직의 제사를 지낸 뒤의 상경일(上庚日)에 쌍충사에서 제사를 올릴 것을 아뢰었다.[8]

오산 차천로(車天輅, 1556년 ~ 1615년)[9]와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년 ~ 1652년)[10]이 쌍충사에 대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참조

[1] 서적 고려사
[2] 서적 고려사
[3] 서적 동국이상국집·전집
[4] 서적 고려사
[5] 시 과철주(過鐵州)
[6] 서적 연려실기술 별집
[7] 서적 여지도서 상
[8] 기록 선조실록 1573-10-04
[9] 시 철주(鐵州)의 옛날 성가퀴(鐵州古堞)
[10] 시 서경 사상(使相)의 철주고성 운에 차운하다(次西坰使相鐵州古城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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