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청주 부모산성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청주 부모산성은 부모산 정상부와 동쪽 계곡을 감싸고 있는 석성으로, 미호강변 평야 지역을 내려다보며 청주 지역을 통치하고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백제 시대의 산성이다. 발굴 조사 결과 삼국 시대 초기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백제 시대에는 토성으로, 통일신라 시대에는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고려 시대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산성의 둘레는 1,135m이며, 동서남북에 문지가 있고 동쪽과 북쪽 계곡에 수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모산성 안에는 샘물인 모유정이 있으며, 몽골군 침입, 임진왜란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30여 년 전까지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청주시는 2010년에 주변을 정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청주시의 문화유산 - 청주 상당산성
    청주 상당산성은 청주시 시가지에 인접한 산 정상에 축조된 둘레 약 4.2km의 산성으로, 통일신라 시대에 축성되었으며 조선 시대 수축과 개축을 거쳐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청주시의 문화유산 -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 충청북도의 기념물 - 배론성지
    배론성지는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찾던 성지로, 황사영 백서 집필 토굴, 한국 최초 신학교, 최양업 신부 묘 등을 통해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와 신앙의 자유, 한국 천주교 성립과 발전의 역사적 의미를 보여준다.
  • 충청북도의 기념물 - 진천 길상사
    진천 길상사는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태령산 아래에 위치하며 신라 시대부터 제사를 지내왔고, 여러 차례 재건을 거쳐 현재는 흥무전을 포함한 여러 건물과 비석 등이 있으며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 충청북도의 성 - 보은 삼년산성
    보은 삼년산성은 신라 시대에 축조되어 삼국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한 돌로 쌓은 산성으로, 축성에 3년이 걸렸다는 기록에서 유래되었으며, 성 내부 유적과 출토 유물은 당시 신라의 건축 기술과 사회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충청북도의 성 - 청주 상당산성
    청주 상당산성은 청주시 시가지에 인접한 산 정상에 축조된 둘레 약 4.2km의 산성으로, 통일신라 시대에 축성되었으며 조선 시대 수축과 개축을 거쳐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청주 부모산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청주 부모산성
청주 부모산성
이름청주 부모산성
로마자 표기Cheongju Bumosanseong
유형충청북도의 기념물
지정 번호121
지정일2002년 1월 11일
주소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산10-1외
시대삼국시대
소유사유
문화재청 ID23,01210000,33

2. 역사

부모산성의 역사에 대한 문헌 기록은 드물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리지에는 둘레가 2,427척(尺)이며 성안에 큰 못(大池)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2] 이 산성은 미호강 변의 넓은 평야 지역을 내려다보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청주 지역을 다스리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백제시대의 성으로 여겨진다.[2]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산성이 만들어지기 이전인 삼국시대 초기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백제시대에는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석성으로 개축되었으며, 고려시대 이후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2]

성곽의 구조를 살펴보면 동서남북 네 방향에 각각 문지(門址)가 있었고, 동쪽과 북쪽 계곡에는 물을 내보내는 수구(水口)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성이 위치한 산줄기를 따라 몇 개의 작은 보루(堡壘)가 함께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확인된 산성의 둘레는 약 1135m, 높이는 6m 내외, 너비는 6.4m 정도이다.[2]

2. 1. 백제 시대

부모산성은 백제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2] 발굴 조사 결과, 초기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 형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2] 이 성은 미호강 변의 넓은 평야 지역을 내려다보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당시 청주 지역을 다스리고 외부의 침입을 막는 거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2. 2. 고려 시대

고려 시대 몽골이 침입했을 때, 인근 백성들이 이 부모산성 안으로 피난하였다.[3]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4개월 동안 짙은 안개가 산을 가려 몽골군으로부터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3] 또한 성 안에 물이 없어 사람과 말이 모두 목말라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모유정에서 샘물이 솟아나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3]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 은혜가 어버이와 같다 하여 산 이름을 '부모산'이라 부르고, 샘은 어미의 젖과 같다 하여 '모유정'이라 불렀다고 한다.[3]

2. 3.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에는 박춘무(朴春茂)가 아우 춘번(春番), 아들 동명(東命)과 함께 7백 의병을 모아 이 산성에서 왜적과 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군량과 식수가 떨어져 위기에 처했을 때 산 정상에서 물이 솟아나 의병들이 생기를 되찾고 왜적을 물리쳤으며, 이로 인해 부모산, 모유정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3]

3. 부모산성

부모산(父母山)은 본래 아양산(我養山)이라 불렸던 산으로, 산봉우리와 동쪽 계곡을 아우르는 산성이다. 고려 말기 몽고 침입 때 지역 주민들이 이곳으로 피난했는데, 성 안에서 샘물이 솟아나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산의 은혜가 부모와 같다 하여 '부모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샘은 어머니의 젖과 같다 하여 '모유정'(母乳井)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전해진다.[2]

부모산성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 기록은 부족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시대 지리지에는 산성의 둘레가 2,427척(尺)이며 성 안에 큰 못(大池)이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미호강변의 넓은 평야 지대를 조망하는 전략적 위치에 자리하며, 청주 지역 통치 및 방어를 위해 축조된 백제 시대의 성으로 여겨진다.[2] 산성의 구체적인 구조와 발굴 조사 결과는 하위 문단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3. 1. 구조 및 특징

부모산(父母山)은 본래 아양산(我養山)이라 불리던 산으로, 산봉우리와 동쪽 계곡을 감싸고 돌로 쌓은 산성이다.[2]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산성은 백제 시대에 처음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통일신라 시대에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고려 시대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2]

산성의 구조적 특징으로는 동서남북 각 방향에 문이 있었던 자리(門址)가 확인되며, 동쪽과 북쪽 계곡에는 물을 관리하던 수구(水口)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성이 자리한 산줄기를 따라 몇 개의 작은 보루(堡壘)가 함께 설치되어 방어 체계를 보강했던 것으로 보인다.[2]

산성의 규모는 전체 둘레가 1135m에 이르며, 성벽의 높이는 6m 내외, 너비는 6.4m 정도이다.[2]

3. 2. 발굴 조사

발굴 조사 결과, 부모산성에서는 성이 축조되기 이전의 삼국시대 초기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백제 시대에는 미호강변의 넓은 평야 지역을 통치하고 방어할 목적으로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가 통일신라 시대에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고려 시대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2] 동서남북에 각각 문지(門址)가 있고, 동쪽과 북쪽 계곡에 수구(水口)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산성이 있는 산줄기를 따라 몇 개의 작은 보루(堡壘)가 부설되어 있다. 산성의 둘레는 1135m, 높이는 6m 내외, 너비는 6.4m이다.[2]

4. 모유정

부모산성 안에 있는 샘물로, 성 안의 군사들이 식수로 이용하던 우물이다.[3] 외적이 침입하면 인근 백성들이 성안으로 피난하기도 했으며, 샘물과 관련된 여러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3]

4. 1. 전설

부모산성은 백제 시대에 청주 서쪽 지역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석성(石城)이며, 성 안에 있는 모유정은 군사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3] 외적이 침입하면 인근 백성들이 이 성으로 피난했다고 전해진다.[3]

고려 시대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4개월 동안 짙은 안개가 산을 가려주어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성 안에 물이 떨어져 사람과 말이 목말라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샘물이 솟아나 모두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은혜가 어버이와 같다 하여 산 이름을 '부모산' 또는 '아양산'이라 부르고, 샘물은 어미의 젖과 같다 하여 '모유정'이라 이름 붙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3]

임진왜란 때에도 비슷한 전설이 전해진다. 박춘무(朴春茂)가 아우 춘번(春番), 아들 동명(東命)과 함께 7백여 명의 의병을 모아 이 산성에서 왜군에 맞서 싸웠다. 싸움 도중 군량과 식수가 떨어져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산봉우리에서 물이 솟아나 의병들이 기운을 차리고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부모산 모유정'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3]

4. 2. 현재

30여 년 전까지는 모유정에서 샘물이 솟아 식수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청주시는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2010년에 주변을 정비하였다.[3]

참조

[1] 간행물 충청북도지정문화재지정 충청북도지사 2002-01-11
[2]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3]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