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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 앞바다 YTL정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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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무 앞바다 YTL정 침몰 사고는 1974년 2월 22일, 통영 충렬사 참배 후 진해 해군 훈련소 신병들을 수송하던 120톤급 예인정 YTL30정이 모함으로 복귀하던 중 충무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고이다. 폭풍주의보와 2m의 높은 파고 속에서 YTL30정은 정원 4명의 79배에 달하는 316명의 신병을 태운 채 급선회하다 전복되었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침몰했다. 이 사고로 159명이 사망하였으나, YTL정 승무원들의 헌신적인 구조 활동으로 157명이 생존했다. 사고 이후 해군 참모총장 등이 해임되었으며, 정원 초과, 조종 미숙, 기상 악화 등이 사고 원인으로 지목되었지만, 군의 안전 불감증과 부실한 관리 체계, 언론 통제로 인해 사고 원인과 책임 소재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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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 앞바다 YTL정 침몰 사고
사고 개요
사건통영 YTL 침몰사고
날짜1974년 2월 22일
원인불명
결과배 침몰
인원
사망자159명

2. 사고 경위

1974년 2월 22일, 충무 앞바다에서 해군 훈련소 신병들을 태우고 가던 예인정 YTL30정이 침몰하여 159명(신병 157명, 승무원 2명)이 사망한 사고이다.[1] 충렬사 참배를 마치고 모함인 LST로 복귀하던 중 발생했으며, 사고 당시 YTL30정에는 정원을 훨씬 초과하는 316명의 신병이 탑승해 있었다.[2][3][4][5] 사고 해역에는 폭풍주의보가 발효 중인 상태였다.[2][3][4][5] 주요 원인으로는 과도한 인원 초과와 악천후 속 무리한 운항이 지목된다.

2. 1. YTL30정

소형 항만 예인정(YTL, Yard Towing Large)은 항구 안에서 예인, 통선과 같은 잡역을 담당하는 보조선이다. 사고가 난 예인정(YTL30정)은 무게 120ton에 약 400마력, 최대 시속은 10노트였다. 승무원은 4명이며, 해군 당국에 의하면 350명 정도의 인원까지 수송이 가능하다고 보도되었다.[2][3][4]

2. 2. 침몰

1974년 2월 22일 오전 10시 40분경, 충렬사 참배를 마친 진해 해군 훈련소 신병 316명이 YTL30정에 1차로 승선하여 외항에 정박 중이던 모함 LST815함으로 복귀하고 있었다.[2][3][4][5]

오전 11시 8분경, 모함을 30m 앞둔 지점에서 YTL정이 갑자기 급선회를 시도하다가 선체가 한쪽으로 기울며 뒤집혔다. 배는 불과 5분도 되지 않아 빠르게 가라앉아 11시 13분경에는 완전히 물속에 잠겼다.[2][3][4][5] 당시 해역에는 오전 10시부터 폭풍주의보가 발효 중이었고, 파고는 2m에 달하는 등 기상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2][3][4][5] 차가운 바닷물과 신병들이 입고 있던 무거운 정복은 탈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YTL 정장은 배의 키를 끝까지 움켜쥔 채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6]

YTL정은 제자리에서도 360도 회전이 가능하고 급선회가 용이한 특성을 가진 예인정이다. 숙련된 승무원들은 이러한 기동에 익숙했지만, 사고 당시 YTL정에는 정원(승무원 4명)을 79배나 초과하는 316명의 신병이 탑승해 있었다. 이러한 극심한 초과 승선 상태에서는 작은 파도에도 배가 크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고, 사실상 안전 운항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승무원들의 숙달된 조함 능력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침몰로 이어졌다. YTL정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승무원 부사관 4명은 모두 순직하였으나, 이들의 노력 덕분에 신병 157명은 생환할 수 있었다.

3. 구조 및 인양

사고 당시 많은 배들이 구조에 참여하였으나, 해상이 어둡고 파도가 높아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3] 모함과 구명정, 어선들을 동원하여 사고 당일 14시까지 모두 152명을 구조하였으나, 그중 2명이 구조 후 사망하였고 164명은 실종된 것으로 보도되었다.[7] 해군본부는 최종 사망·실종자는 모두 159명이라고 발표하였다.[8]

해군은 2월 23일 오전부터 인양 작업을 시작하였고,[9] YTL정은 해저 15m 깊이에서 선체 바닥이 위를 향한 채 침몰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10] 선체는 2월 25일 인양되어 수심이 얕은 곳으로 옮겨졌다.[11] 시신 인양에는 잠수정과 함께 저인망 어선들이 처음으로 동원되었다.[12]

수색반은 2월 26일까지 146명의 시신을 인양하고 공식적인 인양 작업을 종료하였으며,[13] 남은 실종자 수색은 민간 잠수선과 어선에 일임하였다.[14] 3월 3일까지 실종자 중 1명을 제외한 대부분이 인양되었다고 보도되었다.[15]

4. 사후 처리 및 여파

대한민국 정부는 2월 28일, 해군 YTL정 침몰 사건의 책임을 물어 해군참모총장과 차장을 해임하였다.[16] 해군교육단 신병훈련소 훈련대장, 해군통제부항무과장 등은 구속되고, 모함 함장은 직위해제되었다.[17]

사망자는 1계급씩 특진되었다.[18]

5. 원인 분석 및 논란

사고의 초기 원인으로는 정원 초과와 조종 미숙 등이 지적되었다.[19] 1974년 3월 2일, 해군 조사위원회는 공식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무리한 승선'과 '급선회에 따른 운항 부주의'를 사고 원인으로 결론 내렸다. 또한 밸러스트 탱크에 물을 채우지 않은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하였다.[20]

그러나 이러한 발표는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을 축소하고 책임을 현장 지휘관에게만 돌리려는 의도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사고가 발생한 YTL30정은 본래 소수의 승무원만 탑승하여 대형 함정을 밀거나 끄는 예인선으로, 316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을 태우고 운항하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결정이었다는 지적이다. 이는 병력 수송이라는 명목 하에 기본적인 안전 수칙조차 무시된 운항이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배경에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있었다. 선실의 출입구가 매우 좁아 비상 상황 발생 시 내부에 있던 약 150명의 훈련병들이 신속하게 탈출하기 어려웠던 점이 대규모 인명 피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분석된다. 훈련병들의 전투화 착용이나 수영 미숙은 부차적인 요인으로 평가된다. 또한, 사고 당시 갑판에 있던 인원들 중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모함인 LST-815에 구명정이 있었음에도 즉시 구조 활동에 투입되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는 기본적인 안전 대비책조차 마련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군사정권 시절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사고에 대한 언론 보도는 통제되었고, 진상 규명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로 인해 사고의 정확한 원인과 책임 소재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YTL30정 침몰 사고는 단순한 운항 부주의를 넘어, 군 내부의 안전 불감증과 권위주의적 문화, 훈련병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인재(人災)라는 비판을 받는다.

참조

[1] 뉴스 "전우여…" 40년째 목이 메어 불러보다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14-02-21
[2] 뉴스 母艦30m앞두고「急旋回」 동아일보 1974-02-23
[3] 뉴스 母艦눈앞에두고 덮친波濤 매일경제 1974-02-23
[4] 뉴스 餘震은 아직도 1974年 大事件 그後 (1) YTL艇 침몰慘事(2月22日) 동아일보 1974-12-10
[5] 뉴스 海軍新兵 慘事경위와 救助作業 동아일보 1974-02-23
[6] 뉴스 "아빠의 잘못 용서해주세요" 동아일보 1974-03-02
[7] 뉴스 海軍新兵등 166명失踪·死亡 동아일보 1974-02-22
[8] 뉴스 死亡·失宗백59명 海軍本部발표 매일경제 1974-02-25
[9] 뉴스 救助隊員들 잠긴 船室出入口 확인 船體에 로프걸어 동아일보 1974-02-23
[10] 뉴스 UDT72名動員 船體인양작업 매일경제 1974-02-23
[11] 뉴스 침몰YTL艇 引揚 경향신문 1974-02-25
[12] 뉴스 海軍조난 나흘만에 沈没한 YTL船體 인양 동아일보 1974-02-25
[13] 뉴스 屍體引揚 오늘중 매듭 경향신문 1974-02-26
[14] 뉴스 YTL艇,基地로 失踪者수색 民間서 경향신문 1974-02-27
[15] 뉴스 시체三具 또引揚 YTL조난 搜索作業 동아일보 1974-03-05
[16] 뉴스 海軍參謀總長·次長해임 동아일보 1974-02-28
[17] 뉴스 海軍調査委 船體上部에 荷重몰려 전복 동아일보 1974-02-28
[18] 뉴스 1階級씩 特進 葬禮는 遺族뜻대로 경향신문 1974-02-25
[19] 뉴스 조타術 未熟에 安全守則무시 새벽부터強訓 피로·허기겹쳐 동아일보 1974-02-23
[20] 뉴스 海軍調査委 過乗에 運航不注意 경향신문 1974-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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