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미에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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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지미에시 2세는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의 아들로, 아버지의 유언에 언급되지 않아 영토를 물려받지 못했다. 1166년 비실리차 공작으로 봉해졌으나, 형제들과의 갈등 속에서 비실리차 공국만 유지했다. 1177년 미에슈코 3세에 대한 반란으로 크라쿠프를 정복하고 대공이 되었으며, 1180년 웽치차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하여 크라쿠프의 세습 상속 원칙을 받아들였다. 그는 또한 동쪽의 키예프 루스 공국과의 외교 관계를 맺고, 1186년 마조비아 공작 레셰크의 영지를 상속받았으나, 미에슈코 3세와의 권력 다툼을 겪었다. 카지미에시 2세는 교회에 관대했으며, 즈노이모의 헬레나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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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에시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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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카지미에시 2세는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잘로메아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째 아들이자, 생존한 아들 중 넷째였다. 그는 1138년,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같은 날에 태어났다. 결과적으로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언급되지 않았고, 따라서 어떤 영토도 물려받지 못했다.
1166년, 카지미에시의 형 헨리크는 프로이센 십자군 전투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헨리크는 유언을 통해 카지미에시를 자신의 소폴란드 산도미에시 공국의 유일한 상속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대공 볼레스와프 4세는 공국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가장 큰 부분(수도 산도미에시 포함)은 자신이 차지했고, 두 번째 부분은 미에슈코 3세에게 주었으며, 가장 작은 비실리차 공작 지역만을 카지미에시에게 주었다.
1166년, 카지미에시의 형인 산도미에시의 헨리크가 프로이센 십자군 전투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헨리크는 유언을 통해 카지미에시를 자신의 산도미에시 공국의 유일한 상속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대공 볼레스와프 4세는 공국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가장 큰 부분(수도 산도미에시 포함)은 자신이 차지했고, 두 번째 부분은 미에슈코 3세에게 주었으며, 가장 작은 비실리차 공작 지역만을 카지미에시에게 주었다.
1177년, 카지미에시 2세는 미에슈코 3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크라쿠프를 점령하고 폴란드 대공이 되었다. 이 반란에는 소폴란드 귀족, 크라쿠프 주교 게드코, 오돈, 볼레스와프 1세 등이 참여했다.
어린 시절 동안 카지미에시와 그의 누이 아그네스(1137년 출생)는 어머니 잘로메아와 함께 그녀의 과부 영지인 웽치차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어린 왕자는 그의 형제들인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가 그들의 이복형인 블라디슬라프 2세와 벌인 갈등에서 멀리 떨어져 지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폴란드 전체를 자신의 통치하에 통일하려 했고(고인이 된 아버지의 유언과 반대로) 결국 1146년에 추방되었다.
잘로메아 폰 베르크는 1144년에 사망했다. 카지미에시와 아그네스는 2년 후 대공 작위를 차지한 그들의 형 볼레스와프 4세의 보살핌을 받았다. 어린 왕자는 그의 보호 아래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었지만, 미래에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1151년, 그가 가족의 영토 일부를 관리할 수 있는 적절한 나이(당시 13세)가 되었을 때, 그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3년 후(1157년), 그의 상황은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블라디슬라프 2세와 그의 아들들을 돕기 위해 폴란드로 성공적으로 원정을 오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볼레스와프 4세가 바르바로사와 맺어야 했던 조약의 일환으로, 카지미에시는 황제에 대한 형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인질로 독일로 보내졌다. 황실 궁정에서 카지미에시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161년 5월 21일 이전에 확실히 폴란드로 돌아왔는데, 그날 그는 그의 형제 볼레스와프 4세와 헨리크와 함께 문서에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3. 비실리차 공작 (1166-1173)
대공의 결정에 분노하고 실망한 카지미에시는 형 미에슈코, 영주 약사 즈 미에호프, 표트르 브워스토비츠의 아들 스비아토슬라프, 그니에즈노 대교구의 얀 대주교, 크라쿠프 대교구의 게드코 주교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카지미에시는 또한 거의 모든 소폴란드의 지지를 받았다. 볼레스와프 4세의 신속한 조치로 반란은 진압되었고, 결국 카지미에시는 비실리차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172년, 미에슈코 3세는 다시 대공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동생에게 합류할 것을 설득하려 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카지미에시는 이번에는 참여를 거부했다.
4. 산도미에시 공작 (1173-1177)
대공의 결정에 분노한 카지미에시는 형 미에슈코 3세, 영주 약사 즈 미에호프, 표트르 브워스토비츠의 아들 스비아토슬라프, 그니에즈노 대교구의 얀 대주교, 크라쿠프 대교구의 게드코 주교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카지미에시는 또한 거의 모든 소폴란드의 지지를 받았다. 볼레스와프 4세의 빠른 조치로 반란은 진압되었고, 카지미에시는 비실리차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172년, 미에슈코 3세는 다시 대공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동생에게 합류를 제안했지만, 카지미에시는 참여하지 않았다.
볼레스와프 4세는 1173년에 사망했고, 연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생존한 가장 오래된 형제인 미에슈코 3세가 대공의 자리를 계승했다. 미에슈코 3세는 산도미에시 공국 전체를 카지미에시에게 주기로 결정했고, 카지미에시는 마침내 형에게서 빼앗겼던 공작 칭호를 얻게 되었다.
5. 폴란드 대공 (1177-1194)
카지미에시 2세는 슐레지엔, 대폴란드, 마조비아, 쿠야비에 대한 폴란드 군주로서의 주권을 확장했다. 발트해 연안의 포메라니아(그단스크 포메라니아)는 폴란드 봉신인 삼보르 1세가 통치했다.
미에슈코 3세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카지미에시 2세는 1180년 웽치차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하여 귀족과 교회의 지지를 얻어냈다. 이를 통해 크라쿠프에 대한 세습 상속 원칙을 확립했지만, 완전한 폴란드 왕국 복원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1181년, 미에슈코 3세는 메스트빈 1세의 지원을 받아 대폴란드 동부 지역을 일시 점령했다. 레셰크는 카지미에시 2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186년, 레셰크 사후 카지미에시 2세는 마조비아를 상속받아 폴란드의 주요 지역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으나, 미에슈코 3세는 쿠야비 일부를 점령했다.
1191년, 미에슈코 3세는 카지미에시 2세가 러시아 문제에 관여하는 틈을 타 바벨 성을 점령하고 대공 지위를 차지하려 했으나, 카지미에시 2세가 돌아와 평화롭게 권력을 되찾았다.
1194년, 카지미에시 2세는 요트빈기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돌아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5. 1. 미에슈코 3세에 대한 반란 (1177)
새로운 대공의 강력하고 독재적인 통치는 소폴란드 귀족들 사이에 깊은 불만을 야기했다. 1177년에 시작된 새로운 반란은 마그나트 외에도 크라쿠프 주교 게드코, 미에슈코의 장남 오돈, 전임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들인 실롱스크 공작 볼레스와프 1세, 그리고 카지미에시의 지지를 받아 실제로 승리할 기회를 잡았다. 미에슈코와 화해한 후 그가 이 반란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새로운 지도자를 위한 싸움은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미에슈코 3세는 반란군에게 완전히 기습을 당해 대폴란드 공국에서 포즈난으로 후퇴하여 아들 오돈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거의 2년 동안 머물렀다. 결국 그는 패배하여 도망쳐야 했다. 볼레스와프 1세는 크라쿠프와 수석 공국을 정복하는 데 실패했는데, 그 자신도 형제 미에슈코 1세 및 자신의 아들 야로스와프와 실롱스크 내부 갈등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곧 패배한 그는 카지미에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실롱스크에서 성공적인 작전을 펼친 후 카지미에시는 크라쿠프로 진격했고, 크라쿠프는 빠르게 점령되었다. 이제 크라쿠프 공작이 된 카지미에시는 조약을 체결하여 볼레스와프 1세에게 브로츠와프에서 하부 실롱스크에 대한 완전한 권한을 부여하고, 그 대가로 카지미에시는 당시 폐위된 미에슈코 1세 곱슬머리에게 카지미에시의 대자이자 동명이인인 오폴레의 카지미에시 1세, 즉 미에슈코 1세 곱슬머리의 외아들을 위한 선물로 비톰, 오시비엥침 및 프시치나의 소폴란드 지역을 부여했다.
5. 2. 폴란드 통치 강화
1177년 대공 미에슈코 3세에 대한 반란은 카지미에시에게 완전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카지미에시는 크라쿠프(시라즈와 웽치차 지역 포함)를 정복하여 대공의 지위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슐레지엔(당시 블와디스와프 2세의 세 아들인 볼레스와프 고라티, 미에슈코 1세 플론노기, 콘라트 스핀들생크와 볼레스와프의 아들 야로스와프 오폴스키 사이에서 분할됨), 대폴란드(오돈이 통치), 마조비아와 쿠야비(공작 레셰크는 당시 미성년자였으며 그의 어머니와 카지미에시의 추종자 중 한 명인 보이보드 지로나의 후견 하에 있었음)에 대한 폴란드 군주로서의 주권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발트해 연안에서는 포메라니아(그단스크 포메라니아)가 폴란드 봉신인 공작 삼보르 1세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미에슈코 3세는 복귀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처음에는 보헤미아에서, 나중에는 독일과 포메라니아 공국에서였다. 그의 야망을 달성하고 크라쿠프 왕위(그리고 이와 관련된 시니어레이트 지방)에 대한 세습 권리를 그의 후손에게 부여하기 위해, 카지미에시는 1180년 웽치차에서 폴란드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귀족과 교회에 특권을 부여하여 성직자의 이익에 대한 세금을 면제하고 사망한 주교의 토지에 대한 그의 권리를 포기했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그는 크라쿠프에 대한 세습 상속 원칙을 받아들였지만, 폴란드 왕국을 복원하는 데는 아직 1세기 이상이 걸릴 것이다.
1181년 상반기(웽치차 회의 후 1년도 채 안 되어) 미에슈코 3세는 공작 삼보르의 형제인 포메라니아의 메스트빈 1세의 지원을 받아 그니에즈노와 칼리시의 대폴란드 동부 지역을 정복하고, 그의 아들 오돈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일부 역사가에 따르면 오돈은 당시 아버지로부터 오브라 강 남쪽의 대폴란드 지역을 받았다). 동시에 마조비아 공작 레셰크는 카지미에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미에슈코 3세의 아들 미에슈코 젊은 공을 마조비아와 쿠야비의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를 통해 이 지역의 상속에 대한 묵시적인 약속을 했다.
5. 3. 대외 관계
카지미에시 2세는 동쪽의 이웃 키예프 루스 공국과의 외교 관계에 중요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전 최고 공작들과 마찬가지로 류리크 왕조 출신의 키예프 대공들과 유대 관계를 맺고자 했다. 1178년 11월, 카지미에시는 자신의 딸을 키예프의 세볼로트 4세와 결혼시켰다.
1180년, 카지미에시는 키예프 루스 문제에 처음으로 개입했다. 볼히니아 지역의 블라디미르를 두고 민스크의 블라디미르와 분쟁을 벌이던 슘스크의 바실코 공자와 그의 조카 레셰크를 지원했다. 이 전쟁은 블라디미르가 블라디미르와 브레스트를 정복하고, 바실코가 드로히친을 지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182년에는 카지미에시의 조카인 스뱌토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에게 봉토로 주어졌던 브레스트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카지미에시의 도움으로 스뱌토슬라프는 권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상황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한 카지미에시는 결국 스뱌토슬라프의 이복형제인 로만 대공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1187년 할리치 공국의 야로슬라프 오스모미슬 공작이 사망한 후, 그의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야로슬라프의 사생아 아들 올레크가 공국을 장악했으나 곧 살해되었고, 이후 야로슬라프의 장남 블라디미르코가 할리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코의 통치는 불안정했고, 브레스트의 로만 공작은 카지미에시의 도움을 받아 그를 몰아내고 할리치를 완전히 장악했다.
헝가리 왕국으로 도망친 블라디미르코는 헝가리의 벨라 3세의 지원을 받아 할리치로 진군했다. 로만은 크라쿠프로 피신했고, 블라디미르코는 소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러나 벨라 3세는 할리치를 헝가리에 병합하기로 결정하고 블라디미르코를 다시 폐위시킨 후, 자신의 아들 앤드루를 할리치 공작으로 임명했다. 2년간의 전쟁 끝에, 카지미에시는 프리드리히 1세의 지시에 따라 블라디미르코를 할리치의 통치자로 복위시켰다. 블라디미르코는 프리드리히 1세의 신하임을 선언했었다.
5. 4. 내정
1177년, 대공 미에슈코 3세에 대한 반란이 성공하면서 카지미에시는 크라쿠프(시라즈와 웽치차 지역 포함)를 정복하고 대공의 지위를 얻었다. 또한 슐레지엔, 대폴란드, 마조비아와 쿠야비에 대한 폴란드 군주로서의 주권을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발트해 연안의 포메라니아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는 폴란드 봉신인 삼보르 1세가 통치했다.
그러나 미에슈코 3세는 복귀를 위해 보헤미아, 독일, 포메라니아 공국 등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카지미에시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고 크라쿠프 왕위에 대한 세습 권리를 후손에게 부여하기 위해 1180년 웽치차에서 폴란드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귀족과 교회에 특권을 부여하여 성직자의 이익에 대한 세금을 면제하고 사망한 주교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이를 통해 크라쿠프에 대한 세습 상속 원칙을 받아들였지만, 폴란드 왕국을 복원하는 데는 1세기 이상이 걸릴 것이었다.
1181년 상반기, 미에슈코 3세는 포메라니아의 메스트빈 1세의 지원을 받아 그니에즈노와 칼리시의 대폴란드 동부 지역을 정복하고 아들 오돈을 굴복시켰다. 동시에 마조비아 공작 레셰크는 카지미에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미에슈코 3세의 아들 미에슈코 젊은 공을 마조비아와 쿠야비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상속에 대한 묵시적인 약속을 했다.
1186년, 마조비아 공작 레셰크가 사망했다. 병약했던 레셰크는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영지를 카지미에시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레셰크는 이전에 미에슈코 3세에게 상속을 약속했지만, 그의 독재적인 행동 때문에 카지미에시에게 유리하게 결정을 바꾸었다. 그러나 레셰크가 죽은 직후 미에슈코 3세는 비스툴라 강까지 쿠야비 영토를 점령했고, 카지미에시는 마조비아 지역만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조비아 상속 덕분에 카지미에시는 폴란드의 주요 지역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1191년, 카지미에시가 러시아 문제에 관여한 틈을 타 미에슈코 3세는 바벨 성을 장악하여 대공 지위와 시니어 영토를 차지했다. 그는 크라쿠프를 자신의 후손에게 세습 영지로 선언하고, 아들 미에슈코 3세(젊은 공작)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카지미에시가 러시아에서 돌아와 싸움 없이 수도를 되찾고 미에슈코 3세(젊은 공작)가 아버지에게로 도망가면서 갈등은 평화롭게 끝났다.
1194년 초, 카지미에시는 발트족 요트빈기아에 대한 원정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크라쿠프로 개선했다. 그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연회가 열린 후, 카지미에시는 1194년 5월 5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독살되었다고 믿는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미에슈코 3세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해야 했던 그의 장남 레셰크 1세가 대공으로 계승했다. 카지미에시는 아마도 바벨 대성당에 묻혔을 것이다.
카지미에시는 크라쿠프에 대학교를 설립할 계획이었고 이미 건물을 짓기 시작했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현재의 야기엘론 대학교는 1364년 카지미에시 3세에 의해 프라하 카렐 대학교 다음으로 중앙 및 동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교로 설립되었다.
6. 사망
1194년 초, 카지미에시는 발트족 요트빈기아에 대한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크라쿠프로 개선했다. 귀환 축하 연회 후, 1194년 5월 5일 카지미에시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독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카지미에시의 장남 레셰크 1세가 대공위를 계승했으나, 아버지처럼 미에슈코 3세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카지미에시는 바벨 대성당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7. 교회와의 관계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카지미에시는 교회에 매우 관대했는데, 특히 Wąchock, Jędrzejów, Koprzywnica 및 Sulejów의 시토회 수도원, Miechów의 예루살렘 성묘 참사회 수도원, Czerwińsk nad Wisłą 및 Trzemeszno의 정규 참사회, 그리고 Zagość의 구호 기사단에 그러했다. 그는 또한 성 플로리안에 대한 숭배를 확장하려 노력했는데, 그의 유해는 게드코 주교에 의해 크라쿠프로 옮겨졌다.
8. 결혼과 자녀
카지미에시는 1160년에서 1165년 사이(늦어도 1166년까지) 헬레나(ca. 1140/42 – ca. 1202/06)와 결혼했다. 헬레나는 콘라트 2세 공작의 딸이며, 프르셰미슬 왕조의 모라비아 분가 출신이었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7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년도 | 사망년도 | 비고 |
---|---|---|---|
마리아 | 1167년 이전 | 1194년 | 1178년 브세볼로트 4세와 결혼. 결혼 후 아나스타시아로 개명했을 수 있다. |
카지미에시 | 1162년경 | 1167년 2월 2일 또는 3월 1일 |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볼레스와프 | 1168/71년경 | 1182/83년 4월 16일 | 아버지의 할아버지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 또는 삼촌 볼레스와프 4세 콩드라웨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사망했으며, 바벨 대성당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
오돈 | 1169/84년경 | 유아 사망 | 포즈난의 오돈 또는 성 오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을 것이다. |
아델라이데 | 1177/84년경 | 1211년 12월 8일 | 산도미에시의 성 야콥 수도원 설립자. |
레셰크 1세 | 1184/85년경 | 1227년 11월 24일 | |
콘라트 1세 | 1187/88년경 | 1247년 8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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