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포산토 모누멘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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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캄포산토 모누멘탈레는 이탈리아 피사 대성당 광장에 있는 고딕 양식의 묘지이다. 1278년 건축가 조반니 디 시모네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어 1464년에 완공되었으며, 11세기에 골고다 언덕에서 가져온 흙으로 조성된 묘지 위에 세워졌다. 캄포산토는 직사각형 회랑 구조로, 43개의 맹아치로 이루어진 외벽과 세 개의 예배당을 갖추고 있다. 내부에는 로마 시대의 석관들이 소장되어 있었으며, 2,600제곱미터가 넘는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인해 훼손되었으나 복원 작업을 거쳐 현재는 프레스코화와 석관들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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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포산토 모누멘탈레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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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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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이탈리아, 피사 |
좌표 | 좌표: 43.724° N, 10.395° E |
유형 | 묘지, 역사적 건축물 |
스타일 | ? |
크기 | ? |
무덤 수 | ? |
Find a Grave ID | 1981950 |
세계 유산 등재 | 피사 대성당 광장의 일부 |
유네스코 ID | 395bis |
등재 연도 | 1987 |
확장 연도 | 2007 |
역사 | |
설립 | 12세기 |
소유주 | ? |
정치 | |
정치 체제 | ? |
기타 | |
웹사이트 | ? |
2. 역사
캄포산토 모누멘탈레는 피사 대성당 광장에 세워진 네 번째이자 마지막 건물로, 골고다 언덕에서 가져온 흙 위에 지어졌다.
1278년 건축가 조반니 디 시모네가 고딕 양식의 회랑 건설을 시작했으나, 1284년 멜로리아 해전에서 피사가 패배하면서 건설이 중단되었다. 원래는 '산티시마 트리니타'(가장 성삼위일체)라는 교회로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건설 도중 계획이 변경되어 묘지가 되었다. 서쪽 부분이 먼저 지어졌고, 동쪽 부분이 나중에 지어져 1464년에 완공되었다.
2. 1. 초기 건설
캄포산토 모누멘탈레는 피사 대성당 광장에 세워진 네 번째이자 마지막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골고다 언덕에서 흙을 가져온 지 1세기 후에 이전 묘지 위에 세워졌다.1278년 건축가 조반니 디 시모네가 이 거대한 직사각형의 고딕 회랑을 건설하기 시작했다.[1] 그는 제노바와의 멜로리아 해전에서 피사가 패배한 1284년에 사망했다.[1] 묘지는 1464년에야 완공되었다.[1]
이 건물은 원래 '산티시마 트리니타'(가장 성삼위일체)라는 교회로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건설 도중 계획이 변경되어 묘지가 되었다.[2] 원래 부분은 서쪽 부분이었고, 동쪽 부분이 마지막으로 지어져 구조를 마감했다.[2]
2. 2. 건설 중단과 완공
1284년 조반니 디 시모네가 사망하면서 건설이 일시 중단되었다. 이 해는 피사가 제노바와의 멜로리아 해전에서 패배한 해였다. 묘지는 1464년에야 완공되었다.3. 건축
캄포산토 모누멘탈레는 43개의 맹아치로 구성된 외벽과 두 개의 입구를 가지고 있다. 오른쪽 입구는 고딕 양식의 감실로 장식되어 있으며, 성모자상이 있는데, 이는 14세기 후반 조반니 피사노의 추종자가 제작한 것이다. 묘는 대부분 아케이드 아래에 있지만 일부는 중앙 잔디밭에 있다. 묘지 안에는 암마나티 예배당, 아울라 예배당, 달 포초 예배당 등 세 개의 예배당이 있다. 아울라 예배당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진자 운동 계산에 사용한 향 램프가 있었고,[1] 달 포초 예배당에는 12사도 중 11명의 유물, 참된 십자가 조각 등 여러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3. 1. 건물 구조
외벽은 43개의 맹아치로 구성되어 있다. 입구는 두 개가 있다. 오른쪽에 있는 입구는 우아한 고딕 양식의 감실로 장식되어 있으며, 네 명의 성인에 둘러싸인 성모자상이 있다. 이 작품은 14세기 후반에 조반니 피사노의 추종자가 제작한 것으로, 원래의 정문이었다. 대부분의 묘는 아케이드 아래에 있지만, 몇몇은 중앙 잔디밭에 있다. 내부 안뜰은 가늘고 긴 분할대와 다엽형 장식 격자가 있는 정교한 둥근 아치로 둘러싸여 있다.3. 2. 내부 안뜰
내부 안뜰은 가늘고 긴 분할대와 다엽형 장식 격자가 있는 정교한 둥근 아치로 둘러싸여 있다.3. 3. 예배당
묘지에는 세 개의 예배당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피사 대학교의 교사였던 리고 암마나티의 묘에서 이름을 딴 암마나티 예배당(1360)이고, 1518년에 조반니 델라 로비아가 만든 제단이 있는 아울라 예배당이다. 아울라 예배당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진자 운동 계산에 사용했던 원래의 향 램프도 볼 수 있는데, 이 램프는 갈릴레오가 대성당 안에서 본 램프로 지금은 더 크고 정교한 것으로 교체되었다.[1] 1594년 피사 대주교 카를로 안토니오 달 포초가 의뢰한 ''달 포초'' 예배당에는 성 제롬에게 헌정된 제단과 작은 돔이 있다. 2009년에 대성당의 유물이 달 포초 예배당으로 옮겨졌는데, 여기에는 12사도 중 11명의 유물, 참된 십자가 조각 2개, 그리스도의 가시관의 가시 조각,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드레스 조각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달 포초 예배당에서는 가끔 미사가 거행된다.4. 석관
캄포산토에는 로마 시대의 석관이 방대하게 소장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84개만 남아 있다. 석관들은 원래 대성당 주변에 흩어져 있거나 건물 자체에 부착되어 있었다.[1]
4. 1. 석관의 역사
캄포산토에는 로마 시대의 석관이 많이 있었지만, 현재는 84개만 남아 있다. 고대 로마와 에트루리아 시대의 조각품과 항아리 컬렉션은 현재 성직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
석관들은 원래 대성당 주변에 흩어져 있거나 건물 자체에 붙어 있었다. 묘지 건설 후, 석관들은 초원 중앙으로 옮겨졌다. 캄포산토의 큐레이터였던 카를로 라시니오는 피사에 흩어져 있던 많은 고대 유물을 수집하여 묘지 내에 일종의 고고학 박물관을 만들었다.[1] 현재 석관들은 벽 근처의 회랑 내에 보관되어 있다.[1]
4. 2. 카를로 라시니오의 역할
캄포산토의 큐레이터였던 카를로 라시니오는 피사에 흩어져 있던 많은 고대 유물을 수집하여 묘지 내에 일종의 고고학 박물관을 만들었다.5. 프레스코화
캄포산토 모누멘탈레 벽면은 2,600제곱미터가 넘는 프레스코화로 덮여 있었는데, 이는 시스티나 성당보다 더 넓은 면적이다. 1336년부터 프란체스코 트라이니를 시작으로 여러 화가들이 다양한 주제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부오나미코 부팔마코의 《최후의 심판》, 《지옥》, 《죽음의 승리》, 《테바이드》, 베노초 고촐리의 《구약성서 이야기》, 안드레아 보나유티, 안토니오 베네치아노, 스피넬로 아레티노의 《피사 성인들의 이야기》, 타데오 가디의 《욥 이야기》, 피에로 디 푸치오의 《창세기 이야기》 등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공습으로 캄포산토와 프레스코화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전쟁 이후 복원 작업을 통해 지붕은 원래 모습대로 복구되었고, 프레스코화는 벽에서 분리되어 복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프레스코화의 밑그림인 시노피아도 함께 분리되어 시노피아 박물관에 보관되었다.[2]
5. 1. 초기 프레스코화 (14세기)
캄포산토 모누멘탈레 벽에 그려진 초기 프레스코화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은 1336/41년에 프란체스코 트라이니가 남서쪽 모서리에 그린 것이다. 부오나미코 부팔마코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최후의 심판》, 《지옥》, 《죽음의 승리》, 《테바이드》(사막 교부들의 이야기)는 흑사병 이후 시대상을 반영하는 중요한 작품이다.[2]
5. 2. 15세기 이후 프레스코화
베노초 고촐리의 《구약성서 이야기》(15세기)는 북쪽 회랑에 위치해 있었다. 남쪽 아케이드에는 안드레아 보나유티, 안토니오 베네치아노, 스피넬로 아레티노의 《피사 성인들의 이야기》(1377년에서 1391년 사이), 타데오 가디의 《욥 이야기》(14세기 말)가 있었다. 같은 시기에 북쪽 회랑에는 피에로 디 푸치오의 《창세기 이야기》가 있었다. 마지막 이미지들은 17세기 초에 그려졌다.[2]5. 3. 제2차 세계 대전 피해와 복원
1944년 7월 27일,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공습으로 떨어진 폭탄 파편이 캄포산토에 화재를 일으켰다. 이 화재는 3일 동안 지속되며 목재 납 지붕을 붕괴시켰다.[2] 지붕 붕괴는 묘지 내부의 모든 것을 심각하게 손상시켰고, 대부분의 조각상과 석관이 파괴되었으며 모든 프레스코화가 훼손되었다. 미국 육군의 기념물, 미술 및 기록 보존 프로그램 소속 딘 켈러는 프레스코화를 구출하기 위한 초기 노력을 조직했다.[2] 프레스코화 조각들은 수습되었고,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임시 지붕이 설치되었다.[2]전쟁 이후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지붕은 전쟁 전 모습과 최대한 가깝게 복원되었고, 프레스코화는 복원을 위해 벽에서 분리되었다. 프레스코화가 제거된 후에는 《시노피아》라고 불리는 예비 도면도 제거되었다. 이 밑그림은 프레스코화와 동일한 기술을 사용하여 분리되었고, 현재 광장 맞은편에 있는 시노피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프레스코화 복원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페인트 층을 나무 지지대에 고정하는 데 사용된 카제인 접착제가 곰팡이 때문에 접착력을 잃었다. 이 때문에 모든 그림을 떼어내고 다시 옮겨 새로운 지지대에 부착해야 했다. 벽 내 결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합성 직물에 짜여진 정교한 센서 시스템이 벽과 패널 사이에 배치되었다. 이 센서는 10분마다 벽의 온도를 주변 온도와 3도 이내로 조절하여 결로를 막는다.
복원 작업은 2005년 부팔마코 연작의 일부를 재설치하면서 시작되었고, 2014년에는 《테바이드》 프레스코화, 2015년에는 《지옥》, 2017년에는 《최후의 심판》, 그리고 2018년 7월에는 《죽음의 승리》를 재설치하면서 마무리되었다.[3]
참조
[1]
서적
La Lampada di Galileo
https://books.google[...]
Danesi, Rome
1893
[2]
서적
Saving Italy: The Race to Rescue a Nation's Treasures from the Nazis
https://archive.org/[...]
W.W. Norton
2013
[3]
간행물
Con il Trionfo della Morte concluso il restauro del Camposanto di Pisa
https://www.ilgiorna[...]
201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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