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안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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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레안테스는 기원전 330년경 트로아스의 아소스에서 태어난 고대 스토아 철학자이다. 그는 권투 선수 출신으로 아테네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제논의 제자가 되었고, 제논의 사후 스토아 학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클레안테스는 자연에 따른 삶을 강조하며, 제우스 찬가를 통해 범신론적 세계관을 드러냈다. 그의 철학은 윤리학, 물리학, 신학에 걸쳐 있으며, 쾌락을 부정하고 정념을 나약함으로 여겼다. 클레안테스는 99세에 사망했으며, 그의 사상은 데이비드 흄의 저작과 호세 엔리케 로도의 에세이 등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클레안테스는 기원전 330년경 트로아스의 아소스에서 태어나[1] 키티움의 제논 사후 스토아 학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클레안테스는 스토아 철학 발전에 중요한 인물로, 스토아 학파의 자연 철학에 자신의 개성을 부여하고 유물론을 통해 스토아 철학 체계에 통일성을 부여했다.[5] 그는 약 50편의 저서를 썼지만, 현재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스토배우스, 키케로, 세네카, 플루타르코스와 같은 작가들이 보존한 단편들만 전해진다.
2. 생애
그는 젊은 시절 권투 선수로 활동했으며, 아테네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밤에는 물을 나르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그의 성실함과 인내심은 동료들에게 "당나귀"라는 별명을 얻게 했지만, 그는 오히려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키티움의 제논의 가르침을 받으며 스토아 학파 철학을 공부했고, 높은 도덕성으로 존경받아 기원전 262년 제논이 사망하자 학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학파의 지도자가 된 후에도 직접 노동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제자로는 크리시푸스와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있었다. 기원전 230년경 9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1] 스토아 학파를 이끌었다.
2. 1. 초기 생애와 철학 입문
클레안테스는 기원전 330년경 트로아스의 아소스에서 태어났다.[1]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2] 파니아스의 아들이었고, 젊은 시절 권투 선수로 활동했다. 그는 단 네 고대 드라크마를 가지고 아테네로 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테베의 크라테스(견유학파)의 강연을 들었고,[3] 이후 키티움의 제논(스토아 학파)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밤에는 정원사에게 물을 날라 '우물 물 수집가'라는 뜻의 Φρεάντληςel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뚜렷한 수입 없이 하루 종일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아레오파고스에 소환되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설명해야 했다. 판사들은 그가 제시한 증거에 감탄하여 10 미나를 투표했지만, 제논은 그가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끈기 있는 인내력, 혹은 느린 속도 때문에 동료 학생들에게 "당나귀"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제논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기뻐했다.
2. 2. 학자로서의 삶과 스토아 학파 계승
클레안테스는 기원전 330년경 트로아스의 아소스에서 태어났다.[1]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2] 그는 파니아스의 아들이었고, 젊은 시절에는 권투 선수로 활동했다. 그는 단 네 고대 드라크마를 가지고 아테네에 와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테베의 크라테스(견유학파)의 강연을 들었고,[3] 그 다음에는 키티움의 제논(스토아 학파)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밤에는 정원사에게 물을 나르는 일을 했는데, 이 때문에 '우물 물 수집가'라는 뜻의 Φρεάντληςel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뚜렷한 수입 없이 하루 종일 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아레오파고스에 소환되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설명해야 했다. 판사들은 그가 제시한 증거에 감탄하여 그에게 10 미나를 투표했지만, 제논은 그가 이것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끈기 있는 인내력, 혹은 느린 속도 때문에 동료 학생들로부터 "당나귀"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제논이 그에게 무엇을 시키든 그의 등이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기뻐했다고 한다.
그의 높은 도덕적 자질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커서, 기원전 262년 제논이 죽자 그는 학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손으로 노동하여 자신을 부양했다. 그의 제자 중에는 그의 후계자인 크리시푸스와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있었으며, 안티고노스 2세는 그에게 3000 미나를 주었다. 그는 기원전 230년경에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그는 위험한 소화성 궤양으로 인해 한동안 단식을 해야 했다. 그 후 그는 단식을 계속하며, 이미 죽음의 길의 절반에 왔으니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2]
6세기에 글을 쓴 킬리키아의 심플리키우스는 로마 원로원이 세운 클레안테스의 조각상이 아소스에 여전히 보였다고 언급했다.[4]
2. 3. 죽음
클레안테스는 기원전 330년경 트로아스의 아소스에서 태어났다.[1]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그는 파니아스의 아들이었고, 젊은 시절에는 성공적인 권투 선수였다. 단 네 고대 드라크마를 가지고 아테네에 와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테베의 크라테스(견유학파)의 강연을 들었고,[3] 그 다음에는 키티움의 제논(스토아 학파)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밤에는 정원사에게 물을 나르는 일을 했다.[2]
제논이 기원전 262년 죽자, 높은 도덕적 자질로 존경받던 클레안테스는 학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제자 중에는 그의 후계자인 크리시푸스와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있었다. 클레안테스는 기원전 230년경에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위험한 소화성 궤양으로 인해 한동안 단식을 해야 했다. 그 후 그는 단식을 계속하며, 이미 죽음의 길의 절반에 왔으니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2]
6세기에 글을 쓴 킬리키아의 심플리키우스는 로마 원로원이 세운 클레안테스의 조각상이 아소스에 여전히 보였다고 언급했다.[4]
3. 철학
클레안테스는 장력(tonos) 이론을 통해 스토아 철학의 물리학을 혁신하고, 스토아 범신론을 발전시켰으며, 자신의 유물론적 견해를 논리학과 윤리학에 적용했다.[6][7] 그는 영혼이 물질적 실체이며, 영혼과 몸의 공감으로 증명된다고 주장했다.[8] 또한 영혼이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하지만, 그 존재의 강도는 영혼의 강약에 따라 달라진다고 가르쳤다.[9]
클레안테스는 태양을 신성하다고 여겼는데,[10] 이는 태양이 모든 생물을 유지하고 우주의 생기를 불어넣는 불 또는 아이테르의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타르코스를 불경죄로 고발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기존 텍스트를 수정해야 가능한 해석이다.[11] 클레안테스의 철학 사상은 스토바이오스에 보존된 ''제우스 찬가''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이 찬가에서 제우스를 찬양하고 존경하는 것이 모든 이성적인 존재의 가장 높은 특권이라고 선언했다.[12][13]
클레안테스는 쾌락이 선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연에 반하는" 것이고 "가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4] 그는 정념을 나약함으로 보았으며, 정념은 인간의 자제력과 도덕적 강인함을 형성하고 모든 덕목을 조건화하는 긴장감이나 압박감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14] 그는 "사람들은 평생, 또는 적어도 그 대부분을 악행 속에서 살아간다. 만약 그들이 덕을 얻는다면, 그것은 늦은 시기, 즉 인생의 황혼녘에서나 가능하다."라고 말했다.[15]
제논은 삶의 목표가 "일관되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클레안테스는 여기에 "자연에 따라"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자연에 따라 일관되게 사는 것"이라는 스토아적 공식을 완성했다.[16] 클레안테스에게 이것은 우주의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는 곧 진정한 자유 의지라고 보았다.[17] 그는 보편적 자연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며, 그의 유명한 기도에서 이러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18]
3. 1. 물리학
클레안테스는 장력(tonos) 이론을 통해 스토아 철학의 물리학을 혁신했는데, 이는 스토아 유물론을 물질을 죽고 무력한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개념과 구별하는 것이었다.[6] 그는 스토아 범신론을 발전시켰고, 자신의 유물론적 견해를 논리학과 윤리학에 적용했다.[7] 따라서 그는 영혼이 물질적 실체이며, 이는 (a) 육체적 특성뿐만 아니라 정신적 능력도 일반적인 세대를 통해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달된다는 사실, (b) 몸이 맞거나 잘렸을 때 영혼이 고통을 느끼고, 영혼이 불안에 찢기거나 걱정에 짓눌렸을 때 몸이 그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영혼과 몸의 공감에 의해 증명된다고 주장했다.[8] 클레안테스는 또한 영혼이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하지만, 그 존재의 강도는 특정 영혼의 강약에 따라 달라진다고 가르쳤다.[9]
클레안테스는 태양을 신성하다고 여겼다.[10] 태양은 모든 생물을 유지하기 때문에 (스토아 철학의 물리학에서) 모든 생물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신성한 불과 유사하며, 따라서 그것 또한 우주의 생기를 불어넣는 불 또는 아이테르의 일부여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우주의 난로"(즉, 지구)를 움직이려 한 아리스타르코스를 불경죄로 고발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기존 텍스트를 수정해야 가능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필사본에서는 아리스타르코스가 고발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클레안테스의 가장 큰 현존하는 단편은 스토바이오스에 보존된 ''제우스 찬가''의 일부이다.[12] 그는 그 찬가에서 제우스를 찬양하고 존경하는 것이 모든 이성적인 존재의 가장 높은 특권이라고 선언했다.[13]
3. 2. 윤리학
클레안테스는 쾌락이 선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연에 반하는" 것이고 "가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4] 그는 정념(사랑, 두려움, 슬픔)이 나약함이라고 생각했다. 정념은 그가 지속적으로 강조한 긴장감이나 압박감이 부족했다. 이는 신체뿐만 아니라 영혼의 힘에도 의존하며, 인간의 자제력과 도덕적 강인함을 형성하고 모든 덕목을 조건화한다.[14] 그는 "사람들은 평생, 또는 적어도 그 대부분을 악행 속에서 살아간다. 만약 그들이 덕을 얻는다면, 그것은 늦은 시기, 즉 인생의 황혼녘에서나 가능하다."라고 말했다.[15]
제논은 삶의 목표가 "일관되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열정 없는 이성의 삶만이 궁극적으로 스스로와 일관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클레안테스는 "자연에 따라"라는 단어를 추가하여, 목표가 "자연에 따라 일관되게 사는 것"이라는 잘 알려진 스토아적 공식을 완성했다고 여겨진다.[16] 클레안테스에게 이것은 우선, 우주의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우주는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세계의 흐름을 알고 익히고, 이를 합리적인 것으로 인식하며 기꺼이 이에 따르는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7] 그에 따르면, 이것이 진정한 자유 의지이다. 즉, 동기 없이, 정해진 목적에서 벗어나서, 변덕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질서, 따라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겸허히 순응하는 것이다.[17] 보편적 자연을 따르라는 지시는 그의 유명한 기도에서 찾을 수 있다.
제우스여, 저를 이끄소서, 그리고 당신, 운명이시여,
당신의 명령이 저를 할당한 곳으로.
저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원치 않더라도,
비참하지만, 저는 여전히 따라야 합니다.
운명은 기꺼이 따르는 자를 이끌고, 원치 않는 자를 끌고 간다.[18]
3. 3. 신학
클레안테스는 장력(τόνος) 이론을 통해 스토아 철학의 물리학을 혁신했는데, 이는 스토아 유물론을 물질을 죽고 무력한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개념과 구별하는 것이었다.[6] 그는 스토아 범신론을 발전시켰고, 자신의 유물론적 견해를 논리학과 윤리학에 적용했다.[7] 따라서 그는 영혼이 물질적 실체이며, 이는 (a) 육체적 특성뿐만 아니라 정신적 능력도 일반적인 세대를 통해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전달된다는 사실, 그리고 (b) 몸이 맞거나 잘렸을 때 영혼이 고통을 느끼고, 영혼이 불안에 찢기거나 걱정에 짓눌렸을 때 몸이 그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영혼과 몸의 공감에 의해 증명된다고 주장했다.[8] 클레안테스는 또한 영혼이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하지만, 그 존재의 강도는 특정 영혼의 강약에 따라 달라진다고 가르쳤다.[9]
클레안테스는 태양을 신성하다고 여겼다.[10] 태양은 모든 생물을 유지하기 때문에 (스토아 철학의 물리학에서) 모든 생물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신성한 불과 유사하며, 따라서 그것 또한 우주의 생기를 불어넣는 불 또는 아이테르의 일부여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우주의 난로"(즉, 지구)를 움직이려 한 아리스타르코스를 불경죄로 고발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기존 텍스트를 수정해야 가능한 해석이다. 왜냐하면 필사본에서는 아리스타르코스가 고발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11] 클레안테스의 가장 큰 현존하는 단편은 스토바이오스에 보존된 ''제우스 찬가''의 일부이다.[12] 그는 그 찬가에서 제우스를 찬양하고 존경하는 것이 모든 이성적인 존재의 가장 높은 특권이라고 선언했다.[13]
4. 영향
클레안테스의 허구화된 버전은 데이비드 흄의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세 명의 주요 대화자 중 한 명으로 등장하여, 신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사후적'' 지식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견해를 옹호한다.[19]
클레안테스는 호세 엔리케 로도의 에세이 ''아리엘''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밤새도록 물을 운반하면서 제논의 가르침을 묵상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5. 현대적 해석
클레안테스는 데이비드 흄의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세 명의 주요 대화자 중 한 명으로 등장하는 허구화된 인물이다. 그는 신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사후적'' 지식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견해를 옹호한다.[19]
클레안테스는 호세 엔리케 로도의 에세이 ''아리엘''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밤새도록 물을 운반하면서 제논의 가르침을 묵상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6. 추가 문헌
- David Hume영어,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 "''클레안테스''"가 등장인물로 나옴.
- 피어슨(Pearson, A.), [http://www.archive.org/details/thefragmentsofze00zenouoft ''제논과 클레안테스의 단편''] (1891). 그리스어/라틴어 단편 및 영어 주석.
- 톰(Thom, J.), ''클레안테스의 제우스 찬가: 본문, 번역 및 주석''. Mohr Siebeck. (2005).
참조
[1]
학술
[2]
학술
[3]
학술
Cleanthes
Suda
[4]
학술
Commentary on the Enchiridion of Epictetus
Simplicius
[5]
학술
[6]
학술
[7]
학술
[8]
학술
[9]
학술
Plac. Phil.
Plutarch
[10]
학술
De Natura Deorum
Cicero
[11]
학술
On the face of the orb of the Moon
Plutarch
[12]
학술
[13]
학술
[14]
학술
[15]
학술
[16]
학술
[17]
학술
[18]
학술
[19]
서적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Penguin Books
1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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