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브롱 만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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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브롱 만 해전은 1759년 11월 20일에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 간의 해전으로, 7년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이다. 프랑스는 영국 본토 침공을 위해 키브롱 만에 병력을 집결시켰으나, 영국 해군의 봉쇄로 인해 출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 함대는 브레스트를 출항하여 키브롱 만으로 향했으나, 에드워드 호크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와 교전하여 패배했다. 이 해전에서 영국이 승리하면서 프랑스의 영국 침공 계획이 좌절되었고, 프랑스 해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키브롱 만 해전은 영국이 해상 패권을 장악하고 북아메리카와 인도 등지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특히 누벨프랑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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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8세기 중반,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와 인도 등 세계 각지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1756년 발발한 7년 전쟁은 이러한 갈등의 정점이었으며, 영국은 해상 봉쇄를 통해 프랑스의 해상 무역과 식민지 보급을 차단하고자 했다.[9] 1759년, 프랑스는 영국 본토 침공을 계획하고 브레스트에 함대를 집결시켰으나, 영국 해군은 브레스트 항구를 봉쇄하여 프랑스 함대의 출격을 저지했다.[10]
1759년 11월 19일 밤, 프랑스 함대는 키브롱 만 도착을 위해 속도를 줄였다. 벨릴에서 약 32.19km 떨어진 지점에서 콩플랑은 더프의 전대를 발견하고 추격했다. 더프는 전대를 분산시켰고, 프랑스 함대는 이를 추격하다가 서쪽에서 접근하는 영국 함대를 발견했다.[12] 11월 20일 오전 8시 30분, HMS 마그나님(HMS Magnanime)은 프랑스 함대를 발견했고, 호크는 전열을 형성하라는 신호를 보냈다.[12]
프랑스 함대는 이 해전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재건되지 못했다. 알프레드 T. 마한은 "1759년 11월 20일의 전투는 7년 전쟁의 트라팔가이었다. (중략) 그리고 영국 해군은 프랑스와 스페인 식민지에 어떤 제약도 없이 공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언급했다.[20] 이 해전으로 인해 프랑스는 크레디트 크런치(금융의 극단적인 핍박 상황)를 겪었고 정부는 빚을 갚기 힘들게 되었다.[20]
에드워드 호크 경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기함 로얄 조지를 필두로, 전열함 23척, 50문 함 1척, 프리깃 5척 등으로 구성되었다.[1] 찰스 하디 경의 기함은 유니온이었다.[2]
1759년 8월, 라고스 해전에서 프랑스 지중해 함대가 영국 함대에 대패하면서 프랑스의 침공 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프랑스의 수아죌 공작은 스코틀랜드 침공 계획을 계속 추진하고자 했고, 브레스트 함대에 봉쇄 돌파를 명령했다.[11] 11월 초, 강풍으로 인해 영국 봉쇄 함대가 일시적으로 철수하자, 프랑스 함대는 브레스트를 출항하여 키브롱 만으로 향했다.
3. 전투 경과
콩플랑은 강한 서남서풍을 받으며 영국 함대와 교전하는 대신, 모래톱과 암초가 많은 키브롱 만으로 들어가 방어 대형을 형성하고자 했다.[13] 오전 9시경, 호크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14] 오후 2시 30분, 콩플랑이 키브롱 반도 끝의 레 카르디노(Les Cardinaux) 암초를 지날 때 첫 포성이 울려 퍼졌다.[15] 프랑스 함대 전위와 중앙은 만 안으로 진입했지만, 후위는 영국 함대에 따라잡히기 시작했다.
오후 4시경, HMS 레졸루션(HMS Resolution)이 포미더블(Formidable)을 나포했다.[16] HMS 토베이(HMS Torbay)는 테제(Thésée)를 침몰시키고, 쉬페르브(Superbe)를 침몰시켰다. 에로(Héros)는 좌초 전 항복했다.[16] 풍향이 남서로 바뀌면서 콩플랑의 함대는 혼란에 빠졌고, 콩플랑은 다시 바다로 나가려 했다. HMS 로얄 조지(HMS Royal George)가 콩플랑의 기함 솔레이유 로얄(Soleil Royal)에 접근했으나, 앵트레피드(Intrépide)의 방해를 받았다.[17] 솔레이유 로얄은 크로아직(Croisic) 근처에 닻을 내렸다. 오후 5시, 호크는 닻을 내리라는 신호를 보냈다.[17]
밤 동안 프랑스 전함 8척은 로슈포르(Rochefort)로 탈출했다.[18] 프랑스 전함 7척과 프리깃함은 빌렌(Villaine) 강 어귀에 있었는데, 프랑스 함대는 조류와 북서풍을 이용해 탈출하기 위해 대포와 장비를 버렸다.[18] 쥐스트(Juste)는 루아르 강으로 이동하다 난파되었고, HMS 레졸루션은 모래톱에 좌초되었다.
솔레이유 로얄은 크로아직 포대로 탈출하려 했지만 HMS 에섹스(HMS Essex)의 추격으로 에로 옆에 좌초되었다.[18] 22일, 콩플랑은 솔레이유 로얄을 불태웠고, 호크는 빌렌 강에 자리 잡은 적함에 화공을 가했지만 효과가 없었다.[19]
4. 전투의 영향
1760년 프랑스는 해상 보급의 문제로 생트-푸아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따라서 키브롱 만 해전은 누벨 프랑스(현 캐나다의 일부)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로 여겨진다.
호크 제독은 이 해전의 승리로 1776년에 귀족 작위를 받았다. 해군 역사가 니콜라스 트레이시는 이 해전을 "항해 시대의 가장 극적인 해전"이라고 묘사했으며,[20] 해군 이론가이자 역사가인 앨프레드 세이어 메이한은 "1759년 11월 20일의 해전은 이 전쟁의 트라팔가 해전이었고... 영국 함대는 이제 프랑스, 그리고 나중에는 스페인의 식민지에 전례 없이 더 큰 규모로 대항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주장했다.[20]
프랑스는 금융가들이 영국이 이제 프랑스 무역을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신용 경색을 겪었고, 프랑스 정부는 채무 불이행을 강요받았다. 이 해전은 1759년 영국 승리 일련의 전투 중 하나였으며, 이 해는 ''경이로운 해''로 알려지게 되었다.
5. 전투 서열
콩플랑 후작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기함 솔레이유 로얄을 포함하여 전열함 21척, 프리깃, 코르벳 등으로 구성되었다.
5. 1. 영국 함대

영국 함대는 에드워드 호크 경이 이끌었으며, 기함은 100문 함선 로얄 조지였다.[1] 찰스 하디 경의 기함은 90문 함선 유니온이었다.[2]
5. 2. 프랑스 함대
(Soleil Royal)(Dauphin Royal)
느와르 (Noire)
